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기간 동안에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 한 주간을 살펴 보고 있습니다.
오늘 성금요일에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셔서 숨을 거두십니다.
1. 예수님이 죽으실 때 두 가지 이적이 일어났다고 전해줍니다.
1) 자연의 이적입니다.
44절, 때가 제 육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며
예수님은 우리 시간으로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오후 3시에 숨을 거두십니다.
그중 열두 시부터 세시까지 온 땅에 어둠이 임했다고 합니다.
어둠은 하나님의 심판의 증거 중 하나입니다.
출애굽 때 애굽에 내린 열 가지 재앙 중에 흑암 재앙이 있었죠.
그때는 사흘간 이집트 전국에 어둠만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거주하던 고센 땅에는 빛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동안 하나님이 예수님이 짊어지신 인간의 모든 죄악을 심판하고 계시다는 것을 흑암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로마의 판결이 예수님을 처형하고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심판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2)예루살렘 성전에서도 이적이 일어났습니다.
45절,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예수님이 운명하시던 시간과 거의 동시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골고다 언덕에서 그리 멀지 않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이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성전 안에는 성소와 지성소를 분리해 놓은 휘장이 있죠.
제사장들은 매일 바깥 성소에서 율법대로 향단과 진설병과 등잔의 불을 관리하며 봉사했습니다.
단 휘장으로 가로막힌 안쪽 지성소에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곳에는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이 임재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지성소엔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하루 속죄의 피를 들고 들어가 백성들의 죄를 대속 받았습니다.
이 경우도 대제사장 자신은 먼저 속죄제물을 드려 자신의 죄를 속죄 받고 제사를 섬길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거룩하신 임재와 죄인과의 사이를 구분했던 지성소가 활짝 열려 버린 것입니다.
그때는 많은 제사장들이 성전에 모여 대대적인 유월절 제사를 준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성소 앞을 가린 두꺼운 휘장이 엄청난 소리와 함께 두 조각이 났으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큰 명절을 앞두고 대체 무슨 불길한 일이냐 술렁였을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예수님의 대속이 죄인들과 하나님을 분리했던 휘장을 찢었다고 합니다.
성전제사를 특권처럼 여기고 권세를 부리던 대제사장은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된 것이죠.
예루살렘 성전의 시대가 끝이 나고 참성전이신 예수님 안에서 예배하는 때가 온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일곱 번 짧은 말씀을 하십니다.
가상칠언이라고 하죠.
그 중 두 가지만 생각해 보겠습니다.
1)누가복음에는 나오지 않지만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는 더 기록된 말씀이 있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이 말의 뜻은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이 말씀은 다윗의 시편22편의 한 절입니다.
유대인들은 극심한 환난을 당할 때 이 시편구절로 기도를 했습니다.
실은 다윗이 성령의 감동으로 메시야의 고난을 예언한 것인지를 몰랐죠.
누가복음은 유대인들을 위해 기록된 성경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 보내진 복음서입니다.
로마 관료인 데오빌로에게 써서 보낸 복음서죠.
구약성경을 잘 모르는 외국인들이 이 구절에서 오해를 할 가능성이 있기에 누가는 주님의 이 말씀을 뺐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이 버리셨나 그런 의문을 가질 수가 있잖아요?
예수님께서 굳이 이 말을 하신 이유가 있을까요?
물론 있습니다.
인간의 죄를 대신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경험을 그대로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것입니다.
주님만 그 두려움을 경험하고 우리는 몰라도 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죠.
그것을 알아야 내가 어디서 구원받았는지, 아직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어떤 운명을 지게 될 것인지를 알 수 있는 것이잖아요?
주님은 그동안 하나님과 하나이다, 하나님이 항상 나와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심판을 받는 순간, 하나님과도 성령님과도 완전히 단절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그런 단절은 당연히 처음 경험이셨습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이런 고통일 줄 모르셨다, 후회된다는 게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께 끊어지는 게 심판인 줄 아셨습니다.
하나님께로 부터 버림받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우리에게 증언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의 공허한 마음과 마지막 심판에서 영원히 단절되는 절망까지 경험하셨다니 놀라운 고난의 신비입니다.
아직 이 세상은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사람들에게도 살만합니다.
덴마크는 행복지수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에 속합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정치가 올바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덴마크 국회위원 1/3은 자전거로 출퇴근을 하고 국민을 위해 정치를 합니다.
그래서 덴마크 국민들은 삶이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올해 우리나라 삶의 만족도는 OECD중에는 52위입니다.
그런데 우리 국민들에게 조사한 설문에서는 70%이상이 삶에 비교적 만족하다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현재의 삶에 만족한다는 것이죠.
기독교인들이 15% 남짓으로 볼 때, 많은 비신자들도 삶에서 행복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은 하나님께서 선인과 악인에게 해와 비를 동일하게 내려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직은 이 세상의 피조물들을 돌보시고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이 세상이 끝이 나고 사람들이 최후의 심판을 받을 때는 다릅니다.
영원히 하나님의 은혜를 얻을 수 없는 바깥 어두운데로 쫒겨난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 고통을 우리 대신 받으시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이 숨을 거두시며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46절,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심판의 고독과 절망과 슬픔을 예수님께서 그대로 경험하며 숨을 거두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한다고 하십니다.
현재의 상황에서 아버지는 예수님께 진노와 심판의 칼을 들고 계십니다.
주님은 단 한번도 경험한 적 없는 사랑하는 아버지께로 부터 버림받는 심장이 찢기는 슬픔과 공포 가운데에 계시는 것이죠.
그러나 아버지를 향한 신뢰와 믿음은 흔들리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진노의 잔을 쏟아 붓는 아버지께 여전히 주님의 영혼을 맡길 수가 있는 것이죠.
우리가 때로 큰 환난을 만나면 이 세상과 내가 단절된 것 같이 보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얼굴을 돌리신 것 같습니다.
사별의 아픔, 암 선고, 자식의 탈선, 이혼, 부도, 낙방, 사기 피해.
이런 일을 만나면 세상에서 나만 뚝 떨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어찌해야 할지 몸만 덜덜 떨리고 두려움이 엄습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 이상의 심정 중에도 아버지을 신뢰하고 영혼을 맡기신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내게서 하나님이 사랑을 거두지 않으심을 믿고 기도로 도우심을 구해야 하는 것이죠.
예수님이 그런 우리 심정을 경험해 보셨으니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4장14절에서 말씀하죠.
히브리서 4장 14절,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15절,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우리가 인생 중에 당하는 고난 중 주님은 안 당하신 것이 없습니다.
가난한 집에 가장으로 가족을 책임져야 하는 경제적 어려움을 아십니다.
나사렛 출신이라는 차별을 경험하셨습니다.
진심을 이해받지 못하고 억울한 모함을 받으셨습니다.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하셨고, 사람이 당할 수 있는 가장 극한 육체의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우리의 아픈 심정을 아시고 위로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광주 탑팀재활의학과 원장인 박정욱집사는 의대 재학 중에 중병에 걸립니다.
장출혈이 너무 심해서 응급실로 실려 가 혈액10팩을 수혈받게 됩니다.
그런데 수혈보다 출혈이 더 빨라 위중한 상태로 응급수술을 받게 됩니다.
수술은 배 전체를 절개해서 장을 다 꺼내놓고 피를 닦아 가며 내시경으로 터진 혈관을 찾아야 하는 위험한 수술이었습니다.
깨어나 보니 중환자실이었습니다.
처음 들은 생각은 ‘살았구나, 하나님 감사합니다’ 였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 등에 욕창이 생기는 고통과 복부의 수술 봉합 부위에서 느껴지는 통증으로 지옥 같은 고통이 몰려왔습니다.
온갖 호스가 주렁주렁 꽂혀있고, 콧줄을 삽입해 속에 있는 가래와 피를 뽑아내는데 그 괴로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삼 주를 중환자실에 있으며 박원장이 깊이 깨닫게 됩니다.
내가 환자의 고통을 모르고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가 되지 않도록 하나님이 내게 이런 고난을 경험하게 하시는구나
긴 회복 기간에 우울증도 오고 온갖 후유증 질환들을 다 경험합니다.
그런 고난의 시간을 견디고 다시 전공의 과정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한번은 야간 당직을 서는 데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의식이 없이 입원 중인 할머니 환자가 식사를 공급하는 콧줄을 자꾸 빼는 것이었습니다.
할아버지가 못하게 늘 실랑이를 벌이는 데 밤에 할아버지가 주무실 때 뽑아 버리는 것이죠.
야간 당직을 서는 박원장을 새벽 서너 시에 매번 호출하니 얼마나 미안했겠습니까?
할아버지가 너무 미안해 하는 걸 보고 박원장이 이렇게 말합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그래도 의식이 돌아올 때 콧줄을 빼시는 거니까 가만히 계신 것보다 더 좋은 거예요. 미안해 하지 마세요. 저도 삼 주 동안 콧줄 끼고 있어 봤어요.’
그렇게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며 다시 콧줄을 끼우고 있는데, 그 방에 있던 환자들이 전부 울고 있더랍니다.
사람이 나를 이해해 주는 것만으로도 위로를 받죠.
우리의 고통을 완전히 이해하 예수님이시기에 우리의 고통에 적시에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기셨듯 우리의 문제들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 맡기며 사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3.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한 사람은 아리마대 요셉입니다.
50절,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산헤드린 공회가 예수님께 유죄판결을 내릴 때 반대했습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요셉이 예수님의 제자였다고 합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빌라도를 찾아가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요구합니다.
산헤드린 공회와 로마당국이 범법자로 판결한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어떤 곤궁에 처하게 될 줄 모르는 위험한 행동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께 얼마나 진심인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신 것도 아니고, 돌아가셨잖아요?
우리 속담에 정승집 개가 죽으면 조문객이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지만 정승이 죽으면 찾는 이가 없다고 하죠.
요셉은 살아있는 예수님이 아니라, 죽으신 예수님을 위해 자기의 정치생명을 거는 것입니다.
요셉을 통해서 믿음의 관계가 무엇인지를 보게 됩니다.
거래 관계가 아니라 마음이 서로 진실 되게 연합되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는 내게 어떤 불이익이 있다 해도 예수님을 선택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가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그 고통 중에 목숨을 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알아갈수록 인생에는 담대함이, 하나님을 향해서는 더 헌신과 봉사를 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이번 사순절과 고난주간을 통해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더 깊이 깨닫고 믿음은 더 견고하게 되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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