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을 빚던 사람과 화해가 되면 그만큼 큰 기쁨이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런 바울사도의 기쁨이 느껴지죠.
그런데 사실 모두와 화해가 된 것은 아닙니다.
작년에 뉴욕대에서 실시한 실험이 있습니다.
성가시게 하는 사람이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입니다.
실험 결과 성가시게 하는 사람이 나의 생물학적 노화를 촉진시킨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러니까 ‘너 때문에 내가 늙는다’ 그런 말이 사실인 것이죠.
또 사람들은 자기 주변 사람들 4명 중 1명은 성가신 사람이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나를 들볶고, 신경 쓰이게 하고, 상처 주고, 근심하게 하는 사람이 내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사도와 고린도 성도들과의 관계가 잘 해결되었다지만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에 2절에서 4절까지 그 사람들을 먼저 감싼 뒤 화해의 기쁨을 표현한 것입니다.
모든 근심이 완벽하게 사라지는 것은 천국에서일 것입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은 돈, 건강, 사람 관계, 이 삼대 근심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오늘 바울사도와 고린도 성도들의 근심을 좀 들여다 보려고 합니다.
늘 그림자처럼 우리를 따라 다니는 근심을 하나님은 어떻게 가르치시는지를 배울 것입니다.
잘 배우고 우리를 근심하게 하는 사람, 근심하게 하는 문제들을 잘 다루게 되시길 바랍니다.
1. 왜 바울사도와 성도들과의 관계가 서로에게 근심이 되었냐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를 배우기 전까지는 바울사도가 이 정도 마음고생하며 살았는지 잘 모르셨을 것입니다.
반대자들의 박해만 바울의 근심이 아니었습니다.
같은 편인 교회와의 관계도 큰 근심이었던 것이죠.
앞의 실험에서도 먼 관계보다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나를 성가시게 하는 인물이라고 답했더군요.
먼 관계는 싫으면 안 보면 되지만 가까운 사이는 안 볼 수가 없잖아요?
애증의 관계인 가족의 경우 더 큰 스트레스의 요인이라고 합니다.
그동안 바울과 고린도성도들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복습을 좀 하겠습니다.
그래야 오늘 본문과 잘 이어집니다.
바울사도는 고린도교회에서 1년6개월을 목회한 뒤 떠납니다.
몇 년 뒤 고린도교회 지도자들이 찾아와 교회 내 여러 불미스러운 사건들에 대해 바울사도의 조언을 구합니다.
그 문제들에 대해 답을 준 것이 고린도전서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바울사도의 조언에 따르지를 않았죠.
거기엔 바울을 모함하는 유대주의 복음전도자들도 한 몫 했습니다.
바울은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 직접 고린도교회를 찾아갑니다.
그러나 교회에 문제를 일으켰던 무리들에게 심한 배척을 당합니다.
대다수 고린도성도들도 바울 편에 서지 않고 그들에게 동조합니다.
결국 큰 상처만 안고 성과도 없이 고린도를 떠나오게 되죠.
이것을 ‘가슴아픈 방문’이라고 합니다.
바울사도은 다시 편지를 써서 동역자인 디도 편에 보냅니다.
눈물로 간절하게, 그리고 준엄한 내용으로 보낸 편지입니다.
그래서 눈물의 편지, 혹은 준엄한 편지라고 합니다.
이 편지는 유실되고 전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편지를 갖고 떠난 디도가 만나기로 했던 날짜에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바울사도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죠.
당시 배를 타고 장거리 여행을 한다는 것은 큰 위험을 감수한 것입니다.
또 고린도교회에 더 큰 문제라도 생겼나 근심이 바울을 짓눌렀습니다.
그래서 바울사도가 고린도의 길목인 마게도냐까지 가서 디도를 기다리게 됩니다.
이때 바울사도의 심적 근심을 5절에서 솔직하게 드러냅니다.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하지 못하였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노라
그렇잖아도 고린도교회의 문제로 근심이 가득한 바울입니다.
그 와중에도 사방에서 바울을 공격하는 세력들이 있었던 것이죠.
근심은 사람을 나약하게 합니다.
바울사도는 당시 큰 두려움을 느꼈던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은 마침내 바울사도를 위로하셨습니다.
6절, 그러나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7절, 그가 온 것 뿐 아니라 오직 그가 너희에게서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고함으로 나를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
걱정이 목을 조여오던 그때 디도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바울사도의 두 가지 근심이 해결이 된 것이죠.
디도가 무사하다는 것과 고린도성도들의 회개입니다.
이것을 기뻐하며 바울사도가 이 고린도후서 편지를 추가로 보낸 것입니다.
본문 중에서 오늘 두 종류의 근심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과 세상 근심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하나님의 뜻인 구원을 이루고,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입니다.
1) 바울의 근심과 고린도성도들의 근심은 하나님의 뜻대로 한 근심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라는 말은 목적이 있으시고 개입하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순종에서 생긴 근심이고 고린도성도들은 불순종으로 생긴 근심이죠.그러나 결과를 보면 둘 다 하나님의 뜻대로 한 근심인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근심에 대한 위로를 받았고, 고린도성도들은 회개한 것이죠.
우리가 예수님을 잘 섬기고 말씀에 순종할수록 그에 따른 근심도 생깁니다.
교회 문제로 근심해 보지 않은 분들은 없으실 것입니다.
또 전도할 대상 한 사람을 품으면 그 사람 때문에 근심할 일이 많아집니다.
믿지 않는 가족들과의 불화도 큰 근심이죠.
제가 아는 여전도사님이 전에 이런 고민을 토로한 적이 있습니다.
시댁이 믿지 않는 집안이라 때마다 제사를 지냈습니다.
전도사님은 음식만 장만하고 제사에 참여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크고 나니 시어머니가 아이들도 제사에 참여시키라고 했습니다.
아이들에게 절을 시키지 않으면 큰 분란이 일어나게 생겨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더군요.
직장에서는 분위기 깬다고 기독교인을 싫어하는 상사가 있죠.
내 신앙을 밝히지 않는 데는 그런 이유도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다면 그런 근심은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가수 션씨가 작년에 루게릭환자 전용병원을 완공했습니다.
지인에게서 받은 책 한 권이 시발점이었습니다.
루게릭병에 걸린 농구선수 김승0형제가 투병 중에 쓴 책입니다.
병상에 누워 죽어가는 승0형제가 루게릭전용병원을 만들겠다는 강한 의지를 책에 쓴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잖아요?
안타까운 마음에 션씨는 모아 놓은 일억을 가지고 승0 형제를 찾아갑니다.
결국 루게릭 병원을 세우는 건 아픈 승0형제가 아니라 션의 몫이 되고 맙니다.
병원을 세우는 데 총건축비가 239억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 돈이 저절로 생겼겠습니까?
그걸 위해 션이 그렇게 뛰고 또 뛰고, 아이스버킷 챌린지도 하고, 강의도 하고, 개미처럼 후원금을 모은 것이죠.
그러는 동안 십오 년 세월이 지난 것입니다.
공사를 완공하지 못할까 봐 얼마나 근심이 되었겠습니까?
션은 그것이 예수님이 자기를 위해 하신 대로 따라가는 것이라고 말하더군요.
하나님은 션에게 병원 완공의 기쁨을, 바울사도에게는 고린도교인들과의 화해로 큰 위로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해 보지 않은 사람은 그 깊은 위로와 기쁨을 맛볼 수 없습니다.
2) 바울사도가 근심을 어떻게 해결했는지를 배워 우리도 적용해 보겠습니다.
먼저 바울사도는 고린도교회의 골치아픈 문제를 피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며 자발적으로 지는 십자가는 힘에 부칠 때 얼마든지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주님을 위한 봉사와 헌신이 큰 근심이라면 그만하면 됩니다.
그러나 만일 성도들이 그랬다면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멈췄을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작은 교회 섬기는 걸 포기했다면 우리 교회가 여기까지 올 수 없었습니다.
션이 건축비에 대한 근심을 내려놓았다면 병원은 완공되지 못했습니다.
바울사도는 배신감에 고린도성도들과 절교를 선언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한때 주의 일로 바나바와 다투다 헤어졌던 일이 있었죠.
1차전도여행 동행자 중에는 바나바의 조카 마가가 있었습니다.
마가는 전도여행 도중에 포기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2차전도여행을 계획할 때 바나바가 또 마가를 데리고가자고 합니다.
그 문제로 둘이 다투고 각각 다른 선교지를 향해 떠난 일이 있었습니다.
바울사도는 이번엔 고린도 교회의 손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편지를 썼고, 방문을 하고, 다시 또 간절한 편지를 썼습니다.
그 모든 과정은 우리가 살펴본 대로 평탄치 않았습니다.
영적이든 육적이든 문제가 생기면 해결해 가는 과정이 다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일인데도 기적같이 편하게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연의 섭리와 인간 삶에 정해주신 양식 안에서 구원 역사를 이루시길 계획하셨습니다.
바울사도를 배신하고 모욕하는 고린도 성도들의 코를 납작하게 할 방법이 없었겠습니까?
성령께서 바울이 다른 곳에서 보였던 큰 기적을 행하게 하시면 되죠.
그러나 바울은 인간 대 인간으로 고린도 성도들에게 해명하고, 설득하고, 부탁합니다.
예수님도 그러셨을 거예요.
예수님의 증인으로 사는 자리는 다락처럼 높은 자리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몸소 보여주신 대로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섬기는 자리인 것이죠.
그래서 인간 바울이 인간 고린도성도들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침내 고린도성도들의 마음이 열리고 바울의 근심을 기쁨으로 바꿔주시는 것이죠.
인도 콜카타의 빈민가를 배경으로 한 ‘씨티 오브 조이’란 영화에서 주인공이 남자 둘이 이런 말을 나눕니다.
사는 게 왜 이리 힘들까요?
그러게 말이요, 그래서 기쁨도 더 큰가 봅니다.
우리 인생에서 근심이 없다면 과연 기쁨을 알 수 있을까요?
사람이 편하다고 기쁘던가요?
주님을 따르며 근심한 만큼 하나님은 큰 기쁨으로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자신의 명예가 회복되고 고린도교인들의 신뢰를 얻은 것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사도가 이토록 고린도성도들과의 관계를 근심한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마저 곡해될 것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성도들이 다시 바울에게 돌아온 것은 하나님께 회개했다는 뜻이잖아요?
그리고 바울사도는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평생 근심과 고난 중에 섬긴다 해도 이 사역을 통해 가장 큰 복을 받는 사람은 바로 자신이라는 것이죠.
이것을 알기에 성도들은 주를 위한 근심을 감수하고, 위로받고, 영의 축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나의 헌신과 봉사가 근심을 준다면 이것을 생각하며 감사하며 승리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3) 고린도성도들을 회개하게 한 근심에 대해서입니다.
전에 한 원로목사님이 에스겔서를 설교하는 걸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는 본문입니다.
유다 족속이 여기에서 행한 가증한 일을 적다 하겠느냐
이 말씀이 ‘너는 네 죄가 적다고 생각하느냐’로 들려 마음이 찔렸다고 합니다.
평소 ‘나 정도 되면 됐지, 내가 이만큼 헌신하고 바르게 사는 데’ 라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저는 순간 좀 놀랐습니다.
바울같이 헌신해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죄인의 우두머리라 고백하잖아요?
성도들의 죄인식이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내가 죄인인 게 늘 송구하고 주눅이 들 정도인 것이죠.
그래서 항상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이 감사하고 감격스러운 것입니다.
사회적인 죄를 짓든, 안 짓든, 양심대로 살건 안 살건 상관없이 내가 본질상 죄인이라는 게 저절로 알아집니다.
아무리 책잡힐 것 없이 살아도 사람이 위선으로 가득 차기 마련입니다.
아마도 그 목사님은 매일 예수님을 따르며 경건하게 사는 부분을 이야기한 것 같습니다.
성도들은 죄에 대해서 두 가지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본질적인 죄와 그로 인해 매일 짓게 되는 죄입니다.
본질적인 죄는 예수님의 대속을 믿음으로 단번에 용서받고 의롭게 됩니다.
매일 짓는 죄는 매일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처음 바울사도의 복음을 듣고 바른 믿음으로 시작했습니다.
전부는 아니라 해도 상당수가 예수님을 진정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입니다.
지금 문제는 고린도 성도들이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12가지 윤리적 죄를 짓고도 죄책감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타락의 징후입니다.
다시 과거로 회귀하고 있다는 것이죠.
실제 성도들이 다시 고린도의 우상숭배 문화에 발을 들여 놓고 있었습니다.
악한 행위를 회개하지 않고 무감각해지고 있었습니다.
고린도성도들에게만 있는 현상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예수님이 부르신 소아시아에 있던 일곱교회 중에도 다섯 교회가 그런 신앙의 변질과 침체기에 접어들어 있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자연적인 게 아닙니다.
자연적인 것은 이 세상이고 죄의 본성입니다.
그래서 긴장하고 고삐를 틀어쥐지 않으면 과거와 세상으로 회귀하려고 합니다.
침체된 믿음은 바른 질책을 기분 나빠 합니다.
사람이 쉽게 회개하지 않습니다.
잘못을 깨닫는 것도, 돌이키려 하는 것도 하나님의 개입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교회에서 멀어지고 믿음이 식은 형제의 마음은 어떤 것으로도 움직이지 못할 만큼 완강합니다.
고린도전서 편지를 받고 성도들이 그런 반응을 보였던 것이죠.
바울이 방문해서 훈계할 때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아비같이 아끼고 희생해 준 바울사도에게 무례했던 것이 마음에 걸렸을 것입니다.
죄에서 돌이키는 것은 한번에 되는 일이 아닙니다.
고린도교인들의 회개는 고린도전서와 가슴 아픈 방문을 통해서도 이미 시작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바울사도의 눈물과 준엄한 편지에 마음이 찔렸던 것이죠.
바울은 그 편지를 보내고 후회했다고 합니다.
그 편지를 받고 고린도성도들이 근심할 정도였다면 어떤 내용이었을까요?
‘어떻게 내게 이럴 수 있냐’고 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너희가 하나님 백성이 아니구나’, 그러지 않았을까요?
바울사도는 고린도성도들이 편지를 읽고 근심했던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라고 말합니다.
불편한 관계가 된 것은 속상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정도의 고통과 근심이 없이 될 일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열심히 식어가고, 다른 복음을 용납하던 고린도성도들입니다.
큰 다툼이나 갈등 속에는 교회와 성도들을 바로잡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마다 가정마다 그런 소동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를 돌이키게 한 것은 성경에 근거한 권면과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바울사도가 계속 구약성경을 인용하고 예수님의 말씀으로 권하죠.
우리의 믿음이 미끄러지고 있을 때 돌이키게 하는 것은 말씀입니다.
성령께서 그 말씀을 통해 찔림과 뉘우침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양육하실 때 무엇으로 하시겠습니까?
교회 목사를 통해 할지라도, 사람에게서 나온 지혜나 경험이나 체험으로 하시지 않습니다.
오직 기록하신 말씀을 통해 우리의 믿음과 사람 됨됨이를 가르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 말씀을 연구하고 해석하고 나의 신앙에 받아들이는 것이죠.
고린도성도들이 신앙의 지침인 말씀보다 검증되지 않은 종교적인 신비에 치중했던 것을 고린도전서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 결과 믿음이 탈선하고 인격이 붕괴 되기 직전까지 가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말씀에 매일 나를 비추어 보고 마음과 행실을 고쳐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3. 세상 근심에 대해서입니다.
10절,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룹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 모두가 하는 근심을 우리도 하며 살아갑니다.
돈 문제, 건강 문제, 자식 문제, 사람 관계, 일과 진로에 대한 문제.
세상 사람들이나 우리나 똑같이 그런 문제로 근심합니다.
우리가 하는 세상 근심들은 사망을 이루는 것일까요?
여기서 세상 근심은 ‘살면서 만나는 온갖 걱정거리’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세상 근심이란 말은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하는 근심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나님께 속했죠.
우리의 삶에 대한 모든 근심도 하나님께 속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근심거리를 관리하십니다.
그래서 근심의 문제는 똑같지만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과 그것을 받아들이고 해결하는 게 다릅니다.
우리나라 65세 이상 되는 연배에서 매일 열 명이 자살한다고 합니다.
빈곤과 다발성 질환과 노년의 고독이 인생의 마지막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죠.
우리의 삶의 근심들은 그만큼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여러 가지 근심들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모든 근심을 하나님의 뜻대로 해야 합니다.
염려와 근심과 걱정에 대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정해주신 규칙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2장29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 심하지도 말라
생계에 대해 근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차피 우리가 놀고 먹지는 않습니다.
지금처럼 내 생업을 잘 감당하면 될 일이지, 생계가 내게 달린 것처럼 근심하며 궁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6장34절,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너무 먼 미래까지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내일 일을 어찌 알겠습니까?
지난 주 뉴스에 반창고를 사러 약국 앞에 주차하던 차가 약국 안으로 돌진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60대인 남편 약사는 그 자리에서 심정지 되었고, 일을 돕던 아내는 중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걱정하는 내일은 내게 보장된 게 아닙니다.
오늘 하루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감사하게 살아갈 뿐입니다.
빌립보서 4장6절,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염려와 근심은 세상에서의 생존을 위한 본능입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하는 염려입니다.
우리에게는 모든 것을 아시고 도움을 요청할 하나님이 계십니다.
근심 대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감사하며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 으라
예수님은 우리가 계속 근심하는 것은 주님을 믿지 않기 때문으로 보십니다.요동치는 바닷물을 잠잠케 하신 예수님이 우리의 삶에 일렁이는 근심을 잠잠케 하실 것을 믿으십시오.
근심에 대한 하나님의 수칙은 우리 삶에 근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근심에 빠지지 않도록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며 지금 있는 것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모든 근심은 하나님의 뜻대로 목적을 이룬 뒤 큰 위로와 기쁨으로 보상해 주신다는 것을 믿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예수님을 따를 때 생기는 근심은 하나님의 뜻을 이룹니다.
주님의 일로 근심하다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도들의 근심은 세상에 속한 사람들의 근심과 다릅니다.
모든 우리의 근심은 하나님이 관리하신다는 것을 믿고 염려 대신 감사로 주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근심은 우리를 짓눌러 마음과 삶을 서서히, 혹은 일순간 붕괴시킬 만큼 위력이 강합니다.
매일 꾸준히 신앙을 배우고 실천하는 것은 우리를 지탱하는 믿음의 기둥을 더 견고히 해 줍니다.
근심이 우리를 짓누를 때 믿음의 기둥이 든든히 받쳐주도록 매일 꾸준히 성장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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