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요한복음2장13절-22절 (육체로 세우신 참 성전)

남수연 2024. 6. 19.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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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상업화로 얼룩진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셨던 이야기입니다.

유대인들은 주님의 회개 촉구를 듣지 않다 성전과 함께 망했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오시면 우리 마음에서 무엇을 몰아내실까요?

오늘은 우리의 신앙과 예배를 좀 점검해 보면 좋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도시는 그리 넓은 곳이 아닙니다.

오늘 배경인 유월절엔 예루살렘 도성 안에 십만 명 이상이 모였다고 합니다.

어깨가 부딪칠 정도로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던 것이죠.

지금도 축제하면 사람 구경이 제일 재미있다고 하죠.

이날 예루살렘 성전 뜰에선 가축들이 울어대고 값을 흥정하는 사람들의 큰 목소리로 시끌벅적했습니다.

그런 광경을 재미있게 바라보며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래, 이게 유월절이지

예루살렘에서만 맛볼 수 있는 경험이잖아요?
여기까지 순례길을 오는 데 힘들었지만 역시 잘 왔다고 생각했을지도요.

다들 흥겨웠고 아무도 그날 그런 광경을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단 한 사람, 예수님만 그 모습을 보며 사람들과 다른 행동을 하신 것입니다.

명절 분위기를 완전히 깨신 것이죠.

우리도 성전에 있던 사람들과 똑같은 본성과 세속에서 자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예배 관습이 잘못된 것을 눈치채지 못했죠.

우리도 얼마든지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본문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바로 잡으신 것은 우리에게도 잘 적용 시켜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살펴보고 우리의 예배가 정말 복이 되게 드려지길 소망합니다.

 

1. 예수님 당시 성전에서 드렸던 유월절 제사 관습을 좀 말씀드리겠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예수님의 예표가 되는 것들을 잘 아는 것은 실체이신 예수님을 이해하고 믿는 데 매우 유익합니다.

1) 오늘 배경인 유월절은 이스라엘 조상들이 출애굽 했던 해방절입니다.

유월절에 양을 잡아서 문설주와 인방에 피를 발랐던 이스라엘 자손들의 집은 여호와의 심판이 건너 뛰었다고 해서 유월절입니다.

피가 없던 애굽의 장자들이 죽었죠.

유월절 양의 피는 예수님의 예표입니다.

사람이 참 미련한 것이, 천오백 여년간 유월절을 지키면서도 메시야의 구원이 피흘림과 관련 있다는 것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속죄의 보혈이 나를 구원하신다는 걸 믿어야 합니다.

오늘 성찬식이 그 믿음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2) 이스라엘은 메시야가 오셔서 구원을 이루시기까지, 정해주신 곳에서 제사를 드리며 유월절을 지켜야 했습니다.

신명기165절을 보면 각자의 성에서 유월절을 지키지 말고, 하나님이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한 곳에서 유월절 제물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한 곳은 예루살렘 성전이죠.

유월절 양만 예수님을 예표하는 것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도 예수님을 예표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하는 참 성전이십니다.

3) 순례객들은 이 성전에 와서 희생 제물로 유월절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멀리서 오는 사람들은 집에서부터 동물을 끌고 올 수가 없잖습니까?

신명기14장을 보면 하나님께 예물을 드릴 때 먼 곳에서 오는 경우는 돈을 가지고 와서 제물을 사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성전 마당에 크리스마스마켓 처럼 유월절마켓이 열린 것입니다.

14,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제물은 흠이 없어야 제사장이 받아 주었습니다.

멀리서부터 양을 데리고 오는 것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오는 도중에 상처라도 나면 제사장이 불합격 판정을 내릴 것입니다.

그래서 순례객들이 예루살렘 근처에 와서 돈으로 제물을 샀던 것입니다.

제물을 매매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그런데 가축과 상인들이 성전 뜰까지 들어오게 된 것은 분명히 잘못입니다.

성전 권력자들이 돈을 받고 아예 성전 뜰까지 들어와서 장사하게 해 줬기 때문입니다.

성전 밖에서 파는 동물보다 값이 더 비싼 것은 당연했겠죠.

그러나 순례객의 입장에서는 제사장에게 퇴짜맞지 않으려면 좀 비싸더라도 안전하게 성전에서 허가한 동물을 샀던 것입니다.

(4) 또 모든 유대인 성인 남자들은 성전에서 예배를 드릴 때 성전세 반세겔을 헌금으로 드렸습니다.

그런데 성전세는 사회에서 사용하던 로마 동전으로는 드릴 수가 없습니다.

로마동전에는 황제의 초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전에서만 사용하던 동전으로 바꿔서 드려야 했습니다.

여러 나라에서 찾아온 순례객들에게 환전이 필수였던 것이죠.

이 모든 과정에서도 커미션이 오갔던 것입니다.

성전제사에 사람들의 탐욕과 비리가 들어오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본질에서 멀어지고 점점 경시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께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일까요?

코로나19로 교회에 모이지 못하면서 온라인예배가 생겼습니다.

처음엔 성도들이 정장을 차려입고 성경 찬송가를 준비하고 예배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발톱을 깎으며 예배를 드리게 되더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제사만 타락했을까요?

이스라엘의 신앙은 지도자들의 타락 때문입니다.

제사장들이 이렇게 예배를 등한시하니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을 알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섬기는 걸 보고 자식들이 하나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를 압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예배하고 섬기는지를 보고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의식하게 되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2. 예수님이 성전에서 벌어지는 이 행태에 급제동을 거신 것입니다.

1) 곧 성전의 시대는 끝날 것이지만, 성전과 유월절 양의 제사 의미는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당시의 백성들을 가르치실 필요도 있었고, 이런 말씀을 전해 듣는 우리에게도 바른 예배를 가르치시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이 평소와 달리 과격하다 생각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잘 읽어보면 예수님이 분노하셨다, 화를 내셨다, 그런 말은 없습니다.

성전 정화에 대한 다른 복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오시다 이 광경을 보시고 버럭 화를 내셨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12살 때부터 유월절이면 예루살렘에 올라오셔서 이 광경들을 계속 보셨을 텐데, 이제 와서 갑자기 격분하셨다는 것도 좀 이상하죠.

예수님은 사람들이 어떤 죄를 지어도 놀라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사람의 실체를 전부 다 아는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반면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잘 모르죠.

오늘 성전 정화는 즉흥적인 게 아니라 계획된 사건입니다.

2) 주님이 어떻게 시장을 뒤엎으셨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성경을 생각하고 묵상하지 않으면 눈으로 보면서도 오해하기가 쉽습니다.

15,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쫒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고 상을 엎으시고

1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1)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셨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위협적으로 보이죠.

우리말 노끈이라고 번역한 원어는 골풀이라는 질긴 풀입니다.

돗자리 같은 걸 짜는 풀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조리풀이라고 아주 질긴 풀이 있는데, 같은 종류입니다.

예수님이 어디서 갑자기 노끈을 구해서 채찍을 만드셨겠습니까?

길가에 흔하게 자라있던 이 골풀을 묶으셔서 채찍 같이 만드신 것이죠.

누가 맞아서 다칠 만큼 위협적인 채찍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채찍은 보통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할 때 사용된 말입니다.

주님의 행위가 곧 타락한 성전 예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2) 우리 말 번역을 보면 예수님이 가축들을 다 내쫒아서 도망가게 하신 것 같죠.

원어대로는 동물을 쫒은 게 아니라 장사꾼들을 내쫒았다는 뜻입니다.

장사꾼들이 동물들을 챙겨서 데리고 성전 밖으로 내쫒긴 것이죠.

비둘기도 날려 보내신 게 아닙니다.

새장 들고 나가라고 하시잖아요?

돈 통은 그냥 쏟아 놓으셨고 상을 엎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상인들에게 큰 손해를 입히신 것은 아니시라는 것이죠.

우리는 감정도 잘 변하고 상황에 따라 인격까지도 변하지만 예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이 화내시거나, 분노하시는 것은 인간이 느끼는, 죄가 섞인 감정과 똑같은 게 아닙니다.

만일 예수님이 그랬다면 상인들도 가만있지 않았겠죠.

돈 내고 장사하는 자리인데 순순히 쫒겨 나갔겠습니까?

예수님이 진노하셨다, 공의를 시행하신다, 심판하신다, 꾸짖으신다, 이럴 때는 하나님의 거룩의 중압감에 누구도 꼼짝 못하게 됩니다.

귀신들도 주님 명령에 두려워 떨고 쫒겨 나갔잖아요?

계시록에 보면 주님의 심판에 마주한 사람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616, (그들이..바위 틈에 숨어)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예수님은 완전한 사랑이시고 완전한 공의이십니다.

오늘 예수님의 성전 정화는 우리처럼 화내신 게 아니라 주님의 거룩한 공의를 나타내신 사건입니다.

 

3. 그러면 예수님은 이 성전 정화를 통해 무엇을 나타내시려는 것일까요?

1) 하나님을 구하지 않는 예배의 실패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예배드리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구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대제사장이나 상인들이나 다들 제사를 이용해 세상의 돈으로 배를 채우고 있잖아요?

유월절 지키러 오는 사람들이 그걸 모르겠습니까?

그런 걸 보면서 다들 하나님보다 돈을 더 숭배하고 권력을 부러워하게 되는 것이죠.

성경은 그게 우리에게 만족을 주지 못한다고 사실을 누누이 가르치시죠.

전도서 510,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 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조정0목사님의 신앙이야기를 예로 들겠습니다.

이분이 기자출신인데, MBC뉴스데스크 앵커를 하셨던 분이십니다.

기자로 메인뉴스 앵커까지 되었으니 출세한 것이잖아요?

거기까지 올라가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겠습니까?

그런데 그 정도 이루면 만족이 되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은 거예요.

사람들이 돈을 좀 더 벌고 싶고, 권력도 조금 더 높은 데 올라가길 원하죠.

좀 더 내 이름이 알려지고, 좀 더 행복하길 원합니다.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조금 더입니다.

조금 더원한다는 것은 그것 자체가 만족을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더 가져봤자 결과는 똑같은 거예요.

계속 갈구하고 좇아가지만 나를 만족하게 채울 수는 없는 것이죠.

이분도 승진이 되고 유명해져도 갈증은 똑같고 짐만 점점 더 무거워집니다.

그런데 아내가 그런 남편을 위해서 새벽기도를 나가기 시작합니다.

어느 날 아내는 새벽기도 하러 교회로 가고 목사님은 마침 교회 옆에 있던 골프연습장으로 갑니다.

그런데 그날 연습장이 휴무인 거예요.

그냥 집으로 가려다 아내가 대체 교회라는 데 가서 뭘 하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발길을 교회로 돌린 것입니다.

가서 보니 앞에 아내가 앉아 있는 게 보였습니다.

뒤에 앉아서 목사님 설교를 들어보니 이상한 걸 가르치지는 않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혹시 사이비 종파일지도 모르니 취재를 해 볼 생각으로 한 일주일 몰래 새벽기도회를 다닙니다.

목사님 설교도 괜찮았지만 그것보다 일주일이 되던 날, 찬송가 한 곡에서 이 분 마음이 녹아내렸습니다.

너 예수께 조용히 나가 네 모든 짐 내려 놓고

이 찬송가 가사를 눈으로 따라가는 데 눈물이 비오듯 흐르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무겁게 지고 있는 모든 짐을 정말 내려놓을 수 있는 것 일까

그렇게 해 준다는 예수님은 대체 누구인가

그런데 그게 믿어지더랍니다.

그렇게 울면서 예수님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좇았던 세상에서 받아본 적이 없는 평안과 만족을 얻은 것입니다.

그런데 왜 교회 와서 다시 세상의 것을 구하냐는 것입니다.

예배에 오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 은혜를 받아야 우리 영혼이 만족과 쉼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순례객들이 성전에 발을 들여 놓는 순간 마음을 다해 부르는 찬양대 찬양과 성전에 가득찬 사람들의 기도소리가 아름답게 들려야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가축 울음소리, 배설물 냄새, 흥정하는 소리가 예배를 가로막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가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무엇일지도 생각해 보아야하겠습니다.

 

2) 또 이 사건은 건물 성전의 시대가 끝나고 참 성전의 시대가 올 것이라는 주님의 선언으로 이어집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예수님의 그림자, 모형입니다.

아직까지는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했지만 앞으로는 예수님이 바로 성전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선택하시고 그 만남의 상징으로 성전을 허락하셨죠.

성전은 희생 제물의 제사를 통해 지은 죄를 용서받는 곳입니다.

그리고 돌아가서 다시 하나님 백성으로 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을 읽어보면 이 성전이 하나님께는 골칫거리였습니다.

결국 성전 제사까지도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무엇을 갔다 주든 함께 끌고 가 타락시키는 비상한 재주가 있죠.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면서도 점점 더 부패하고 악해져 갑니다.

말라기110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하나님의 고충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이런 성전제사의 시대를 예수님이 종료 시키신다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많은 예언자들이 메시야가 오셔서 성전을 정결하게 하실 것을 예언했습니다.

메시야의 성전 개혁을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이 모를 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나온 성전 관계자들의 반응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 왜 성전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냐고 하지 않습니다.

18,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표적을 보이라는 것은 메시야의 표적을 말하는 것입니다.

메시야가 아니면 이런 일을 할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야로 행동하신다는 것을 짐작하고, 그렇다면 메시야의 증거가 있냐고 추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1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신봉하는 황금빛 성전에 대한 엄청난 모욕이고 도전인 것이죠.

이 말씀은 물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진짜 성전을 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뜻을 사람들이 이해했을 리가 없죠.

말도 안되는 허풍이라고 비웃었습니다.

제자들도 주님이 부활하고 나서야 이 말씀을 깨닫고 믿었다고 하잖아요?

주님은 말씀대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하나님과 사람을 위한 영원한 성전이 되셨습니다.

건물을 선택하고 참성전을 버린 이스라엘은 이후 불과 40년 뒤, 로마제국에 의해 황금성전과 함께 파괴되는 역사를 맞이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대신 붙잡으려는 것이 그만큼 위험하다는 것을 명심해야겠습니다.

 

4. 유대인들의 신앙이 왜 성전과 함께 파괴되어야 했는지를 우리에게 잘 적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이 세상 종교처럼 변질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만들어 낸 종교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신을 찾아내고 내 행복을 위해 신의 도움을 받자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다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셔서 자신을 계시하고 사람의 소원과는 전혀 다른 것을 가르치고 믿게 하십니다.

그렇잖아요?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산상수훈이나 설교를 보면 사람의 본성과는 전혀 다르죠.

원수를 어떻게 사랑합니까?

사람의 머리에서 그런 게 나왔을 리 없죠.

우리의 신앙은 세상 종교처럼 삶의 한 구석이 아니라 내 인격과 삶 전체로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만든 종교가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영광스러우신 하나님을 알고 그 영광에 맞게 하나님을 섬기는 게 우리 신앙의 목적입니다.

행복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면 저절로 얻어지는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복되게 해주시려고 부르셨으니 당연한 것이죠.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잘 형성되면 어떻게 살아야할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가 점점 바로 잡힙니다.

그러면 현재의 삶에서도 행복이 따라오는 것이죠.

세상 종교가 정성을 바치고 복을 빌고 소원을 기도하는 것이라면 우리 신앙의 기도는 하나님과의 사귐입니다.

하나님과의 시간을 갖다 보니 내 생각도 말씀드리고, 문제의 도움도 구하고, 진짜 삶을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인격 없는 우상처럼 대하는 종교화입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믿는 게 뭔지를 좀 어려워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반대로 인격이 없는 종교의 대상을 생각해 보면 쉽습니다.

불상과 마주하고 절할 때 불상에 살아있는 인격이 없잖아요?

오히려 신접한 무당의 경우 귀신은 어쨌든 인격이 있는 존재이죠.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음성도 못 듣는데 어떻게 하나님과 실제 관계를 갖고 섬길 수가 있겠습니까?

그게 신비입니다.

우리는 성경으로 하나님을 배우고,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인격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처럼 예수님에 대해 배우면 성령께서 주님과 우리를 인격적인 관계로 맺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점점 하나님과 인격적인 사귐을 가지며 섬기게 되는 것이죠.

이스라엘의 신앙이 우상종교가 된 것은 사람들이 그걸 더 바랬기 때문입니다.

인격적으로 간섭하는 신을 누가 좋아합니까?

제사의식만 지키고 돌아서서 내 맘대로 사는 그런 종교가 더 본성에 맞거든요.

우리 신앙이 진짜 그렇게 되지 않길 축복드립니다.

예배드리는 이 순간에도 하나님이 나를 감찰하고 나를 불꽃 같은 눈으로 직관하고 계시다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존엄과 권능과 사랑의 성품을 배우고 그런 인격의 하나님과 친밀히 사귀며 섬기는 것이 우리 신앙입니다.

예수님은 종교화된 성전은 멸하실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 우리 예배와 믿음 속에 여전히 세상의 것들을 끌고 다니지는 않는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많은 문제해결과 나도 좀 행복하게 살고 싶은 게 절실하지만 거기에 매달린다고 잘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정성으로 섬기는 삶에서 진정 행복이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늘 채찍으로 유대인들의 신앙을 일깨우셨듯이 말씀의 채찍으로 우리를 일깨우십니다.

전도서 1211절 말씀입니다.

지혜자의 말씀은 찌르는 채찍 같고 회중의 스승의 말씀은 잘 박힌 못 같으니 다 한 목자의 주신 바니라

말씀의 채찍이 우리 안에 있는 죄와 세속을 몰아내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