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어스름한 새벽의 절망감에서 시작됩니다.
우리에게도 전 날에 있었던 믿을 수 없는 사건 속에 울며 잠들었다 눈을 뜬 아침이 있었습니다.
밤새 뒤척여 붉은 눈으로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세상이 아무 의미 없고 모든 의욕이 상실 된 텅 빈 아침을 한번 쯤은 맛보셨을 것입니다.
날은 여전히 밝았으나 어제와 영 다른 낯선 아침에 허무감이 밀려옵니다.
오늘 막달라 마리아와 여인들이 그런 아침을 맞이했습니다.
그렇게 좋으셨던 예수님을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게 믿을 수 없었습니다.
이젠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도 없는 데 따를 주님은 이 세상에 없으니 그의 마음이 갈피를 잡지 못했을테지요.
그러나 마리아는 이른 새벽 발길을 주님께로 향합니다.
때로 우리가 낙심하고 믿음이 쇠약해지면 옛날로 다시 돌아갈 수도 없고 믿음의 확신은 서지 않고 망연자실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인생의 고통으로 인해 낙심하고 믿음이 바닥나는 것 같더라도 결국 다시 하나님을 향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를 붙드시는 주님의 축복인 줄 믿습니다. 아멘.
금요일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주님은 급히 무덤에 안치되었습니다.
다음 날인 토요일은 유대인의 안식일이었습니다.
여인들은 안식일을 절망과 슬픔 가운데서 보냈을 것입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그들이 주님께 바르기 위해 향품을 준비했다고 기록합니다.
아마 안식일에 시신을 만지는 것을 부정하게 여겼던 율법의 전통 때문에 토요일에 무덤에 가지 않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안식후 첫날인 주일 아침, 여인들은 새벽 일찍 주님의 무덤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나러 가는 그들 앞엔 장애물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경비병이 지키고 있는 무덤에 가까이 가는 것만으로도 죽음을 각오하는 일이었겠죠.
두려움에 사로잡힌 제자들이 무덤 곁에 얼씬도 않았던 걸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무덤은 무거운 돌로 닫쳐 있었습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무덤 문을 어떻게 열지를 걱정했다고 기록합니다.
당시 유대인의 묘는 땅을 아래로 파는 것이 아니라 땅굴처럼 옆으로 파고 들어가 시신을 안치하고 무거운 돌로 입구를 막아놓게 되어 있습니다.
부자들의 묘는 도굴을 염려해서 2톤 정도 되는 무거운 돌로 묘를 막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갇히셨던 묘도 부자 공회원이던 아리마대 요셉이 준비한 무덤임을 생각할 때 상당히 무겁고 큰 돌로 막아두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삶을 살려할 때도 우리 앞에 이런 장애가 있는 것을 매일 발견합니다.
마치 주님이 무덤에 누워 계신 것 같이 아무 기척이 없으셔 낙심하게 됩니다.
엄한 파숫군처럼 우리의 믿음을 훼방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걱정하고 염려하는 나의 옛 성품이 믿음을 방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보니 여인들의 염려는 모두 다 기우였습니다.
2절에 보니 그 때 큰 지진이 나며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순식간에 돌을 굴려내 무덤이 훤히 열렸습니다.
4절에는 무덤을 지키던 파숫군들은 놀라 죽은 사람처럼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천사가 내려와 돌 문을 활짝 열어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며 누우셨던 빈 무덤을 가리킵니다.
마리아는 두려움 반 기쁨 반 가슴이 벅차서 이 부활의 소식을 전하러 뛰어갑니다.
그 때 부활하신 주님이 그 친근한 모습으로 앞을 막아 서시며 마리아야라고 부르십니다.
주님을 다시 만난 마리아의 기쁨과 감격을 말로 표현할 수 없어 다만 그가 주님의 발을 붙잡고 경배했다고 본문은 기록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절망을 순식간에 소망으로 바꾸신 줄 믿습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우리 인생에서 온전히 만났다면 인생의 장애도 절망도 반드시 해결 할 방법을 주시는 줄 믿습니다.
오늘 우리가 부활절을 맞아 주님의 부활의 사건을 자세하게 다시 상고하는 것은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과 능력이 다시 충만하기를 원함입니다.
나누는 말씀을 통해 부활의 기쁨과 능력이 우리 안에 다시 풍성히 임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첫 번째로 나누고 싶은 것은 주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란 것입니다.
지난 2천년 동안 예수님의 부활은 그 진위를 놓고 여전히 공방 중에 있습니다.
지난 주 십자가에서 참혹하게 죽으셨던 그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서 걸어나오신 것을 믿으십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사실입니다.
2천년 기독교의 역사가 바로 그 증거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부활은 기독교의 가장 큰 걸림이 되는 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종교가 현실에서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억측을 앞세워 포교를 하려 하겠습니까?
어느 누가 십자가에서 죽은 교주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났다는 터무니 없는 교리로 신도를 모으려 하겠습니까?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신화도 아니고 버젓이 역사와 문화가 숨 쉬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이 말도 안되는 사실을 매를 맞고 죽어 가면서까지 주장했다는 것이 부활의 진실을 말해준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은 현장에서 십자가와 부활을 전하는 어려움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린도전서1장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다.
사도행전17장 32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였다고 합니다.
듣는 사람들도 가당치 않은 이 증언에 대해 어이없고 곤혹스러워 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허탄해 보이는 사실을 증거한 기독교가 2천년 동안 세계의 1/3인구에게 믿어지게 된 것은 부활이 진실이라는 명백한 증거인 것입니다.
또 다른 증거는 사라진 주님의 시신입니다.
예수님이 운명하신 후 산헤드린 공회원인 아리마대 요셉이 당돌하게 본디오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요구해 무덤에 모십니다.
그 때 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무덤에 군사를 배치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이유는 마태복음 27장 63에 기록되었습니다.
빌라도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
라고 말합니다.
빌라도는 너희에게 성전 경비병이 있으니 알아서 굳게 지키라고 말합니다.
설마 제자들이 그들을 상대로 예수님의 시신을 꺼내올 수 있으리라 생각하진 않으시겠죠?
유대인이 무서워 예수님 십자가와 무덤 주변에 얼씬도 못했던 그들입니다.
오늘 본문 4절에 보니 경비병들이 큰 지진이 나고 돌이 굴러 떨어지는 것을 보고 무서워 떨며 죽은 자 처럼 되었다고 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만 지켜야 할 예수님의 시체가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그들은 문책을 두려워하며 황급히 대제사장에게 가서 이 사실을 전합니다.
대제사장은 장로들을 모아 긴급회의를 소집하고 경비병들에게 돈을 쥐어 주며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훔쳐갔다고 소문을 내라고 사태를 입막음합니다.
그게 사실일 수도 있지 않냐고 사람들은 말할지 모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찌 어찌해서 시신을 훔쳐갔다면 제사장들이 그냥 두었겠습니까?
자기들 말 대로 백성들에게 부활했다 전해지면 그 파장이 죽기 전 보다 더 클텐데요.
잡아다 고문이라도 해서 주님이 시신을 찾았겠지요.
성경 어느 곳에도 그들이 제자들을 찾아 심문했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그들도 경비병의 말을 통해 뭔가 초자연적인 일이 일어나 주님의 시신이 없어졌다는 것을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래도 제자들이 주님의 시신을 유기했다고 믿고 싶어 합니다.
어떻게든 시신을 숨긴 후 제자들이 있지도 않은 부활을 날조했다는 것이죠.
그 분들은 성경을 좀 읽으셔야 합니다.
사복음서에 4명의 복음서 기록자들이 쓴 부활의 내용을 보면 그냥 눈에 확 들어오는 공통 된 부분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마리아가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자 제자들이 한결 같이 주님의 부활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분명 사흘 뒤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셨었는 데 어쩜 저렇게 그럴 리가 없다고 확신하는 지 신기할 정도입니다.
오죽하면 주님이 직접 그들에게 모습을 보이셨을 때 믿음이 없다고 책망하셨겠어요.
그런데 그런 그들이 주님이 부활하셨다고 속이려고 시신을 훔쳐갔다는 게 앞 뒤가 맞는 일입니까?
제자들이 시체를 숨겨두었다면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하다 모두 순교한 것은 또 어떻게 해석하겠습니까?
그들은 우리가 바로 부활의 증인이다 말하며 죽었습니다.
인간이 그렇게 날조하고 꾸민 일을 위해 개죽음 당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지요.
제자들은 분명 십자가 위에서 처절하게 죽으신 주님이 영광의 몸으로 부활하신 것을 보았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시신은 이 땅 어디에도 없습니다.
살아나셔서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목격했다고 성경은 전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베드로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다고 증언합니다.
주님의 빈 무덤이야말로 부활의 증거입니다.
초대 교회가 예수님의 무덤을 특별히 신성하게 다루었다는 내용도 전혀 없습니다.
살아계신 분에게 무덤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더 많은 정황과 고증과 결과들을 들어가며 주님의 부활을 증거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활의 주님을 믿게 된 것은 사실 이런 것들을 알아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이런 것 다 몰라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보증이 되는 것인 줄 믿습니다.
둘 째로 주님의 부활은 곧 우리도 부활할 것의 증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성경의 예언 된 대로 부활하셨으니 우리도 말씀대로 확실히 부활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이 세상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은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죽고 모든 생이 끝난 게 아닙니다.
죽음 이후에 더 실제적인 영원한 삶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보여주신 주님의 말씀은 한 치 거짓없이 반드시 이루어질 사실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 말씀합니다.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은 잠시요 영원한 본향이 있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주님이 부활하셨듯이 우리도 부활할 것을 믿기에 사망에 매여 죄의 종노릇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만이 죽음의 두려움을 뛰어넘는 능력을 갖게 되는 것 입니다.
몇 년 전에 뉴욕에 살던 한 코미디언이 죽기 전에 이런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내가 죽으면 내 시체를 해부실습용으로 기증하겠소. 특별히 하버드 대학으로 보내주길 바라오.
이것이 부모님의 소원을 들어드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오.
부모님의 평생 소원은 내가 하버드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었는데,
내가 하버드에 들어가는 방법은 이 길밖에 없소."
죽어가는 순간에도 코미디언으로서 최선을 다한 이 사람은 그러나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죽음은 역시 고통스럽다"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불신자들에게 죽음은 결코 웃을 수 있는 사건이 아닙니다.
한편 유명한 토크 쇼의 진행자 자니 카슨은 나중에 묘비명에 어떤 글을 남길 것인가에 대한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잠시 후에 돌아오겠습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다 생각하고 사는 인생과 죽은 후에 부활이 있다는 걸 아는 인생은 그 결말이 다릅니다.
한 때 아이젠 하워의 개인 담당의사였던 모리스 롤링스박사가 쓴 죽음의 문 너머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심장혈관 질환 전문의며 응급소생술의 국제적 권위자였으며 자가용비행기를 가지고 호화저택에 사는 부자였습니다.
그는 모든 종교는 속임수이고 죽음은 모든 고통의 끝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1977년 그의 삶을 뒤바꾸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는 찰리라는 한 우체부의 죽음에 직면했는 데 의식을 잃어가던 그가 공포에 일그러진 괴상한 얼굴로 나는 지옥에 있다라고 외치는 무서운 모습을 목격 합니다.
우체부는 잠깐 의식이 돌아올 때 마다 의사의 손을 붙잡고 자기를 위해 기도해달라 애원했습니다.
얼떨결에 그를 위해 기도를 하게 되었고 환자는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다음날 침대에 앉아 열심히 성경을 읽고 있는 우체부를 바라보며 롤링스는 죽음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죽음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고 죽음에 대한 경험에 일정한 공통점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모든 종교의 경전을 연구하며 죽음 그 이후에 대해 분석했으나 단 한 책만이 죽었다 살아난 그의 환자들의 경험과 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성경이었습니다.
연구 결과 그는 기독교가 유일한 참된 종교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고 죽음이후의 삶을 믿는 독실한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죽어가는 사람들은 죽는 순간 별안간 통증에서 해방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육체에서 이탈 해 두둥실 떠돌며 잠시 방안에서 머물다가 그 다음은 새로운 차원으로 옮겨간다는 것이 공통 된 보고입니다.
어떤 환자는 알 수 없는 흑암의 존재들에게 끌려가는 무서운 경험을 호소 합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빛의 천사 또는 사랑이 넘치는 존재에게 이끌려 황금빌딩과 수정같이 맑은 도로, 아름다운 동산과 같은 곳을 방문하는 경험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들 모두는 거룩한 빛의 존재자 앞에 섰다는 것입니다.
대 부흥사 무디가 죽을 때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1899년 그의 죽음이 임박했습니다.
그의 아들 윌은 복도 건너편 아버지의 방에서 무디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대지가 물러 간다 내 눈앞에 하늘이 열려 있다’
그 때 윌은 아버지의 방으로 달려갔습니다.
무디는 말하기를 『이것은 꿈이 아니다. 윌, 정말 아름답다. 정말 황홀하구나! 만일 이것이 죽음이라면 무엇이 두려울 것이 있겠느냐! 하나님이 나를 부르고 있다. 나는 가야만 한다.』 그리고 나서 무디는 의식을 잃었습니다.
주치의의 구명 노력으로 다시 살아난 그는 자기가 이 세상 바깥에 갔다 왔노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천국의 문 앞에 갔는데 그곳은 말할 수 없을 만큼 멋지고 아름다운 곳이며 자기의 죽은 아이들도 만났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한 후 "무엇으로도 나를 더 이상 잡아둘 수 없다.
마차가 방안에 와 있다"고 말하며 밝은 천국으로의 기대에 안겨서 숨졌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에게 영원한 내세의 소망과 완전한 부활을 약속해 주신 줄 믿습니다.
우리가 천국과 부활의 소망을 자주 묵상할 수록 이 땅에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이 우리를 짓누르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주님께서 예비하신 아름다운 본향을 견고하게 소망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부활하셨습니까?
주님의 부활의 의미가 무엇이기에 어쩌면 기독교의 아킬레스건이라 할 수 있는 부활 사건이 꼭 필요했을까요?
십자가에 죽으셔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면 충분 하신 게 아닌가요?
주님의 부활은 주님의 사역과 우리 구원의 완성이십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사건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사건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15장17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라고 말씀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죽게 되어있고 그것은 죄의 댓가입니다.
그 말씀대로라면 인간이 죽는 다는 것은 그가 선한 삶을 살아 의인인줄 알았는 데 알고보니 그도 역시 죄인이란 증거인 셈이죠.
로마서6장23 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류가 죽는 것은 그가 죄인이라는 피할 수 없는 증거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반대로 죄가 없는 사람에게는 결코 죽음이 지배할 수 없다는 뜻이 됩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원죄가 없으시고 주님의 생애를 통해 하나님을 순종하고 죄인까지 사랑하신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이루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죄가 없으신 주님을 사망이 붙잡아 둘 권리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다시 사셨다는 것은 죄가 없으시다는 뜻이고 그렇기에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을 수 있는 자격이 있으셨단 뜻입니다.
원죄를 갖고 태어난 인간은 아무리 고결한 인격으로 살다 죽었다 하더라도 자기의 죄로 죽을 뿐입니다.
그 어느 인간도 남을 대속할 자격도 없고 능력도 없습니다.
인류 역사상 그 누구도 부활하지 못한 것은 그들이 모두 죄인이란 증거입니다.
주님의 부활하심은 주님이 바로 내 죄를 대신 해서 죽을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유일한 분이었음을 명백히 드러내는 증거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가 주님의 십자가에서 완벽하게 속해졌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주님의 뒤를 이어 부활할 것에 대한 약속이요 보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십자가의 대속으로 우리의 죄값을 완불한 우리들은 주님이 오늘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것 처럼 하나님의 나라에서 주님과 같은 몸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할렐루야.
주님이 부활은 이 세상 공중 권세 잡은 자들의 사형 선고입니다.
밤낮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고발하던 원수는 이제 주님이 모든 죄 값을 지불하셨으므로 그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
주님이 부활해서 원수 마귀를 밟고 승리하셨기에 우리가 주님의 이름의 권세로 모든 악한 영을 대적하여 또한 승리할 줄로 믿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영생을 주실 뿐 아니라 지금 즉시 우리에게 평강을 주십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맨 처음 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9절에 보니 주님은 마리아를 보고 평안하냐 고 물으십니다.
주님의 반가움이 베어 나오는 것 같습니다.
마리아에게도 사흘이 긴 시간이 었지만 우리 주님께도 제자들과 헤어진 시간이 길게 여겨지셨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마음으로 믿고 확신할 때 우리 마음에도 주님은 항상 이렇게 말씀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평안하냐? 내가 이렇게 살아있으니 안심하고 두려워 말라.
우리 마음이 답답함과 조급함과 두려움 가운데 있다면 오늘 부활의 주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평안을 주시길 기도하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평안을 원하십니다.
제자들이 유대인이 두려워 숨어있던 곳에 주님은 문도 열지 않고 그대로 통과해서 나타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몸은 육체를 가지셨지만 이 땅의 물리 법칙에 제한을 받지 않으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이 복잡한 세상을 살아갈 때 언제 평안하다 느껴보신 적 있으십니까?
만사가 형통하여 술술 잘 풀릴 때 평안하던가요?
언제 이 일이 꼬일지 모른다는 걱정이 은근히 마음 속에 밀려듭니다.
몸이 편하고 돈이 많다고 우리 심령이 평안하진 않습니다.
올해 삼0전자 회장인 이0희 회장이 배당금 1000억을 받은 것으로 듣는 사람의 입이 떡 벌어지게 했습니다.
우리 같은 사람은 실감이 나지 않는 액수이죠.
천문학적 재산이 있다고 그가 평안합니까?
최근에도 애플이 제기한 특허침해 소송 문제로 인터뷰할 때 못이 나오니 때리려 한다며 세계 시장의 견제를 걱정합니다.
삼0전자와 다른 기업의 특허분쟁 건수도 몇 년 사이 2배 넘게 늘었다고 합니다.
최근 신라호텔 한복출입금지 사건도 불거졌고 노련한 이0희 회장의 얼굴의 깊은 수심은 누구에게나 녹록지 않은 인생의 고달픔을 느끼게 하는 것 이었습니다.
올해 초 이0희 회장이 향후 10년 내 삼성의 모두 주력사업이 사라질 수 있다며 큰 식구를 거느리고 가는 경영권자의 고뇌를 내비치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막내 딸 윤형씨의 자살과 조카인 이0천의 투신자살로 어두운 그림자를 가진 삼성가를 볼 때 야곱이 노년에 한 말이 기억납니다.
창세기 47장9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삼십 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너나 할 것 없이 험악한 세월을 보내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현0그룹의 고정0영회장이 정0준씨의 주선으로 운명하기 전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 또한 첫째 아들은 교통사고로 넷째 아들은 음독자살로 다섯 째 아들은 투신 자살로 죽었던 험악한 세월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우리의 삶의 모양이 어떠하고 인생의 길이 어떠하든지 부활하신 주님만이 우리 마음에 참 평안을 주시며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아무리 험한 세파 속에서라도 평강을 누리는 성도님들 되시길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아멘.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 부활의 아침, 하나님 아버지께서 외치십니다.
이젠 됐다, 나의 공의는 다 이루어졌다. 속죄물은 흠이 없고 완전했다.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 이 많은 나의 자녀들을 죄에서 구했구나.
그리고 주님을 부활시키십니다.
천국은 주님이 잠드신 동안 숨을 죽이고 기다리다 부활절 아침 주님께서 모든 사역을 완수하고 완전한 속죄를 이루시는 순간 기쁨으로 폭발했습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기쁨이 얼마나 터질 듯 한 지 땅이 진동합니다.
무덤을 막은 돌도 하나님이 친히 걷어 차버리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의 능력을 믿으시죠?
우리도 주님이 오시는 날, 아니면 우리가 주님께 가는 날 우리의 이 육신 장막이 영화로운 부활의 몸으로 변할 것입니다.
나사로를 살리셨던 주님께서 죽은 우리를 반드시 살리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하시기에 영원히 함께 살기 위해서입니다.
이 믿음으로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것을 확신하며 날마다 성령 충만을 받고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하는 삶을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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