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신명기32장7절-14절 (하나님의 비행 훈련)

남수연 2024. 4. 29. 22:41

오늘 모세가 죽기 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재교육하며 당부했던 이야기를 마무리할 시점이 되었습니다.

하나님도 아시고 모세도 알았습니다.

가나안땅에 들어가면 이스라엘은 자기들 마음대로 믿을 수 있는 신, 인간들이 만들어 낸 신으로 갈아탈 것이라는 것을.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을 위해 마지막으로 모세에게 두 가지를 명하십니다.

이제까지 주신 모든 율법과 계명들을 기록해서 법궤 곁에 두고 레위인들이 가르치게 해라.

또 하나는 오늘 읽은 본문을 노래로 지어서 대대로 부르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 모세의 노래는 마치 구약성경 전체를 요약한 것과 같습니다.

아직 모세오경이 기록될 때이지만 이스라엘의 배신과 종말적인 회복까지 아우르는 계시까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 믿음의 인생을 넓은 안목으로 조망하게 하는 노래입니다.

오늘 읽은 부분에서 몇 가지를 살펴보며 우리 믿음에 적용해 보겠습니다.

 

1.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가나안땅에 들어가서 어떻게 계속 섬길 수 있는 지에 대한 방도입니다.

가나안땅에 들어가면 세속문명과 거주민들의 우상 숭배가 눈길을 사로잡을 것입니다.

그나마 만나도 끊어지고, 구름기둥도 불기둥도 보이지 않을 것인데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잊지 않고 계속 섬길 수 있는 방안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도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그 답이 7절에 나오죠.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버지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말하리로다

다소 당황스럽죠?

가나안의 점술가들은 눈앞에서 길흉을 점쳐주고, 그들의 현란하고 육감적인 그들의 우상종교는 이스라엘을 유혹할 것인데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의 방책은 그것들과 겨루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든 세상 종교들과 하나님 신앙은 나란히 놓을 수 없습니다.

모조품과 진품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걸 모르면 종교가 다 똑같다, 아무거나 믿어도 구원을 받지 않겠냐는 오해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붙잡을 하나님의 방법은 40년간 이스라엘과 동행하며 기적을 베푸셨던 과거의 역사를 들으라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으로만, 세속과 죄와 세상 종교의 유혹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님은 증거를 보고 믿겠다는 사람들에게 눈길을 주지 않으십니다.

믿을 사람은 지나간 연대에 대해 듣기만 해도 믿습니다.

안 믿을 사람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을 눈으로 보면서도 의심했던 것처럼 갈라진 홍해를 건너오고도 안 믿습니다.

우리의 이성과 현실 세계가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도전할 때도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들어야 합니다.

반드시 성경에서 믿음을 찾아야 합니다.

특히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역사를 이끄신 하나님을 만날 때는 예수님을 보는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성부 하나님과 성령하나님을 조금씩 예수님과 똑같은 살아 계신 인격자로 느낄 수가 있습니다.

오직 성경으로 하나님과 우리 구원에 대한 모든 진리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 자녀들을 성경으로 가르쳐 믿음을 전수해야 합니다.

그것이 모세가 이 성경을 기록한 이후 삼천오백 년간 진리가 보존 된 비결입니다.

그리고 현재까지 성경으로 성도들이 구원받는 것을 가능하게 만든 것입니다.

고대국가들의 수많은 우상종교들 중 현재 남아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스의 그 많은 우상신들과 화려했던 신전들은 관광 상품으로 남았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성경 하나로 승부하십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흔들린다면 성경을 펴십시오.

 

2. 이스라엘의 광야 40년 역사는 하나님이 실제로 우리 삶을 인도하신다는 증표를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출애굽의 역사는 두고 두고 하나님의 존재와 성도들에 대한 인도를 들려주시는 것이죠.

성도들이 고독하게 분투하며 천국을 찾아가는 게 아닙니다.

주님은 이렇게 인도하십니다.

10,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2백만 민족이, 4백 년간 노예로 살다 탈출해 자유를 찾았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이보다 더 분명히 하나님을 증명하는 게 어디 있겠습니까?

출애굽의 모든 과정은 자연세계에서 일어날 수 없는 기적의 연속입니다.

식물이 없는 살인적인 황무지 광야에서 한 민족이 40년을 생존한 것이 실제 역사였다면 실제로 하나님이 보호자이셨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2백만 명 중 굶어 죽은 사람이 없고, 사막의 갈증으로 죽은 사람이 없습니다.

다 자기 수명대로 살다 죽었고 자식 세대는 다 살아서 가나안땅으로 들어간 것이잖아요?

세상의 어떤 신도 (물론 신은 하나님 한 분 뿐이시지만) 어떤 지도자도 그런 큰 역사를 이루지 못합니다.

이스라엘만 그렇습니까?

이스라엘의 역사는 나를 구원하신 역사이고 나를 영원한 가나안땅으로 인도하시는 현재 진행형인 역사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지금 나를 호위하시고 보호하시고 눈동자처럼 지키고 계십니다.

 

3. , 하나님은 보모처럼 이스라엘을 먹이고 입히기만 하시지 않습니다.

엄한 부모처럼 이스라엘을 훈련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을 향한 목적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애굽의 종의 마인드로 세운 나라는 하나님을 만방에 나타낼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거룩하신 주님을 닮지 않는다면 세상에 하나님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우리가 들어야 할 말은 너를 보니까 하나님이 계신 것 같다, 네가 믿는 예수님을 나도 좀 믿어 봐야겠다바로 이 말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들을 맏아들인 예수님을 닮도록 연단하십니다.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이렇게 훈련시키셨다고 합니다.

11,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여호아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독수리가 새끼의 비행훈련을 하는 것을 빗대어 하나님이 자녀들을 어떻게 훈련시키시는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광야 생활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암벽 벼랑 위에서 독수리가 새끼를 훈련하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새끼들은 푹신한 깃털로 채워진 둥지에서 어미가 물어다 주는 먹이를 먹고 점점 몸집이 커져 갑니다.

새끼들이 크면 본능적으로 날개를 펴고 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날아야 할 때가 되면 어미는 사정없이 둥지의 푹신한 깃털을 날려 버립니다.

안락했던 둥지가 나뭇가지가 찌르는 불편한 자리가 되는 것이죠.

그리고 어미는 새끼들을 둥지에서 허공으로 밀어내 나는 방법을 가르칩니다.

바닥으로 추락하는 새끼들은 기겁해서 날개를 퍼득거리겠죠.

어미는 추락하기 전에 새끼들 아래로 날아가 큰 날개로 새끼를 받아줍니다.

이것을 수없이 반복합니다.

이제 자기 힘으로 날 수가 있게 되면 새끼 독수리들은 비로서 독수리의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수달이 새끼에게 수영을 가르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달은 그야말로 수영 천재 아닙니까?

물속에서 물고기보다 더 빠른 게 수달입니다.

수달 새끼들이 당연히 태어나면서부터 수영을 잘 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뭍에서 태어난 수달은 물을 겁나 무서워합니다.

어미 수달은 그런 새끼를 주둥이로 거칠게 밀며 물가로 데려갑니다.

물속으로 안 들어가려고 도망가는 새끼를 순식간에 입에 물고 물속에 처박습니다.

그렇게 입에 물었다 놓았다를 반복하고 수면 위를 오르락 내리락하며 수영을 가르칩니다.

도망가면 얄잘없이 물어와 물에다 내리 꽂아버립니다.

영상을 보니 참 신기했습니다.

본래 잘하도록 창조되었다고 해서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니더군요.

이것을 우리 믿음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순종할 새 마음을 우리 안에 주셨지만 그 마음이 본성과 다투어 저절로 이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따뜻한 보육만 받길 원하지만 하나님의 생각과는 다른 것이죠.

이 어미들의 스파르타식 교육방식을 설계하신 분이 하나님이시잖아요?

히브리서126절 말씀을 외워야 합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서 하나님은 때로 광야에서 먹을 물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원망하고 불평하고 하나님께 눈을 치켜뜨죠.

하나님은 오아시스가 아닌, 암석에서 물이 터지게 하셔서 그들을 먹이십니다.

하나님은 예측대로 움직이지 않으십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이 하나님을 훈련시키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훈련시키시게 해야지 우리가 하나님을 내 비위에 맞게 조련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요셉이 어떻게 하나님을 그 정도로 신뢰하는 믿음의 인물이 되었겠습니까?

혹독한 노예 생활, 빛 한줄기 없는 감옥에서의 수년간, 요셉이 하나님만 죽어라고 찾을 수 밖에 없지 않았겠습니까?

성도들의 믿음의 실력은 축척 된 신앙경력에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그 순간, 하나님을 붙들고 있느냐에서 나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시키시는 믿음의 훈련은 매 순간 하나님을 붙드는 훈련입니다.

성도다운 성품과 언행도 예수님을 붙들고 있는 가운데 나오는 것이지 수행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닙니다.

안타깝게도 감옥같이 꽉 막힌 환경 속에서나 사람은 억지로 훈련이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 둥지를 불편하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온화한 둥지 속에서 나올 생각을 않고 죄의 몸집만 비대해져 가기 때문입니다.

훈련의 시기가 오면 하나님은 우리를 마치 사지에 몰아넣듯 밀어 넣으시고 훈련하십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용광로 같은 시련을 만나잖아요?

그때 훈련받은 우리는 끝없이 추락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이겨낼 만큼 하시고 독수리 날개로 우리를 업어서 다시 올려주십니다.

추락해 보지 않으면 내게 날개가 있다는 걸 모릅니다.

끝이 좋아야 다 좋은 것입니다.

40년 광야의 연단 뒤에 가나안의 풍요가 있는 것입니다.

13절부터 읽기만 해도 행복이 묻어나고 웃음이 새어나오죠.

기름진 밭의 채소와 꿀과 우유와 치즈, 그리고 양고기와 아름다운 밀과 포도주로 차린 식탁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곳은 예수님께서 마련하신 천국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도 하나님은 곤고한 날과 형통한 날을 우리 삶에 반복해 주시며 죄를 연단하시고 강한 주님의 백성으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끝이 좋아야 그 훈련을 왜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히딩크 감독이 남들이 다 전술 훈련해야 한다고 할 때 오대영이란 성적을 거두면서도 체력과 기본 훈련을 피나게 시킨 결과 우리 국민들에게 오필승 코리아라는 기쁨을 준 것이잖아요?

하나님의 비행훈련에 성실히 참여하는 성도님들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고난 중에 감사하고 매일 성경 말씀을 묵상하고 순종하는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2024년4월24일 수요기도회 남수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