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요한복음7장37절-44절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남수연 2024. 6. 4. 11:54

 

https://www.youtube.com/live/yEoPCDj5Bes

 

유튜버로 활동하는 한 젊은 목사가 최근 올린 영상이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

이분이 성극에서 나옴직한 예수님 분장을 하고 거리전도를 합니다.

노란 가발에 선그라스를 낀 예수님 분장이 눈에 확 띄더군요.

종이박스를 잘라 대충 만든 십자가에는 고민을 들어드립니다라고 써 있었습니다.

아마도 전도지를 내밀면 멀리 피해 가는 사람들에게 좀 재미있게 다가가려고 한 것 같습니다.

탑골 공원에서 노인분들에게 이렇게 대화를 시작하더군요.

어르신, 고민 있으시면 제가 들어드릴께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노인분들이 쉽게 말문을 여시더군요.

예수님을 믿으시겠냐는 말에는 손사래를 치는 노인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건강을 위해서 기도해 드리겠다고 하니까 고개들을 숙이고 아멘도 하시더군요.

보수적인 신자들은 전도를 너무 장난으로 한다고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복음을 어떻게든 전하려고 아이디어를 내고 애쓰는 젊은 목사에게 마음으로 뜨거운 응원을 보냈습니다.

솔직히, 예수님을 안 믿으면 지옥에 가는 걸 알면서 내 자식이나 가족을 무심하게 내버려 둘 수 있을까요?

만일 배가 침몰할 것을 알았다면 사람들이 타도록 내버려 두겠습니까?

모든 걸 그렇게 둔 채로 살고 있는 우리 믿음이 괜찮은 건지 모르겠습니다.

젊은 목사에게는 간절함이 있는 것이죠.

오늘 예수님께서 아주 강렬하게 구원으로 사람들을 초대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만 복음 전파를 맡기신 게 아닙니다.

주님이 자신이 복음이셨고 주님 생애가 복음 전파였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이렇게 사실대로 자신을 전하시다 모욕도 당하셨고, 위협도 당하셨고, 죽음으로 몰리실 만큼 증오도 당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감사하게도 다 주님의 초대에 응답을 한 사람들이죠.

오늘 그 복된 결과가 무엇인지 알아보고 더욱 풍성히 누리게 되길 바랍니다.

또 주님의 초대를 거절했던 사람들에게서 믿음의 걸림돌이 무엇인지도 이해하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1. 본문 배경인 이스라엘 명절과 주님이 하신 말씀과의 관련에 대해서입니다.

37,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1) 유대인의 3대 명절은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법으로 정해진 명절이고 모든 유대인 성인 남자들이 예루살렘에 올라와 지켜야 합니다.

그중 본문의 명절은 초막절이라고 2절에 나옵니다.

장막절이라고도 하죠.

구약성경에는 예수님의 대속과 구원을 상징하는 사인들로 가득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한 나라의 역사를 구원의 교과서로 쓰신 것이죠.

이런 내용을 배우고 알아야 믿음이 단단해집니다.

성도님들 중에는 믿어보려고 애쓰는 분들이 많으십니다.

배워서 이해가 되면 믿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믿어집니다.

사실 사람들이 구원받는다는 것이 몸으로 실감나지는 않죠.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명절 속에도 복음을 심어 놓으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유월절은 출애굽하던 밤에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에 바르고 노예에서 해방 된 날입니다.

이거는 누가봐도 예수님의 속죄와 구원이잖아요?

오순절은 첫 보리를 수확하고 드리는 명절이라 맥추절이라고도 합니다.

유월절로부터 오십일이 지나서 지키는 명절입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유월절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고,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셨죠.

그해 첫 보리수확을 오순절에 하듯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구원의 추수가 시작된 것입니다.

초막절은 한 해 마지막 수확을 마치고 지키는 추수감사절 같은 절기입니다.

이것은 구원의 완성과 종말을 상징합니다.

레위기를 보면 초막절에는 집 밖에 초막을 짓고 일주일을 지내야 합니다.

애굽에서 나온 뒤 광야에서 텐트에 거주했던 것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그때와 달리 지금 가나안땅의 풍요를 감사하는 것도 있지만,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 세상도 실제로는 여전히 영적인 애굽땅이잖아요?
우리를 억압하고 괴롭히고 내 마음대로 못하게 매여있는 애굽땅입니다.

이런 세상이 끝나 완전한 하나님의 장막에 거하는 날이 있다는 예표를 주신 것이죠.

그날이 예수님이 오심으로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요한복음114절을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여기서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말은 원어로 장막을 치다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위에 이미 장막을 치고 임마누엘로 함께 하시는 것이죠.

초막절의 의미도 우리에게 다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 나라 이스라엘의 역사를 예수님의 대속과 구원에 맞춰서 진행시키셨다는 게 참 놀랍죠.

그 안에 우리 각자의 구원도 계획하셨던 것입니다.

 

2) 그런데 성경에는 없는 초막절 의식들이 추가되어 예수님 당시에 행해지고 있었습니다.

광야 생활하면 구름기둥, 불기둥, 만나, 반석의 물, 그런 것이 떠오르죠.

그래서 초막절 제사에 제단에 물을 길어서 붓는 의식을 넣었습니다.

광야에서 반석을 쪼개서 물을 주셨던 것처럼 내년 농사를 위해 풍성한 물의 복을 기원하는 것이죠.

또 구약성경에는 종말에 주실 메시야의 은혜를 물로 표현한 곳이 많습니다.

메시야가 오셔서 주실 큰 은혜를 고대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오늘 초막절에 왜 생수에 대해 말하셨는지 아시겠죠.

우리는 생수를 주신다는 말에 생수병 정도가 생각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생수에 대한 느낌은 우리와 다릅니다.

타는듯한 광야에서 물이 없었다면 조상들은 생존하지 못했고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존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생수는 생명수입니다.

또 물이 부족했던 나라에서 예수님의 생수를 마시라는 외침은 귀에 때려 박히는 말씀이었던 것이죠.

예수님은 수많은 사람들이 와글거리는 성전에서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외치셨다는 이 헬라어에서 클락션이라는 말이 유래된 것입니다.

차를 탄 사람이 언제 경적을 울리는지를 생각하면 예수님이 외치셨던 정황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위험에 빠진 것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빵빵 경적을 울리듯이 주님께서 목청을 높여서 외치셨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이 주님의 말씀 그대로 믿으시길 축원드립니다.

 

2. 이스라엘 사람들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은 이 생수가 필요합니다.

1)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목마른 인생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목마름에 대해서 이해를 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이라는 것은 목마른 사람도 있고 목마르지 않은 사람도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목마름이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목마름을 아는 사람이 있고 목마름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목마름을 안다면 주님께로 나오라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누구든 자신의 목마름을 인정하고 주님께로 나오라는 것입니다.

목마름은 육체로 태어난 모든 사람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공허함과 갈증입니다.

바삐 살고, 세상이 재미있는 순간엔 잊었다가 어느 순간 실체를 알 수 없는 텅 빈 구멍이 내 안에 있다는 걸 느끼게 되죠.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 아담이 배우자가 있어야 할 자리를 느꼈듯이, 사람의 본성은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도 느낍니다.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게 목마름입니다.

세상 무엇으로 하나님의 공간을 채울 수 있겠습니까?

채워지지 않으면 목이 마르고 갈증이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만족시킬 것을 찾아서 헤매는 것이죠.

사람에게서 만족을 구하고, 재물로, 성공을 목표로, 세상 쾌락을 좇으며, 등등 그런 것을 쫒으며 목마름을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것으로는 사람의 목마름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며 살다 보면 나도 옛날엔 그랬는데, 어느새 내게 그런 목마름이 더 이상 없다는 걸 알게 되죠.

 

2)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데도 여전히 목마르고 삶의 풍요를 느끼지 못한다는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거짓말을 하셨으리는 없죠.

주님은 목마르지 않다고 하셨지 결핍이 없다고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목마름과 결핍은 다릅니다.

결핍은 부족한 게 있는 것이고 그것이 채워지면 없어집니다.

목마름은 부족할 때는 물론이고 부족한 게 없는데도 갈증이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느끼는 것은 목마름이 아니라 결핍입니다.

결핍은 기도로도 채워지고, 우리도 노력하며 채워가면 됩니다.

다드림교회를 목회하는 김병0목사님은 아내의 건강의 결핍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아내가 셋째 아이를 낳고 집에 돌아와 삼일 만에 뇌경색으로 쓰러집니다.

눈도 뜨지 못하고 의식도 없는 완전 식물인간 상태가 된 거예요.

막 교회를 개척했을 때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게 이해가 되겠습니까?

처음엔 어떻게든 아내가 일어날 것을 믿고 기도로 매달렸습니다.

아내가 해야 할 육아와 살림은 물론 간병에 목회까지 하며 아내를 일으켜 주실 것을 간절히 기대했습니다.

그렇게 아내가 의식도 없이 전신마비로 누워있은 지 이십여 년이 됩니다.

그 사이 아이들은 잘 자라 주었습니다.

김목사님은 이제 아내를 일으켜 달라고 기도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결핍 속에서도 살아가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가운데도 하나님의 돌보심은 있었습니다.

그동안 아내의 치료비가 3억 넘게 들었다고 합니다.

전 재산 천만 원으로 개척한 목사에게 그런 돈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엄청난 비용이 다 후원과 성도들의 연보로 감당이 된 것입니다.

아내의 건강의 결핍은 채워주지 않으셨지만 생활의 결핍은 채워주셨습니다.

김목사님이 쓴 책 중에 이런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아빠, 우린 왜 이렇게 행복하지?’

엄마 목소리 한번 듣지 못하고 자란 막내 딸이 했던 말이래요.

아빠, 우리는 가난한 데 왜 이렇게 행복하지?’

결핍과 목마름의 차이를 목사님의 가정이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목마름이 해결되면 결핍도 이겨냅니다.

전에 김목사님이 책을 낸 인세로 완전히 파산한 성도 가정에 작은 트럭을 한 대 사 주었다고 합니다.

만일 근본적인 목마름이 해결되지 않았다면 그렇게 남의 결핍을 채워줄 수는 없습니다.

내 사정이 나쁘진 않은데도 계속 부족하다 느끼는 것은 근본적인 목마름이 해결되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그렇기에 주님의 생수를 받은 사람들은 어찌 보면 좀 사람이 밍밍해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갈증이 없으니까 크게 바라는 것도, 큰 목적도 없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그 속은 전혀 다릅니다.

매일 평범하게 밥 먹고, 일하고, 산책하고, 가족들과 아웅다웅 사는 데도, 예수님이 늘 끼어 계시기 때문에 삶이 행복감으로 꽉 차 있는 것이죠.

가진 것이 오십 밖에 없다 해도 주님이 주시는 생수가 나머지를 채워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집착하거나 어딘가에 빠지거나 하질 않게 됩니다.

뭔가 욕망이 생기다가도 얼마 안 가면 그 덧없음을 생각하며 내려놓게 되죠.

그래서 세상과 사람과의 거리가 항상 일정한 편이고 대신 하나님과 가깝습니다.

주님의 생수를 받아 삶의 시름이 사라지고 모든 결핍도 이겨내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3. 오늘 예수님이 내게 와서 마시라고 하신 생수의 정체는 성령님이십니다.

39,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목마르지 않는 이 생수는 막연한 어떤 은혜가 아니라 주님과 똑같은 인격의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성령께서 오셔야 우리가 지금까지 나누었던 목마름이 없는 복된 삶이 시작됩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가장 중한 것은 성령을 받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어떻게 오십니까?

39절에서 말씀하셨듯이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주님께서 주십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성경을 통해서 계속 말하여 왔던 구원자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유대인들과 논쟁이 붙었을 때 그들이 예수님께 따집니다.

요한복음 825, 그들이 말하되 네가 누구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구약성경은 시종일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오실 메시야를 말씀하잖아요?

바로 그 분이 예수님이심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과의 논쟁에서 여러 가지로 자신을 설명하십니다.

나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다.

나는 생명을 주는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

우리가 이 말씀을 믿으면, 성령을 주셔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단 예수님은 우리가 주님을 믿는 것을 지식으로만 이해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앞에서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653,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먹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마치 아기가 엄마 젖을 먹어야 살 듯이, 예수님 없이는 우리가 생존이 불가능한 관계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말 주님이 내게 그런 분이신지를 자꾸 인식하고 점검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경건한 정시 기도도 필요하지만 무엇을 하면서도 예수님과 스몰 토크를 자꾸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자들도 예수님과 그런 일상의 대화를 나누었잖아요?

우리가 진실하기만 하다면, 주님은 예를 갖추지 않았다고 우리를 나무라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4. 오늘 예수님의 구원으로의 초대에 대해 사람들의 의견이 나누어졌습니다.

공관복음에서는 주로 예수님의 행적과 핵심적인 설교와 이적들을 중점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반면 요한복음은 그로 인해 유대지도자들과 불붙은 논쟁의 내용을 본문처럼 자세히 기록합니다.

주님은 그런 논쟁을 하시며 실은 이렇게 믿음과 구원의 원리들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예수님 말씀으로 인해서 논쟁이 벌어지죠.

주님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둘로 나뉘어집니다.

40, 이 사람이 참으로 그 선지자라

모세가 하나님이 나와 같은 선지자를 보내실 것인데,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예언했던 그 선지자가 예수님이 맞다는 것이죠.

41,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라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진실되심을 보았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반대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42,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그리스도가 다윗의 씨로 다윗의 동네인 베들레헴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이죠.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갈릴리 지방 나사렛 마을 출신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래서 나사렛예수라고 불리셨죠.

이들의 생각이 맞습니까, 틀립니까?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예수님께서 부모의 고향인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고 기록되어 있죠.

당시 호적령이 내려서 만삭인 마리아가 할 수 없이 본적지까지 먼 길을 떠난 거잖아요?

논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단지 주님이 자랐던 고향만을 알고 태어나신 곳은 몰랐던 것입니다.

우리는 왜 이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으로 예수님을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자기 생각대로 하나님을 판단하려고 합니다.

성경을 읽다가도 잘 이해가 안되면 내가 잘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이 이해가 안된다고 의심부터 하죠.

욥도 그랬잖아요?

자기가 겪는 고통은 부당하다며 하나님과 변론해 보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뭐라고 하십니까?

하나님은 이 광대한 천지창조에 대해 네가 아냐고 물으십니다.

네가 우주의 별자리를 그렇게 묶을 수 있냐고 물으십니다.

그렇잖아요, 왜 별자리들은 누가 별들을 묶어 놓은 둣이 그렇게 운행합니까?

정말 욥기38장에서 41장을 읽어보면 하나님의 엄청나심에 말문이 막힙니다.

욥은 그 말씀을 듣고 자기의 무지한 말을 거두고 회개하겠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못하겠으면 우리도 그걸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아는 게 대체 얼마나 많길래,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판단하고 믿겠다, 못 믿겠다 하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에 걸림돌은 내 작은 뇌에 들어있는 조그만한 경험과 지식입니다.

나보다 예수님이 더 진실하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다 받으시길 축원드립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 주님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매일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못 느낄 때가 많죠.

예수님 말씀대로 생수의 강이 우리 배에서 흘러 나오기 때문입니다.

로 번역한 단어는 깊은 곳이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생수가 깊은 곳에 있기에 끌어 올려야 하는 것이죠.

펌프질을 해서 물을 퍼올릴 때와 비슷합니다.

종일 일하느라 바쁘고, 사람들과 어울려 살다보면 성령이 주시는 생수의 기쁨은 서서히 바닥으로 내려갑니다.

그때 기도와 말씀이 마중물이 되어 다시 성령충만한 상태를 얻을 수가 있는 것이죠.

만일 그렇지 않으면 허전함을 세상이 주는 물로 채우려고 합니다.

세상이 주는 값싼 물은 쉽게 얻어지죠.

그걸로 나를 채우다 보면 힘써서 생수를 길어 올릴 생각이 점점 없어집니다.

그러나 세상이 주는 물은 결국은 더 갈증만을 일으킬 것입니다.

끊임없이 넘겨보는 유튜브 영상들, 게임, TV, 먹고 마실 생각, 단지 세상적인 대인관계, 사실 질리면서도 그걸 끊지 못하죠.

그나마 없으면 허전하니까요.

은혜 받아보면 은혜 받는 게 재일 재미있습니다.

최근 인도 도시에서 환경 문제로 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연간 천 마리가 넘는다고 합니다.

인도는 소를 숭배하지만 돌보지는 않고 방치합니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소들은 사람들이 버린 쓰레기, 비닐과 플라스틱 같은 것을 먹다가 죽는 것입니다.

죽은 소에 위에는 풀이 아니라 되새김질해서 삼킨 비닐쓰레기가 공처럼 단단하게 뭉쳐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세상의 것으로 마음을 채우려는 게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 속에 결국 내게는 독이 될 것들이 가득 차 있지는 않습니까?

성령께서 주시는 매일의 신선한 은혜를 기도와 말씀을 통해서 퍼올려야 합니다.

성경에서 성령충만이 임하신 내용들을 보면 말씀을 들을 때와 기도할 때 뿐입니다.

바쁘고 늘 피곤하지만 은혜 받는 일에 힘쓰시길 권면드립니다.

그 생수의 힘으로 결핍도 이겨내고 매일 활기차고 상쾌하게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