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한국은행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우리 국민 1인당 평균 자산이 2억5천만원이라고 합니다.
가구당 평균 가족수를 2.3명으로 볼 때 한 집의 자산이 6억이 되는 것이죠.
그것도 없는 나는 어느 만큼 밑바닥 수준으로 살아가는 것일까요?
사실 이 숫자는 재벌의 자산까지 포함한 단순 평균값입니다.
소득액 순서대로 나열해서 딱 중간에 해당되는 중위값은 1억입니다.
그걸 기준으로 하면 나만 가난한 것 같은 상대적 박탈감은 좀 덜 해지죠.
그렇다 해도 당장 통장에 단돈 백만 원도 여유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고달프죠.
돈 이야기, 특히 헌금에 대한 이야기가 교회에서 조심스러운 이유입니다.
고린도교회와 바울사도 사이에서 있었던 갈등은 일단락이 되었습니다.
이어서 바울사도는 바로 구제헌금 이야기를 꺼냅니다.
돈이야기는 관계가 좋을 때도 선뜻 꺼내기 힘들잖아요?
겨우 관계가 회복된 고린도성도들에게 바울은 헌금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도 8장과 9장에서 길고 자세하게 말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온 고린도교회의 은혜가 이웃에 대한 이 구제의 사랑으로 더 온전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이미 고린도전서에서 알려 줬잖아요?
내 돈이 향하는 곳이 내가 생각하는 인생의 목적지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것일까요?
예수님은 돈 이야기를 많이 하셨습니다.
돈은 우리가 진짜 소중히 여기는 곳으로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돈은 누가 진짜 내 주인인지를 말해 줍니다.
오늘 헌금에 대한 설교라 은혜가 안되고 부담이 될 거라 속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미 하나님께 힘껏 드리는 우리 성도님들에게 위로와 큰 은혜를 주시리라 확신합니다.
1. 바울사도는 예루살렘교회에 보낼 구제헌금을 모으고 있었습니다.
언제나 가난한 이웃은 우리 곁에 있습니다.
예루살렘교회는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즈음에 오랜 기근이 있었다고 사도행전은 전합니다.
지금도 한 해만 농사를 망쳐도 농민들은 빚내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나라도 옛날에는 굶어 죽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박경리작가의 소설 ‘토지’에는 1900년 초 기근으로 거리에 아사자들이 널려있었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의 성도들은 게다가 유대사회에서 쫒겨 난 상태입니다.
돈벌이를 할 수 없는 것이죠.
바울사도가 예루살렘 성도들의 굶주림을 신경 쓴 것은 지금이 처음이 아닙니다.
바울이 안디옥교회에서 사역 할 때도 안디옥교회에서 모은 구제헌금을 갖고 예루살렘에 간 적이 있습니다.
이제 선교지에서 세운 교회가 성장하자 다시 헌금을 모으고 있는 것이죠.
예루살렘 성도들의 형편이 나아지지 않았다는 것이죠.
신실한 성도들도 가난하게 살 수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일 년 전에 바울의 권고에 따라 헌금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교회 내의 불미스러운 문제들과 바울과의 관계가 어색해지면서 헌금이 중단된 것이죠.
이제 문제들이 다 해결되었으니 다시 헌금을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먼저 마게도냐에 있는 교회들의 헌금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1절,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2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당시 그리스의 윗지방이 마게도냐고 아랫지방이 아가야입니다.
마게도냐의 교회들은 빌립보교회, 데살로니가교회, 베뢰아교회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아가야지방에 있습니다.
마게도냐는 아가야지방보다 가난한 곳입니다.
같은 로마 식민지였지만 마게도냐는 역사적으로 반역이 많이 일어난 곳입니다.
로마 당국의 차별로 다른 도시들에 비해 낙후된 곳입니다.
우리나라도 과거 지역 차별로 그런 문제가 좀 있었죠.
바울사도는 어려웠던 마게도냐에서는 구제헌금 모금을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4절에 보면 마게도냐에 있는 교회들이 이 모금에 참여하게 해달라고 간곡히 부탁을 했다고 하죠.
4절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마게도냐 성도들은 섬기는 일이 특권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가난 때문에 이런 특권에서도 제외될 수는 없다는 것이죠.
돈이 없어서 면제받는 걸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어느 성도님이 헌금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번 돈으로 평생 빚만 갚다가는 평생 연보 못한다구요.
마게도냐 성도들 마음이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동참시켜 줄 것을 간절히 구했고 힘에 지나도록 헌금을 모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헌금의 액수가 많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형편으로 볼 때 최선을 다했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1절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은혜를 주셨기 때문인 것이죠.
여기서 우리가 물질을 나눌 수 있는 비밀을 발견하게 되죠.
내 돈을 남에게 거저 준다는 것은 정말 기적이고 뭔가 비밀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도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나 많이 받았습니까?
7절에 보면 믿음과 말과 지식이 풍성했다고 하죠.
일 년 반 동안 바울사도의 목회를 받고 은사도 많이 받았던 교회잖아요?
고린도는 잘사는 항구도시인 만큼 교회 안에는 부자 성도들도 꽤 많았습니다.
바울사도는 마게도냐 성도들이 환난과 가난 중에 기쁘게 이 연보에 동참했다는 이야기를 왜 하는 것일까요?
경쟁심을 자극하기 위해서는 아닐 것입니다.
믿음의 순종은 나 혼자만 희생하는 것 같으면 힘이 빠집니다.
어려움 중에 있는 게 뻔한 데도 하나님께 최선을 다하는 다른 성도들을 보며 힘을 내게 되는 것이죠.
우리의 선한 행위가 교회와 가족과 이웃에게 그런 힘을 북돋울 수 있기를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2. 성도들의 헌금은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자선도 적선도 기부도 아닙니다.
바울은 마게도냐성도들의 예를 들고 이어서 두 번째 구제헌금의 타당성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9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헌금에 앞서 전제되는 것은 은혜입니다.
먼저 큰 은혜를 받았기에 내 힘껏 받은 은혜를 하나님께 돌려 드리고, 이웃에 흘려 보내는 것이죠.
은혜를 알기 전에 드리는 헌금은 의무나 부담이거나, 안전과 풍요를 구하는 기복의 의미가 더 많이 들어가죠.
바울사도는 헌금을 하기 전에 우리에게 주신 예수님의 은혜를 먼저 기억하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창조주로서 아버지와 함께 모든 존귀와 영광을 가진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것을 다 내려놓고 성육신하시고, 가난하게 33년을 사셨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기 위해 스스로 가난하게 되신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거지였잖아요?
껍데기 인생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게 하시려고 가난하게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 속한 모든 영광이 이미 전부 다 우리에게 옮겨진 것입니다.
마치 주님의 피가 우리에게 몽땅 수혈되어 우리가 살고 주님이 죽으신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입니다.
우리 믿음이 온전해질수록 내 형편과 상관없이 정말 이 넘치는 부요를 누리며 살게 됩니다.
무언가 넘치기에 흘러 나가게 되는 것이죠.
예수님은 지금도 헐벗고 가난한 자들을 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TV 뉴스에서, 공익광고에서, 인터넷 기사에서 보는 그것을 하나님도 보고 계십니다.
그 눈길이 가난한 나를 향하셨던 똑같은 눈길이시잖아요?
그렇기에 우리가 적선이 아니라 주님의 그 사랑으로 결핍이 있는 이들에게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 구제가 동반되지 않았던 적이 없습니다.
어느 세상 종교가 사람 사회에 들어갔더니 삶이 개선되고 정의롭고 풍요로워진 걸 본 적이 있으십니까?
세상 역사를 보면 그런 예가 없습니다.
복음이 들어가면 개인이든 국가든 변합니다.
예수님이 부요하게 하신 모든 것이 성도들을 통해 흘러가기 때문이죠.
물론 이런 긍휼사역에는 결정적인 장애물이 있긴 합니다.
우리 인색한 본성이 선한 일을 방해한다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나 아닌 다른 사람의 고통에 공감한다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식일지라도 그 고통을 부모가 똑같이 느끼지는 못합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처음부터 완벽한 조건에서 남을 도우려 하면 시작하기도 힘듭니다.
기부천사 가수 션의 기부는 매일 만원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결혼할 때 아내와 매일 만 원씩 모아 기부하기로 약속했다고 합니다.
그때 생각엔 그저 우리에게 필요한 그릇을 다 채우고 남은 만큼만 흘려 보내자였습니다.
그런데 하다 보니 남을 돕는 금액이 점점 많아지게 된 것이죠.
왜냐하면 자기를 위하는 행복의 그릇이 작아져서 조금만 가져도 금방 채워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남는 게 더 많으니 더 많이 흘려보낼 수가 있었다는 것이죠.
우리의 행복 그릇에서 하루 천 원씩은 덜어도 되지 않을까요?
매일 천 원씩을 봉투에 넣었다가 한 달에 한번 의미있게 사용하는 것도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이 되겠죠.
예수님의 부요함으로 우리 삶이 넘치고 주님의 눈이 향하는 낮은 곳에 흘려보내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3. 어려운 성도들을 돕는 것은 주님의 교회를 균등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고린도성도들 가운데는 이 구제헌금에 대해 부정적인 사람이 있었습니다.
사람들 마음이 다 다르잖아요?
마게도냐와 아가야에서 모은 돈으로 예루살렘교회 배만 부르게 한다는 말도 나왔을 것입니다.
그거에 대해서 바울사도는 분명히 말씀합니다.
13절,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균등하게 하려 함이니
하나님이 세상에 대한 생각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모두가 필요한 만큼 갖고 공평하게 잘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창출된 이익은 사람마다 차지하는 양이 다릅니다.
성도들만은 세상과 다르게 모두가 균등하길 원하신다는 것이죠.
하나님의 이 생각은 성령강림의 오순절 사건을 겪었던 초대교회에서 실제로 실현되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풍족한 성도들이 자기의 소유를 교회로 가져와 가난한 성도들을 챙겼던 것이죠.
하나님은 그때나 고린도후서 당시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으십니다.
바울사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더 이전에서 찾았다고 합니다.
15절, 기록된 것과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이게 어떤 사건에 대한 기록일까요?
출애굽기16장에 기록된 만나 급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6절,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사람 수효대로 한 사람에 한 오멜씩 거두되 각 사람이 그의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거둘지니라 하셨느니라
17절,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18절,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
농사를 못 짓는 광야 40년동안 하나님은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매일 새벽에 만나가 서리처럼 진 주위에 내렸다고 하죠.
만나는 하루 먹을 양만 거두라고 하십니다.
일인 당 한 오멜씩이라고 하죠.
한 오멜은 2킬로가 좀 넘는 양입니다.
하루에 2킬로 양식이면 장정들도 충분했을 것입니다.
만나를 거두러 어른들이 나갔겠죠.
나가서 가족 수에 맞춰서 적당량을 거둬오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좀 많이 거두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좀 적게 거두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장막에 와서 됫박에 채워보니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다 정해진 분량만큼이었다는 것이죠.
기적입니다.
만나는 다음날까지 두면 벌레가 생겨서 못 먹게 됩니다.
아꼈다가 다음날 보니 실제로 벌레가 생겼습니다.
어차피 못 먹을 것이니 남는 것을 모자란 사람에게 주어서 다 똑같이 먹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만일 그랬다면 만나로 장사하는 사람도 생겼을 것 같습니다.
게으른 사람은 새벽에 나가지 않고 느즈막히 일어나 돈 주고 사 먹었겠죠.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정해진 양만큼 만나를 주시는 기적을 일으키셨다는 것입니다.
만나는 영적으로는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을 상징하지만 현실로도 생명의 양식입니다.
동일하게 인당 한 오멜 씩 주신 것은 하나님 나라의 원칙인 균등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 원칙이 다윗에게서도 나타납니다.
다윗이 적을 치러 나갈 때 힘없는 병사들은 남아서 짐을 지키게 합니다.
대승을 거두고 돌아온 다윗이 전리품을 나눌 때, 나가서 싸운 병사나 짐 지킨 병사나 똑같이 분배하는 이야기가 사무엘서에 나옵니다.
나가서 싸운 사람들이 불평했겠죠.
다윗은 그들을 꾸짖고 그 방침을 아예 법제화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세례요한이 또 반복하죠.
‘옷 두 벌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눠주라’
그러니까 성경은 계속해서 같은 원리를 우리에게 전해 주는 것이죠.
물론 여기서 균등하게 한다는 것은 모든 성도들이 재산을 합쳐서 똑같이 나누라는 것은 아닙니다.
14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죠.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
예루살렘 교회의 형편이 좋아지고, 너희 형편이 나빠졌을 때가 올 거라는 말이 아닙니다.
언제 그런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그때 너희가 돌려 받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교회와 예루살렘 교회는 각자가 더 가진 것을 나눠 균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가 물질을 나눴다면 예루살렘교회는 모교회로 남아서 여러 가지 신앙적인 부분을 돕는 것입니다.
성경은 교회는 주님의 몸이고 모든 교회는 한 몸이라고 합니다.
교회 안에서 혹은 밖에서 서로 남는 것으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서 주님의 몸을 균등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교회를 위한 성도들의 봉사와 헌신이 그런 것이잖아요?
어떤 성도들이든 자신에게 가능한 것으로 섬기고 봉사함으로 교회가 모나지 않게 성장하는 것이죠.
설령 아무 것도 나눌 게 없는 연약한 성도라 할지라도 그냥 사방에서 채워주는 것으로 균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가장 아름다운 교회의 모습이 아닐까요?
우리교회가 그런 모습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데 감사를 드립니다.
4. 바울사도가 헌금에 대해 격려하는 9장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이런 나눔에 대해서 하나님은 어떻게 성도들을 축복하시는지 보증하는 말씀들을 제시합니다.
8절,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은혜, 모든 일,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
바울사도가 이 구제헌금 하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 최선을 다해 설명하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 덜어 주었다고 내가 궁핍하게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넘치고 넉넉하게 하신다는 것이죠.
예수님이 하셨던 말씀을 떠올리고 하는 말입니다.
누가복음 6장 38절,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이번엔 시편 말씀을 인용합니다.
9절, 기록된 바 그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예수님의 마음을 갖고 헌신하는 성도들이 복 받기를 바울사도는 열심히 축복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가장 아끼는 돈을 믿음으로 내어놓는 성도들이 얼마나 귀하고 고마웠겠습니까?
돈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사역을 도왔던 경제인들이 많았잖아요?
마게도냐 첫 성인 빌립보에서 하나님은 사업가 루디아를 제일 먼저 만나게 해 주셔서 사역에 함께 하게 하셨잖아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도 사업가였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 중에는 바울을 돕던 부자 재무관 에라스도가 있습니다.
지금 그리스의 고린도에 가면 바울 당시 옛고린도 유적지를 볼 수있습니다.
그때 조성했던 도로의 경계석에 도로를 깐 사람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아주 선명하게 재무관 에라스도라는 글귀가 남아 있습니다.
개인이 도시의 도로를 깔 정도로 부자였다는 것이죠.
바울사도는 구제헌금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에게 이들처럼 더 많은 섬김의 복을 주시길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주님을 섬기기에 똑같은 복을 주시길 축원드립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에 대해서는 각별하지만, 가난한 형제들을 돕는 일에는 쉽게 마음이 열리지 않는 편이죠.
한 원로 목사님이 젊을 때 작은 교회에서 열린 세미나에 참석했습니다.
회의가 끝나고 어려운 그 교회를 위해 헌금하자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선뜻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 헌금이야?
그래서 주머니에서 천원짜리 한 장을 꺼내 헌금 바구니에 넣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돈을 넣으려는 순간, 이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는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너무 두렵고 부끄러워 가진 것을 다 꺼내 헌금바구니에 넣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형제를 섬기는 것은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도 이 구제헌금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이라 말씀합니다.
12절,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은 받지 아니하시리라
남을 위해 아무 것도 희생하지 않는다면 주님께서 안타깝게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내가 네게 준 것이 그렇게도 없더냐, 네 마음의 인색함 때문은 아니더냐.
우리 성도님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은 교회 안팎의 선한 일을 위해 사용됩니다.
지금은 교회 운영에 사용하는 데 주로 사용됩니다.
그 외에 작은 선교사역과 장학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교회 형편에 따라 주님의 몸을 균등하게 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성도님들의 수고와 헌신으로 우리교회도 계속 선한 일에 힘쓰는 교회가 될 것을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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