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신명기4장1절-4절 (여호와께 붙어 떨어지지 말라)

남수연 2024. 1. 12. 02:26

신명기는 가나안땅 진입을 앞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모세가 율법을 되풀이 해서 당부하는 말입니다.

40년간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가르쳤습니다.

그래도 부족해서 그것을 다시 또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1,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게 되리라

이제 곧 가나안땅에 들어가겠지만, 그 땅을 얻고 살 길은 한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잘 듣고 준행하는 것입니다.

새해가 되고 벌써 둘째 주입니다.

우리가 살아가게 될 2024년도에도 되풀이 해주시는 말씀을 잘 듣고 준행하면 복된 한해가 될 것입니다.

 

1. 본문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법도를 안 지킨 결과가 무엇인지를 최근에 있었던 한 가지 일을 되새겨 명심하라고 합니다.

그것이 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바알브올의 일로 말미암아 행하신 바를 너희가 눈으로 보았거니와 바알브올을 따른 모든 사람을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서 멸망시키셨으되

이 사건은 불과 1년도 지나지 않은 일입니다.

가나안땅이 바라보이는 요단강 동편 이 모압 평지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모압왕 발락이 보니 이스라엘이 코 앞에 와 진을 치고 있는 것입니다.

위기감을 느낀 모압왕이 발람이라는 점술가를 불러오죠.

이스라엘에게 저주의 점술을 부리면 엄청난 재물을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일개 점술가의 저주가 하나님 계획에 무슨 영향이 있겠습니까만, 성경은 이 사건을 중하게 다룹니다.

하나님이 이 점술가 발람의 입에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말을 넣어주십니다.

이게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전에 말씀드렸죠.

이방인들에게 처음으로 선포된 메시야 예언이기 때문입니다.

먼 훗날, 한 별이 야곱에서 나온다는 것이 발람의 예언의 골자입니다.

그렇게 잘 예언을 하고 나서 발람이 뒤로는 모압왕과 거래를 합니다.

저주는 못했지만 더 현실적인 방법을 가르쳐주죠.

모압이 섬기는 바알신의 축제에 이스라엘 민족들을 초대하라는 것입니다.

고대의 종교축제는 타락과 광란의 극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춤추는 광란의 소리가 시내산을 내려오는 모세에게 들렸잖아요?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에서 본대로 한 것입니다.

그런 걸 던져주면 국민들이 좋아하니 권력자들이 그런 걸 이용하기도 하죠.

지금도 축제만 열리면 사람들이 얼마나 몰립니까?

발람의 꾀가 적중합니다.

그 축제에 참가해 바알에게 절하고, 음식을 같이 먹고, 모압여인들과 음행한 이스라엘 백성이 24천명이라고 민수기에 기록합니다.

하나님이 이들을 다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에게 암적인 요인이 생기면 잘라 버리십니다.

전체로 퍼지는 걸 막으시는 것이죠.

하나님은 말씀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실제로 관리하십니다.

성경은 이 사건을 반면교사 삼도록 자주 언급합니다.

이 일이 경악스러운 것은 지금은 광야 40년의 마지막 해이고, 범죄한 사람들은 광야에서 심판받은 1세대가 아니라 2세대라는 것입니다.

이 사건이 경고하는 것은 구원은 각자의 믿음으로 얻는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바알의 축제에서 죄를 짓지는 않았잖아요?

그들이라고 외국의 신기한 문화에 호기심이 없었겠습니까?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십계명을 이스라엘 자손들이 대부분 지켰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붙어 떠나지 않은 너희는 오늘까지 생존하였느니라

생존한 사람들은 자기들의 믿음과 의지로 여호와께 붙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2. 그러니 오늘까지 생존한 사람들은 계속 여호와께 붙어 떠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가나안땅에 들어가면 여호와께 붙어 있기가 더 어렵습니다.

광야는 하나님의 보호를 벗어나면 한시도 살 수 없는 곳입니다.

구름기둥을 벗어나면 당장 일사병으로 쓰러집니다.

불기둥을 벗어나면 광야의 추위와 불뱀과 전갈에 물려 죽습니다.

매일 아침 정해주신 대로 만나를 거두지 못하면 하루를 굶어야 합니다.

싫다고 이 광야의 장막 생활을 안 할 수 없는 것이죠.

인생의 광야에서 하나님을 배신하는 용감한 사람들은 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종종 인생의 광야로 우리를 몰고 가시는 것이겠죠.

그런데 가나안땅은 그렇지 않습니다.

가나안땅을 정탐하고 온 사람들이 포도 한 송이를 두 명이 메고 돌아왔잖아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엔 안전한 집이 있고, 우물이 있고, 외양간에 소가 있고, 밭에는 언제나 싱싱한 작물이 자랍니다.

광야에서 바알축제로 단 24천명만 떨어져 나갔다면 가나안땅에서는 민족 전체가 바알을 따라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나갑니다.

하나님께 붙어 있지 않아서 다 멸망합니다.

이게 우리의 죄가 세상과 결탁하는 막강한 괴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붙어 있으려고 애를 쓰지 않으면 죄가 우리를 끌고 가버립니다.

제 나이 전후한 성도님들은 70,80년대 성도들의 뜨거운 신앙을 기억합니다.

어디서 부흥회만 한다면 사람들이 까맣게 몰려갔죠.

1973년 여의도에 빌리그래함이 와서 집회할 때 백만 명이 몰렸습니다.

현재 송파구 전체인구가 65만명인데, 엄청 모인 것이죠.

십자가만 달아 놓으면 가마니 깔아 놓은 교회에도 사람들이 와서 무릎을 꿇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힘들고 가난하던 시절엔 정말 의지하고 매달릴 곳이 하나님 밖에 없었습니다.

교회를 벗어나면 당장 생활고에 짓눌리고, 병마에 시달리고, 절망감이 목을 조르니 주중에 매일이라도 교회로 달려가야 했었죠.

어떤 목사님이 그런 말을 하더군요.

자기 청년부 때 매일 모여서 뜨겁게 기도하는 모임이 있었는데, 열두 명 중 열 명이 목사가 되었다는 거예요.

수없이 교회로 밀려 올 성도들을 감당하게 하도록 사역자들도 미리 준비시키신 것이죠.

그런 신앙의 열심으로 우리나라의 번영과 교회성장의 복을 받은 것입니다.

지금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우리나라가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잖아요?

하나님께 매달리지 않아도 웬만큼 먹고 살고, 취미생활도 즐기고, 그런대로 편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목사를 지망하는 사람들도 줄어들고, 성도 수는 급감해 육백만 명이 채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여의도에 모인 사람만 백만 명인 때와 얼마나 달라졌습니까?

교회에 가도 뜨겁게 은혜받기가 힘듭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은혜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예전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도 예배에 은혜를 부어주시지 않습니다.

은혜는 성도들의 간절함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신 데, 아쉬운 게 없으니 간절함이 억지로는 안되는 것이죠.

은혜의 물줄기는 높은 곳이 아니라 항상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이제는 교회 전체가 은혜를 받는 시기가 아니라 간절히 사모하고 예수님께 계속 붙어 있는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은혜가 임하시는 때입니다.

 

3. 이런 풍요의 가나안땅을 살아가는 성도들은 어떻게든 하나님께 붙어 있어야 합니다.

감정적인 은혜를 받는 것보다 끈기 있게 주님께 붙어서 생존하는 것이 더 절실합니다.

오랜 신자들은 과거에 맛보았던 그 은혜 시대의 뜨거운 감동과 눈물을 항상 그리워하죠.

그걸 좀 살려보려고 교회들도 예배에 이런저런 순서들을 넣고 인위적으로라도 감동을 주려고 그러잖아요?

과거 영광스러웠던 신앙의 시대를 추억하는 성도들은 어디서 좀 신비한 기적들이 일어난다면 따라가 보고, 어디에 뜨거운 분위기가 있다면 몰려갑니다.

그런 것은 다 소용없습니다.

돌아와 보면 하나도 달라지는 게 없잖아요?

그런 것으로 신앙의 공허감을 달래려다가는 점점 현실과 괴리되는 신비주의 신앙에 빠지게 됩니다.

은혜가 없는 시대에 오히려 신비주의, 기적, 열광, 같은 것이 성행합니다.

이런 시대에 생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 달라붙어 있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주님의 법도와 명령을 배우고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광야에서 생존해 모세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은 계명을 지키며 여호와께 붙어 있던 사람들입니다.

붙어 있는 것과, 계명을 지키는 것과, 생존하는 것은, 똑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아침에 눈을 뜨고, 세상 밖으로 나가면 하는 일은 매일 똑같아도, 마음이 막막해지며 숨이 턱 막히기는 날이 많습니다.

어느 것이 길인지 안갯속처럼 뿌옇기만 할 때도 있습니다.

또 세상엔 가나안 종교처럼 우리를 유혹하는 게 많습니다.

길을 잃고 헤매지 않으려면 나를 흔들리지 않는 기준에 붙잡아 매야 합니다.

그 기준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법도와 명령입니다.

2절에 보면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말씀을 가감하지 말라고 하시죠.

위로가 되고 은혜가 되는 성경만 좋아하고 진짜 힘써 순종해야 할 거북한 말씀은 멀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결국 이 신명기의 훈계대로 지키지 않고 못쓰게 타락합니다.

그래서 약속의 땅에서 진멸되고 도처에 포로로 잡혀갔던 것이죠.

그 마지막 시기에 예레미야가 40년을 백성들 속에서 육성으로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경고했습니다.

끝까지 그 말씀도 안 듣다 바벨론이 코 앞까지 포위해 오자 예레미야에게 하나님께 좀 물어보라고 안달을 합니다.

그러면 뭐 합니까?

자기들이 원하는 답이 안 나오니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으리가 없다고 또 무시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우리의 본성이 원하는 것하고는 다릅니다.

우리는 내가 원하는 것과 다른 말씀을 들을 것을 항상 각오해야 합니다.

모세는 벌써 이들이 가나안땅에서 결국 쫒겨나 포로가 될 것까지 예언합니다.

그걸 알면서도 간곡히 충고할 말씀은 이것 밖에 없는 것이죠.

제발, 하나님께 붙어 있어라.

신약의 성도인 우리에게도 예수님은 내게 붙어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붙어 있는 가지가 되어야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죠.

오늘 모세를 통해서 말씀하신 대로 다시한번 기억합시다.

예수님께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것은 말씀대로 지키는 것입니다.

올해는 정말 예수님이 주신 계명들을 그대로 한번 지켜보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산상수훈의 말씀, 복음서의 설교 말씀, 서신서에 사도들이 기록한 권면.

그 말씀을 매일 읽어 되새기고 다같이 힘껏 지켜보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면 올해 우리 가운데 아름다운 결실이 풍성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나를 묶어 놓는 장치가 좀 필요합니다.

주일성수, 수요기도회, 매일 성경1, 매일 기도 10, 한가지 봉사, 이런 것을 정해서 나를 묶어 두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저렇게 편하게 사는 데, 내가 뭐 별 다르다고 이렇게 신앙에 얽매여 살 필요가 있을까 생각될 때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붙어 떠나지 말아야 올해도 우리가 생존할 수 있습니다.

지옥의 문처럼 사람을 빨아들이고 있는 공허하고 광활한 세상입니다.

더 빠져나오기 힘들고 무서운 것은 내 마음의 깊은 구렁텅이입니다.

우리를 낙담시키고 무기력하게 하고 절망시키는 깊은 수렁에 빠지는 게 외부의 적보다 더 두려운 것입니다.

이런 것에 휩쓸리고 빠지지 않으려면 예수님께 붙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 붙어 있는 것은 단지 생각만 주님께 두는 게 아니라 말씀하신 대로 힘써 지키는 것입니다.

모든 말씀들을 매일 지킬 수는 없으니 성령께서 생각나게 하실 때 힘써 지킨다면 평안 중에 풍성한 성령의 열매들을 맺게 될 것입니다.

함께 하는 우리 성도들이 있으니 올해도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격려해 주며 예수님께 잘 붙어서 따르는 모두가 되시길 간절히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