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신명기32장39절-47절 (너희의 날이 장구하려면-송구영신)

남수연 2022. 1. 6. 15:22

해마다 연말이면 교수들이 뽑은 올해의 사자성어가 선정됩니다.

올해 880명의 교수들이 선정한 사자성어 1위가 묘서동처라고 합니다.

고양이와 쥐가 함께 있다는 뜻이죠.

쥐를 잡아야 할 고양이가 쥐를 안 잡고 같이 동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경찰과 도둑이 한통속이 되는 걸 의미합니다.

지난 한 해 동안 국민들을 실망시킨 정치인, 공무원, 기관들의 비리에 한탄하는 마음이 반영된 것 같습니다.

두 번째로 뽑힌 사자성어가 인곤마핍입니다.

사람과 사람을 태우고 다니던 말이 둘 다 지쳤다는 뜻입니다.

뭔가 마음에 확 와 닿지 않습니까?

삼국지에서 유비가 너무 도망을 다니다 보니 사람 뿐 아니라 말도 기진맥진했다는 데서 나온 말입니다.

두 사자성어가 세상의 악덕과 인생의 피곤함을 말해 주는 것 같습니다.

지난 일 년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지만 하루하루는 정말 지치도록 힘든 날들이 많았습니다.

코로나 상황에 맞춰가며 불안하게 살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 발도 물러나 주지 않는 인생의 여러 구차한 일들까지 참 우리를 지치게 했습니다.

이제 힘들었던 2021년을 보내고 2022년 새해를 맞는 송구영신의 시간입니다.

내년엔 또 어떤 날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요?

그러나 올해를 잘 건너오게 하신 하나님께서 내년에도 모든 상황을 인도해 주시고 동행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뜻 깊은 시간에 하나님께 이렇게 함께 예배드리게 되어 너무 감사합니다.

온라인으로 예배드리는 우리 성도님들도 반갑습니다.

올해의 마지막 시간과 새해 첫 시간을 예배로 시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께 새해의 모든 날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으로 가득하길 빕니다.

 

오늘 하나님 말씀은 지난 주일에 이어 모세의 노래에서 듣도록 하겠습니다.

모세는 장차 이스라엘에게 일어날 미래를 경고하는 노래를 지어서 백성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그때 모르고 배웠지만 우리는 알죠.

불길했던 예언대로 되었다는 것을.

지난 주 나눈 부분은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신실하게 인도하신 하나님, 그리고 약속하신 가나안땅의 풍요를 누리게 될 노랫말을 살펴 보았습니다.

우리를 지난 일년간 보호하고 연단하시고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그 노래 안에서 만나 보았었죠.

그러나 모세의 노래 가사는 끝까지 이렇게 행복하고 달콤하지만은 않습니다.

지난 주일 나눈 말씀 바로 바로 뒤이어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밀월이 끝납니다.

 

1. 장장15절부터 26절까지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가나안우상 종교로 개종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엄벌을 노래합니다.

모세의 노래에서 가장 많은 양을 하나님을 배반한 이스라엘이 당할 비참한 현실에 할애하고 계신 것이죠.

하나님의 안타까우심과 진노가 노랫말에 펄펄 끓어 오르는 듯 합니다.

우리는 모세의 노래가 예언한 대로 이스라엘이 절대로 걸어서는 안 될 그 길을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끌려가더니 결국 망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배신한 이스라엘은 결국 축복의 땅에서 쫒겨나 모든 것을 잃고 비참한 노예로 다시 돌아갑니다.

애굽의 노예에서 건져주셨더니 다시 바벨론의 노예로 돌아간 것이죠.

우리는 지난 주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했습니다.

새해를 맞이하는 오늘 이스라엘의 실패에서도 우리 자신을 비춰보아야 할 것입니다.

1)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신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인간의 골수에 새겨진 교만과 지독한 자기애 때문입니다.

15절에서 뼈아픈 인간의 한계를 지적했었죠.

그런데 여수룬이 기름지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비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업신여겼도다

아쉬운 게 많았던 광야에서 하나님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가나안땅을 처음 봤을 때 이스라엘은 눈을 의심했을 것입니다.

대다수가 황량한 광야에서 태어나 광야에서 살았던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비옥한 땅에 자라고 있는 곡식과 과실들을 보았을 때 기분이 어땠겠어요?

아마 우리가 지금은 약속만 받고 아직 가보지 못한 천국을 눈으로 볼 때처럼 감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잘 하는 게 있죠?

은혜를 빨리 잊는다는 것입니다.

계속되는 풍요는 점점 당연한 것이 되어가죠.

우리의 신앙도 그러기 쉽습니다.

하나님 외에는 기댈 곳이 없었고, 하나님의 도우심 외엔 손 벌릴 데도 없었던 시절에 주셨던 은혜, 말씀으로 위로하고 힘을 주셨던 시간들이 편해지면 곧 당연히 누릴 것으로 여겨집니다.

은혜를 잊을 때 하나님을 모셔야 할 자리를 죄의 골수에 새겨진 자기애, 교만이 자리잡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점차 풍요만이 남고 그 풍요와 안정을 주신 하나님은 잊어버립니다.

하나님을 경외해야 할 자리를 웅크리고 있던 자기애, 교만이 자리잡고 앉는 것이죠.

 

2)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가나안의 신들을 받아들인 것은 같은 맥락입니다.

그들 마음에 새 신들을 경외하며 잘 섬기려고 그랬겠습니까?

하나님은 십계명에서 분명히 너희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죠.

우상숭배는 자기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우상신을 받아들였다는 것은 종교를 받아들인 게 아니라 자기를 기쁘게 하기 위해 세속세상을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선을 그어 놓으신 세상에 대해 문을 활짝 개방한 것이죠.

인류의 역사를 보면 16세기 즈음까지 종교가 없는 민족이 없었습니다.

종교가 곧 민족의 삶이고 문화였습니다.

지금도 국교가 있는 이슬람이나 종교색이 강한 나라들을 보면 사람들의 생활과 종교는 분리할 수가 없이 밀착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외국인 노동자들을 열심히 전도해서 고향으로 귀국시키면 얼마 안가서 다시 자기나라 종교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제가 미얀마에 가 보았더니 나라 전체가 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미얀마 사람들은 데이트도 절에서 합니다.

가족들은 휴일에 도시락을 싸들고 절에 와서 불상을 바라보며 놉니다.

우리나라도 고려시대 같은 경우 불교가 사람들 생활 전반에 침투했다가 조선시대에 더 깊숙이 유교 영향이 파고 들었잖아요?

아직도 우리나라에 제사 같은 유교문화가 뿌리 뽑히지 않고 있습니다.

가나안의 종교는 곧 가나안 부족들의 생활이자 세상 문화였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주야로 바라보고 만나를 거두어 먹고 가축을 돌보며 사는 비교적 단순한 일상이었죠.

여호와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가나안땅을 위시한 주변 여러 나라의 난잡한 종교와 완전히 다릅니다.

종교도 사람이 만들면 인간의 본성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이 만드셔서 사람들에게 흥미롭지 못합니다.

기독교가 자꾸 흥미롭게 바뀌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가나안의 우상종교는 음란과 쾌락, 광적인 인신제사와 귀신과의 접신 같은 것이 혼합 된 최악의 결정판이었습니다.

그게 얼마나 강하게 죄성을 끌어당기는지 한 세대 만에 이스라엘이 무너집니다.

한 두 번 본 음란물에 중독이 되는 거잖아요?

이스라엘이 처음 가나안종교를 받아들일 때 하나님신앙을 부정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세속과 신앙이 섞이면 신앙을 버리고 세속으로 빠지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을 발로 차버릴 것을 모세가 예언하는 것이죠.

우리가 사는 세상을 즐기고 누리는 것을 하나님이 금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의 믿음을 무너뜨리는 것은 세속의 문물들입니다.

세상의 것들을 이용할 땐 신앙에 영향을 주지 않을 만큼의 균형이 중요합니다.

잠언이 그 균형을 잘 말해주십니다.

25장16절, 너는 꿀을 만나거든 족하리만큼 먹으라 과식하므로 토할까 두려우니라

하나님이 제외 된 세상의 문화와 엔터테인먼트 같은 것들이 꿀같이 달달한 행복을 주는 것 같지만 토하도록 먹게 되고 결국 중독에 이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구하면 생수와 같은 상쾌함과 만족을 얻지만 세상에서 얻는 것들은 결국 토하고 싶을 만큼 자극적인 단맛인 것이죠.

성도들은 세상 것을 즐기고 나서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그 때 ‘아, 내가 이 세상사람들과는 다른 사람이구나. 대단한 믿음이 있지도 않은 데 결국 또 하나님께 관심이 가는구나’를 느끼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연말 프로를 택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고 찬양드리러 나오신 것이잖아요?

이스라엘이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배반하고 자기를 기쁘게 할 우상문화를 선택한 것은 지독한 인간의 자기애, 교만이라는 내부의 적에게 진 것입니다.

새해에는 여러 가지 모양으로 위장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내 안의 원수, 지독한 자기애와 세속적인 즐거움에 대해 경계하며 예수님을 따르는 복된 모두가 되길 원합니다.

 

2. 하나님은 잘못 된 길을 가는 이스라엘을 징계하시고 징계의 수단이 되었던 원수들은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있는 죄라는 내부의 적을 징계하시는 데 대부분 외부의 적을 통해서 하십니다.

악의 세력과 악인들, 악한 환경들이 그 역할을 하죠.

이렇게 징계도 하고 심판도 하시는 하나님이 공명정대하다 39절에서 선포하십니다.

이제는 나 곧 내가 그인 줄 알라 나 외에는 신이 없도다 나는 죽이기도 하며 살리기도 하며 상하게도 하며 낫게도 하나니 내 손에서 능히 빼앗을 자가 없도다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먼저 인정할 것은 창조주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에 대한 권리가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기에 대해 이런 권리가 있으시다는 것에 격렬히 항거합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피조물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십니다.

상하게도 하시고 낫게도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주시고 주인이시고 우리가 복종해야 할 주권자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실패한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이 하나님을 유일하신 신으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애굽과 가나안에 무수한 가짜 신들처럼 자기 자신을 위해서 선택할 수 있는 우상신과 구분을 못했던 것이죠.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기본적인 관계 설정은 신앙생활의 첫단추입니다.

하나님을 창조주와 통치자로 믿고 있는지는 하나님의 심판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서 드러납니다.

본문 말씀 41절에서 43절을 보면 무섭게 보응하시는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를 보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의 측면만을 알고 있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죄악에 대해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을 함께 이해하고 경외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않게 됩니다.

사실 진노와 심판이라는 면은 하나님께는 결코 경험치 않아도 되셨을 불쾌하고 불편한 일입니다.

만일 피조물에 자유의지를 주시지 않았다면 이런 불쾌한 부정적 상황을 굳이 당하실 이유가 없는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은 스스로의 가장 평안하고 온전한 만족의 상태를 포기하시고 우리에게 자유의지라는 소중한 선물을 주신 것입니다.

그마저 죄와 마귀에 뺏겼기에 하나님의 아들이 목숨을 걸고 대속해 그 귀중한 자유를 찾아 주셨잖아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우리가 불편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죄송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심판하시는 게 아니라 징계하고 연단하시기에 우리에겐 징계 또한 소망인 것입니다.

오히려 대적에게 복수해 주시고 자기 백성의 죄는 속죄해 주신다 약속하십니다.

43절, 너희 민족들아 주의 백성과 즐거워하라 주께서 그 종들의 피를 갚으사 그 대적들에게 복수하시고 자기 땅과 자기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시리로다

이 예언의 말씀은 일면 성도들이 당하는 억울하고 무고한 고난을 예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때로 악의 세력에게 피 흘리기 까지 고초를 당하기도 하는 것이 성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 억울함을 대신 갚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보복이 무서우리만치 맹렬합니다.

이것은 사탄과 악인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백성을 잔혹하게 괴롭혔는지 그대로 갚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날은 사탄과 그에 동조한 악인의 영원한 파멸의 날입니다.

이 땅에서의 심판은 최후의 심판과는 다르지만 하나님의 심판의 시스템은 자연계 속에서도 작동합니다.

그것은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이죠.

하나님이 관여하지 않으셔도 악을 따르던 사람은 결국 악한 종말을 향해 달려가 스스로 파멸하게 되어 있습니다.

33절에서 그걸 말해 주십니다.

그들이 실족할 그 때에 내가 보복하리라 그들의 환난날이 가까우니 그들에게 닥칠 그 일이 속히 오리로다

악인은 스스로 함정을 파고 덫을 놓고 결국 거기에 자기가 걸려듭니다.

뉴스를 장식하는 모든 범죄자들이 저렇게 미련하게 스스로 자폭하나 싶잖아요?

지난 한 해 우리가 잘못해서 겪은 어려움은 회개하고 용서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바로 잡는 징계들은 매일 죄를 짓는 우리에겐 차라리 소망입니다.

어떨 때는 나를 보며 하나님이 한 대 좀 때려주셨으면 좋겠다고 생각이 들잖아요?

죄를 간과하시고 버려두시는 게 더 두려운 일이죠.

그러나 믿음을 지키며 예수님의 말씀대로 겸손히 견뎠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대신 갚아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자꾸 몰아내고 왕좌에 앉으려는 나와 나를 즐겁게 하려고 세상과 벗하려는 내 안에 있는 죄라는 원수를 잘 인식 하셨으리라 믿습니다.

또 밖에서 공격하는 원수, 마귀의 세력도 잘 인식해야 합니다.

하나님처럼 마귀도 실존합니다.

이제 새해가 되었는데, 올해도 이 두 가지가 우리 삶에 잦은 다툼과 분란과 풍파를 몰고 다닐 것입니다.

 

3. 그렇기에 모세는 이 노래를 마치고 우리가 이 시험을 이길 수 있는 길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46절,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오늘 너희에게 증언한 모든 말을 너희의 마음에 두고 너희의 자녀에게 명령하여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라

이스라엘의 실패의 원인은 아주 명백하죠.

오늘 예언의 노래가 이렇게 분명함에도 그들의 행복을 위해 정해주신 생명의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모든 말을 너희 마음에 두고, 자녀에게 명령하여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라고 하셨잖아요?

올해 우리에게 힘든 시간들을 돌아봅시다.

그것은 필시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지 않고, 말씀대로 지켜 행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기준으로 살려고 하지만 사실은 대개 몸에 익은 습관과 머리에 박힌 세속적인 가치관을 따라 삽니다.

저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예수님을 따르며 살아왔다고 생각했기에 어느 정도 자연스럽게 내 생각이 곧 하나님의 생각과 같을 거라고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실은 내 머리와 내 처세술로 살았던 때가 더 많았던 것이죠.

새해엔 저의 생각과 일거수일투족을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에 맞춰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말씀과 그 길을 따른다는 것만이 우리에게 안전과 담대함을 줄 것입니다.

47절, 이는 너희에게 헛된 일이 아니라 너희의 생명이니 이 일로 말미암아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 차지할 그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갈등하고 고민하다 때로 이렇게 까지 해야 하냐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은 헛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우리의 생명이라고 하십니다.

내게 영생의 생명이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는 내가 부단히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려고 애쓰고 갈등하고 있는지에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새해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께 복을 구하며 시작하고자 합니다.

올해도 우리가 좁은 문으로 들어온 이상 좁은 길을 걸어가야 하는데 어찌보면 그 길이 칼날 같이 좁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 길은 내 앞에 놓아주신 말씀으로 이어진 길입니다.

시편119편은 하나님의 말씀이 내 발의 등이고 내 길에 빛이라고 하죠.

새해 내 안의 원수, 그리고 밖의 대적을 이겨내려면 이렇게 말씀의 인도하심을 따라 한발 한발을 안전하게 내딛고 형통한 길로 행하는 모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