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광야에서 받는 축복 (신명기8장1절-4절)

남수연 2024. 1. 26. 01:37

오늘 모세가 가나안땅 진입을 앞 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또 광야를 가르칩니다.

우리가 별로 즐겁지 않은,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게 지나온 광야인데요.

그러나 인생 자체가 광야이기에 오늘 말씀으로 은혜를 주시리라 믿습니다.

1.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을 역사적으로 먼저 생각해 보면 좋을 것입니다.

한 나라 개국 역사에서 이런 광야 40년이 있었다는 것은 참 특별하고도 기이하죠.

최강국 애굽의 노예생활을 탈출한 것도 기적인데, 그렇게 탈출한 사람들이 웬일인지 광야에서 40년을 떠돌았던 것이잖아요?

나왔으면 어디든 살 곳을 찾아 들어가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생존이 불가능한 광야에서 이백만 명이 살아냈다는 것이죠.

광야 40년은 하나님이 아니면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지나온 광야를 생각해도 하나님 없이 설명할 길이 없죠.

중동의 주변나라들이 볼 때 한 나라의 광야생활이 얼마나 기이했겠습니까?

그러니까 여리고를 정탐했을 때 라합의 말이 일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여호와는 상천하지의 하나님이시라고 하잖아요?

물론 이후 가나안의 막강한 일곱 부족을 정복하게 하신 것도 모든 나라에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드러내시는 것이죠.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열심히 주일예배에 나올 때 가족들이나 주변 사람들이 은근히 지켜봅니다.

그러다 광야 같은 시련을 만나 고생할 때 어떻게 생각할까요?

그것 봐라,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생각도 하겠죠.

욥의 아내처럼 우리를 더 심하게 낙담시키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그런 시련에 좌절하지도 않고, 망하지도 않고, 꿋꿋이 이겨내는 것을 본다면요?

그러면 오히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계신가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가 승승장구하는 것으로 하나님이 증명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광야가 오히려 나 자신과 이웃에게 하나님을 증명한다는 게 신비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도록 성공시켜 달라고 기도하지만, 그 속에는 내 영광을 좀 신경 써 주시라는 뜻이 더 많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로 하나님의 무능하심이 널리 퍼진 것이 아니었죠.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스스로 나타내십니다.

우리가 어려운 광야에 있을 때, 남들에게 창피하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는 생각으로 절대로 나를 괴롭히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강하게 역사하실 때도 우리의 고난의 시기입니다.

 

2. 왜 광야 40년 역사를 살게 되었는지를 다시 상기시킵니다.

1절에 보면, 너희가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가나안땅을 차지하고 그 땅에서 번성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너희 부모들은 명령을 지키지 않아서 광야에서 고난을 당했다는 뜻이죠.

그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나안땅에도 광야는 있을 것이고, 누구나의 인생엔 광야가 있기 때문입니다.

광야가 앞에 있냐, 뒤에 있냐, 얼마나 긴 광야냐, 짧은 광야가 자주 오느냐.

이런 문제만 다를 뿐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40년을 보내게 된 이유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불신하고, 가나안땅을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신명기에서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갈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주신 명령과 규례대로 행하라고 반복해서 당부합니다.

가나안땅이 약속의 땅이라고 죄가 없는 곳이 아닙니다.

오히려 광야보다 더 죄를 절제하기 어려울 것을 하나님이 경계하시는 것입니다.

물질이 풍요롭고 생활에 걱정이 없으면 사람의 오만도 커집니다.

전에 뉴스에 보니 수협 조합장 자리도 그렇게 높은 자리인지 몰랐습니다.

신발을 벗어서 직원을 때리려 하고, 일자리 끊어버리겠다고 포악을 부리는 데 그런 막장이 없더군요.

통장에 돈만 조금 쌓여도, 지위가 조금만 높아져도, 인기가 올라가도.

그걸 겸손하게 지키기가 인간은 그렇게 어렵습니다.

우리 성도님들 중에는 아직 광야를 지나시는 분도 있습니다.

또 누군가는 광야를 지나 주님의 안위를 받고 평안을 얻기도 했습니다.

광야에서는 말할 것도 없지만, 광야를 지나온 우리들도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말씀대로 살기가 참 어려우시죠?

우리는 내 생각대로 살아가는 걸 좋아하고, 특히 내 감정대로 삽니다.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고.

상황이 안 좋으면 불안해 하고, 칭찬받으면 금방 우쭐해지고.

누군가의 한마디에 낙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은 감정이 내 생각과 말과 행동을 끌고 가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최초에 드는 감정은 거의 타락한 본성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감정은 대개 아군을 가장한 적군일 경우가 많죠.

가뜩이나 상황도 힘든데, 감정이 나대면 더 어렵잖습니까?

부정적인 감정, 원망, 남을 무시하는 마음, 급격한 우울감, 연민.

이런 감정이 앞서 나올 때 우리에게 주신 말씀으로 틀어막아야 합니다.

말씀은 어떤 복잡한 상황에서도 아주 간결하고 확신 있게 명령하시죠.

걱정이 앞설 때, 염려하지 말라 하시잖아요?

용납해라, 감사해라, 비판하지 마라.

어떻게 매번 그렇게 말씀을 신경쓰며 사냐, 그렇게 사는 게 얼마나 피곤하겠냐, 뒤로 물러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그렇게 못 살아서 힘들고, 곤고하고,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함께 격려하며 말씀대로 살아내기에 더욱 힘쓰길 축복드립니다.

 

3. 광야생활에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분명히 광야 길은 이스라엘의 죄가 자초한 심판입니다.

하나님은 광야가 심판이라는 말만 계속하지 않으십니다.

잘못한 것을 계속 반복해서 추궁하면 관계는 파탄나죠.

하나님은 우리가 싫은 소리를 계속 들으면 엇나간다는 걸 아십니다.

분명히 내게 있는 어떤 힘든 문제들은 내게 책임이 있죠.

그걸 우리가 인정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면, 하나님은 놀랍게도 그 문제를 다루십니다.

그 고난을 오히려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가장 큰 유익은 우리의 교만을 낮추신다는 것입니다.

3절은 광야생활에서 먹었던 만나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1) 만나도 너를 낮추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자연세상에 있는 것들로만 생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도 광야에서 먹을 것이 떨어지고, 먹을 물이 없을 때 하나님이 우리를 죽이려 하신다고 공포에 질려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누구도 본 적 없는 만나를 내리셔서 이스라엘을 먹이셨죠.

하나님이 원하시면 얼마든지 광야에 대추야자가 주렁주렁 열리고 밀이 자라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그게 더 쉬우십니다.

더 어려운 하늘의 음식 만나를 만들어 먹이신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들을 주리게 하셔서 낮추기 위해서라는 것이죠.

사람이 자기 힘으로 의식주를 해결하지 못할 상황이 되면 가장 두렵고 무능함을 느끼게 됩니다.

돈이 없고, 내 힘으로 살만한 건강이 없으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사람은 저절로 자기가 얼마나 힘없는 존재인지를 알고 낮아집니다.

만일 이스라엘을 항상 오아시스로 인도하고 열매를 거두게 하셨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 은혜인 줄 모르고 여전히 자만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매일 아침 단 하루치 만나를 내려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네 힘으로 먹고 살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낮아지라는 것입니다.

2) 또 생존이 눈에 보이는 세상 것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돈이 없으면 못 산다고 생각하는 우리도 마찬가지죠.

저도 주머니에 단 돈 몇 푼이 없던 광야를 지나왔습니다.

돈이 없는 건 고사하고 매달 월급이 턱도 없이 부족한 가운데 수 년 간을 버텨봤습니다.

계산상으로는 돈이 없어서 굶어 죽어야 했는데, 죽지 않고 살았습니다.

사람 관계가 먼지처럼 푸석대고, 냉장고를 채울 음식이 없고, 내일 갚아야 할 돈이 없고, 몸과 마음이 고달픈 게 광야입니다.

그때 우리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나를 겸손하게 하시는구나.

세상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 방식으로 나를 살라고 하시는구나.

그걸 인정하고 매일 주시는 삶에 최대한 감사하면 가장 귀한 것을 얻을 것입니다.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주님과 동행하는 것, 그게 가장 귀한 것이잖아요?

 

4. 만나로 이스라엘을 낮추셨듯이 마음이 낮아져야 예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만나는 생명의 양식인 예수님을 상징한다는 것 아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과 하셨습니다.

광야의 이스라엘이 자기 힘으로 생존할 수 없었듯이, 우리도 내 힘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만이 내가 살 길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믿기 위해서는 반드시 광야를 통해서 낮아져야 하는 것입니다.

광야에서는 우리 마음이 비참하게 깨지고 깊은 상처를 입죠.

지난 주에 제가 금을 캐는 과정을 기록한 다큐 영상을 흥미롭게 보았습니다.

금광석은 보통 지하 백 미터 이하를 내려간 깊은 암반층에서 캐냅니다.

금맥이 어떻게 생기냐 하면, 단단한 화강암층에 균열이 생길 때 그 틈으로 지하에 있는 마그마가 올라와 틈을 메운다고 합니다.

마그마가 올라오면서 금, , 동 같은 금속 물질들을 끌고 와서 굳은 게 금맥이라고 하더군요.

저는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단단한 화강암에 균열이 생기려면 얼마나 큰 압력이 작용을 했겠습니까?

화강암이 깨지지 않으면 금맥이 생길 수가 없다는 것이죠.

그렇게 만들어진 금광석은 그걸 또 뜨겁게 제련해야 순금이 나옵니다.

욥기에서 나를 단련하신 뒤에 내가 정금 같이 나온다는 게 실감이 나더군요.

사람의 강팍한 마음이 화강암보다 더 단단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그 마음이 견디기 힘든 압력을 받고 여기저기가 깨어져야 금보다 귀한 믿음이 침투할 수 있는 것이죠.

그 믿음이 정금이 되기 위해서도 여전히 크고 작은 압박과 제련들이 또 필요한 것입니다.

하루 중에도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엎었다 뒤집었다 단련하십니까?

그래서 우리 마음이 늘어져 있지 못하고, 괴롭고 고단하죠.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평안과 은혜를 누리면서도 한편으론 이런 연단을 완벽하게 졸업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연단 된 믿음이 내 본성을 잘 다루어 갈수록 내 안의 분쟁이 가라앉고 모든 것과의 화평이 늘어가게 되는 것이죠.

또 예수님을 위한 무언가 작은 사명도 자발적으로 기쁘게 감당할 수 있는 든든한 믿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다만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광야 인생을 가는 동안 우리 의복이 해어지지 않게, 우리 발이 부르트지 않게,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김창옥강사가 얼마 전 강의에서 이런 말을 하더군요.

올해 목표가 무엇이냐, 어떻게 살겠냐고 물을 때, 작년처럼 살겠다고 한다면 그게 제일 잘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어제처럼 살면 되지.

내일? 오늘처럼 살면 되지.

그럴 수 있다면 우리는 잘 살고 있다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잘 사는 것은 어제 주님만을 의지했듯이 오늘도 그렇게 살고, 내일도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있는 곳이 광야든 가나안땅이든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먹으며 사시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