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새롭게 하소서에 사십 세가 안 된 아내를 대장암으로 떠나 보낸 한 집사님이 출현했습니다.
아내는 12살, 9살, 6살, 세 아이의 엄마였습니다.
아이들이 너무 어려서 차마 마지막 모습을 보여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엄마는 영상으로 세 아이들과 작별을 해야 했습니다.
그 영상을 보다 진행자들까지 눈물을 쏟았습니다.
열두 살 난 큰 딸부터 여섯 살 막내 아들에게까지 한 명씩 아이들 이름을 부르며 엄마가 마지막 인사를 합니다.
‘엄마 먼저 가서 천국에서 기다릴꺼니까 우리 나중에 꼭 만날거야, 동생들 잘 돌봐 주면 좋겠어’
‘사랑해 우리 아들, 누나 말 잘 듣고 교회에 잘 다녀’
숨을 몰아쉬며 한마디씩 힘을 줘 말하는 엄마는 오히려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습니다.
강하고 의연하게, 오직 아이들에게 슬픔을 남기지 않기 위해 작별 인사를 마치더군요.
세 아이를 두고 가는 엄마의 담대함에 오히려 가슴이 먹먹해졌지만 그런 모습에서 성도의 영광이 느껴졌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 인생은 참 가혹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마치고 제자들에게 많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앞둔 건 주님이신데 제자들이 초죽음이 된 것 같아 보입니다.
제자들 중엔 바다에서 뼈가 굵은 억센 어부들이 많았잖아요?
오늘밤 제자들의 멘탈의 바닥이 드러납니다.
우리도 강한 척하고 살지만 속으로는 멘탈이 바사삭 부서지는 것 같을 때가 많죠.
예수님은 고별의 담화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오늘 주님의 말씀을 살펴볼 때 우리 믿음에 이런 담대함을 갖게 되길 바랍니다.
1. 본문은 다락방에서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마친 뒤 제자들에게 하신 대화의 일부입니다.
14장부터 16장 전체에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는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믿음과 구원에 대한 진리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겠죠.
본문과도 관련이 있어서 전체 말씀하신 내용을 몇 가지 참고로 하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 무엇을 믿고 있는지 짚어 볼 수가 있는 내용입니다.
1) 예수님의 죽음, 부활, 승천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 당부라면 당연히 이 말씀이 들어가겠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이고 부활하실 것이다, 그리고 임무를 완수하셨으니 본래의 자리로 승천하실 것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16절에서 이런 식으로 말씀하십니다.
16절,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니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한다는 것은 주님이 십자가형을 받고 무덤에 묻히신다는 것이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는 것은 사흘 뒤에 부활하신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제대로 알아듣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이렇게 반응합니다.
17절, 제자 중에서 서로 말하되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냐 하고
예수님이 뭔가 십자가 구원에 대해서 확실히 공개하지 않고 엄폐하신다는 느낌이 좀 들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자들이 더 헷갈렸던 것이죠.
이것은 뒤에서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2) 예수님이 승천하신 뒤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떠나시고 성령이 오시는 게 너희에게 유익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성육신하심으로써 하나님이신 주님의 존재 방식을 우리와 같은 사람 모습으로 결정하셨습니다.
부활하신 몸 그대로 승천하셨기에 지금도 사람 예수님 모습으로 계십니다.
영이신 하나님으로 존재하셨던 것에 비할 때 그것도 또한 스스로를 낮추신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 인간의 죄를 대속하실 인간이 되셨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영원히 우리와 같은 형상으로 지내시겠다는 것이죠.
대신 이 자연세계에서 주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은 제한될 수밖에 없습니다.
몸의 한계가 있으시니까요.
그렇기에 모든 사람들을 효과있게 구원으로 이끌 수 있도록 성령께서 역할을 바꿔서 행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성령에 대해 ‘하나님의 영’, ‘예수의 영’이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만일 ‘나의 영’이라면 나와 똑같아야 할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과 하나님과 똑같은 분이시라는 걸 알 수 있죠.
지금은 우리가 복음서에서 알아가고 있는 그 예수님과 동일하신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3)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해서 십자가로 몰고 가잖아요?
예수님이 대속을 완수하셨다고 해서 세상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세상은 이제 예수님을 믿는 제자들을 미워한다는 것이죠.
‘예수님이 구원하셨는데, 왜 세상이 달라지지 않지? 왜 내게 박해가 오지?’
그렇게 놀라지 말라는 것입니다.
환난을 당해도 너희들은 그 가운데서도 평안을 누릴 것이고, 담대하게 이겨낼 것이라는 것입니다.
4)내 이름으로 기도하면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들을 주님께서 잘 주지시키시려는 둣, 반복해서 설명하시는 게 다락방 강화입니다.
그렇기에 요한사도가 잘 기억했다가 이렇게 복음서에 그대로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이죠.
2. 이 중에서 오늘 말씀의 내용을 세 가지로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그냥 한번 읽어서는 말씀이 쏙 들어오지 않습니다.
1) 앞으로는 비유가 아니라 직접 하나님에 대해 알리시겠다는 것입니다.
25절, 이것을 비유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는 비유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이런 말씀 좀 이해하기가 어렵죠.
왜 지금은 비유로 말씀해 주시고, 때가 되면 사실대로 밝히시냐는 것이죠.
복음서를 보면 재미있는 걸 발견하게 됩니다.
제자들이 하는 말 중 맞는 말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말 중에서 은혜 받으시면 안됩니다.
제자들은 기이할 정도로 엉뚱한 말을 합니다.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내려와 예수님과 대화할 때 베드로가 뭐라고 합니까?
산 위에다 초막 셋을 지을테니 거기에 거하시라고 합니다.
얼마나 엉뚱합니까?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아차, 먼저 집회 장소에다 떡을 두고 왔다’고 두런거립니다.
복음서에서 제자들이 한 말 중 유일하게 옳은 말은 하나인 것 같습니다.
베드로사도가 한 말이죠.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말도 베드로가 생각한 게 아니라 하나님이 이것을 알게 하셨다고 주님이 말씀하시죠.
이미 예수님이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몇 차례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에겐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어차피 살아나실 거면 뭐하러 죽으시지? 그런 것이죠.
이것은 제자들이 유독 둔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나라를 인식한다는 게 자연인들에게는 결코 넘지 못할 높은 장애물이라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에 대한 말씀에서 비유를 많이 사용하셨습니다.
비유의 목적은 사실을 잘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또 사실을 알리시되 지금 당장은 감춰두시는 목적도 있으십니다.
복음서를 읽다보면 분명히 예수님께서 뭔가를 감추시려는 그런 묘한 긴장감을 자주 느낄 수가 있습니다.
지금도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서도 조금 있으면 못 보겠고, 조금 있으면 다시 보겠고.
그런 식으로 설명하셨잖아요?
이런 의문은 구약성경에서부터 계속되고 있다는 생각 해보셨나요?
주님의 동정녀 탄생, 고난, 십자가 대속, 부활, 구원이라는 사건들을 이스라엘 역사 속에 슬쩍 버무려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예를들면, 예수님이 당하시는 고통을 다윗이 고난 중에 부르짖듯이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지금이야 우리가 예수님에 대한 구약성경의 예언들도 쉽게 이해하지만 십자가 이전까지는 정말 알 수가 없었던 것이죠.
왜 그러셨을까요?
여러 가지 뜻이 있지만 우리가 잘 생각하지 않는 중요한 이유도 있습니다.
주님의 대속이 사람에게나 마귀에게 방해받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이 안다고 협조할 일이 아닙니다.
사람이 구원을 환영할 것 같습니까?
그래서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대속의 신비가 감춰져 있었고 사탄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인들이 훤히 알았다면 당연히 사탄도 알았을 것입니다.
사람의 일이라면 사탄이 모르는 게 없기 때문이죠.
사탄도 주님의 십자가가 죄인을 구원한다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습니다.
그렇게 되는 건 사탄의 파멸을 의미합니다.
인질들이 구출되면 납치범은 끝장이죠.
사탄이 대속의 비밀을 알았다면, 가룟유다에게 들어가 예수님을 대제사장들에게 넘겨주게 했겠습니까?
절대로 십자가에서 죽지 못하시게 가로막았겠죠.
빌라도가 십자가형을 내리게 내버려 두었겠습니까?
물론 사탄도 ‘십자가에 뭔가 있나’ 좀 헷갈리기는 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베드로를 통해 십자가의 길을 한번 방해도 해 보았던 것이죠.
우리가 지금 너무나 쉽게 알고 있는 십자가의 대속은 사탄도, 사람도 상상 못한 신비하고도 오묘한 구원 방법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늘 말씀하시죠.
25절, 이것을 비유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는 비유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
주님의 대속이 완성된 뒤로 더 이상 비유로 이르실 필요가 없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이 진리들을 더 정확하게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14장26절,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그렇기에 성령을 받기 전 모든 사람들은 구원의 진리에 대해 눈이 닫혀 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대체 예수님의 십자가가 어떻다는 것인지, 부활이 무엇인지 정말 모릅니다.
아무리 학력이 높고 아이큐가 좋다고 해도 십자가와 부활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대속과 부활은 성령께서 깨닫게 하셔야만 이해의 문이 열립니다.
예수님이 이 대속의 진리를 마지막까지 길게 설명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령께서는 주님의 말씀 안에서만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 말씀을 한마디도 모르는데 성령께서 무엇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그렇기에 성경을 읽고 배우는 게 그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고 40일간 제자들과 함께 계실 때, 그때도 제자들을 가르치셨다고 사도행전은 기록합니다.
모든 구약성경과 주님의 설교의 모든 비유를 다 풀어 주셨겠죠.
구원의 확신을 원하는 성도들은 성경을 읽고 알아가야 합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진 성도들도 성경을 읽고 깨달음을 얻어가는 기쁨을 평생에 지속해야 합니다.
성도들에겐 성경을 깨닫는 것보다 더 영혼에 큰 만족을 주는 것은 없습니다.
2) 제자들에게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는 문을 열어주십니다.
26절, 그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이전엔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셨다는 뜻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제자들은 별로 기도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기도하실 때 데리고 가면 주로 졸았죠.
주님은 내가 너희를 위해서 기도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음 장에서 하나님께 대제사장의 입장으로 기도를 드릴 때 이런 기도를 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들을 내가 보존하고 지키었나이다
예수님이 제자들 지키는 게 당연한 일이지 이렇게 아버지께 보고할 만큼 대단한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아직 성령 받지 않은 제자들의 믿음을 지켜내신 일이 그만큼 어려운 일이라는 뜻입니다.
성도들이 성령 받기 전까지 지금도 예수님은 구원을 위해 중보하십니다.
우리에게 기도의 문을 열어주신 것은 우리 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영혼구원을 위해 중보하게 하시려는 뜻도 포함됩니다.
주님이 하셨으면 우리도 따라야 하는 것이죠.
성장한 성도들의 기도를 가만히 보면 구원받을 사람들을 위한 기도가 절대적으로 많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 누군가 나를 위해서도 그렇게 간절히 중보기도 해 준 것입니다.
파리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딴 탁구 복식조에 신유빈, 전지희, 이은혜선수가 있습니다.
전지희선수와 이은혜선수는 중국에서 귀화한 선수들입니다.
전지희선수는 귀화할 때부터 정상급의 선수였지만 이은혜선수는 그렇지 않았다고 합니다.
과거 탁구 금메달리스트였던 양영자선수라고 아실 것입니다.
이분은 남편과 함께 몽골선교사로 가셨습니다.
몽골에서 탁구를 가르치던 중에 유소년 탁구부에 있던 이은혜선수를 만나게 됩니다.
중국이 한 자녀만 허용하던 때 이은혜선수 부모는 자녀 셋을 낳았습니다.
사회적으로 불이익이 많던터라 이은혜선수가 귀화를 선택합니다.
양선교사의 주선으로 한 목사님 가정에서 이선수를 딸로 입양하게 됩니다.
이미 딸 둘이 있었는데, 큰 언니로 이은혜선수를 입양한 것이죠.
한국에 와서 적응하는 동안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이은혜선수가 공황장애와 우울증으로 힘든 시절을 보냈습니다.
차 안에서 공황 증세가 나타나면 양영자선교사님이 차를 세우고 기도해 주곤 했다고 합니다.
부모가 된 목사님 부부야 말할 것도 없이 딸을 위해서 기도했죠.
그리고 십삼 년 만에 대표선수로 뛰게 된 것입니다.
이번에 경기를 앞두고 세 사람이 함께 기도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죠.
불안해 하는 두 사람을 위해서 이은혜선수가 기도를 해 준 것입니다.
경기 후 인터뷰에서도 이은혜선수는 모든 것이 하나님아버지의 은혜라고 밝히는 걸 보았습니다.
세 명의 어른들의 기도가, 기도하는 이은혜선수를 만든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 특권의 중요한 부분은 하나님나라와 성도들의 구원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성도들이 기도하지 않는 이유 중에는 기도해도 달라지는 게 없다는 생각도 있을 것입니다.
한두 번 기도해서 이뤄지는 일은 거의 없죠.
몇 달, 몇 년을 기도해도 꿈쩍하지 않는 문제들도 많습니다.
엘리야가 비를 주시길 기도했을 때 일곱 번 만에 사람 손만한 조각구름이 바다에서 떠올랐었죠.
우리가 기도하는 문제에 손바닥만한 구름 한 조각이라도 보여주시길 간절히 바라지만 그 조차도 없을 때 하나님이 계신가, 내 기도만 외면하시나, 그런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응답받지 못해도 여전히 기도하는 것은, 손바닥만한 구름 한 조각 같은 우리의 믿음의 증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그래도 기도하러 나오는 우리를 사랑하고 기뻐하신다고 믿습니다.
기도하고 받는 게 공식이라면 거기에 사랑과 신뢰가 설 자리는 없잖아요?
응답이 없어도 기도해야 하고, 다급한 게 없어도 꾸준히 기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떠나실 예수님이 특별히 제자들에게 기도를 선물로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지금까지는 얼굴을 맞대고 주님과 교제했지만 이제는 기도로 주님과 교제해야 한다는 것이죠.
기도로 우리는 예수님의 능력과 생명에 연합되어 살 수 있습니다.
기도는 매일 해야 합니다.
하루 기도를 소홀히 하면 다음날 기도가 힘듭니다.
영은 약화 되고 육은 그만큼 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면 점점 포기하고 육신대로 살아가는 성도가 되는 것이죠.
기도하며 살아야 삶이 잘 정돈되고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해서도 생각이 지혜롭고 명쾌해진다는 것도 기억하고 기도에 힘쓰는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3)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고 하십니다.
33절,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성도들도 세상에서 환난을 당합니다.
성도들만 환난을 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뉴스를 보면 매일 사건 사고죠.
그런데 성도들은 예수님을 위해서도 환난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 우리는 상처 받기도 하고, 크고 작은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주님의 열두 제자들이 그렇게 복음을 위해 살다가 순교까지 했잖아요?
남유럽의 코소보라는 곳에서 오래 선교활동을 하신 선교사님이 계십니다.
이분이 처음으로 가족들과 함께 한국에서 1년의 안식년을 갖게 되었습니다.
코소보를 떠나기 전에 오랜만에 가족들이 소풍을 나갔습니다.
그런데 계곡에서 물놀이를 하던 고등학생 딸이 급류에 휩쓸려 허우적거리는 것을 선교사님이 발견합니다.
워낙 수영을 잘하는 분이라 곧바로 물로 뛰어들었죠.
그런데 바위가 갈라진 틈에 다리가 끼면서 골절이 되는 바람에 꼼짝을 못하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렇게 눈 앞에서 딸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아야만 했습니다.
이런 환난을 당할 때 우리가 어떻게 선하신 하나님이라고 끝까지 주님을 믿겠습니까?
우리에게 인생의 역경을 쉽게 넘어갈 수 있게 해 주신다는 약속은 없습니다.
오히려 제자들에게 너희가 환난을 당할 거라는 걸 미리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환난이 올 것이지만 주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던 제자들은 속으로 싫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 성령을 받은 제자들에 의해서 사실로 증명이 되죠.
복음 전하다 매맞는 것까지 그들이 영광으로 알았잖아요?
베드로는 옥에 갇혀 죽게 되었을 때 어찌나 태평하게 잠들었는지 천사가 와도 모를 지경이었습니다.
천사가 발로 걷어 차서 깨웠잖아요?
오늘 제자들은 무슨 이런 섭섭한 말씀을 하시냐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막상 제자들 모두 그런 역동적인 삶을 기쁘게 살았다는 거예요.
예수님의 말씀대로입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환난이 마치 우리를 이기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의 눈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실패 같지만, 불가능했던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 승리입니다.
바울사도는 주님의 십자가로 우리가 어떤 승리자들이 되는지를 이렇게 말씀하죠.
고후6장9절, 우리는...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말씀을 마칩니다.
성령님의 지도를 구하며 성경 말씀을 꾸준히 읽으십시오.
응답이 없어도 주님이 듣고 계심을 믿고 항상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이 내게 성공과 복을 주시기 때문에 믿는다면 세상도 가질 수 있는 믿음입니다.
내게 환난을 주시는데도 믿는다면 그건 세상이 감당 못할 믿음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그런 믿음으로 함께 자라나길 축복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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