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후서

고린도후서12장1절-10절 (계시와 가시)

남수연 2025. 9. 2. 18:25

 

https://youtu.be/lEaecaREiQw

 

 

오늘 바울은 역대급 신앙체험과 자신의 육체의 가시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설교 제목은 계시와 가시라고 정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매일 성경을 통해서 말씀의 인도를 받지만, 주일설교를 잘 듣고 한주간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는 것도 중요합니다.

설교의 제목을 기억하면 주신 말씀을 떠올리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도 계시와 가시, 두 가지로 살펴 보겠습니다.

 

1. 먼저 계시에 대해서입니다.

바울사도는 셋째 하늘에 가서 본 환상과 계시에 대해 자랑합니다.

바울사도가 고린도교회에서 일 년 반 목회했지만 한번도 이 이야기를 한 적은 없었습니다.

왜 여기서 바울이 그동안 말하지 않았던 이 체험을 이야기할까요?

바울이 떠난 뒤 고린도교회를 찾아온 거짓사도들이 바울의 사도직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었죠.

그중 하나가 바울이 사도라면서 특별한 영적 체험이 없다는 것입니다.

말을 안 했으니 몰랐던 것이죠.

고린도전서를 보면 지금 고린도교회가 과도하게 초자연적인 신비체험에 치우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거짓 사도들은 고린도교인들에게 성령이 아닌 다른 영을 받게 하며 그런 신비적인 신앙을 부축이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대해 바울사도가 영적 체험의 진수가 무엇인지로 답변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의도는 그리스도께 인정받은 사도로서 부족하지 않음을 증명하려는 것이죠.

또 한편 신비한 체험을 자랑하는 고린도교인들에게 진정한 성도의 자랑이 무엇인지를 깨우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1) 바울사도가 언제, 어떻게 이 계시를 받았는가입니다.

1,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사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울 자신이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올라 갔었다는 것입니다.

뒤로 갈수록 자기라는 걸 자연스럽게 드러내죠.

십사 년 전이면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뒤 고향 다소와 아라비아에서 지냈던 기간입니다.

그때 셋째 하늘에 올라간 놀라운 경험을 했다는 것이죠.

4절에 보면 낙원으로 이끌려 갔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셋째 하늘에 갔다는 것은 곧 천국에 갔다는 뜻이죠.

그런데 괄호 안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우리 성경에는 괄호로 처리했지만 원문에는 그냥 문장 중간에 괄호 없이 이 구절이 들어 있습니다.

빼도 좋은 게 아니라 아주 중요한 내용인 것이죠.

이 말은 영혼만 가서 천국의 환상을 보았는지, 몸을 가진 그대로 천국에 올라간 것인지 확인해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완곡하게 몸의 상태로 천국에 다녀왔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죠.

바울사도가 이렇게 애둘러 자신의 천국 체험을 이야기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도 영혼이 천국을 보고 왔다는 신빙성 없는 간증들은 많이 있습니다.

고린도의 전통 종교에도 그런 신비 체험은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누구도 몸을 가진 채 다른 세계를 드나든 사람은 없었습니다.

지금 자신을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몸이 천국으로 올라갔었다면 허풍이라고 비웃을 것 아니겠습니까?

또 혹시 바울사도의 이 영적 체험 때문에 성도들이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바라보는 것도 바울사도가 원하는 바는 아니죠.

그래서 이런 애매함으로 자신의 영적 체험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바울이 천국에 가서 보고 들은 것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바울이 대체 뭘 보고 들었기에 그렇게 평생 쉬지 않고 몸이 닳아 없어지도록 복음을 전했을까요?

저는 그게 무엇인지 좀 알 것 같습니다.

사람이 충격적인 것을 보고 나서는 달라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달라진 행동을 보고 역으로 그 사람이 무엇을 보았는지 짐작할 수가 있는 것이죠.

 

2) 바울사도가 달려온 삶이 그날 무엇을 보았는지를 추측할 수 있게 합니다.

 

바울이 그날 보고 들은 대로 살았을 것이잖아요?

천국에 갔으니 당연히 천국을 보았겠죠.

바울은 눈 앞에 펼쳐진 천국의 광경에 넋을 잃었을 것입니다.

진짜 천국을 보고 온다면 우리도 지금같이 신앙 생활하지는 않겠죠.

그런데 바울이 천국만 보았을까요?

지옥도 보지 않았을까요?

성경에는 천국에 대한 계시가 여러 군데에 나옵니다.

예수님의 말씀, 다니엘서, 요한계시록 등에 천국에 대한 환상과 계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천국과 동시에 꼭 지옥을 언급합니다.

구원과 심판을 동시에 보여주시는 것이죠.

예수님은 거지나사로의 천국과 부자의 지옥을 함께 말씀하셨습니다.

계시록에도 생명나무 실과가 있는 천국과 불과 유황으로 타는 지옥을 동시에 말씀하셨습니다.

다니엘이 보았던 종말의 환상에도 영생을 얻는 자와 수치를 당하여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가 함께 언급됩니다.

천국을 보는 것과 지옥을 보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각성이 될까요?

아무래도 절망적인 지옥을 보는 게 더 강력하지 않을까요?

만일 지옥이 없다면, 마음대로 살다 존재를 끝내겠단 사람을 그렇게까지 희생하며 붙들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지옥을 한번이라도 본다면 내 가족들이 거길 향해 가는 걸 손 놓고 보고 있지 못할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자기 민족 유대인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멸망 당하는 걸 얼마나 가슴 아파했는지 모릅니다.

로마서 9장에서 이렇게 말씀했죠.

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이 구원받을 수 있다면)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모세도 그랬죠.

금송아지 우상을 만든 이스라엘이 진멸되게 됐을 때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출애굽기3232,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천국의 영광과 지옥의 절망은 얼마나 비교가 될까요?

바울사도가 그것을 보았기에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려고 불길로 뛰어드는 인생을 살았던 것입니다.

바울사도의 이런 삶이 그날 바울이 본 것을 증명하는 것이죠.

우리가 얼마나 은혜 체험을 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지금 받은 은혜만큼 살아내는 게 중요한 것입니다.

 

3) 그렇다면 바울이 들은 것은 무엇일까요?

4,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은 것들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대체 무슨 말이기에 바울사도가 14년간을 함구 했을까요?

만일 단지 지구의 종말이나 바울의 미래에 대한 것이면 이렇게까지 호들갑스럽게 표현하지 않았겠죠.

인류의 종말이야 구약성경에서부터 이미 다 예언된 사실이잖아요?

가장 놀랍고 인간의 말로 가히 표현할 수 없는 말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추하고 파렴치하고 악한 죄인을 사랑하신다는 말 아닐까요?

예수님이 그런 죄인을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대속하셨다는 말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간증합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많이 들었지만 과연 얼마나 잘 이해하고 얼마나 말로 잘 표현할 수가 있겠어요?

저는 바울사도가 예수님의 대속의 사랑에 대해서 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베드로에게 물었던 질문을 바울에게도 하셨을지 모릅니다.

바울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 질문은 내가 바울 너를 사랑한다그런 의미입니다.

연인들이 나 사랑하냐고 묻는 것은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이잖아요?

하나님이 정말 내 앞에서 나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신다면 어떨까요?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나 같은 자를 향해 내가 널 사랑한다,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전 차마 그 말을 사람들에게 그대로 옮기지 못할 것 같습니다.

왠지 고결하신 주님께 누를 끼치게 될 것 같아서죠.

나 같은 사람에게 주님이 사랑을 고백하셨다는 걸 어떻게 염치없이 사람들에게 옮길 수 있겠어요?

바울은 주님이 자신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을 들은 것입니다.

자신이 그렇게 존귀한 자임을 알았기에 그의 일생이 주님을 위해 지독히 낮아지고 자존심마저 짓밟혀도 개의치 않는 것이죠.

자기 목숨도 아끼지 않고 세운 고린도성도들에게 당한 이 배신도 견뎌내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 주 강주0씨 유튜브 채널을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강주0씨가 캐나다에서 태어났습니다.

아주 점잖고 우아한 고령의 부모님은 지금 캐나다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그 캐나다 친정집을 소개하는 영상을 올렸더군요.

그렇게 아름답게 꾸민 집은 처음 보았습니다.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부잣집은 댈 것이 아닙니다.

집도 멋지고 정원도 아름답고 어머니가 평생 모은 장식품과 가구들이 너무 조화롭고 완벽한 집이었습니다.

천국 같은 집이라고 해도 좋을 듯 싶더군요.

강주0씨가 층층이 방마다 소개하는 걸 아주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게 하나 있었습니다.

그만큼 잘 사는 집을 소개하는 데 그게 하나도 자랑처럼 느껴지지 않는 거예요.

그냥 하나하나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소개할 뿐이지 자랑이 1도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그럴 수는 없잖아요?

내게 남이 없는 게 조금만 더 있으면 아무리 안 그러려고 해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랑하게 되죠.

그런데 그 밑에 댓글을 보니까 저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니더군요.

이런 댓글이 있었습니다.

강주0님의 장점은 어떤 말을 해도 자랑처럼 느껴지지 않아요

강주0씨가 완벽한 사람은 물론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과거 인터뷰에서 강주은씨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자신은 신앙과 삶이 일치되게 살려고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존감이 확고하다는 것이죠.

바울사도는 오늘 대놓고 내가 자랑 좀 하겠다고 합니다.

6,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런데도 바울사도의 말에서 왜 자랑이 느껴지지 않을까요?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 내가 얼마나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인지를 아는 사람은 그런 것 같습니다.

좀 비천해지나, 자랑거리가 넘치거나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죠.

그 차이가 별다르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우리도 그렇게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계시를 점점 더 알아가게 되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2) 또 바울은 하나님의 그 사랑이 온 인류를 향한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초대교회 당시는 사도들조차 복음이 유대인만을 위한 것으로 알았습니다.

사도행전10장에서 이방인 로마장교 고넬료에게 베드로가 복음을 전했을 때 그들이 성령을 받잖아요?

그때 이방인에게 성령이 임하시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하죠.

45,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바울사도는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예수님께 너를 이방인의 사도로 보내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요한계시록에 요한이 본 환상처럼, 모든 민족과 나라들에서 그렇게 수많은 성도들이 구원받을 것까지는 몰랐을 것입니다.

당시는 예수님께서 멀잖은 시기에 재림하실 것이라 믿었거든요.

바울은 온 인류에 대한 원대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들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로마를 지나 당시 세상의 끝으로 여겼던 스페인까지 가려는 선교계획을 세웠던 것이죠.

바울사도가 본 것과 들은 것을 다 말하지 않은 것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사도를 위한 개인적인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바울사도의 헌신을 굳게 할 바울만을 위한 계시인 것이죠.

그래서 자신이 경험한 이 놀라운 계시를 한번도 말하지 않은 것입니다.

내가 말씀을 잘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기도의 은혜를 누린다면 그것은 그만큼 내가 헌신하도록 주신 은혜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들었던 계시들은 바울과 함께 무덤에 묻힌 것은 아닙니다.

바울이 기록한 열세 권의 신약 성경에 그 모든 것을 다 녹여 놓은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바울사도에게 주신 이 계시들을 서신서를 통해 우리에게도 똑같이 계시해 주시는 것이죠.

바울사도가 서신서에 정리한 신앙의 지식들은 사람의 모든 생각과 인간 종교를 뛰어넘는 독보적인 진리들입니다.

이신칭의가 그런 것이죠.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경험과 머리에서 나올 수 있는 게 절대 아닙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도 자신이 전한 복음은 예수님께 계시로 받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큰 환상과 계시를 바울이 경험했던 것입니다.

놀라운 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대속을 믿는다면 우리도 이 큰 계시를 받은 것입니다.

 

2. 다음은 가시에 대해서입니다.

바울이 그 막중한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게 한 것은 놀라운 환상과 계시가 아닙니다.

바울의 약한 것들, 바울의 가시가 그것을 완수하게 해 주었다는 것이죠.

5,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아니하리라

자신을 약하게 하는 것을 육체의 가시, 곧 사탄의 사자라고 합니다.

7,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에게는 육체를 괴롭게 하는 가시가 있었다는 것이죠.

그 고통이 갑자기 찾아온 사탄의 메신저같이 바울을 공격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가시는 많은 고난 중에 얻은 간질이라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또 안질이다, 바울사역을 힘들게 하는 사람이다, 변화되지 않은 육신의 기질이라 추측하기도 합니다.

바울의 육체의 가시가 무엇인지는 정확히는 모릅니다.

그러나 고린도성도들은 다 알고 있는 약점일 것 같습니다.

바울의 이 약점에 고린도성도들은 의문을 가졌고, 그걸 바울의 대적자들이 바울을 공격하는 빌미로 삼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일꾼이라면 왜 그 병이 낫지 않냐는 것이죠.

단지 바울 자신을 괴롭게 할 뿐 아니라 사역에 걸림이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너무 괴로워서 예수님께 세 번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 기도에 대한 주님의 응답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입니다.

바울은 왜 가시가 주어졌는지를 분명하게 알아 들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가시와 약함을 자랑하게 되었다는 것이죠.

1) 받은 계시가 너무 커서 자만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사도에게 큰 계시를 주시고, 그것으로 인해 자만해지지 않도록 육체의 가시를 주셨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보면 좀 병 주고, 약 주고 그런 느낌이죠.

모세나 바울처럼 하나님나라를 위해 특별히 선택하신 성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은 사탄과 죄인들의 거센 저항을 각오해야 합니다.

웬만큼 무장되지 않고는 바울만큼 큰 일을 해 낼 수 없습니다.

보통 이상의 계시와 능력으로 붙들어 주셔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그 엄청난 계시를 받은 것이 사역자를 교만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돈이 좋다지만 돈이 많다고 사람들이 우러러보지는 않습니다.

종교인의 영적권위는 사람들이 우러러봅니다.

교주에게 평생을 헌신하잖아요?

당연히 돈도 따라오죠.

바울사도라고 뭐가 다르겠습니까?

하나님의 큰 사명을 감당하도록 큰 은혜를 주셨지만 그것이 결국은 사역자를 망하게 할 수 있습니다.

사탄도 천사 시절 그것을 이기지 못했고 아담도 이기지 못했습니다.

바울이 그러지 못하도록 육체의 가시를 주셨다는 것이죠.

우리라고 별 수 있겠습니까?

지금도 이렇게 교만한 데 가시마저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안전장치가 가시입니다.

손톱 밑에서 늘 신경 쓰이는 가시, 가슴에 대못처럼 박힌 가시, 쉴 새 없이 몸을 찌르는 가시, 근심과 죄의 가시.

이것들은 우리가 받은 구원과 은혜를 끝까지 지킬 수 있게 하는 가시입니다.

바울사도는 사탄의 사자를 하나님이 주셨다고 합니다.

우연히 온 게 아니고, 사탄이 제 발로 찾아온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자만하여 큰 파멸에 이르지 않도록 허락하신 게 우리에게 있는 가시라는 것입니다.

 

2) 가시의 유익은 예수님의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지기 때문입니다.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만일 바울사도가 자기 실력과 강인한 성격으로 환상과 계시를 이루려 했다면 분명히 중도에 포기했을 것입니다.

11장에 보면 바울이 당한 고난의 목록들이 나옵니다.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28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이 모든 걸 사람의 힘으로 이겼다는 건 말이 되지 않습니다.

자기의 약함을 알고 주님을 의지했기에 주님의 능력이 그를 붙들어 해낼 수 있게 하신 것이죠.

우리는 내게 있는 이 가시만 없으면 모든 게 잘될 것 같습니다.

가시가 없어도 겸손할 수 있을 것 같죠.

우리는 그렇게 속지만 하나님은 속지 않으십니다.

우리에게서 가시를 빼주시면 내 힘으로만 살아가려고 할 것입니다.

자기 힘만 의지해 살아가는 인생은 자기 능력을 벗어난 위기에 무너집니다.

나의 약함 때문에 예수님을 의지한 성도들은 어떤 위기에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무너지실 리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약한 성도들이 오히려 하나님이 그려주신 인생의 청사진대로 살고, 믿음의 경주와 봉사도 끝까지 해 낼 수 있는 것이죠.

나의 약한 것들이 항상 우리의 고민이죠.

그러나 믿음의 놀라운 역설과 반전은 약함을 아는 성도들이 주님의 능력으로 더 강하게 살아낸다는 것을 아시고 내 약함을 자랑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바울의 서신서없이 우리 신앙의 이치를 명징하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바울이란 한 사람이 하나님 나라와 주님의 교회를 위해 이룬 업적은 평가가 불가할 정도입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큰 계시와 은혜를 주시고, 가시도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도 바울과 똑같습니다.

천국과 지옥을 믿고,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대속을 믿게 된 것은 엄청난 계시를 받은 것입니다.

그 구원과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도록 우리를 약하게 하는 인생의 가시도 주셨습니다.

우리가 약했기에 주님을 의지했고 주님의 강함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교만과 자만으로 만땅 채워진 심령에는 주님의 능력이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가시 돋친 인생이 따갑고 때로 말뚝만한 가시에 고통스럽지만, 이겨냈고 또 이겨내고 있는 것은 주님의 강함이 나를 붙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가시는 영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언제든 또 다른 가시를 주실 수는 있죠.

다만 가시로 인해 우리가 약해질 때 예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의 강함으로 믿음과 삶과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게 되길 간절히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