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예레미야애가3장19절-28절 (기억하소서)

남수연 2024. 10. 23. 23:47

예레미야애가는 남유다가 바벨론에 멸망하고 난 뒤 예레미야가 쓴 애통의 시입니다.

폭격으로 무너진 건물더미에 앉아 가족의 시신을 안고 울부짖는 사람들의 모습을 우리도 뉴스에서 많이 보았죠.

영상이 아니라 눈 앞에서 그 일이 벌어진다면 그 충격은 다를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진짜로 나라의 멸망을 막아보려고 했습니다.

사람들의 비방과 미움을 혼자 받으며 회개를 촉구해 왔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사투에도 불구하고 조국은 결국 파국을 맞은 것이죠.

그것을 바라보는 애통한 마음을 예레미야가 애가로 지은 것입니다.

당시 바벨론에게 당한 이스라엘의 처참한 상태를 이 애가를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1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전에는 열방 중에 공주였던 자가 이제는 강제 노동을 하는 자가 되었도다

221, 늙은이와 젊은이가 다 길바닥에 엎드러졌사오며 내 처녀들과 내 청년들이 칼에 쓰러졌나이다

예레미야가 시체로 가득 찬 예루살렘을 보며 슬퍼하고 망연자실한 모습이 상상이 되죠.

우리말 번역 성경으로는 나타나지 않지만 애가의 4장까지는 알파벳시입니다.

각 연의 시작이 히브리어 알파벳의 글자순으로 맞춘 단어로 시작합니다.

시편에도 이런 답관체 형식의 시는 드물어서 단 아홉편 뿐입니다.

살해된 사람들로 가득한 예루살렘을 보며 알파벳에 단어를 맞춰가며 공을 들여 시를 썼다는 게 좀 이해가 안 가죠.

알파벳시는 기억하고 외우기 쉽게 하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애가는 기억하는 시라고 생각하면 되겠습니다.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을 그 패망을 기억하라는 것이죠.

본문에 와서는 시의 분위기가 극적으로 바뀝니다.

무참히 부서진 이스라엘을 위로하며 소망을 주는 내용입니다.

우리의 많은 시련 가운데도 오늘 말씀을 잘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하나님이 이 괴로움을 기억해 달라는 것입니다.

19,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이 한 구절에서 고통과 쓰라림의 맛이 느껴지는 것 같죠.

이스라엘이 왜 망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죽어 마땅한 악행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이 가나안 부족들보다 더 악을 행했다고 하셨습니다.

또 하나님을 버리고 가나안 부족들의 우상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 믿고 불상에게 비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예레미야를 보내셔서 40년간 경고하셨지만 듣지 않아서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 우리가 당하는 고초를 기억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 매를 들고 있는 분이 하나님아버지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릴 때 아주 가끔 저희 어머니가 매를 드셨습니다.

그때는 주로 방바닥을 쓸던 빗자루 몽둥이였죠.

형제가 많다 보니 약은 자식들은 빗자루만 잡으셔도 싹싹 빌어 위기를 모면합니다.

저는 약간 그쪽이었습니다.

어떤 자식은 때리는 엄마의 매를 손으로 붙잡고 울면서 매달립니다.

제 동생목사는 맞을 때 도망도 안 가고 빌지도 않아서 더 많이 맞았습니다.

때리는 사람이 부모이기에, 때릴 만큼만 때린다는 걸 아는 것이죠.

남에게 맞는다면야 죽을까 봐 무서워서 도망갔겠죠.

예레미야는 40년간 하나님과 독대했던 선지자입니다.

하나님아버지 마음을 예레미야만큼 잘 아는 사람이 있을까요?

부모는 때리고 싸매잖아요?

그렇기에 죄와 잘못으로 당하는 징계에도 고초를 하나님이 기억해 주시길 바라는 것입니다.

살면서 이유없이 당하는 고난이라면 더욱 더 하나님이 기억해 주시길 기도할 수 있는 것이죠.

젊을 땐 바쁘게 일하고, 아이 키우고, 가정 돌보며 정신없이 살았습니다.

힘든 일도 폐기로 이겨내고, 낙관으로 이겨냈던 것 같습니다.

인생의 황혼기가 되면 작은 위험에도 불안과 두려움이 커지게 됩니다.

그렇게 평생 책임만을 짊어진 우리에게도 영원히 기댈 부모가 계십니다.

언제든 짐이 무거울 때 내 고초와 담즙같이 쓴 심정을 기억해 주소서, 하나님아버지께 의지하고 힘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2. 내 자신에게도 이 고통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20, 내 마음이 이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고난이 오면 사람들은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생각합니다.

틀어진 관계면, 어떤 말에 오해했는지 대화를 기억하며 다시 복기해 보죠.

크고 작은 시험과 고난은 우리로 멈춰 생각하게 하고 기억하게 합니다.

그러나 단지 문제에 대해서만 기억하면 낙심하게 되죠.

해법이 없잖아요?

현재 이스라엘은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나 처참해 어떤 희망도 가질 수 없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이 일을 기억하되 하나님을 기억하면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1) 여호와의 인자를 기억하자고 합니다.

21,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아옴은

22,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 때문에 이대로 끝이 아니라는 것이죠.

잠언 2313절은 하나님의 훈계의 준엄하심을 보여줍니다.

13,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

14, 네가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의 영혼을 스올에서 구원하리라

이 말씀대로, 하나님의 공의만으로라면 우리는 매일 맞고 또 맞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동정하십니다.

본시 하나님이 허락하신 징계와 시련은 우리를 진멸하시려는 게 아닙니다.

용광로는 귀금속을 녹여 내버리기 위해서가 아니죠.

버리시는 것은 용광로 속에서 녹아 나온 우리의 죄의 습관과 성품들입니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도 우리를 견디게 하시는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이 있다는 것입니다.

23,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용광로 같은 고난의 때는 아침이 오는 것이 두렵죠.

하루를 살아낸다는 게 무섭기만 합니다.

그런 날 중에도 하나님은 아침마다 새로운 인자와 사랑을 베푸십니다.

십자가 사건 뒤 갈릴리로 돌아가 물고기를 잡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모닥불에 떡과 고기를 구워 놓으셨죠.

허기진 배를 채워주시고 따뜻하게 다독이시는 주님의 인자하심으로 우리도 아침마다 새로운 힘을 얻고 험악한 날들을 살아냈던 것입니다.

그런 날들을 기억한다면 언제든 우리 앞에 다가온 시련들을 또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2) 하나님이 나의 기업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24,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이스라엘은 지금 난감하게도 가나안땅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의 기업이 되신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모든 지파들에게 나누어 주실 때, 기업을 주지 않은 지파가 있었죠.

레위지파입니다.

레위지파에는 경작할 땅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길, ‘나 하나님이 너희의 기업이라고 하셨습니다.

실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가나안땅이 기업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기업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기업이십니다.

살다 보면 나에게 주신 소중한 것들을 잃을 때가 있죠.

재물, 사람관계, 건강, 직장, 그런 것들을 잃어버린 낙망 중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나의 기업이시라는 것입니다.

어차피 땅의 것들 중에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기업이시라는 것은 땅의 모든 것이 없어진다 해도 하나님으로 살 수 있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3. 그렇기에 하나님을 기억하고 잠잠히 현재의 어려움을 이겨내라고 합니다.

25, 기다리는 자들에게나 구하는 영혼들에게 여호와는 선하시도다

26,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자책하고, 억울해하고, 분노하는 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미 벌어진 일이고 엎질러진 물이잖아요?

하나님의 구원을 기도하며 잠잠히 기다린다면 오히려 더 좋다는 것입니다.

고난도 유익이 되는 것이죠.

여기저기, 이사람 저사람 찾아다니는 것보다 하나님 앞에서만 내 문제를 호소하고 잠잠히 기다리는 게 좋습니다.

지금 짊어진 멍에는 하나님이 지워주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27, 사람은 젊었을 때에 멍에를 매는 것이 좋으니

28절 혼자 앉아서 잠잠할 것은 주께서 그것을 그에게 메우셨음이라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삼으시고 그 본성을 길들이실 멍에를 메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소에게는 굴레와 멍에가 있습니다.

굴레는 소를 조련하기 위해 코를 뚫어 코뚜레를 꿰고 머리를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동여매는 것입니다.

굴레는 소가 죽을 때까지 차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멍에는 소가 일할 때 목에 걸고 밭고랑을 파고 달구지를 끌 때만 지는 것입니다.

멍에가 없다면 소가 일을 할 수가 없는 것이죠.

하나님은 우리에게 멍에를 지게 하시지, 굴레를 씌우지는 않으십니다.

우리를 꼼짝 못하게 끌고 다니던 것은 죄와 사망의 굴레였습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에게서 그 굴레를 벗겨 멀리 던지셨잖아요?

내 생애 어떤 문제는, 하나님이 내게 꼼짝 못하게 씌어놓은 굴레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그것도 굴레가 아니라 멍에입니다.

멍에는 우리가 예수님을 따를 수 있게 지우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셨잖아요?

마태복음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우리에게 지워주신 모든 멍에는 주님을 배우게 하는 멍에입니다.

우리의 못된 성정을 갈아 엎어 쉼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죠.

하루 중 왜 우리 마음에 분노가 일어나고 미움이 일어나고 불안감에 싸입니까?

왜 중요한 관계를 망칩니까?

못된 성정 때문이잖아요?

그것을 가르치고 고치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멍에를 지우시는 것입니다.

이 멍에를 잠잠히 지다 보면 가시밭처럼 쓸데없는 것으로 꽉 찬 마음도, 돌맹이처럼 완고한 마음도, 말씀이 떨어져 좋은 열매를 낼 수 있는 부드러운 옥토가 되는 것이죠.

또 하나님나라를 위해 일할 때 멍에를 메워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쩌다 보니 주님을 위해서 수고의 멍에를 메었다면 주님이 메워주신 것이니 혼자 잠잠히 메고 가면 됩니다.

멍에를 메고 일할 기간과 분량은 하나님이 정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젊었을 때 그 멍에를 메게 하십니다.

늙어서 힘없는 소에게 일하라고 멍에를 메워주는 주인은 없습니다.

제가 믿음생활을 하면서 보아온 바로는 젊을 때부터 멍에를 메고 배운 성도에게 늙어서까지 무거운 멍에를 메워주시진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나라를 잃고 인생과 세계관이 다 무너진 이스라엘에게 이것들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세상은 어떻게 변해도 우리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시련 중에 하나님이 기억해 주시길 기도하고,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을 기억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2024년10월23일 주는나의산성교회 수요기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