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하

엘리야와 로뎀나무 (열왕기상10장1절-10절)

남수연 2012. 7. 24. 12:03

얼마 전 교과서에서 0종환의원의 시를 삭제 할 것이냐로 논란이 있었죠.

흔들리며 피는 꽃이라는 시입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날마다 흔들리는 삶을 사는 연약한 인간의 마음이 어떤지 너무나 공감이 가는 시입니다.

아무리 강해 보이는 사람도 흔들리고 떨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주인공인 엘리야선지자도 지금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는 지친 몸을 로뎀나무 아래 누이고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인도와 사랑을 다 잊을 정도로 낙망해서 주저앉을 때가 참 많지요.

오늘 하나님은 강한 선지자 엘리야의 낙망한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귀한 교훈을 주실 줄 믿습니다.

이 피로사회에서 모두 과로와 염려와 우울에 빠져 탈진해 가고 있지만 우리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공을 나는 독수리 같은 활기를 되찾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먼저 엘리야선지자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가장 위대한 선지자라면 아마 모세와 엘리야를 꼽을 것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이집트 노예에서 탈출시킨 영웅이고 엘리야는 타락한 이스라엘의 영적회복을 위해 우상종교와 혼자 맞서 싸웠던 선지자입니다.

엘리야는 분열왕국 때 북쪽 이스라엘 선지자로 최악의 왕 아합이 통치하던 시대에 활동했습니다.

아합왕은 이웃나라 시돈의 공주인 이세벨을 아내로 맞이하고 이세벨의 종교를 따라 이스라엘에 공식적으로 바알 신당을 세우도록 허용합니다.

그렇잖아도 하나님의 법도를 버리고 타락한 이스라엘은 난잡한 우상 종교로 인해 종교적, 사회적으로 심각하게 부패한 국가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때 엘리야선지자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이스라엘에 3년 반 동안 비와 이슬이 내리지 않을 것을 경고합니다.

그들이 받아들인 바알신이 ‘비와 이슬의 주인’으로 불리웠기 때문입니다.

불과 두어 달 비가 오지 않는 데 오산 텃밭이 완전 타들어가는 현장을 보고나니 농사에 비가 얼마나 절대적인지 실감이 나더군요.

3년 반 동안 가뭄으로 이스라엘 형편이 얼마나 처참했겠습니까?

그러나 아합왕은 하나님께 회개할 생각은 않고 가뭄의 저주를 내린 엘리야만 죽이려 찾아다녔습니다.

삼년 반 뒤 나타난 엘리야선지자는 이방종교를 척결하기 위해 바알제사장 450명과의 공개적인 영적 대결을 제안합니다.

갈멜산에 각각 제단을 쌓아 제물을 올려놓고 기도할 때 하늘에서 불을 보내제물을 불사르는 신을 진짜 신으로 인정하자는 것이죠.

아합왕과 이스라엘 온 백성들이 둘러 선 가운데 벌어진 영적 대결에서 바알제사장들은 물론 실패했고 엘리야의 기도로 하늘에서부터 불이 내려와 제물을 불태웠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백성들은 여호와가 하나님시라 엎드렸고 엘리야를 도와 바알제사장들을 척결합니다.

그리고 엘리야가 비가 내리기를 간절히 기도하자 장대 같은 소나기가 쏟아지는 큰 사건이 바로 오늘 본문 앞 장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얼마나 박진감 넘치고 통쾌한 믿음의 승리입니까?

그런데 오늘 이어진 본문에서 분위기가 영 딴 판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1절에 보니 그 날 사건에 놀라고 기가 질린 아합왕이 왕비인 이세벨에게 자초지종을 고해 바치죠.

이세벨은 바알종교를 들여오며 하나님의 제사장들을 대거 죽여 버린 잔인하고 악한 여자입니다.

바알사제들의 몰살 소식을 듣고 노기등등하여 엘리야선지자를 잡아 죽이겠다는 전갈을 보낸 것입니다.

이 이세벨의 협박에 엘리야가 도망쳐 죽음을 구하며 누워버린 것입니다.

일대 450으로 영적 대결을 승리한 위풍당당한 엘리야는 간 곳이 없습니다.

왕비의 폭탄선언을 듣고 벌벌 떨며 도망을 치는 데 국경을 넘어서 유다나라 그것도 제일 먼 남쪽 끝 브엘세바 까지 갑니다.

당시 이스라엘왕과 우호적인 유다왕이 혹시 자기의 신병을 넘겨줄까 두려웠는 지 아예 인적이 없는 광야로 하룻 길이나 더 들어갔다고 본문4절은 기록합니다.

도망 친 거리는 무려 2백킬로가 넘습니다.

서울서 전주 정도 까지 간 것입니다.

불과 성경 한 장을 사이에 두고 급반전 된 엘리야의 모습에서 우리는 야고보서의 기록대로 그도 역시 우리와 같은 성정을 지닌 연약한 인간이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위대한 엘리야도 믿음이 흔들리는 데 우리가 자주 낙담하는 게 당연하기도 하겠지만 그렇게 적용하자는 게 아닙니다.

믿음은 위기 때 더 필요한 것 아닙니까?

우울과 탈진은 사람 살 의욕 조차 버리게 합니다.

엘리야는 믿음의 낙망으로 죽을 것 같은 심신의 탈진을 경험하게 되었고 그가 쌓았던 대 선지자로서의 명예에도 큰 오점이 남았습니다.

성도들은 믿음 위에 굳게 설 때 영적인 축복과 육적인 축복과 심령의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오늘 엘리야의 실패와 회복을 살펴보며 낙심한 우리 마음을 추스르고 우리를 소진시키는 우울감에서 벗어나 승리의 기쁨을 누리게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먼저 엘리야의 실패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첫 째는 사역의 긴장감으로 인해 심신이 지쳤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읽어보면 엘리야는 완전 탈진 즉, 번 아웃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일을 성취한 뒤 오는 급격한 탈진을 엘리야 증후군이라 부릅니다.

우울한 것에 끌리는 인간 본성 때문에 생기는 우울증이나 호르몬의 영향으로 생기는 우울증과는 좀 다른 이유이죠.

이 탈진 증후군이란 것은 업무나 학업이나 다른 한 가지 목표에 지나치게 몰두할 때 생기는 극심한 불안이나 피로를 말합니다.

목표에 몰입하느라 쉬지 못하고 쌓인 스트레스를 해소하지 못할 때 자주 발생합니다.

우리 몸은 스트레스를 받으면 신장에 붙어 있는 부신에서 스트레스를 완화시키는 코티솔이란 호르몬을 만든다고 합니다.

스트레스가 계속되면 쉴 새 없이 코티솔을 생성하다 부신 기능이 완전히 고장나는 것입니다.

이 때 쉬어주지 않으면 세포가 정상기능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음식을 먹어도 에너지가 되는 게 아니라 피로 물질로 몸에 쌓여 극도의 피로감을 느끼며 탈진되는 것이죠.

과다 수면이나 무기력감이 대표적인 증세인 데 본문의 엘리야가 딱 그 증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극심한 스트레스를 참고 일을 끝낸 다음 갑자기 탈진해 쓰러지는 것을 주변에서 실례로 종종 보게 됩니다.

곧 개봉 될 도둑들이란 영화를 찍을 때 김0수씨가 손목을 수갑에 채운 상태로 물 속에 가라앉은 자동차 안에 있는 장면을 찍은 뒤 탈진 해 쓰러졌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수갑을 차고 차에 갇힌 채 수중촬영이라니 생각만 해도 숨이 막혀오는 것 같죠.

겨우 겨우 극도의 공포 속에서 촬영을 끝냈지만 결국 육체도 정신도 탈진되고 만 것입니다.

개그맨 김0진씨의 경우 한창 인기 있을 때 일주일에 일억을 벌었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 번 뛰고 나면 심각한 탈진이 오는 게 너무 무서워 살기 위해 일억을 포기하고 출연을 거절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선교지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도 종종 탈진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테러의 협박을 끊임없이 받게 되는 위험한 지역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이나 아무리 열심히 사역을 해도 열매가 없을 때 심각한 탈진과 우울증을 겪게 된다고 합니다.

제가 아는 인도선교사님도 일 년에 한번 씩은 한국에 돌아와 재충전하고 돌아가야 할 정도로 우울감을 자주 겪고 있습니다.

엘리야의 경우 혼자 수 백명을 상대한 영적 싸움을 마친 뒤에 심신이 매우 지쳐있는 상태였습니다.

우리도 직장 일에 몰두하거나 부담되는 일로 전력을 다하고 나서 가벼운 탈진을 느낄 때가 종종 있습니다.

끊임없이 은근히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이라면 탈진보다는 누구나 우울 증세를 보이게도 됩니다.

원치 않아도 약해지면 걸리게 되고 또 잘 쉬면 쉽게 낳기 때문에 우울증을 마음의 감기라고 부르기도 하죠.

우리가 우울하고 탈진되지 않으려면 지나치게 과로하거나 지나치게 신경을 쓰지 않도록 일의 완급을 잘 조절하며 적당한 휴식을 취해야 합니다.

육체를 입고 있는 우리는 믿음만으로 삶의 스트레스와 피로감을 항상 이겨내는 데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육체적, 정신적, 영적으로 고갈 될 때 까지 자신을 내몰지 않도록 우리를 잘 관리해야 할 줄 믿습니다.

건강한 육체도 건강한 영혼만큼 소중합니다.

한 가지 일에 몰두해서 생기는 우울증은 의외로 다른 일을 병행하면 사라지기도 합니다.

한 음악가가 극심한 우울증으로 치료를 받고 있었지만 차도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병원에서 집에 돌아가던 중 타이어에 펑크가 났습니다.

차에서 내려 장비를 꺼내고 차를 들어 올리고 땀을 뻘뻘 흘리며 1시간 넘게 타이어를 교체하고 일어나는 순간 그의 우울증이 씻은 듯이 사라지는 것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정신적인 일의 스트레스에는 때로 육체적인 작업과 운동이 도움이 됩니다.

물론 육체적으로 과로하는 분들은 몸을 쉬게 하는 게 급선무겠죠.

우리 에너지가 다 고갈 되고 탈진되기 전에 적절한 휴식과 마음을 즐겁게 할 힘을 공급해 주는 것이 지혜인 줄 믿습니다.

내 상황을 바라보면 쉽게 쉴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지지 않는 게 문제죠.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소중히 여기시듯 나 자신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나를 위해서 때로는 돈을 포기하고 일을 포기하고 집착을 포기하는 것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울한 골방에 나를 가둬두지 말고 기계처럼 나를 계속해서 돌리지 말고 나를 돌보고 즐겁게 하는 투자도 필요한 것이죠.

지금 우리가 가난하든 부요하든 하나님은 우리가 감사하며 누릴 만큼은 이미 공급해 주셨습니다.

내 주변을 둘러보면 정말 받은 것이 너무 많지 않습니까?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재능도, 건강도, 아쉬운 대로 쓸 만큼 물질도, 생각해 보면 필요한 만큼 다 채워주셨습니다.

전도서5장 19절은 말씀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그에게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제 몫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지금 현실에서 감사한 마음으로 즐거움을 찾지 못한다면 어떤 성공을 이루어도 마찬가지로 행복을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청년들도 혼자 있을 때 행복한 청년들이 결혼해서도 행복한 것입니다.

혼자 있을 때 불행한 사람이 결혼한다고 행복해지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결혼 상대를 고를 때 고려하십시오.

현실을 고통이라 해석하지 말고 얼마든지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해석하면 지금 당장도 작은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을 줄 믿습니다.

항상 즐거운 마음을 갖고 지나친 과로로 몸과 정신을 학대하지 말고 지금 내게 주신 생활 속에 감사함으로 작은 기쁨을 누리시면 영육간에 건강한 삶을 주시리라 확신합니다.

 

두 번 째 이유는 환경만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3절을 보면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도망하기 시작했다고 말씀합니다.

역시나 우리가 늘 하는 것처럼 나빠진 형편만을 계속 바라보았다는 것이죠.

현실만을 바라보고 우리의 주특기인 부정적으로 판단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와 불신자의 차이가 뭐겠습니까?

물론 우리도 상식과 이성과 논리로 상황을 판단하고 대응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런 환경 너머에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다는 믿음이 있지 않습니까?

덜컥 겁부터 먹고 우왕좌왕 할 일이 아니라 전능하신 아버지께 가야죠.

어떤 위기나 다급함 중에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게 바로 우리의 능력이고 영적 실력인 것입니다.

엘리야는 목숨을 걸고 수행한 영적 싸움의 결과로 이스라엘에 큰 회개가 일어나고 종교개혁의 단초가 될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기대했던 영적 부흥은 커녕 악은 더욱 득세하고 오히려 자신의 목숨이 위태롭게 된 걸 보았습니다.

절박한 환경에만 집중한 순간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최선을 다해 달렸는 데 여전히 바뀌지 않는 현실을 바라보면 어느새 슬그머니 실망과 함께 불신이 올라오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죽이겠다는 이세벨의 협박에 왜 그렇게 심각한 병적 반응을 보였겠습니까?

그는 3년 반 기근을 예언하고 그 기간 동안 아합의 칼을 피해 숨어 지내야만 했습니다.

성경은 아합이 엘리야를 찾으러 다니지 않은 나라가 없다고 말씀합니다.

항상 누군가가 내 목숨을 노리는 상황이 얼마나 긴장과 두려움이겠습니까?

이제 모든 위험이 끝났다 생각했는 데 또 다시 생명의 위협이라니, 갑자기 맥이 탁 풀리고 더 이상은 못하겠단 마음이 들만도 하죠.

겨우 겨우 한 고비를 넘었는 데 여전히 우리 앞에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산적해 있을 때 하나님을 불신하며 탈진하고 우울증에 빠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조0기목사님도 여의도에 교회를 지으실 때 어마어마한 일을 벌여놓았지만 오일쇼크로 은행들이 문을 닫고 대출이 막혀버린 것입니다.

공사대금 내놓으라는 인부들이 벽돌을 들고 덤비면 도망치고 매일 시달리다보니 극심한 우울증이 왔다고 합니다.

집에 들어가면 아이들이 배고프다고 울며 밥 달라고 합니다.

내일 밥을 주겠다고 달래보지만 어린 자식들이 당장 내놓으라고 떼를 쓰며 울어댑니다.

너무 마음이 상하고 스트레스가 폭발해 아들을 한 대 때렸더니 김성혜사모님이 나를 못 때리니까 애를 때리냐며 대들었다고 합니다.

흥분한 조목사님이 내가 너를 왜 못 때리냐며 사모님을 때렸는 데 그만 코에서 피를 흘리며 울며 친정으로 돌아갔던 시절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궁지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우울증을 이기고 결국 어려운 교회 건축을 끝낸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언제든 이런 지치고 낙망할 여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욥기 5장 19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엘리야가 또 다시 위기가 닥치는 순간 어제 불을 내려 주셨던 그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왜 하나님이 엘리야를 죽게 두시겠습니까?

왜 하나님이 자녀인 우리를 진창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삶을 살게 하시겠습니까?

사실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려했다면 당장 잡아갔어야 합니다.

이미 많은 백성들의 마음이 엘리야에게 넘어갔으니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밤 어쩌면 엘리야가 알아서 도망가 주길 바랐는지 모릅니다.

이세벨은 속으로 엘리야를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의 권세를 양도받은 성도들을 두려워하는 걸 믿으시기 바랍니다.

설령 귀신들린 자 옆에 서도 우리가 떠는 게 아니라 귀신이 떠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협하는 마귀의 세력은 이미 우리 주님의 손에 패배한 존재들이고 주님께 순복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를 환경과 질병으로 낙망케 하고 위협을 해도 결코 우리를 넘어뜨리지 못한다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시편 89장 22 원수가 저에게서 강탈치 못하며 악한 자가 저를 곤고케 못 하리로다

엘리야는 급반전 된 상황에 대해 먼저 하나님의 뜻을 물었어야 했습니다.

우리에게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다른 일들이 벌어졌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엘리야의 사역은 신약시대 세례요한의 사역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세례요한의 사역이 사람을 구원하는 게 아니라 죄를 꾸짖고 마음을 돌이켜 메시야를 대망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엘리야의 역할도 백성들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으로 끝이라는 얘기죠.

구원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자신의 사역을 통해 이스라엘이 단숨에 회개하고 돌아올 것을 기대했지만 절대로 마귀가 백기 들고 포로들을 쉽게 내 주지 않습니다.

한 번의 깜짝 놀랄만한 이적으로 이스라엘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은 사역자의 로망일 뿐입니다.

인간이 그리 순순히 하나님께 돌아온다면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 고통스런 죽음으로 불순종한 우리 죄를 담당하셨겠습니까?

우리가 여기 앉아 있는 것 순순히 한 번에 돌아온 것 아닙니다.

엘리야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어디까지 인지 몰랐고 하나님의 뜻을 앞서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믿을 때 내가 좋아하는 식으로 인도해 주시길 바라는 마음이 있죠.

그러나 신앙생활에서 종종 경험하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 우리 생각과 언제나 많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내가 인생의 계획을 짜고 하나님께 사인하라고 내미는 게 보통 우리들의 기도입니다.

확신하건데 우리가 세웠던 계획대로 하나님이 응답하셨다면 우리는 반드시 지금보다 더 실패한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지금 당장의 환경만 바라본다면 낙심하고 탈진해 쓰러지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항상 최선의 계획을 갖고 계시고 그 길로 인도해 가심을 믿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그렇다면 엘리야는 어떻게 이 탈진에서 회복하게 되었는 지를 살펴보겠습니다.

5절에 엘리야가 하나님을 찾지 않자 하나님이 엘리야를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스스로 믿음으로 추스르지 못할 만큼 낙망해 있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주십니다.

사실 거의 대부분 우리가 넘어졌던 자리에서 우리가 스스로 힘을 내서 일어 난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다독이시고 용기를 주시고 손을 잡아주신 것입니다.

엘리야는 로뎀나무 아래 지쳐 잠들어 있습니다.

로뎀나무는 어른 키도 않되는 작은 나무인데 잎이 자잘해서 싸리 빗자루처럼 빗자루로 사용하기도 했던 사막의 나무입니다.

아쉬운 대로 나그네들에게 그늘이 되어주기도 했지요.

광야에서 햇볕도 완벽하게 가려주지 못했을 볼품없는 나무 밑에 잠들어 있는 엘리야의 모습이 참 안되 보입니다.

우리도 지친 몸으로 잠에 떨어져 일어나고 싶지 않은 경험들이 다 있죠.

연애하다 실패한 여자처럼 그냥 한 없이 가라앉아 자고 싶은 마음이 어떤 건지 우리가 다 알고 있습니다.

얼마를 잤는지 천사의 어루만지는 손길에 엘리야가 간신히 눈을 떴습니다.

원어의 뜻을 보면 그냥 깨우려고 만진 것이 아니라 마치 안마를 하듯 그의 몸을 한동안 주물러 주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일어나 좀 먹어라 라고 말합니다.

머리 맡에 하나님의 천사가 직접 구운 떡과 물 한 병이 있었습니다.

우리에겐 천사가 만져주는 힘만이 아닌 음식의 힘도 필요한 것입니다.

에너지가 다 고갈 된 엘리야는 그걸 먹고 다시 누웠다고 말씀하죠.

그의 침체와 탈진이 얼마나 심했는지 천사가 그를 만지는 영적인 신비조차도 그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심신이 지치고 피곤하면 그래서 신앙생활도 잘 하기가 힘듭니다.

밤늦게까지 일하고 예배에 오면 잠이 오기 마련이고 쉴 틈 없이 에너지를 다 쓰고 나면 육신과 감정이 우선인지라 영적인 관심도 떨어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그렇게 대단하게 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티끌임을 아신다고 하지 않습니까?

거창한 계획을 세우고 대단한 포부를 이룰 것 같다가도 낙심하고 곤두박질치는 우리의 연약함과 변덕을 너무 잘 아신다는 것이죠.

한번 넘어지면 또 일어날 생각을 않고 고집을 피우며 눌러 앉아 있으려합니다.

떡과 물을 먹고 여전히 무기력한 잠에 빠져있는 엘리야를 천사는 두 번째 찾아와 음식을 먹이고 하나님의 산인 호렙산으로 가게 합니다.

떡 먹고 물도 마셨으면 일어나야지 무슨 시위라도 하듯이 또 드러 누워버리는 엘리야를 발로 툭 걷어차는 게 아니라 여전히 어루만졌다고 말씀합니다.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천사로 번역 된 이 존재를 성육신하기 전 예수님이라고 해석합니다.

구약시대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자, 하나님의 천사, 하나님의 군대장관 이런 단어들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사실 엘리야를 찾아와 위로하시며 먹이시는 이 하나님의 천사의 모습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 갈릴리로 제자들을 찾아가시는 장면과 비슷합니다.

십자가를 지시는 주님을 버리고 다 달아났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대면하기 얼마나 염치가 없었겠습니까?

제자의 자격도 없다고 생각했던 그들은 다시 고기나 잡으러 가자고 바다로 나가 밤이 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헛수고였습니다.

어느 새 날이 밝아 희뿌연 새벽이 되었는 데 해변가에서 한 사람이 큰 소리로 말을 걸어옵니다.

얘들아, 오른 쪽에 그물을 던져라.

그 말대로 오른 쪽에 그물을 던지자 그물이 찢어질 만큼 고기가 잡혔죠.

그제서야 제자들은 해변가의 그 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임을 알아보고 주님 곁으로 모여듭니다.

이른 아침, 해변가엔 숯불이 피워있고 떡과 생선 몇 마리가 구워지고 있었습니다.

아무 말 못하고 바닥만 바라보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침들 먹어라.

이 장면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사랑을 인격적으로 마음에 느꼈다고 말합니다.

아무리 잘못했어도 때가 되면 밥상을 차려주고 수저를 쥐어주던 우리 어머니 사랑처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다시 일으켜주십니다.

우울감과 탈진으로 지쳐갈 때 하나님 앞으로 나가면 주님이 만지시고 회복시켜주시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위기와 시련마다 낙심한 우리 마음을 이리저리 만져주시고 떡과 물로 우리 영혼을 먹이시고 일으켜 주셔서 여기까지 온 것 우리가 잘 알지 않습니까?

우리 자식들이 벌겋게 열이 날 때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하고 물수건을 갈아주고 이마를 짚어주는 그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부부만 해도 오래 살다보면 그게 잘 안 우러납니다.

남편이 누워 끙끙거리고 앓고 있으면 이마를 짚어주기는 커녕 감기 옮는다고 딴 방으로 가서 눕지 않으면 다행이죠.

남편도 아내도 다 지쳐서 탈진하고 있습니다.

자식도 부모도 피곤으로 지치고 회복 될 틈이 없어 우울합니다.

현대의 피로사회에서 탈진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사실 내 자신을 추스르기도 힘겨운 게 우리 현실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서로 엘리야를 어루만지는 천사가 되어 우리 가족들의 낙심한 마음을 돌아보고 원기를 북돋아줘야 할 줄 믿습니다.

엘리야의 탈진 속에는 항상 혼자였다는 외로움도 한 몫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건강한 가정을 소중하게 여기시고 믿음의 형제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함께 가게 하신 줄 믿습니다.

우리가 신앙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늘 강하게 설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낙망하고 소진되었을 때 하나님은 끝까지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우울감에 빠지고 때로 탈진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반드시 회복시키시고 우리의 갈 길을 끝까지 달려갈 수 있게 도와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다만 주님은 우리를 격려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말씀을 맺습니다.

휴식을 취할 여유도 없이 바쁘고 해야 할 일이 산더미라도 일을 내려놓고 쉴 수 있는 여건과 지혜를 주시길 기도하십시오.

내 스스로 나를 행복하게 하지 않으면 누가 나를 도와줄 수 있겠습니까?

낙담과 우울에 빠질 때 나를 스스로 위로하고 스스로 격려해야 합니다.

시편에는 자기 스스로에게 하는 설교가 아주 많이 있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우리가 힘을 내서 하나님을 바라 볼 때 원기를 회복시킬 말씀의 떡과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의 생수를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아버지께서 반드시 우리를 위로하시고 회복시켜주심을 믿으시고 우울과 권태와 탈진을 털어버리고 감사와 기쁨이 충만한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