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하

사르밧의 기적 (열왕기상 17장8절-24절)

남수연 2012. 8. 15. 18:11

 

지난 번에는 로뎀나무 아래에서 있었던 엘리야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시간적으로 그보다 앞서 일어났던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선지자를 통해 헛된 우상숭배에 빠진 아합왕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수년 간 비와 이슬이 내리지 않을 것을 경고하십니다.

우리가 읽지 않았지만 본문의 앞 부분을 보면 엘리야를 죽이려는 아합왕을 피해 하나님은 엘리야를 그릿시냇가에 숨기십니다.

시냇물을 마시고 아침 저녁엔 하나님이 보내신 까마귀가 떡과 고기를 물어다 줍니다.

요즘 무더위에 지치다 보니 엘리야의 은둔생활이 참 부럽죠?

시원한 계곡에서 하루 종일 물살을 바라보고 아침 저녁 어김없이 까마귀가 날라 오는 음식을 먹습니다.

더운 데 음식 만드는 일이 얼마나 고역입니까?

이런 피서가 있다면 한번 가고 싶으시죠?

재미있는 것은 잡식성 까마귀가 먹고 싶은 걸 꾹 참고 음식을 날라왔다는 것입니다.

마을의 어느 고깃간에서 물어왔을 지 떡은 또 어디서 가져오는 지 알 길이 없지만 하나님은 일용할 양식을 엘리야에게 꼬박 꼬박 보내 주십니다.

사람의 손이 돕지 못할 상황이면 하나님은 동물이건 무엇이건을 통해서라도 우리를 도우시는 줄 믿습니다.

모퉁이돌 선교회 보고에 따르면 중국의 한 전도자는 박해를 받아 감옥에 갇혔을 때 영양실조로 기력이 떨어져 계란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쥐가 오리알을 굴려 와 감옥 안으로 밀어주는 것입니다.

영양실조로 죽어나가기 다반사인 열악한 중국 감옥에서 쥐가 매일 물어다준 오리 알로 전도자가 살아 남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무 것도 기대할 것이 없는 상황에서 그야말로 까마귀의 공수나 다름없는 도움의 손길을 통해 돌보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다고 말합니다.

우리 삶을 돌이켜 보면 때마다 필요한 것을 날라 오셨던 하나님의 손길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음식점을 하는 한 집사님의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단골손님이 떨어져 시름에 잠겨있는 데 아들은 철없이 옆에서 퀴즈 프로를 보고 재미있어 하더랍니다.

퀴즈 문제는 까마귀가 떡과 고기를 물어다 먹인 선자자가 누구냐인데 아들이 엘리야라고 큰 소리로 대답하더랍니다.

그 순간 정신이 버쩍 났다고 합니다.

그동안 까마귀를 통해서 주님이 우리를 먹이셨구나.

하나님이 까마귀를 보내듯 손님을 보내서 먹이신다는 걸 깨닫고 그의 모든 걱정을 털어버렸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 굶게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아멘.

이런 엘리야의 은둔 생활에도 위기가 닥쳐왔습니다.

시냇물도 여러 달 가뭄으로 서서히 말라가더니 바닥을 드러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엘리야선지자를 위해 다음 은신처를 준비해 두셨습니다.

 

먼저 엘리야의 새로운 은신처와 하나님의 인도를 살펴봅니다.

하나님이 제공하신 두 번 째 은신처는 엘리야선지자를 당혹스럽게 했습니다.

9절에 보니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그 곳 과부의 집에 가서 몸을 의탁하라고 하시죠?

짧은 한 절의 말씀이지만 엘리야에겐 황당한 명령입니다.

우선 요단강 줄기인 그릿시내에서 사르밧까지는 지도상의 거리가 백 킬로미터를 넘습니다.

타는 듯한 가뭄에 식량도 없이 아합왕의 추적을 따돌리며 도망하기엔 너무 벅찬 거리 아닙니까?

게다가 이 시돈의 왕은 아합왕의 왕비인 이세벨의 친정아버지입니다.

완전 적진 한 가운데로 들어가라는 말씀이시죠.

시돈은 바알신을 숭배하는 이교도의 나라니 우리 식으로 치면 무당집에 피해 있으라는 것이나 같다고 할까요?

그리고 그의 한 몸을 의탁할 곳은 다름 아닌 혼자 된 여인의 집입니다.

가뭄으로 다들 끼니의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혼자 된 여인이라면 그 형편이 얼마나 더 힘들지 뻔한 일이죠.

또 남자 몸으로 과부의 집에 들어가 투숙한다는 게 마음 편한 일도 아닐 것입니다.

그를 안전하게 보호해 줄 권력이 있고 가뭄에도 식량 걱정 없을 부잣 집에 좀 보내시면 엘리야가 얼마나 마음이 놓이겠습니까?

단 한 가지도 엘리야의 마음에 흡족한 조건이 없는 곳으로 가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얄궂게 느껴졌을지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때때로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하고 이게 뭐지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잘 아시겠어요?

내 기분과 맞지 않으면 당장 불평을 하고 짜증을 내는 게 우리들이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옳으신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사르밧에서의 3년은 엘리야를 갈멜산의 영적 대결에 세우시기 위한 최적의 훈련 장소였습니다.

재정이 넉넉하고 내 주변이 안전하다고 느끼는 순간 신기하게 우리의 믿음은 오히려 힘을 잃기 시작합니다.

갑자기 생각지 못했던 돈이라도 좀 들어오면 금방 우리 마음이 둥실 떠올라 세상을 향해 돈 좀 쓰러 가고 싶은 마음으로 부풀지 않습니까?

야고보서는 엘리야도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만일 엘리야가 삼년을 안전하고 풍족하게 은둔하고 있었다면 오히려 그 스스로 영성을 훈련하기가 더 힘들었을 것입니다.

통에는 겨우 하루 분의 밀가루만 들어있고 길 가 허름한 여인의 집은 결코 그가 은닉할 안전한 처소가 아니었습니다.

열왕기서를 읽으면 엘리야가 참 겁이 많은 사람이란 걸 느끼게 됩니다.

이세벨의 말 한마디에 지쳐 쓰러질 때 까지 도망갔던 것을 보았었죠?

그 이후에도 그의 겁먹은 행적이 열왕기서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집 밖에 어수선한 소리만 들려와도 낯선 발자국 소리만 들려도 바짝 신경을 쓰며 긴장하고 하나님을 바라보았겠죠.

바알숭배의 본산지에 들어 앉아 있으니 영적인 싸움도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선교사들에게도 그 땅을 장악한 귀신들과의 영적 전쟁이 제일 힘들다고 합니다.

이런 악조건에서 엘리야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깨어 스스로를 강하게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죠.

갈멜산에서 바알의 무당 450명을 상대할 때 흔들리지 않을 영적 실력을 쌓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 육체의 본성을 거슬려 괴롭게 하지 않고서는 어떤 유익한 것도 나올 수 없다는 게 영과 육에 공통 된 진리입니다.

자신을 강하게 훈련한 사람만이 영광도 얻고 승리의 기쁨도 누리는 것을 요즘 올림픽 경기를 통해 보게 됩니다.

금메달을 목에 걸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선수들을 보며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아예 죽기로 작정해서 이겼다는 김재0 선수의 말을 들을 때 그가 얼마나 자신을 담금질을 했을까 안쓰럽더군요.

김선수는 1등을 꿈꾸며 매일 11시 11분에 하나님께 기도드렸고 그의 우승의 영광과 감사를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이런 선수들을 보면 수많은 적들과 싸워 이기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왕의 자리에 앉았던 다윗의 고백이 기억납니다.

시편 18장 34 여호와께서 내 손을 가르쳐 싸우게 하시니 내 팔이 놋 활을 당기도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적 전쟁을 가르치십니다.

우리 육신이 불편하고 마음이 불안한 모든 환경들은 우리를 가르치고 훈련시켜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아버지의 섭리 가운데 있는 줄 믿습니다.

선수와 감독이 함께 울고 웃듯이 우리를 가르치시는 주님은 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런가하면 탁구의 김경0선수가 자신의 마지막 올림픽에서 싱가폴선수에게 지고 난 후 철저히 대비하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때론 우리가 삶에 지쳐 주저앉고 싶지만 영적인 원리는 주저앉는다고 결코 편하게 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약해지고 물러서는 순간 오히려 우리를 복잡하고 심란하게 하는 잡다한 문제들이 독버섯 처럼 일어나 우리를 괴롭게 합니다.

참 된 안식은 오히려 우리를 이기게 하시는 주님을 굳게 바라볼 때 옵니다.아무리 힘든 환경이라도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믿음으로 설 때 승리도 있고 평안도 있습니다.

믿음에 있어서만은 긴장을 늦추고 좀 나태하게 있는 게 절대 쉬는 것이 아닌 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청년들이 월급을 받는 첫 일자리를 구할 때까지 걸린 시간은 평균 11개월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힘들여 얻은 첫 직장에서 근무하는 햇수가 평균 1년7개월이라는 통계가 나왔죠.

근무 여건에 대한 불만과 힘든 상황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두는 것입니다.

몸이 편한 것, 기분에 맞는 것만을 선호하며 살고 있는 젊은 세대가 앞으로 험난한 인생을 헤쳐 나갈 것이 걱정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편한 환경 속에 두시고 때로 자존심을 굽히게 하시며 훈련하는 것은 이 세상이 갈수록 만만치 않을 것이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세는 고통당하는 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적으로 신앙의 박해가 많을 것은 물론이고 기후와 환경 파괴로 인해 의식주조차도 안전하게 보장받기 힘든 때가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OECD에 따르면 2030년이면 지구의 절반 이상이 물 부족으로 인한 어려움을 겪을 것이고 곡물 생산이 30%이상 줄어들 것이라고 합니다.

엄청난 재앙이죠.

물 부족은 식수와 곡물생산에만 지장을 주는 게 아닙니다.

물품생산에도 물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청바지 한 장을 만드는 데 필요한 물의 양은 10톤이고 자동차 한 대를 생산하려면 무려 380톤의 물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앞으로 우리의 생존 여건은 지금보다 하루 하루 더 나빠진다고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어떤 환경도 이길 만큼 지혜롭고 강하게 훈련하시는 줄 믿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믿음으로 강해질 수 있습니까?

디모데후서 2장1은 말씀하시죠.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

예수님 안에서만 우리가 강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피조물도 끊을 수 없는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를 생각하고 하나님의 빽을 믿을 때 우리가 강하게 되는 것이죠.

때로 팍팍한 삶에 하나님께서 조금만 도와주시면 일어날 것 같은 데 왜 당장 좀 도와주시지 않나 섭섭할 때도 있습니다.

도와주시기는 커녕 엘리야 곁에서 여인의 아들이 죽었을 때 그가 얼마나 또 황당했겠습니까?

그도 우리처럼 하나님을 향해 속상해 하는 것이 20절에 나타나죠.

내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하는 집에 재앙을 내리십니까?

라는 말 속에 그가 얼마나 환경 속에서 낙담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기도로 여인의 아들을 살리는 기적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담대하게 바알의 선지자들을 대항할 실력을 갖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 안에 있을 때 위기는 놀라운 기회가 되었다는 간증은 너무나 많습니다.

엘리야에게 주신 환경이 그를 위한 최상의 환경이듯 지금 우리의 모든 환경도 주님의 섭리 안에서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고 계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불평하고 낙심하면 이길 수 없습니다.

경기하는 선수의 얼굴에 투지가 없는 걸 보며 얼마나 답답했는지 모릅니다.

주눅 든 얼굴로 환경을 바라보고 낙심해 있다고 누가 도와주는 것 아닙니다.

우리의 투지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감사하며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환경을 통해 다가오는 어둠의 세력을 능히 이기게 될 줄 믿고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드립니다. 아멘.

 

다음은 사르밧의 여인에게 베푸신 은혜를 살펴봅니다.

엘리야가 지친 몸으로 사르밧 성 앞에 당도했을 때 한 여인이 나뭇가지 몇 개를 줍고 있습니다.

12절을 보면 나뭇가지 둘을 주웠다고 하죠.

더 이상의 땔감도 필요치 않은 것은 음식을 만들 밀가루가 한 줌 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떡은 가난한 모자에게 마지막 양식이 될 것입니다.

남편을 앞세우고 남겨진 아들 하나를 키우며 근근히 생계를 이어오던 여인에게 혹독한 가뭄은 이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때 엘리야가 여인에게 물과 떡을 구합니다.

12절에 당신의 하나님여호와라고 말한 것을 보면 여인은 자기에게 말을 걸어오는 엘리야가 하나님의 선지자 라는 걸 알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9절에서 하나님께서 이미 여인에게 엘리야를 공궤하도록 명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어떤 방식인지 모르지만 꿈이든 환상이든 여인은 선지자를 숨기고 공궤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여인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을 것 같습니다.

당장 자식이 굶어 죽어가고 있는 처지에 나그네를 어떻게 공궤합니까?

우리 세대만 해도 가난에 한 입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고 있습니다.

우리 어릴 때만 해도 한 입 덜려고 자식을 수양 딸로 보내고 그랬습니다.

혼자 된 몸으로 길손을 들이는 것도 부담이죠.

게다가 엘리야와 그를 추격하는 아합왕의 이야기는 이미 팔레스타인 땅에 파다하게 알려져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위험한 인물을 숨겨준다는 것은 어떤 화를 불러올지 모르는 일이죠.

엘리야는 여인의 눈에 깃든 이 모든 곤고함과 두려움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두려워말라고 여인을 위로합니다.

가진 것이라곤 참담한 환경 뿐인 절망에 빠진 여인에게 오늘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4장에서 엘리야시대 흉년 중에 하나님이 이 여인에게엘리야를 보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주님이 그 때 엘리야를 이 곳에 보내셨던 것이죠.

하나님께서 누구도 눈여겨 보지 않던 한 여인의 절망을 알고 계셨고 그 생명을 구하기 위해 엘리야를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렇게 하나님이 찾아오신 줄 믿습니다.

여인은 아무 이유 없이 자기를 찾아오신 하나님의 은총에 반신반의하고 있습니다.

쉽사리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연약한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에 확신을 가지시길 축원드립니다.

엘리야는 여인에게 한 줌 남은 밀가루로 먼저 자기를 위한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오라고 말합니다.

아들의 마지막 음식이 될지 모르는 떡을 양보한다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잘못하면 아들 입에 넣어줄 마지막 떡 한 조각을 잃게 되는 상황이죠.

그러나 영원한 떡을 얻기 위해 여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보여야 했습니다.

우리가 영생의 복을 받기 위해 모두 믿음으로 응답한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여정 가운데 더 좋은 축복을 위해 때때로 헌신을 요구하기도 하십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순종한 뒤 기뻐하시며 축복을 주시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여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고 자신의 모든 것인 남은 한 개의 떡을 드리고 영원한 떡을 보장받았습니다.

하나님이 무언가 헌신을 원하실 때 그것은 축복을 위한 기회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우리 삶을 조금씩 하나님의 뜻에 맞춰 나갈 때 반드시 더 나은 환경으로 인도하시고 축복하신다는 걸 굳게 믿으시는 성도님들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아멘.

 

마지막으로 엘리야의 기도로 여인의 아들을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여인의 집에서는 이렇게 특별한 동거가 시작되었습니다.

본문을 통해 엘리야는 가난한 이 집의 다락방에 거처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바알신을 숭배했던 여인이 하나님의 선지자를 섬기는 데 마음에 갈등이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종교를 갑자기 바꾸는 것 쉬운 일 아닙니다.

영적인 문제라 더욱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간섭과 은혜가 있어야 교회에 나오는 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18절에 보면 여인은 엘리야와의 동거를 그리 기뻐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와 함께 할 때 왠지 자꾸 자기의 죄가 생각났다고 말합니다.

영적인 긴장감은 죄성을 가진 우리 마음을 좀 불편하게 하죠.

엘리야를 숨겨준 것이 발각될지 모른다는 불안감도 점점 커졌을 것입니다.

빵 문제가 해결되고 기적이 일상이 되니 현실적인 불편함만 더 크게 보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는 너무나 쉽게 잊어버리고 눈 앞에 작은 불편으로 불평들 해보셨죠?

출애굽 광야에서 하나님이 내려주신 만나로 첫 식탁을 차렸을 때 감격은 한 달이 못되어 맛없고 박한 식물이 진저리가 난다는 불평으로 바뀌었습니다.

우리 식탁에서 감사가 사라지면 아무리 기름지고 특별난 음식에도 행복은 없습니다.

풋고추에 된장을 찍어 먹는 소박한 밥상에서도 내게 음식 맛을 즐길 건강과 소화시킬 능력과 기쁨을 주신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합니까?

그런데 이 불편한 동거를 급반전 시키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중해지더니 숨이 끊어진 것입니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품에 안고 여인은 엘리야를 향해 울분을 쏟아 놓습니다.

자기 속에 있는 이런 죄 때문에 벌을 내려 아들을 죽게 했다는 원망입니다.본문 어디에도 엘리야나 하나님이 아들에게 병을 주고 죽게 했단 말은 없습니다.

성도들이 시험을 당하고 고난을 만날 때 하나님을 의심하는 경우가 종종 있죠.

왜 사업이 망하게 되었나, 왜 병에 걸렸을까, 왜 결혼에 실패했을까 결국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러나 욥기5장7절은 말씀합니다.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 가는 것 같으니라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저주받은 환경과 공중의 권세 잡은 악한 영들의 훼방으로 끊임없이 고통 받는 운명인 것입니다.

우리의 고통스런 환경들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요한복음10장10절에서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곤고하게 하고 기쁨을 빼앗는 도적은 우리 원수인 마귀인 것입니다.죽은 아들은 엘리야의 기도로 살아나 어머니의 품에 안깁니다.

불시에 당하는 시련 속에 우리가 할 일은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 온다 해도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는 죽은 자를 살리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큰 기적을 그저 죽은 아들을 품에 안고 절규하는 평범한 여인을 위해 베풀어 주신 것이 우리에게 은혜가 됩니다.

하나님의 응답에는 조건이 없고 단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만이 있는 줄 믿습니다.

엘리야의 기도로 죽은 아들을 다시 돌려받은 여인은 24절에 고백하죠.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오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생명을 살리시고 죽은 자를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 이제야 완전한 믿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상황에도 기꺼이 응답하시고 기적으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포스코에 다니는 어떤 집사님의 간증을 읽었는 데 참 잔잔한 하나님의 은혜를 느꼈습니다.

이 분은 시골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교회 목사님댁에 머물며 하나님의 은혜를 처음 맛보게 됩니다.

소극적인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전도사님들을 따라 전도하러 다닐 때만은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 지 전도가 큰 기쁨이었다고 합니다.

시골에서 보내주는 빠듯한 생활비가 다 떨어진 어느 날 예배말씀을 기록해 오던 노트에 더 이상 기록할 곳이 없었습니다.

나의 살아계신 하나님, 돈이 다 떨어져 공책을 살 수가 없습니다. 어떻하면 좋죠?

그가 영동대교 아래를 걸어 집으로 돌아가다 둔치에 잠깐 앉았는 데 눈 앞에 빨간 공책 한 권이 강물에 밀려 다가오는 것입니다.

건져보니 코팅한 표지만 약간 젖었을 뿐 아무 것도 적히지 않은 새 노트였습니다.

한 달 뒤 군대에 입대하라는 영장이 나왔습니다.

강원도 춘천에서 강추위 속에 모진 군생활을 시작했지만 하나님과의 교제는 계속되었습니다.

그는 기도했습니다.

나의 하나님, 저 행정병 시켜 주세요. 근사한 행정병이 꼭 한번 되어보고 싶습니다.

서울 명문대를 다니다가 온 군인들이 수두룩한데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에게는 꿈도 못꿀 일이었죠.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신기하게 그는 12사단 작전부서 교육계로 발탁이 되었고 전역하는 순간까지 행정병 업무를 수행했습니다.

전역할 때가 되자 취직이 고민이었습니다.

그러자 전역하기 한 달 전 하나님께서는 포항제철 공채시험에 응시하도록 길을 열어 주셨고 30명의 면접자 중 유일하게 합격통지서를 받았습니다.

14년을 근무하고 그는 또 기도했습니다.

저 현장부서에 가서 한번 일을 해보고 싶습니다. 아버지 보내주세요

그는 에너지센터로 발령을 받을 수 있었고 그가 14년간 근무하던 부서는 1년 후 다른 업체로 넘어갔습니다.

처음 현장부서에 발령받았을 때 너무 낯설고 아는 게 없어 힘이 들었지만 하나님께서 용기와 지혜를 주셔서 모든 면에서 창의력을 발휘하게 해주셨습니다.

부서를 옮기고 난 후 4년밖에 되지 않은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포스코 창립40주년 회장표창' 까지 주셨습니다.

부족하고 보잘 것 없는 자신은 하나님을 위해 한 것도 없지만 하나님은 늘 최고의 것으로 인도하셨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를 잔잔히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가 살아온 뒤를 돌아보면 우리도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충분히 기록할 수 있지 않습니까?

평범한 그에게 깊은 사랑으로 함께 해주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우리와도 함께 하시는 걸 믿으시고 감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본문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끊임없이 일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여정의 한 부분을 기록한 것입니다.

인간의 어떤 죄악 중에도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신실하게 계획을 이루어 가십니다.

사르밧의 가난한 여인을 찾으시듯 우리를 찾아오셨고 모든 죽음과 절망을 끊으시고 영생의 소망과 삶의 축복을 주신 줄 믿습니다.

때로 까마귀를 통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고 때로 험한 세상을 강하게 살도록 우리를 격려하시며 인도하십니다.

좋으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날마다 믿음으로 조금씩 헌신하며 나가는 성도님들께 영육간의 강성한 은혜와 지혜를 풍성하게 부어주시길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