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후서

고린도후서10장1절-11절 (싸움의 기술)

남수연 2025. 8. 26. 22:15

 

 

https://youtu.be/S59HnIA9PhI

 

바울사도는 고린도성도들의 중요한 의무이자 특권인 연보에 대해서 앞 장에서 잘 설명을 마쳤습니다.

고린도성도들은 바울의 권고에 따라 연보에 동참합니다.

바울은 이후에 직접 고린도교회를 방문하죠.

불편했던 관계를 잘 청산하고 모아 놓은 연보를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기 위해 떠납니다.

오늘 10장에서는 다시한번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를 다룹니다.

고린도교회와 바울 사이에 끼어 있는 유대주의 순회 전도자들의 문제입니다.

이들이 여전히 고린도교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바울사도에 대한 인신공격과 비하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일부 교인들은 바울사도보다 외형적으로 더 그럴듯한 그 사람들을 따르고 있었죠.

우리가 서신서를 통해 알게 되는 게 있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고 교회가 세워졌다고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믿고 구원받아 교회의 일원이 되었다고 다 된 게 아닙니다.

사탄의 훼방, 세상권력의 압제, 옛사람과의 싸움은 종말까지 계속됩니다.

우리가 예수님 앞에 서는 날까지 계속됩니다.

그래서 지난 한 주도 전쟁터에서 산 것이죠.

그러나 그 골치 아픈 일도, 성가신 사람도 다 내게 주신 삶의 일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무균실 상태로 살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아무 성장도 없이 무기력하고 공허하게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삶을 어떻게 이기고 성장할 것인지 오늘 바울사도에게 배우려고 합니다.

바울사도가 직면한 부당한 상황이 무엇인지, 바울사도의 담대함은 무엇인지, 우리는 어떻게 바울처럼 믿음의 싸움을 싸울지를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고린도교회의 문제는 바울사도에게 유례없는 큰 타격이었습니다.

유럽선교에서 가장 큰 성과가 고린도교회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의 수고와 노력이 내 잘못이 아닌 데 송두리째 흔들릴 때가 있죠.

바울사도가 지금 그런 것입니다.

본장부터 13장까지 바울이 대적자들에 대해 반박하고 조목조목 시비를 가리는 내용입니다.

1절부터 상황을 좀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너희를 대면하면 유순하고 떠나 있으면 너희에 대하여 담대한 나 바울은

이게 무슨 말인지 좀 아리송하죠?

이 말은 대적자들이 바울을 헐뜯는 말을 그대로 한번 해 본 것입니다.

바울사도의 대적자들이 그렇게 말하고 다녔다는 것이죠.

사람들과 대면해서는 말도 못하는 소심한 사람이, 떠나서 편지를 쓸 때만 큰소리 친다

비슷한 말이 10절에도 나오죠.

그들의 말이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하니

이게 편지는 칭찬한다는 게 아닙니다.

이중인격이다, 겉다르고 속다르다 그렇게 몰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사도이 왜 이런 오해를 받게 되었을까요?

1) 사실 바울이 고린도성도들을 대할 때 유순하고 겸손했습니다.

바울사도는 본래 한 성격하는 사람입니다.

베드로사도의 잘못도 사정없이 비판했던 바울입니다.

바울사도가 그 혈기로 이번 사건을 대했다면 고린도성도들과의 관계는 끝났을 것입니다.

그렇게 할 이유가 없는 것이죠.

바울사도가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에 이런 말을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7, 오직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바울사도가 온유하고 겸손하게 지도한 이유는 신생교회와 성도들의 연약함 때문입니다.

자식의 성장 상태를 무시하고 우격다짐으로 키우는 부모는 없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유모에게 맡겼다면 유모도 그래야죠.

예수님은 고린도성에 내 백성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백성을 맡은 바울은 한 영혼도 실족하지 않도록 유모의 마음으로 성도들을 양육한 것입니다.

그런 바울을 대적자들과 일부 교인들이 만만하게 보았다는 것이죠.

인간의 죄성이 어디 가겠습니까?

친절하고 겸손하면 자기보다 부족해서 그런 걸로 아는 것이죠.

그러나 떨어져 있는 사이 버젓이 죄를 짓는 성도들을 묵과할 수는 없었기에 보낸 편지가 강경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마도 평소 바울사도와 다른 모습에 사람들이 꽤 놀랐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진심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 비난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공의가 없는 사랑은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죠.

그건 단지 환심을 얻으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11절에서 바울사도가 단호하게 말씀합니다.

이런 사람은 우리가 떠나 있을 때에 편지들로 말하는 것과 함께 있을 때에 행하는 일이 같은 것임을 알지라

대면했을 때나 편지를 쓸 때나 똑같은 그리스도의 마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교인들에게도 2절에서 일침을 줍니다.

전체적으로 글의 내용이 쏙 들어오지 않는 것은 아무래도 2천 년 전의 문장이기 때문입니다.

한글로 쓴 조선시대 편지도 지금과 얼마나 다른지를 생각하면 이해되죠.

2절은 이런 의미입니다.

바울이 대적자들을 엄중하게 대하듯이, 거기에 현혹된 성도들도 그렇게 대할 것이니 정신차리라는 것입니다.

특히 그들의 잘못을 지적합니다.

7,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교인들도 바울의 외모나 사역자로서의 자격을 미심쩍어 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외모가 어땠는지 알 수 없지만 호남형은 아니었나 봅니다.

사람은 제일 먼저 외모로 평가 받는다는 게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훈훈한 외모와 매력에 끌리죠.

외모가 인생에서 얼만큼 중요한가를 사람들에게 물어 보는 영상을 보다 제가 혼자 웃었습니다.

평생 얼굴에 분칠 한번 안 해 봤을 것 같은 한 시골 어르신에게 물었더니 아주 수줍어 하시며 이렇게 대답하더군요.

잘 생기고 이쁜 사람은 서울대 나온 거랑 똑같애. 그렇게 예쁜 사람을 내가 엄청 부러워 해.

본인은 그냥 부러워서 한 말일지 모르지만 학벌주의와 외모지상주의를 기가막히게 꼬집은 것 같죠?

바울사도는 자기에게 설령 약점이 있다 할지라도 더 좋다고 생각한 사람입니다.

오히려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그리스도께서 강하게 되신다고 했잖아요?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라서 오히려 예수님의 대속의 사랑이 더 절실하다고 했습니다.

남성 권위주의가 있는 우리나라에서 여성목사들은 차별을 많이 느낍니다.

아니 여성들 전부가 그러실 것입니다.

우리들교회 김양0목사님이 목사가 되었을 때 주변에서 박사학위를 꼭 하라고 권유했다고 합니다.

여성목사는 무시해도 박사는 무시하지 못한다는 것이죠.

받은 게 부족한 것은 크게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다 어느 부분에선 남과 비교할 때 부족함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외적 조건으로 유대사회에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셨죠.

성경에서 외적 조건이 좋은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게 많지 않습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얼마나 준수한 자였습니까?

특히 아름답고 풍성한 머리카락이 볼만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압살롬의 최후를 보면 그 머리털 때문에 죽잖아요?

생각 속에 뭔가 잠깐 스치는 게 있지 않습니까?

성도들은 부족한 것 때문에는 크게 잘못되지 않습니다.

잘나고 아름다운 것이 미끄러지게 하는 것입니다.

사실 소중하고 가치있는 것들은 보이는 것보다는 보이지 않는 것에 깃들어 있죠.

모든 작은 것에도 하나님은 부족하지 않은 가치를 담아 주셨습니다.

유퀴즈가 처음엔 길거리에서 사람들을 만나 토크하는 형식이었습니다.

한번은 학원에 가는 초등학생 주은이를 만나 대화를 했습니다.

그런데 주은이가 MC아저씨들의 질문에 신기할 정도로 감동적인 답변을 하더군요.

조세0씨가 주은 어린이에게 물었습니다.

신이 주은양 만드실 때 이것 저것 좋은 것을 넣으셨는데, 뭘 안 넣으신 것 같아요?’

쉽지 않은 질문이죠?

그런데 주은 어린이가 이렇게 대답해 모두를 놀라게 했습니다.

, 신은 저한테 남김없이 전부 다 넣어주신 거 같아요.’

나의 외적인 조건이 좀 부족해도 하나님은 사랑을 다 담아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바울사도의 외모와 유순함을 비판했지만 무슨 상관입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에 부족함이 없었기에 억울함도 배신도 이겨내는 것이죠.

예수님께 받은 넘치는 사랑을 굳게 믿는 것은 시험을 잘 이기게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 바울이 말씀을 전할 때 사람들이 왜 시원치 않게 느꼈을까요?

바울은 글만 뛰어나고 말주변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말에 힘이 없고 수줍어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고린도에 오기 전, 바울사도가 철학자의 도시 아테네에 들릅니다.

광장 아레오바고에서 바울이 이들을 상대로 변증적인 설교를 합니다.

아테네 시민의 종교심을 접촉점으로 참 신이신 하나님과 예수님을 논리적으로 설명한 뛰어난 설교입니다.

그런데 아테네 선교는 기대 이하였습니다.

이후 고린도에 들어간 바울사도는 달라졌습니다.

바울사도가 어떤 각오로 고린도에 들어갔는지 고린도전서2장에서 이렇게 밝혔습니다.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바울이 철학적인 지식이나 사고력이 부족해서 복음만 전한 게 아닙니다.

온갖 지식을 동원해서 설득력 있게 전했지만 믿지 않으면 선교사의 실패죠.

바울사도가 그렇게 아테네에서 전도하며 느낀 게 무엇입니까?

그들의 진이 견고하다는 것입니다.

예술과 지식과 부와 명성을 다 가진 곳이 그리스의 도시였습니다.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이미 4백년 전에 최고 지성의 도시로 올려 놓은 곳이 아테네입니다.

인간은 모두가 죄인이다, 예수께서 죄를 대속하셨다,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

이런 복음이 귀에 들어오기나 하겠습니까?

이 복음에 그들이 좋아하는 무슨 지성과 철학적 사색이 있습니까?

그에 비하면 소아시아 사람들은 그래도 복음을 잘 받아들인 편이죠.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1세기 대표적인 일곱교회가 다 소아시아 교회입니다.

바울이 아테네에서 논리적으로 접근한 복음전파가 실패한 뒤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배척하며 세워진 세상은 쉽게 뚫리지 않는 견고한 진이란 것입니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인간의 지혜만으로는 안된다는 것이죠.

그것을 4절에서 말씀하죠.

4,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5,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2. 바울사도는 그런 견고한 진을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 뿐임을 절실히 깨달았던 것입니다.

지금 바울이 대적하는 자들이 가진 것은 예루살렘교회의 추천서와 종교성과 유창한 언변입니다.

그들이 그것으로 고린도의 견고한 진을 무너뜨린 게 아니잖아요?

바울사도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싸워 세운 교회에 밥숟가락을 얹겠다는 거잖아요?

아니, 밥상을 차지하겠다는 것이죠.

그들이 하찮게 여긴 바울의 온유와 겸손엔 하나님의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만을 전한 것은 그때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나타날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고린도인의 견고한 진이 무너진 것이죠.

하나님의 능력만이 세상과 마귀와 죄에 붙잡힌 영혼들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합니다.

IT전문가인 전 SKT사장 이수0박사가 하나님을 믿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이분이 첨단 과학기술 분야에 있다 보니 따져보고 이해되지 않으면 절대로 믿지 않았다고 합니다.

미국에서 아내를 따라 교회를 나가게 되었지만 하나님의 창조나 예수님의 대속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유학생활 당시에 미국에선 AI연구가 한창이었습니다.

옆 연구실에서 사람 눈을 닮은 AI컴퓨터 눈을 만드는 연구를 하고 있었습니다.

전 세계 기라성같은 연구원들이 모여 만들어낸 결과가 나온 날입니다.

이박사는 그걸 보는 순간 너무 실망합니다.

기대 이하의 결과였습니다.

AI 눈이 사물을 식별하는 것조차 명확하지 못하고 에러가 너무 많은 거예요.

잠자리 눈도 저 정도는 되겠다 싶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상당히 발전을 했을 것입니다.

그날 집에 돌아오니 돌 된 딸이 모빌을 보며 놀고 있었습니다.

사랑스런 딸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 보는 데 아빠와 눈을 마주칩니다.

방긋 웃었겠죠.

그리고 손짓하는 쪽으로 움직이며 조그만 눈이 정확히 반응을 하는 거예요.

그 순간 퍼뜩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딸의 눈은 누가 만들었지?’

30명의 박사들이 모여서도 사람 눈 근처도 못 갔잖아요?

내가 낳았지만 딸 아이의 눈을 내가 만든 것은 분명 아니죠.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의 창조가 믿어졌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만드셨구나

최첨단 기술과 이론이 하나님께 복종 되는 순간인 것이죠.

예수님을 알지도 못했던 고린도가 복음을 믿은 것은 그보다 더 큰 기적입니다.

고린도사람들이 알고 있던 신은 제우스, 포세이돈 그런 신화의 신들이 전부였습니다.

도시엔 그 신들의 거대한 대리석 신전들이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의 기둥 양식에서 가장 화려했던 것이 코린트식입니다.

고린도의 기둥 양식이죠.

그곳에서 부와 향락에 빠져 살던 사람들이 바로 고린도성도들입니다.

마귀와 사망의 견고한 진에 사로잡혀 있던 것이죠.

하나님의 능력이 바울을 통해 나타나 고린도성도들을 거기서 꺼내신 것입니다.

그 싸움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우리는 고린도후서를 통해 조금 이해하는 것이죠.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긴급하고 절박한 심정을 스펄전 목사가 쓴 글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죄인들이 반드시 지옥에 떨어져야 한다면

적어도 우리의 몸을 밟고 지옥으로 뛰어들게 하라

그들이 멸망해야 한다면

우리가 그들의 무릎을 끌어안은 채로 멸망하게 하라

단 한 사람도 경고 없이

단 한 영혼도 기도 없이

그곳에 가도록 내버려 두지 말라

바울이 그 마음으로 고린도교회를 낳았고, 지금 다시 해산의 수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출해야 할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 손을 끝까지 놓지 마시길 축복드립니다.

 

3. 마귀는 반대로 견고한 진을 세우고 나를 공격하는 영적 전투도 벌입니다.

마귀의 진은 사람 관계 속에도 있고, 힘든 여러 환경들 속에도 있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를 공격해 상처 주고 피흘리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도 순식간에 진지를 만드는 게 마귀의 일입니다.

괜히 사람을 미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마음에 마귀가 견고한 진을 구축합니다.

우리가 육신으로 살아오는 동안 그렇게 견고해진 마귀의 진지들이 있습니다.

그 견고한 진을 파악해 무너뜨리지 않으면 고질적으로 우리를 괴롭히고 불행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대항하면 그것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능력을 어떻게 가질 수 있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무기로 얻으려면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사람이 스스로 지닐 수 없습니다.

삼손의 괴력이 긴 머리털에 있었던 것 아시죠?

들릴라의 유혹에 넘어가 머리털이 잘린 뒤 그 힘은 사라졌습니다.

삼손의 능력은 평생 머리털을 자르지 말라시는 명령에 의존할 때만 유효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얻고 싶다면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의지하는 게 쉬운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힘을 의지하려고 합니다.

돈이 큰 힘이기에 모든 사람들은 돈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언제 도와주실지 모르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건 어렵습니다.

강한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나약한 게 아닙니다.

그게 믿음의 실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는 믿음을 가지려면 하나님과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서먹해서는 신뢰하는 관계가 될 수 없죠.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방법은 변함없이 말씀과 기도입니다.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가까이 하고 예수님과 가까이 하는 훈련이 되어야 하나님을 점점 더 의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세속과 물질주의와 무신론 과학의 도전 속에 있습니다.

점점 더 거세게 믿음을 흔들고 무섭게 덮쳐올 것입니다.

믿음의 기본기를 다지고 근육을 강화하지 않으면 머잖은 미래에 많은 사람들이 교회 의자를 떠나 있을 것입니다.

예배 의자는 우리가 지켜야 할 마지막 보루입니다.

하나님은 예배하는 성도들을 주님의 능력으로 강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예배에 소홀하면 금방 영혼의 근육이 빠져 홀쭉해집니다.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도록 영혼의 근육을 단련하는 일에 더욱 힘쓰는 성도님들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바울은 오해받고 비난받았지만 그것은 다 고린도성도들을 위해서였습니다.

배후에는 고린도성도들을 뺏긴 마귀의 반격이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 싸움이 있다는 걸 잊으면 안됩니다.

우리의 삶 전체가 영적 싸움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일상을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고 육신으로 삽니다.

그 속에 마귀가 견고한 진을 치고 화살을 쏘아대는 것을 모르는 것이죠.

가정생활도 하나님께 기도하며 의지해야 관계가 평온합니다.

가정생활은 우리가 빠져나갈 수 없기에 그만큼 악령의 역사가 큰 곳입니다.

직장도 그만 둘 수 없기에 마귀가 사람을 심어 놓고 괴롭힙니다.

그런 마귀의 덫을 피할 수 있는 능력과 지혜는 하나님을 의지할 때 주십니다.

지혜가 부족하면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구하라고 하셨잖아요?

이 싸움에는 기술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믿음의 실력이고 말씀대로 싸우는 게 기술입니다.

믿음의 기본기를 잘 다지지 않으면 불안해서 하나님만 의지하지 못합니다.

기도와 말씀 훈련을 더 이상 미루지 마십시오.

우리가 싸움 잘해서 뭐 하려고 합니까?

그것이 나와 내 가족과 교회와 이웃을 살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지혜롭게 싸워 마귀의 견고한 진을 무너뜨리고 구원과 평안을 이루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