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의 마지막장에 도착했습니다.
바울사도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의 분량은 고린도전서와 후서를 합치면 총 29장입니다.
지금 우리가 성경필사를 한다 해도 만만치 않은 분량이죠.
이 외에 유실된 편지까지 치면 훨씬 더 많은 양입니다.
고린도교회가 그만큼 바울의 큰 숙제였고 반드시 바로 세울 의지가 있었다는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의 문제들도 보살피시지만, 믿음의 문제들을 특히 해결하길 원하십니다.
바울사도는 본문에서 결국 미뤄두었던 이 말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너희 정말 구원 받았니?
구원은 너무 엄청난 사건이기에 아무리 반복해 들어도 나쁠 것이 없습니다.
나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믿음에 대해 솔직하고 진지하게 오늘 말씀을 받을 수 있길 축복드립니다.
마지막 장 전체 내용을 간추려서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바울은 이 편지를 완성하면 디도편에 고린도교회에 보낼 것입니다.
그 후에 바울이 직접 고린도교회를 찾아갈 계획입니다.
1절,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리니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정하리라
이번에 가면 세 번째 방문이라고 하죠.
첫 방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갔을 때, 두 번째는 고린도전서를 보낸 뒤, 직접 문제 해결을 위해 갔지만 상처만 안고 돌아왔던 일명 가슴아픈 방문입니다.
그리고 곧 세 번째 방문을 하겠다는 것이죠.
가면 고린도교회 문제를 치리하겠다고 합니다.
두 세 증인을 세운다는 것은 만일 그때까지 문제가 남아 있다면 이젠 공적인 절차로 매듭짓겠다는 뜻입니다.
교회에 해를 끼친 문제적 성도들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물론 바울 개인의 감정에서 하는 말은 아닙니다.
바울사도가 이렇게 쎄게 나가니까 듣는 우리는 좀 시원한 것도 같습니다.
고린도성도들이 그동안 바울을 얼마나 물렁하게 보았습니까?
3절을 보면 교인들이 어디까지 선을 넘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너희가 구함이니
사람이 참 못됐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되죠.
사람에게 잘 해 주고 너무 기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바울에게서 복음을 받고 교회가 세워졌는 데 이제 와서 바울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는 거잖아요?
증거를 대지 않으면 바울의 훈계 따위는 듣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가 절대로 무관하지 않습니다.
앞에서도 고린도성도들이 가난한 성도들을 차별하는 것을 바울이 책망했었습니다.
잠언 17장5절에서도 사람을 이렇게 통찰합니다.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이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
사역자들이든 성도들이든 무시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교회에서든 가정에서든 주님께 하듯 서로 존중해야 합니다.
그런데 고린도성도들은 바울을 의심하듯 예수님도 의심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4절에서 이런 말씀을 한 것이겠죠.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고린도성도들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에 대해 뭔가 걸림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먼저 쓴 편지 고린도전서에서도 언급했던 것입니다.
1장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사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은 사람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로마제국에 반역한 자들이 받는 가장 처참한 사형법입니다.
우리도 그런데 십자가형이 집행되던 당시에는 더 의구심이 들었을 것입니다.
주님이 저런 형틀에서 비참하게 죽으신 것과 구세주라는 게 매치가 안되는 것이죠.
십자가를 믿으면서도 십자가가 걸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믿음이 생기기까지는 신자들 마음도 그럴지 모릅니다.
고린도성도들에게 십자가는 여전히 뭔가 부족하게 느껴지는 것이죠.
그러니까 거짓사도들이 율법과 할례를 전할 때 그거라도 더 붙들까 했던 것입니다.
십자가 구원에 대해 불확실하면 믿음에 깊이 들어가지 못합니다.
믿음의 본질보다 자꾸 종교적인 언저리만 맴돌게 됩니다.
십자가는 단번에 모든 죄인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가장 큰 능력입니다.
부활은 그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죠.
바울사도는 자신의 약함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가진 능력보다 과소평가 되는 걸 참지 못합니다.
우리는 조금이라도 나를 얕잡아 보면 못 견디죠.
바울사도가 낮아질 수 있었던 것은 약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십자가를 거친 성령의 능력으로 강했기 때문이죠.
그런 것을 아직도 이해 못하는 고린도성도들의 미숙한 신앙에 바울이 너희가 의심스럽다는 것입니다.
참았던 최후의 통첩을 던지는 것입니다.
5절,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2. 내가 아니라 너희가 믿음이 있는지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젠 네 믿음을 보여 봐.
네 안에 정말 그리스도께서 계신 걸 증명해 봐.
그 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면 예수님을 닮은 것이 나와야 합니다.
고린도성도들에게 그걸 찾지 못했다는 것이죠.
너희 안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너희는 버리운 자라고 합니다.
이런 말 듣는다면 굉장히 불쾌하겠죠.
지금 고린도성도들 중에 예수님을 안 믿는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게다가 고린도전서를 보면 교회에서 자기 믿음과 은사를 자랑하고 뽐내기 바빴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의심스러우니 증명하라는 것이죠.
믿음을 꺼내 보일 수도 없는 데 어떻게 확증하라는 것일까요?
우리가 구원받았는지, 진짜 믿음이 있는지는 여러 방법으로 어느 정도 확인이 됩니다.
1) 지금 고린도 성도들의 경우는 구원의 진리를 다 들었으니, 책망받은 그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앞 12장20절에서 고린도성도들의 문제를 언급합니다.
내가 갔을 때 이런 걸 또 보게 될까 봐 두렵다는 것이죠.
20 또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비방과 수군거림과 거만함과 혼란이 있을까 두려워하고
21 또 내가 전에 죄를 지은 여러 사람의 그 행한 바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하지 아니함 때문에 슬퍼할까 두려워하노라
목회자로서 어지간하면 성도들의 죄를 이렇게 적나라하게 폭로하진 않을 것입니다.
고린도성도들은 이 죄를 해결하는 게 믿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지금 믿음을 확증하라는 것은 신앙고백을 하라는 게 아닙니다.
가진 은사를 보여달라는 것도 아닙니다.
만일 예수님을 진짜 믿고 성령이 함께 계시면 그 문제들을 회개하고 처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 유전자 연구가 놀랍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유전자 속에 한 사람의 일생이 다 정해져 있다고 합니다.
외모는 물론이거니와 공부 잘하는 것, 병이 드는 것, 술 마시는 것, 범죄자가 되는 것, 심지어 부자 되는 것까지 유전자의 힘이라고 하더군요.
그러니까 유전자가 다 한다는 것이죠.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어 완벽한 유전자를 가졌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람 속에 이렇게 많은 악이 생겼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제가 이렇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영적으로 망했고 하나님과 단절된 그런 면에서가 아니라, 지금 살아가는 우리 전인격의 입장에서입니다.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이해하는 데는 도움이 되실 겁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완벽한 아담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있는 조건에서 창조되었습니다.
그때 아담의 유전자는 완벽했죠.
그런데 하나님을 반역해 그 조건이 깨진 순간, 에러가 생긴 것이죠.
완벽했던 설계가 여기저기 파괴되고 망가지게 된 것입니다.
지금도 환경적 요인으로 돌연변이가 생기잖아요?
자연과 동식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른 사람을 위해 창조해 주신 것이잖아요?
그것들도 똑같이 유전자 변이가 생기고 창조의 아름다움이 손상된 것이죠.
변이 유전자로 해충이 되고 맹수가 되고 독을 갖게 되고 그런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다방면으로 변형된 악한 형질들이 후손에 전해지게 된 것입니다.
유전병도 생기고 각 사람마다 병들기 쉬운 취약한 부분이 생긴 것이죠.
성격과 기질도 변했습니다.
교만, 혈기, 음란, 미움, 질투심, 폭력, 사기성, 각종 악덕이 생겨나고 유전되는 것이죠.
무엇보다 가장 큰 비극은 아담의 반역 유전자가 후손인 우리에게 그대로 전이된 것입니다.
타고난 유전자 자체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의 성품이 백신처럼 다시 들어온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기계처럼 백신으로 완전히 고쳐질 수는 없죠.
조상에게 물려 받은 유전형질들이 한 편에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령과 거듭난 성품이면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사도는 베드로후서에서 ‘하나님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세상의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셨다’는 놀라운 말씀을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거듭난 성품으로 유전적인 죄의 본성을 억제하고 거룩한 성품을 이루어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사도는 그것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지금 바울이 걱정하는 고린도성도들의 상태와 얼마나 다릅니까?
공통되는 게 하나도 없잖아요?
베드로사도는 더욱 힘쓰라고 합니다.
말투 하나도 바꾸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절대로 안 바뀝니다.
그렇게 그저 육신을 따라 살았던 고린도성도들이 이렇게 성경 역사에 남아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것입니다.
2) 그러나 우리가 이 모든 나쁜 행동을 고쳐야만 믿음을 증명하는 것이라면 우리 중에 합격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고린도성도들의 문제는 바울사도의 조언에 귀를 막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말을 인정하기 싫어서 아예 사도 자격을 부정하고 싶은 것이죠.
거짓 사도들은 아마도 그런 죄는 묵인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인간성 뜯어 고치라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바울사도가 지도한 것은 누가 봐도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따른 것입니다.
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진리를 거슬러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
진리가 선포되는 곳에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그것을 거부한다는 것은 성령님의 감화를 받아들이는 성도들의 양심 체계에 문제가 생겼다는 뜻입니다.
우리도 고린도성도들과 같은 약점과 죄를 짓고 삽니다.
그러나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들을 때 죄를 느끼고 고쳐야겠다 생각하죠.
기도하지 못한 것, 너그럽게 포용하지 못한 것, 미워한 것.
이런 내 행동에 대해 죄스럽고 부끄러운 마음이 듭니다.
어떻게든 말씀대로 해보려고 불편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성도들은 그렇게 죄에 점점 민감해져야 잘 가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간절함이 곧 우리의 믿음을 확증하는 것 중 하나임을 기억하고 그렇게 사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3. 예수님이 우리 안에 내주하신다는 것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성도님들과 함께 하십니까?
성령께서 성도님들 마음에 내주하고 계십니까?
이 중요한 문제에 진지하지 않은 것은 내 장래에 대해 무책임한 것입니다.
주님의 내주하심을 확신하는 성도라면 매일 주님과 동행하는 것을 알아가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게 되는 것입니까?
제가 말씀드릴 때 속으로 체크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심판받을 죄인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죄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대속하셨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 주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고, 이제까지 속했던 세상과 죄에서 원칙적으로 돌아서야 합니다.
그러면 죄를 용서받고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내 안에, 그리고 내 모든 삶 전체에 함께 하십니다.
이 진리를 다 알고 그대로 했다면 구원을 주실 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구원은 그 믿음으로 받는 것이지 경험이나 특별한 계시로 받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도 많은 성도들이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걸 모르겠다, 내가 구원받았는지 잘 모르겠다 고민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제가 몇 가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1) 구원받는 원리에 대해서 잘 모르거나 너무 피상적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오래 다닌 성도들 중에도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왜 믿으면 구원을 받는 것인지 정확히 설명하지 못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교회에서 잘 안 가르쳐서 그럴까요?
간혹 그럴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성도들이 관심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히브리서2장3절은 이렇게 경고하십니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큰 구원을 등한시한다면, 그래서 믿음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상일에는 별 시시한 것에도 다 관심을 갖고 호응하며 살잖아요?
내 구원을 위한 모든 지식도 더욱 자라나길 축복드립니다.
2) 주님이 내 안에 계신 게 불확실한 이유는 내 의지와 선택으로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진심으로 영접한 적이 없으니 내 안에 와 계시다는 게 안 믿어지는 것이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이것이 누구에게 하신 말씀입니까?
라오디게아 성도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불신자가 아니예요.
지금도 교회 안에 예수님을 내 삶에 들어오시도록 영접하지 않은 성도들이 많을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와 주인으로 모셨다면 주님이 내 안에 계시다고 믿으시면 됩니다.
3) 영접했다지만 실제로 예수님을 주인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손님으로 들어오시는 게 아닙니다.
단지 내가 필요할 때 나를 돕기 위해서만 오시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의 주인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지시를 받을 생각 없이 사는 것이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영접했다면 주님을 계속 의식하고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계속 의식할 수 있도록 모든 방편들을 적극 활용해야 합니다.
성경을 경전으로 생각하지 말고 매일 내가 읽고 연기할 대본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4) 신앙생활을 한 지 오래지 않아서 구원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아서 그런 경우도 있습니다.
성경을 계속 배우고, 구원과 죄에 대해 이해하고,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고, 그래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그 과정을 착실히 거치면 됩니다.
또 확실히 예수님을 믿지만 세상일에 너무 분주해 신앙의 성장을 이루지 못한 경우도 내 믿음에 대한 확신이 어렵습니다.
하나님 앞에 부족한 신앙생활이 마음에 걸리기에 내가 구원받았다는 확신이 차마 생기지 않는 것이죠.
5) 예수님을 알기 전에 살던 방식과 생각에 대한 고집이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 확증편향이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자기 가치관에 일치되는 정보만 받아들이는 사고방식을 말합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것이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그런 면에서 아주 불리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먼저 알았고, 세상은 자기 것을 계속 우리에게 주입합니다.
세상에 좋은 점도 있는 것 같지만 근본은 다 하나님께 반역하는 체제입니다.
그것을 빨리 인정하고 내 모든 지식과 생각을 하나님의 진리 아래에 복종시켜야 합니다.
이것 들 중에 어떤 부분이 내게 부족해서 구원의 확신이 없는지 아셨다면, 그것을 힘써서 잘 보완하시길 바랍니다.
성숙한 성도일수록 이 가운데 걸리는 것이 없이 구원의 확신과 믿음의 복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라고 말할 때 마음이 얼마나 괴로웠을까요?
회개하지 않는 예루살렘을 보고 우셨던 예수님의 그 마음을 느꼈을 것입니다.
바울이 셋째 하늘을 보지 않았다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계시를 듣지 않았다면 이런 환난을 당하며 복음을 전할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이 계시지 않고 예수님의 복음이 거짓이라면 어떻게 온 세상에 이렇게 복음이 편만할 수 있었겠습니까?
나 혼자 믿는 것도 만만하지 않잖아요?
우리도 날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믿음을 확증하며 이 복된 소식을 살아생전 누군가에게 전하며 살기를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그동안 고린도후서를 통해 무엇을 기억하셨습니까?
우리의 뇌는 에너지를 많이 소모하지 않는 쪽을 선택한다고 합니다.
새로운 것을 생각하고 기억하는 것은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기에 뇌가 싫어합니다.
왜 이렇게 성경 읽기가 싫지?
왜 이렇게 기도하는 게 싫지?
당연한 것입니다.
억지로 성경 말씀을 읽고, 기억하고, 지키려 노력해야 합니다.
힘들지만 그렇게 할 때 정말 좋은 보상이 따라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온전한 구원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
바울사도의 마지막 인사를 함께 읽으며 고린도후서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11절,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12절, 모든 성도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13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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