우리나라 인구 천만 명이 1인 가구라고 합니다.
사람이 반드시 가족이 있는 가정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 점점 바뀌는 것이죠.
오늘 예수님 말씀도 가족이라는 인륜을 경시하시는 것처럼 오해하기가 쉽습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될 것입니다.
평소에 주님은 부부관계, 가족의 도리에 대해 강조하셨습니다.
그런 가정과 혈육보다 우선되는 것이라면, 지금 말씀하는 것이 얼마나 중대한 것일까라는 의미로 보면 되겠습니다.
저는 설교에 이런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 20년 전 개봉했던 태극기 휘날리며라는 영화를 재개봉한다고 하죠.
지금의 기술로 해상도를 높이고 음질을 개선한 것입니다.
그것처럼 성경 말씀을 현재에 맞는 요소로 더 선명하게 드러나게 하는 작업이 설교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아무리 화려한 색채를 입히고 최신 기술을 사용했다고 거기에 사람들이 감동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감동은 원작에서 받는 것이죠.
오늘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뜻이 더 뚜렷해지고 이 말씀을 하셨던 그날처럼 우리 모두에게 은혜를 주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1. 오늘 말씀의 전체적인 주제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입니다.
요즘 성도들은 제자가 되라고 하면 마음이 힘들어 합니다.
옛날에는 교회에서 제자훈련한다고 하면 지원자가 많았습니다.
아무래도 제자라고 하면 신앙생활과 교회를 위해 더 시간을 내고 헌신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죠.
예전엔 주님을 위해 그렇게 봉사한다는 걸 영광으로 알았습니다.
요즘 성도들은 그런 영광보다는 당장의 쉼과 편안함을 더 원합니다.
어쩌면 그만큼 이 시대가 사람들을 지치게 하고 등골을 빼먹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인도나 아프리카 선교지를 보면 사람들이 죄다 나와서 길거리에 그냥 앉아서 시간을 보내는 걸 보게 됩니다.
일거리도 없고 바쁜 일도 없고 삶이 느슨하게 흘러가는 것이죠.
우리는 일주일 중에 아무 일 없이 하루를 온전히 쉬기도 어렵습니다.
그런 피곤한 한 주를 보내고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는 것만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다 보니 점점 제자가 된다는 게 부담스러워지는 것이죠.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복음을 전해서 ‘제자를 삼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는다면 누구나 제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신분상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또 성도가 됩니다.
자녀가 되는 것은 태어나는 순간 모두가 똑같이 자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대로 따라서 살아간다는 측면에서는 모두가 제자인 것입니다.
한 반에 담임선생님에게는 삼십명의 제자가 있는 것처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다 주님의 제자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수련의 정도에 따라 차이가 있는 것이죠.
성경에서 제자라고 하면 요즘 우리가 생각하는 제자하고는 더 차이가 있는 느낌이 드는 것도 그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서기1세기에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유대교인들과 로마정부의 박해를 각오한 결단을 거친 성도들입니다.
현대 교회의 제자들은 그런 테스트를 받지 않았죠.
그렇기에 우리는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제자의 기준에 우리를 점검하며 주님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왜 제자가 되어야 하는지를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1) 하나님나라의 발전을 위해서는 제자가 필요합니다.
오늘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고 하는 말씀 속에는 딱 봐도 상당한 결단과 헌신을 요구하시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성도들이 자녀는 되고 제자가 되지 못한다면 누가 주의 일을 하고 복음을 전파하겠습니까?
오늘 이야기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던 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이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시면, 이 땅에서의 사역을 완수하시는 것이죠.
그리고 주님은 본래 영광의 자리로 올라가실 것입니다.
남겨진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나라를 세워가야 하는 것이죠.
그렇기에 주님은 더 많은 제자들을 불러 믿음을 강화하시고 실제 전도 훈련도 시키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앞에서 12제자 전도단을 여러 마을로 보내서 하나님나라를 전파하게 합니다.
그리고 본문에 이어서는 70명의 전도단을 꾸려서 전도하게 보내십니다.
주님께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고 그로 인해 죄인들이 구원받을 것보다 더 시급한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주님은 모든 성도들이 제자가 되어 자기 세대에 필요한 하나님나라를 세워가라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분야에 베테랑을 보면 자기 일에 얼마나 능숙한지 아름답다는 생각까지 들죠.
신앙에서도 잘 훈련된 제자들이 그렇습니다.
잠언22장29절의 말씀은 신앙에 적용됩니다.
네가 자기의 일에 능숙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사람들이 세상에서도 쓸모있는 사람 되기를 다 원하죠.
주님은 우리를 잘 훈련하셔서 하나님과 사람을 위해 쓸모있는 제자가 되게 하시길 원합니다.
2) 또 좋은 제자가 되는 것은 나에게 유익합니다.
제자가 되어 주님이 가르쳐 주신 그대로 따르지 않으면 나 자신에게도 유익한 변화가 없습니다.
바울사도도 제자로 성장하지 못하고 젖만 먹는 성도를 걱정했죠.
우리가 왜 하나님을 믿겠다고 결심했습니까?
하나님 없이 살던 인생과 내 자신에게 별 희망이 없는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주님을 믿고도 이전과 똑같이 산다면 그랬던 인생과 달라지는 게 아무 것도 없는 것이죠.
신분이 바뀌었는데도 여전히 헐벗고 죄짓고 부끄럽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조금씩 더 좋은 제자가 되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내 노력이 아닌 믿음으로 취득하지만 이후로는 내가 스스로 제자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내 의지와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서만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제자로 부르시고 훈련하십니다.
우리는 이미 제자로 훈련을 받고 있고 제자가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2. 오늘 말씀은 그런 상황에서 마침 주님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이 세 사람은 제자가 되기에는 각각의 허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따르는 우리 모두가 가진 문제들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 사람이 제자가 되는 데 걸림돌이 무엇인지를 진단하시고, 제자로 살아갈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믿음의 걸림돌은 무엇인지도 말씀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1) 첫 번째 인물입니다.
57절,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예수님의 전도 현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다 자기 생활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열두 제자처럼 주님과 동행하겠다는 것이죠.
추수할 일군이 부족한 데 자원해서 제자가 되겠다고 찾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58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제자가 되어 보겠다는 사람에게 찬물을 끼얹는 말씀이죠.
이 말씀은 두 가지를 규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첫째는 세상의 성공이라는 기대감으로 주님을 따르지 않도록 제자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시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주님을 따르겠다는 이유에 주님과 함께 세상적인 성공도 얻겠다는 생각이 있음을 보신 것이죠.
두 번째는 그렇다고 가난하게 될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먼저 주님의 현재의 처지를 있는 대로 보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같이 이렇게 아무 것도 없는 상황이라면 주님처럼 그렇게 남들에게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지금보다 더 가난해질까 두려워하는 마음이 다 있습니다.
‘이렇게 신앙생활만 하고 봉사만 하다 가난해지면 어떡하지?’
저는 전에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도 삼십삼 년 가난한 삶이 힘드셨겠구나, 주님의 애환을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묵상하다 다른 각도에서 이 말씀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부자가 되실 능력이 없으신 게 아니잖아요?
주님께서는 일부러 이 땅에서 머리를 대실 단 한 평 집도 갖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도 아무 문제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지독히 가난하고, 병들고, 사랑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해도 하나님나라의 관점에서는 아무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만큼 가난해질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세를 낼 반세겔의 돈이 없으셨습니다.
징수원이 와서 독촉하니까 베드로에게 가서 낚시를 던지면 한 세겔 동전을 물고 있는 물고기가 잡힐 것이니 우리 두 사람의 성전세를 내라고 하시잖아요?
주님의 주머니가 그 정도로 늘 비어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 해도 주님은 사역을 다 감당하셨고 마음에 천국을 누리셨잖아요?
우리에게도 그럴 수 있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잘 견딜 것이고, 천국에서 눈물을 씻고 영원토록 아름다운 삶을 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많은 것을 소유하셨다면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하늘의 영광보다 옳다구나, 주님이 주실 현세의 복만 구했을 것입니다.
세상의 스타 목사들이 너무 화려한 생활을 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입니다.
조엘 오스틴 목사 같은 사람은 자가용 20대를 세울 차고가 있는 대저택에 삽니다.
최애 자동차는 3억이 넘는 페라리라고 합니다.
과연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게 맞나 의심스럽죠.
아마도 주님은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1) 예수님의 머리둘 곳 없으셨던 삶은 실제로 수많은 제자들의 본보기가 되셨습니다.
교회역사는 그 이름을 기록해 전해줍니다.
우리나라 개화기 때의 사회상을 알 수 있는 귀한 영상자료들이 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에 온 서양 선교사들이 촬영했던 것입니다.
불과 백여 년 전에 우리나라가 얼마나 가난하고 비참하게 살았는지 마음이 좀 아렸습니다.
그때 선교사들이 자기 청춘과 미래를 이 가난한 나라 조선의 구원을 위해 바쳤습니다.
선교사들이 세웠던 병원과 학교가 우리나라의 선진화에 초석이 된 것입니다.
당시 전주 예수병원을 세운 사람이 보그스선교사입니다.
보그스 선교사가 안식년을 맞아 미국에 갔다 당시 발명된 최첨단 의료기기인 엑스레이를 보게 됩니다.
그걸 가져오고 싶었지만 모금이 잘 되지 않았습니다.
가족들의 돈을 모아서 기어이 그 엑스레이 기계를 들고 우리나라로 돌아옵니다.
당시 미국의 최첨단 의료혜택을 빈곤하고 낙후된 우리 조선사람들이 누리게 했던 것입니다.
이 땅에서 나 혼자 평생 호의호식하고 편히 살던 사람들을 누가 기억하겠습니까?
선교사들 당시의 부자들은 지금 그 무덤조차도 사라져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을 따라 세상의 영광을 버리고 하늘의 영광을 택한 제자들은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별과 같이 빛나는 것입니다.
(2) 또 주님의 낮아지심은 어떤 이유로 인해 우리가 가난하게 되었을 때, 우리를 수치스럽지 않게 합니다.
주님도 가난하셨는데, 가난을 부끄럽게 생각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가난이 부끄러운 게 아니라 죄가 부끄러운 것이잖아요?
촉망받던 젊은 트로트가수가 음주운전으로 구속되었습니다.
왜 보는 우리가 부끄러운지 모르겠습니다.
가난이 부끄러운 게 아니라 돈이 너무 많아 죄를 죄 같이 여기지 않는 게 부끄러운 것입니다.
오늘 첫 번째 사람에게 하신 말씀은 주님의 제자가 됨으로 얻을 세속적인 복을 기대하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가난을 두려워하여 주님 따르기를 주저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의 나라와 내가 누릴 하나님나라의 가치를 늘 비교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 것이 부족할 때도 슬퍼하지 않고 굳세게 예수님을 따를 수가 있습니다.
자발적인 가난이든, 아니면 어쩔 수 없이 환경적으로 당하는 물질, 건강, 관계, 생활의 모든 가난이든 우리 영원한 미래를 생각하면 아무 문제 없습니다.
하늘에서 우리가 누릴 영화는 영원하고 복되다는 것을 기억하고 당당히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2) 두 번째 사람입니다.
59절,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마태복음에 보면 이 사람을 제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전합니다.
이미 주님을 따르는 믿음이 있었던 사람인 것이죠.
그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주님께서 드러내 제자로 결단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먼저 아버지를 장사하고 오겠다고 합니다.
주님은 이렇게 그 사람의 문제를 다루십니다.
60절,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왜 아버지의 장례도 허락하시지 않으셨을까요?
지금 이 사람이 예수님 집회를 따라 다니는 걸 보면 오늘 갑자기 부친이 사망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또 당장 부친이 위독하다기보다는 연로한 아버지의 임종이 가까웠으니 임종을 보고 다시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성도들 중에도 이런 분들이 종종 있죠.
지금은 아직 해결해야 할 일들이 남아있어서 교회에 열심히 다닐 수 없다고 합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하고, 사람과의 관계도 좀 정리되고, 건강이 더 회복이 되면, 그때 가서 예수님을 열심히 믿겠다고 합니다.
두 번 째 사람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런 생활의 문제들이 얼마나 무거운 짐인 줄을 아십니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있으면 신앙생활도 부담만 되죠.
오늘 말씀이 우리 가족들에 대한 의무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돈을 벌어서 가족을 잘 부양해야 합니다.
돈이 없으면 얼마나 가족들이 힘들어지는 지 알죠.
어느 목사님이 부모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역기능 가정에서 불행하게 성장했고 가난한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딸을 낳고 보니 그 딸이 얼마나 귀한지 보기만 해도 행복했습니다.
어느날 아기들이 어린이집 마당에서 야외학습을 한다고 신발을 신겨서 데려오라는 통신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기가 아직 신발이 없었고, 돈도 없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옆에 있던 전도사가 자기 딸이 신던 신발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아이에게 그 신발을 신겨서 어린이집에 데려다 주었습니다.
멀리서 보니 처음 신발을 신고 아장아장 걷는 딸이 너무 예쁘고 대견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 눈에 다른 아기들의 신발이 보였습니다.
다른 아기들은 다 고급 브랜드의 예쁜 새 신발을 신고 있었는데 목사님 아기만 시장에서 파는 낡은 신발을 신고 있었습니다.
그때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내 부모가 내게 가난을 물려줬던 것처럼, 나도 내 자식에게 가난을 물려주고 있구나’
그래서 가족들을 책임지기 위해 교회를 섬기면서 목수 일을 배우게 됩니다.
목회자가 주의 일에 백프로 헌신해도 될까 말까잖아요?
그러나 내 가족 먹여 살리는 책임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그것을 책망하시겠습니까?
오늘 말씀은 가족을 위한 의무보다 주님의 일이 먼저라는 뜻은 당연히 아닙니다.
사실 평범한 성도들이 복음을 누구에게 가서 전하겠습니까?
평생 가족 한두 명 전도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 가족을 잘 섬기고 돌봐야죠.
죽은 자로 죽은 자를 장례하게 하라는 말씀은 생명을 살리는 일과 관계없는 일이라면 세상 사람들이 하게 두라시는 것입니다.
이 사람의 경우로 보면 아마도 부친이 죽은 뒤에 재산 상속 같은 문제일 것입니다.
그걸 기대하고 지금 주님의 일을 해야 할 기회를 놓치지 말라시는 것이죠.
두고 보십시오.
장례를 치르고도 주님을 따르지 못하게 하는 세상 일은 계속 계속 나옵니다.
우리의 직장이나 사람관계와 삶 전부가 다 하나님나라에 속하지만 어떤 일은 정말 해 봤자 세상 일로 끝나는 것들도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잘 분별하고, 그 중에 주님의 제자로 성장하는 데 방해되는 것들은 단호히 끊고 주님을 잘 따르시길 축복드립니다.
3) 세 번째 사람입니다.
61절,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이 사람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라가기 전에 가족들과 작별할 시간을 달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겠다는 생각이 오늘 처음 든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결단하지 못한 것은 집에 두고 온 가족들 때문입니다.
집에서 편히 지내는 가족들에게서 떠나고 싶지 않은 것이죠.
그것은 사실 그들과 함께 편히 지내는 삶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좋은 사람들과 어울리며 재미나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를 위해서 내 소소한 행복과 권리를 포기하고 주님을 섬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잘 하다가도 그만두고 싶은 충동이 들 때가 있잖아요?
세 번째 사람은 가서 가족들과 작별하는 게 아니라 가족들의 만류에 주저앉을 사람입니다.
어쩌면 따르기는 해야 할 것 같은데, 결단하지 못한 마음을 가족들이 좀 안된다고 붙잡아 주었으면 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호하게 결단을 요구하십니다.
62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많은 성도들이 예수님을 믿어보겠다고 하지만 끊지 못한 과거와 세상적인 삶에 항상 연연해 합니다.
그래서 믿는 것 같다가 다시 뒷걸음질을 칩니다.
마치 안 믿던 옛날이 행복하고 즐거웠던 것 같은 그런 착각이 무엇인지 성경이 분명히 보여주죠.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하나님 백성으로 사는 게 싫다고합니다.
채찍 맞으며 노예생활 하던 때가 그립다고 합니다.
세상이 얼마나 재미있습니까?
그런데 영적으로 보면 그렇다는 거에요.
그런 맛에 질질 끌려 뒷걸음질 하는 믿음이 되지 말고 앞만 보고 쟁기질을 하는 제자가 되라시는 것입니다.
쟁기질은 앞에서 소가 끄는 쟁기를 손으로 잡고 따라가며 고랑을 파는 일입니다.
쟁기를 잡은 사람은 앞만 보아야 고랑이 똑바로 됩니다.
자꾸 뒤를 돌아보면 고랑이 엉망이 되고 밭을 망칩니다.
농부가 뒤를 돌아보며 쟁기질을 한다면 얼마나 우습겠습니까?
성도들이 자꾸 세상의 기쁨과 욕심과 안락함을 뒤돌아 보면 밭 잘 가는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제자의 체질을 만들어 가려면 앞을 보고 가야 합니다.
우리 앞에 있는 말씀과 기도, 예배, 찬양, 봉사, 전도를 따라가면 하나님의 밭이자 우리 인생을 아름답게 경작하는 제자들이 될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제자가 되어서 주님을 위해 조금씩 더 헌신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제자로서 자원해서 지는 짐은 주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그것은 나 자신이 깨어서 믿음을 지키고 주님을 따를 수 있도록 나를 붙드는 장치이기도 합니다.
우리 안에 오늘 주님 앞에 나온 세 사람의 심정이 다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게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지금보다 더 나빠지지 않습니다.
설령 평생 지금처럼 빠듯하게 산다 해도 얼마든지 제자는 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어떤 환경이든 문제 될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모든 환경이 좋아지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겠다고 생각한다면 환경도 좋아지지 않고 신앙도 좋아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잘 따르면 반드시 환경도 풀릴 것입니다.
또 안락해 보이는 세상과 죄의 요람을 더 이상 뒤돌아 보지 말고, 밝고 거룩하고 용기있고 헌신적인 제자의 삶을 향해 앞만 보고 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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