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요한복음18장1절-9절 (마지막 기적) 겟세마네 동산

남수연 2024. 3. 21. 16:44

우리는 사순절 기간 동안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보내신 마지막 1주일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어린 나귀를 타신 예수님은 수많은 사람들의 환성 속에 예루살렘에 들어오셨죠.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시며 두려움에 사로잡힌 제자들에게 많은 위로와 확신을 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 만찬을 드셨던 다락방을 떠나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으로 가십니다.

감람산은 예루살렘이 있는 성전산과 지척에서 마주 보고 있는 산입니다.

저도 감람산에 서서 예루살렘 도시를 바라본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감람산 안에 있는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땀이 피가 되기까지 간절한 기도를 하셨죠.

요한사도는 이미 다른 복음서에 기록된 겟세마네 기도 대신 그 이후의 체포되시고 재판 받으시는 과정을 상세히 기록했습니다.

요한사도 밖에는 그 장면을 본 사람이 없었죠.

 

1. 요한이 전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이 체포되는 것과 십자가형을 주도적으로 이루어가셨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당시 이렇게 생각했다는 것이죠.

그날 잡히시지만 않았어도.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유월절에 사형 집행을 당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명절 전날 누가 사형을 집행하겠습니까?

주님을 예표하던 유월절 양을 잡던 날에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기에 그것을 가능하게 하셨던 것이죠.

그래야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우리가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었다는 구약의 유월절의 의미와 짝을 맞출 수 있는 것이죠.

오늘 예수님이 잡히시는 과정도 주님께서 모든 상황을 움직이십니다.

예수님은 유다가 군사들을 데리고 올 것을 아셨고, 유다가 찾아올 그 겟세마네로 찾아가신 것입니다.

2, 그 곳은 가끔 예수께서 제자들과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 곳을 알더라

주님은 유다가 이미 군사들을 예수님 계신 곳에 데려올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다면 겟세마네로 가지 말고 다른 곳으로 피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알고도 그곳으로 가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측면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구약성경 역사 속에 치밀하게 준비되신 대속을 하나님의 시간표대로 이루신 것입니다.

세상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관심도 없지만, 혹시 안다 해도 기득권 세력의 음모로 억울하게 죽은 한 젊은 종교 지도자의 죽음 정도로 알겠죠.

아마도 푸틴에 의해 살해당했을 나발니 같은 그런 개혁자들이 숱하잖아요?

제자들도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혼란스러워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실망해 고향으로 돌아가던 두 제자가 있었죠.

이 두 제자는 엠마오라는 곳에서 그들을 찾아오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때 한 제자가 하는 말이 당시 예수님에 대한 여론을 잘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못 알아보는 제자들에게 주님이 왜 그렇게 슬퍼보이냐고 물을 때 이렇게 대답하죠.

누가복음2419,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20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1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예수님이 메시야이길 바랬지만 대제사장의 무리가 십자가에 못 박아서 멘붕에 빠졌다는 것이죠.

요한은 주님의 죽으심을 구약의 예언과 계속 연결하며 십자가 사건을 진술합니다.

그 죽으심은 여느 인간의 죽음이 아니라 하늘과 땅과 현재와 영원을 뒤집어 놓는 엄청난 신비임을 우리도 항상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2. 겟세마네 동산으로 유다가 주님을 체포할 사람들을 데리고 나타납니다.

3,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여기서 군대라는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스페이란입니다.

이것은 보통 600명 정도로 구성된 로마의 단위부대를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우리나라 중대나 대대 정도가 되려나요.

12절을 보면 천부장이 왔다고 기록되어 있죠.

이스라엘을 관장하는 로마군대는 평소엔 가이사랴라는 곳에 주둔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월절 명절에는 민란이 자주 일어났기 때문에 치안 유지를 위해서 예루살렘에 와서 머물렀습니다.

대제사장 무리가 빌라도에게 청해 그 군대 일부를 데리고 성전수비대와 함께 예수님을 잡으러 온 것입니다.

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들이 오는 것을 아시고 나오십니다.

잠들어 있던 제자들은 수많은 군인들의 발자국소리와 일렁이는 횃불에 화들짝 놀라 잠이 깨서 허둥댔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주님의 특별한 이적이 있었다고 요한사도가 전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시죠.

군인들이 죄수를 잡으러 온 고압적인 자세로 나사렛 예수다라고 말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내가 그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주님 앞에 섰던 사람들이 다 뒤로 넘어가며 땅에 엎드려졌다는 것입니다.

이런 초자연적인 상황은 성경에 여러 차례 기록되었죠.

구약성경에서는 다윗을 모욕했던 나발이 갑작스러운 두려움에 몸이 굳어서 죽은 일이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그런 경우죠.

하나님의 실존에 압도되어 저항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엎드러진 군사들에게 다시 한번 누구를 찾느냐 물으십니다.

그들이 다시 나사렛예수라고 말합니다.

그 말소리는 사뭇 달라졌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그이니 제자들은 놓아주라고 말씀하십니다.

 

3. 이 시점에서 왜 이런 이적을 주님께서 행하셨을까요?

1) 이 초자연적인 힘에 압도되었기에 살인병기나 다름없던 로마군인들이 제자들이 도망가는 것을 그냥 둔 것입니다.

반란을 진압하는 데 주동자만 체포하는 일은 없잖아요?

예수님이 제자들 살려주라고 하신들 포악한 로마군인들이 본 적도 없는 죄수의 말을 왜 들어주겠습니까?

분위기를 압도한 그 신비한 힘이 없었다면 제자들이 도망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사실에 대해 요한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9,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이 말씀은 저녁식사가 끝나고 예수님이 아버지께 기도하신 내용입니다.

제자들이 나중에 그때 자기들이 붙잡히지 않았던 게 우연이 아니었다는 걸 알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대로 자기들의 목숨을 지켜주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죠.

2)이것은 단지 그날 밤만 제자들을 구원하신 것으로 한정되는 게 아닙니다.

영원한 관점으로 볼 때 예수님이 잡히시고 대신 제자들이 구원을 받았다는 의미로 확장되는 것이죠.

3) 또 주님께서 앞으로도 계속 제자들을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거들 일도 아닌 데, 괜히 붙잡혀 고난을 당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인생의 여러 난관을 만날 때 이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의미 없는 고난을 허락하지도 않으십니다.

다윗이 쓴 시편 56편엔 이런 구절이 있죠.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우리도 아픔과 고난 중에 흘리는 내 눈물을 이만큼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주님이 그렇게 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고난 없이 정말 우리에게 유익한 것을 하나인들 얻을 수 있을까요?

오늘 제자들을 지켜주신 주님은 어떤 시련 중에도 우리를 잃지 않게 하실 것입니다.

3) 예수님의 대속에 있어서 희생 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날 흥분한 베드로가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칼로 베어버리잖아요?

심지어 예수님이 그 귀까지도 만져서 고쳐주십니다.

군사들이 넘어진 것, 귀를 고쳐주신 것, 두 가지가 예수님의 마지막 기적입니다.

주님은 이 이적들을 자신의 권능을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사용하셨습니다.

오늘은 군사들이 예수님께 압도되어 바닥에 엎드려졌지만 포박을 당하신 다음부터 예수님은 그러시지 않습니다.

대제사장의 종들이 얼굴을 때리는 것을 그냥 맞으십니다.

침을 뱉는 것도 그냥 당하십니다.

우리 같으면 감히 내게 이따위 짓을 하냐며 이성을 잃었을 것입니다.

만일 조그만 권력이라도 있다면 다 동원해서 대들었겠죠.

예수님은 주님의 권능을 자신을 증명하시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예수님은 이 밤에 조용한 동산에서 아무도 모르게 붙잡히시고, 새벽에 아무도 모르게 심문을 받으시고 그날 아침 9시에 십자가형을 받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메시야로 따르던 사람들이 소동할 틈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로마군대와 충돌하지 않았고 단 한 명의 희생자도 발생하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진실되게 따르고자 하는 성도들은 그렇게 주님을 닮으려고 하죠.

강점이 있다면 이웃을 위해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나를 굳이 증명하지 않아도 괜찮은 것은 하나님의 자녀 된 정체성이 압도적으로 우리 심중을 받쳐주고 있기 때문이죠.

남의 유익을 위해 살면서도 내 자신을 염려하지 않는 것은 지금도 주님께서 모든 능력을 기꺼이 나를 위해 사용하실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4. 오늘 십자가의 대속은 주님께서 혼자 이루실 일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인류의 죄를 다 속죄하신 다음, 이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는 제자들이 그 십자가를 질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언제, 어디서, 무슨 방법으로 주님을 위해 땀을 흘려야 할지를 정해 주십니다.

단 제자들이 억지로 그 일을 한 게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사도행전과 서신서에서 충분히 보았습니다.

젊은 의사 두 사람이 우리나라 낙도를 찾아다니며 의료봉사를 하는 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좀 큰 섬까지는 연락선을 타고 갑니다.

거기서 다시 작은 통통배를 타고 세찬 바람과 물보라를 맞아가며 한 두시간씩을 또 이동합니다.

낙도에는 주민 몇 사람이 의사가 오는 이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비를 뒤집어 쓰고, 물벼락을 맞아가면서도 의사 두 사람이 그렇게 얼굴이 행복할 수가 없는 걸 보며,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누가 시켜서 그 일을 하겠습니까?

주님의 십자가는 우주에서 홀로 괴롭게 감당할 고난이었지만 우리가 주님의 나라를 위해 받는 고난은 다릅니다.

우리가 하는 수고와 헌신엔 그로 인해 느끼는 기쁨과 보람도 주시잖아요?

 

사순절을 보내며 예수님의 십자가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십니까?

십자가를 지시는 이 마지막 한 주에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극한 상황에서만 드러나는 진실이 있죠.

십자가를 앞두신 주님 마음이 얼마나 끔찍하셨을까요?

그러나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고, 제자들을 다독이시고, 제자들이 고통받지 않게 마지막 기적을 사용하십니다.

마치 암수술을 하러 입원하는 엄마가 자식들 먹을 반찬을 하나씩 준비해 냉장고에 넣어두고 사랑해라고 포스트잇을 붙여 놓는 그 마음이 생각납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시고 끝까지 책임지신다는 것을 마음에 깊이 기억하시길 축복드립니다.

2024년3월20일 사순절 수요기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