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나귀를 타신 예수님 (마태복음21장1절-13절)

남수연 2011. 4. 10. 21:05

마태복음21장1절-13절

 

요즘은 사순절 기간입니다.

이번 주부터 부활주일까지는 예수님의 생애의 마지막 1주일에 있었던 일들을 살펴보며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야로서의 사역을 시작해 삼년 반 동안을 이스라엘의 각 곳을 돌아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주님 사역의 절정인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치 축제처럼 보이는 오늘 본문의 예루살렘 입성은 주님이 죽으로 들어 가시는 길입니다.

이미 제사장과 바리새인들도 주님이 예루살렘에 오시면 죽이려고 흉계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1장 56에 보면 저희가 예수를 찾으며 성전에 서서 서로 말하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저가 명절에 오지 아니하겠느냐 하니 이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신고하여 잡게 하라 명령하였음이러라 라고 당시의 긴박한 상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동안 스스로를 메시야,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라고 선포하셨습니다.

백성들 가운데도 이젠 나사렛의 예수라는 선지자가 나라를 구할 행동을 하리라는 기대감이 팽배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올 때 우리가 읽은 대로 그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흔들며 예수님을 열렬히 환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입성하신 뒤에 낮에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활동하시고 밤이면 베다니로 돌아가서 쉬셨습니다.

이 기간 중에 우리가 지난 주에 살펴보았던 마리아가 향유를 부은 사건이 있었고 제자들과의 최후의 성만찬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죠.

그리고 같은 주 금요일에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뒤인 주일에 부활을 하시게 됩니다.

우리가 본문에서 읽은 대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실 때 일어난 몇 가지 사건들을 통해 영적인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성령님께서 지혜의 영을 부어주셔서 말씀을 전하는 저와 듣는 성도님들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를 깨닫는 시간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먼저 본문에서 비중있게 다룬 나귀와 그 주인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성에 오신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성인 남자들은 매 절기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12살이 되어 예루살렘을 방문했다는 기록이 누가복음에 나오고 메시야로서의 행보를 시작한 30살부터 세 차례에 걸쳐 예루살렘 성을 방문하신 것이 요한복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중 뭐를 타고 다니셨다는 기록은 성경에 없습니다.

먼 길을 주로 걸어 다니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께는 나귀 같은 값나가는 재산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특별히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십니다.

그런데 2절에 보니 맞은 편 마을로 가서 집 앞에 매여 있는 나귀를 그냥 풀러서 끌고 오라며 제자들을 보내십니다.

영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죠?

서민들의 귀중한 재산인 나귀를 두 마리나 무조건 끌고 오라는 것은 누가 봐도 강탈입니다.

진짜 경우 없는 명령을 내리신 것입니다.

이런 비슷한 황당한 명령을 하신 적이 또 있으셨죠.

금요일 밤 최후의 성만찬의 장소를 어디로 하면 좋으냐고 묻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마을로 들어가 물 한 동이를 이고 가는 사람을 만나 주님이 식사할 장소가 어디냐 물으라, 그러면 모든 식탁이 차려진 집으로 안내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이 갸우뚱 해서 나갑니다.

그런데 모든 일이 말씀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뭔가 석연찮은 이 묘한 두 사건은 제 삼자들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과 당사자만 아는 이야기란 것이죠.

유월절 명절을 아무 연고 없는 예루살렘에서 보내실 주님을 위해 상을 차리는 한 사람을 주님께서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지금도 주님을 위해 우리가 무언가를 하고 싶고 드리고 싶은 감사의 마음을 주님이 헤아리십니다.

오늘 나귀의 임자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오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분께 나귀가 필요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메시야의 출현을 기다리는 경건한 유대인이라면 스가랴의 예언을 알고 있었습니다.

본문5절은 500년전 스가랴 선지자가 한 예언서에 나온 내용입니다.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 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메시야가 어린 나귀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것쯤은 다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이 나귀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누가 귀중한 재산을 이렇게 보관하겠습니까?

제자들이 와서 예수님이 필요하다고 했을 때 그는 자신의 예측이 맞았음을 알고 크게 기뻐하며 나귀를 내어 드린 것으로 믿습니다.

나귀 임자가 그 예언을 몰랐다면 또 어떻습니까?

그는 자기의 전 재산일지도 모르는 귀한 나귀를 즉시 주님을 위해 드렸지 않습니까?

주님이 그의 믿음과 드리려는 마음을 인정하셨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꺼이 사용하신다는 것이 은혜요 축복인 줄 믿습니다.

지금도 많은 주의 자녀들이 주님의 필요를 헤아리며 기쁨으로 기꺼이 헌신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봅니다.

주님이 나귀 주인의 마음을 알고 계셨듯이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드렸던 작은 헌신도 주님이 반드시 기억하시고 기뻐하신 줄 믿습니다.

그런데 본문2절에 보면 주님이 나귀와 나귀 새끼를 풀어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날 주님이 타신 것은 나귀의 새끼라고 같은 사건이 마가복음과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에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타지도 않을 어미 나귀까지 데려오라고 말씀 하신 걸까요?

누가복음19장 30절을 보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새끼 라고 기록합니다.

말하자면 주님이 쓰실 나귀가 아직 어려서 어미 품을 떠나지 못했다는 것이죠.

만일 어린 나귀만을 끌고 오면 새끼나 어미나 얼마나 놀라고 슬퍼하겠습니까?

자식에 대한 사랑은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한 어미 개가 보호소의 벽을 향해 뒤돌아 앉아 있는 사진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이유는 보호소로 올 때 데리고 있던 새끼 5마리하고 격리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어미 개가 얼마나 새끼들 걱정에 마음이 고통스러웠으면 일주일을 그렇게 식음을 전폐하고 벽을 향해 앉아 있었을까 생각하니 측은했습니다.

개의 뒷 모습도 참 많은 걸 말해주는 걸 느꼈습니다.

지난 구제역 때도 동물들의 모정 때문에 수의사들이 눈물을 많이 흘렸다고 들었습니다.

수의사가 근육이완제 주사를 놓으려하자 한 어미소가 새끼 송아지 앞을 딱 막아서서는 꼼짝도 안하고 지키고 서있더라는 겁니다.

동물의 모정 또한 사람 못지않습니다.

나귀의 모정을 만드신 주님께서 오늘 그 어미의 마음을 어떻게 헤아리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사람에게야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지만 말 못하는 짐승에게 어떻게 이 상황을 이해시키겠습니까?

주님은 지금 잃은 자녀를 찾으러 가시는 길입니다.

새끼 잃은 어미의 아픈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십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인류를 구원 할 메시야를 이렇게 예언한 바 있습니다.

40장 11절에 그는 목자같이 양 무리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 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이런 마음을 품은 인간이 인류 역사상 태어난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 이외에 그 어느 인간도 이 예언의 주인공이 될 수는 없습니다.

자녀들을 찾기 위한 애끓는 창조주 아버지의 마음이시기에 하찮은 동물의 자식 사랑에도 주님은 마음을 쓰시는 것입니다.

라라의 테마라는 배경음악이 참 아름답던 닥터 지바고란 영화가 있었습니다.

영화 마지막 부분에 지바고의 딸 타냐를 찾은 장군이 묻습니다.

넌 왜 아버지와 헤어지게 됐니?

타냐는 뜻밖에 질문에 당혹스런 표정을 지으며 대답합니다.

그때는 전쟁 중이었습니다. 거리는 온통 불바다였고 아버지가 저를 보호해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장군이 타냐에게 다시 묻습니다.

아버지와 헤어진 진짜 이유가 무엇이냐?

타냐는 가슴 속에 묻어 둔 말을 꺼냅니다.

사실은... 아버지가 제 손을 놓아버렸어요.

장군이 말합니다.

그랬었구나. 그 사람은 네 아버지가 아니란다. 아버지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식의 손을 놓지 않는 법이지. 네 친아버지는 닥터 지바고란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손을 놓치 않으실 줄 믿습니다.

우리가 전쟁터와 다름없는 고통스런 삶을 헤쳐갈 때 우리 손을 꼭 붙들고 함께 가시는 친 아버지인 줄 믿습니다.

어린 자녀들이 아프고 피곤할 때 아빠 품에 안기듯이 우리의 삶에 좌절과 슬픔이 있을 때 마다 하나님 아버지 품으로 달려 나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아멘.

 

두번째로 주님은 왜 예루살렘 입성에 어린 나귀를 선택하신 걸까요?

그것은 선지자의 예언을 이루기 위해서라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주님은 아담의 범죄 이후 즉시 대속의 죽음을 결정하고 준비하셨습니다.

주님은 수 천년의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수 없이 예언되고 말씀하여 온 바로 그 메시야이십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메시야가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오르시는 모습을 성령의 감동으로 바라보고 5백년 전에 이것을 기록한 것입니다.

위풍 당당한 말도 있고 왕에게 어울리는 멋진 병거도 있는 데 왜 하필 나귀입니까?

그것은 예언자의 말대로 예루살렘에 강림할 너의 왕은 겸손한 사랑의 왕이기 때문입니다.

환호하는 사람들의 기대처럼 로마제국의 압제를 대항해 무력과 전쟁으로 나라를 되찾을 왕이 아니라는 것이죠.

스가랴 선지자는 9장10절에 또 이렇게 예언합니다.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하나님이 이 땅에서 전쟁을 위한 말이나 권력을 상징하는 병거를 끊으시고 화평의 구원자를 보내시겠다는 것입니다.

다윗왕의 뒤를 이어 솔로몬이 왕 위에 오를 때도 말이 아닌 노새를 탔던 것이 열왕기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반면에 반역을 일으켰던 이복 형제 아도니아는 말과 병거를 예비했던 포악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권력과 힘에 의해 세워지지 않습니다.

다윗은 성전을 건축하고 싶었으나 전쟁을 통해 많은 피를 흘린 왕이라 아들에게 성전 건축을 위임합니다.

솔로몬은 전쟁을 하지 않은 평화의 왕이었습니다.

주님은 힘과 권력이 아닌 사랑으로 온 세계를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제자들도 단지 예수님의 사랑만으로 삼백년 만에 로마제국을 정복했습니다.

무력으로 일어났던 십자군 전쟁은 참담한 실패와 부작용을 낫았음을 역사를 통해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지금도 주님의 나라는 십자가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가고 계십니다.

우리에게도 주님의 사랑으로만이 영혼을 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본문에서 보다시피 셀 수없는 무리들이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와 고대하던 메시야가 혹시 주님이 아닐까 열광합니다.

9절에 보면 그 당시 얼마나 군중들이 환호하였는지 뜨거운 분위기가 느껴지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하더라

그리고 자기 겉 옷을 벗어 길에 깔고 나뭇가지를 꺾어 길을 장식하고 야단났습니다.

그러나 성 안으로 들어오시는 예수님은 한 번도 사람을 태워보지 않은 어린 나귀를 타시고 평화로운 모습으로 나타나십니다.

주님은 군중들의 열띤 분위기에 흥분하는 모습도 없으십니다.

저들의 환호가 이 땅에서 자신의 안위와 평화를 바랄 뿐임을 아시면서도 기꺼이 자신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예수님은 지금 환호하는 사람들이 십자가에 오르신 주님을 외면하고 등질 것을 아셨습니다.

때때로 우리의 마음에 있는 주님에 대한 뜨거운 관심과 열정도 아시지만 잠시 뒤 세상을 향해 얼굴을 돌리는 우리의 약함도 아십니다.

주님의 사랑은 우리의 행동 하나 하나에 따라 변하지 않으십니다.

어린 나귀를 타고 겸손하게 우리 마음에 임하시는 주님을 마음을 활짝 열어 맞이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오늘 주님을 태운 어린 나귀는 주님과 함께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했습니다.

나귀는 율법에 분류로 볼 때 부정한 동물임을 아십니까?

그래서 출애굽기34장1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모든 첫 태생은 다 내 것이며 네 가축의 모든 처음 난 수컷인 소와 양도 다 그러하며 나귀의 첫 새끼는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이스라엘의 가축의 첫 새끼는 하나님께 재물로 바치게 되어 있습니다.

이유는 우리가 알듯이 출애굽 당시 애굽의 장자와 가축의 첫 새끼가 모두 죽임을 당했지만 유월절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에 바른 이스라엘의 장자와 가축은 죽지 않았죠.

유월절 양이 대신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기념하고 기억하라고 하나님은 가축의 첫 새끼를 제물로 바치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나귀는 부정한 짐승이기에 성전에 제물로 바칠 수 없어 어린 양으로 바꿔서 바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주님을 태운 나귀가 살기 위해 어린 양이 죽어야 했습니다.

나귀가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에 입성 할 수 있는 것은 어린 양이 대신 죽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을 태우고 또각 또각 걸어가는 어린 나귀는 주님의 피로 죄를 씻음 받고 주님을 왕으로 모시고 천국의 새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우리의 모습인 줄 믿습니다.

아직 어린 나귀가 주님을 태우고 걸을 때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그러나 누가 나귀를 지으신 주님만큼 나귀를 편안하게 다룰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어린 나귀를 달래고 엉덩이를 두드리시며 나귀를 인도하셨습니다.

나귀의 운명은 평생 무거운 짐을 등에 지고 사는 것입니다.

힘이 센 나귀는 자기 몸무게의 두 배를 짊어집니다.

죽기 전에는 그 짐을 내려놓을 수 없는 것이 나귀의 인생입니다.

어쩜 우리 인생과 그리 닮았는지 모릅니다.

감당할 수 없는 고생의 짐과 죄의 짐을 무겁게 지고 걸어가야 하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시편 68장 19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우리의 곤고한 인생의 짐을 주님 앞에 가져갈 때 주님이 가뿐하게 짐을 부리시는 줄 믿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세상 짐을 내려놓고 주님의 멍에를 매고 겸손하게 주님을 따르는 성도님들 되시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아멘.

 

그럼 주님이 걷지 않고 나귀를 타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 주님이 평소처럼 걷지 않고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신 것은 왕의 신분으로 자신의 영토에 입성하심을 뜻합니다.

세상 임금을 심판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할 왕으로 입성하신 것이죠.

요한복음16장 11절에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의 권세 잡은 악의 세력을 말할 때 세상 임금이라고 하신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 세상나라는 사탄이 임금이 되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5장19절에 보면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라고 말하며

요한일서 3장 8절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 하려 하심이니라 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 임금을 멸하고 나라와 백성을 되찾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의 왕 예수님이 들어오셔야만 합니다.

마가복음3장27절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강탈하지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인간의 마음을 이미 지배하고 있는 마귀를 결박하지 않고는 그의 세력에 짓눌린 인간을 구해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왕의 자격으로 이 땅에 오셔서 이 세상 왕 마귀를 심판하고 우리를 구해주신 것입니다.

인간이 제 아무리 자기가 잘나고 똑똑해서 훌륭하게 자기 인생을 꾸려나갈 것 같지만 천만에 말씀입니다.

사탄과 악한 영들은 얼마나 교묘히 사람을 미혹하여 자기의 종이 되게 하는 지 모릅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에게도 악한 영은 시험과 공격을 그치지 않습니다.

할 수 만 있으면 택한 자라도 미혹하려 한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조0기 목사님이 수많은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어 쫒고 얼마나 성령의 권능이 충만한 믿음의 종입니까?

그런데 그에게도 악한 영이 침입해온다고 합니다.

한번은 조목사님이 해외 부흥집회에서 복음을 증거하고 호텔에 들어와서 주무시려는 데 갑자기 불행하단 생각이 들고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부흥회 잘 인도하고 호텔에 들어왔는데 마음이 우울해지고 자꾸 마음 속에 어떤 음성이 들리는 것입니다.

죽어라 ! 뭐한다고 이렇게 돌아다니며 야단이냐! 죽어라 !

그러면서 걷잡을 수 없이 우울한 마음이 드는겁니다.

그런데 또 다른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귀신을 쫒아내라. 귀신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지마라.

그래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명하노니 귀신아 나와라!  그리고 난 다음 혼비백산 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조 목사님 속에서 굉장히 큰 소리를 지르며 귀신이 나가더라는겁니다.

남들한테서 귀신이 쫒겨가는 걸 수도 없이 보았는 데 그때 처음으로 자기에게서 귀신이 나오는 것을 체험했다고 합니다.

목사님은 하나님 종으로 온 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자기에게는 귀신이 들어오지 않을 줄 알았답니다.

그런데 목사님에게도 귀신이 와서 억압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고 심령이 눌릴 때 마다 귀신을 쫒아낸다고 합니다.

신기한 건 들어올 땐 언제 들어온지 모르게 슬그머니 들어 온 귀신이 나갈 때는 꼭 소리를 지르며 나간다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영적인 세계를 무시하고 살아가려 짐짓 애를 쓰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사람들은 다 압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을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지만 이미 자신의 영혼이 이들에게 지배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어둠의 세력에도 두려워하고 염려할 것 없습니다.

주님이 이미 승리하셨고 강한 자로 우리 마음에 오셨기에 모든 악한 영이 결코 우리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다만 우리의 마음을 미혹하려 하는 마귀를 대적하면 됩니다.

야고보서 4장 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 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고 하신 말씀대로 주님의 이름으로 대적하십시오.

우리 마음이 이유 없이 눌리고 우울하고 부정적인 생각과 근심에 사로잡힐 때 주님의 이름으로 쫒으십시오.

우리는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마귀의 생각이 아닌 주님의 뜻에 순종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뒤 성전에 들어가서 거룩한 성전을 더럽히는 난잡한 상행위를 뒤엎고 정결케 하십니다.

유대인들은 명절인 절기마다 성전에 와서 제물을 드렸습니다.

멀리서 오는 사람들이 제물인 양이나 소를 끌고 오기 힘들기에 자연히 돈으로 제물을 팔고 사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파는 사람이나 사는 사람이나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본 뜻은 잃어버리고 형식적인 종교행위가 되어 버렸습니다.

또 이 모든 상권에 제사장들이 관여하여 부당한 이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흠이 없는 제물을 드려야 하는 율법을 무시하고 병든 것이나 결함 있는 값싼 동물들을 판매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멸시했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예배의 자리까지 침투한 사탄의 세력을 몰아내시고 하나님과 사람과의 온전한 예배를 회복시키십니다.

주님이 우리 마음에 오시면 우리 속에 온갖 부패하고 더러운 일들을 뒤엎으시고 정결하게 하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택한 백성들을 만나는 거룩한 집이 성전입니다.

주님의 전은 기도로 하나님과 만나고 교제하는 곳입니다.

예배의 자리를 오염시키고 변질시키는 것이 사탄의 계략입니다.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섬겨야할 예배의 자리에 다른 무언가를 올려놓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예배해야 하는 우리 마음의 성전에 슬그머니 들어오는 부정한 생각들과 불신들을 정결케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우리의 죄와 연약함을 주님께 고백하면 주님의 보혈로 씻으시고 하나님 아버지와의 완벽한 예배와 교제를 회복시키시는 줄 믿습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주님은 왕으로서 마땅히 타고 오실 병거와 말이 아닌 어린 나귀를 타고 우리의 심령 안에 겸손하게 오셨습니다.

죄와 사망의 무거운 짐을 벗을 수 없는 우리의 인생에 오셔서 무거운 멍에를 벗기시고 우리의 짐을 대신 져 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실 때는 심판의 하나님으로 오십니다.

계시록19장11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주님은 그때 겸손하게 어린 나귀를 타고 오지 않으십니다.

전능하신 심판의 주로 임하시는 주님은 백마를 타고 오셔서 악을 심판하고 만국을 다스리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인생에 왕 되신 주님을 모시고 세 예루살렘 하늘의 빛나는 도성을 향해 승리하며 나가는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