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아만장군의 치유
열왕기하5장9절-19절
오늘 나눌 말씀은 나아만이라는 아람장군의 나병을 엘리사선지자가 치료하는 내용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의 역사서에 기록되기엔 다소 어울리지 않는 사건이 불쑥 들어 있는 느낌이 듭니다.
본문의 역사적 배경은 이스라엘과 아람이 적대세력으로 대치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본장 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적국인 나아만장군을 도와 전쟁에서 이기게 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람을 강성하게 한다는 것은 당연히 이스라엘에게 큰 위협입니다.
이스라엘 편을 들어주셔야 할 하나님께서 갑자기 아람의 군대장관인 나아만의 편을 들어주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편을 잘못 짜고 계신 것 같죠.
이 개인의 치유사건이 역사서 중간에 들어가 있다는 것은 이 사건이 현재의 역사적 사실들과 관련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본문이 믿음으로 기도해서 기적으로 병을 치료받자 단지 그런 의미로 기록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실망하지 마십시오.
기적으로 병이 낫는 이야기도 뒤에 나옵니다.
현재 이스라엘이 아람의 침략으로 비참한 곤경을 당하고 하나님이 아람 편을 들어주는 이유가 뭐겠습니까?
우리가 추측하는 대로입니다.
이스라엘이 왕부터 시작해서 모두가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하고 바람난 여자처럼 가나안의 풍습과 우상숭배로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아무도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또 선지자의 경고도 듣지 않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이방인 한 사람을 택해 사랑을 부어주시고 병을 치료해주십니다.
이 사건을 나중에 예수님께서 누가복음4장에서 거론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고향 갈릴리에서 사역을 시작하실 때 주님의 메시야적 권능과 지혜를 보고도 사람들이 주님을 배척합니다.
그 때 그들에게 이 사건을 말씀하십니다.
엘리사 당시 이스라엘에 수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지만 믿지 않았기에 단 한사람도 고침을 받지 못하고 이방인 나아만장군만 고침을 받았던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마을 사람들이 분노해서 예수님을 몰고 가 낭떠러지에 밀어서 죽이려고 했습니다.
신구약의 두 사건이 종합을 해보면 하나님을 거절한 이스라엘은 구원받지 못하고 이방이 먼저 하나님께 돌아올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이스라엘은 예수님을 거부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 나아만은 장차 구원받을 이방인인 우리를 상징하는 예표의 인물인 것이죠.
우리가 다 나병환자 나아만 처럼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죄로 인해 서서히 죽어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죄야말로 사람을 파멸시키지 않습니까?
아직도 주님을 믿지 않는 분들을 보면 점점 더 악해지는 것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복을 받지 못하는 인간이 얼마나 피폐하게 뒤틀리고 죄에 끌려 살아가는 지 모릅니다.
수평적인 인간관계도 해결이 안되니 늘 갈등과 고통가운데 살 수 밖에 없는 것이죠.
나아만의 나병치료는 단순히 육체의 병이 낫는 기적보다 이렇게 죄로 죽었던 영혼이 치유되고 구원받는 더 놀라운 기적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구원받은 것입니다. 할렐루야.
오늘은 엘리사의 입장이 아닌 나아만의 치료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인 교훈과 은혜를 더 깊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나병에 걸린 나아만장군의 현실을 살펴보겠습니다.
1절을 보면 그는 군대장관으로 아람왕의 신임을 받는 존귀한 자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그에게 그런 자리가 주어진 이유를 밝힙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전쟁에서 승리를 안겨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몰랐습니다. 자신이 왜 성공하는지를.
그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었던 것이죠.
어떻게 우리가 지난 날 그 시련을 이겨냈고, 왜 내게 또 많은 좋은 일들이 일어났습니까?
우리가 아직 하나님을 모를 때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아람의 군대장관으로 왕의 전폭적인 신임을 얻은 존귀한 사람이고 큰 용사였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나병환자더라.
앞에 나온 화려한 경력과 권세와 그가 가진 모든 것들이 이 한마디로 인해 모래바람 너머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것 같지 않습니까?
모든 좋은 것을 가졌지만 그러나.
그러나 뒤에 오는 문제가 우리 인생을 힘들게 하고 허무하게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의 사업은 번창했다. 그러나 자식이 없었다.
그의 인기가 절정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안젤리나 졸리와 브레드 피트의 결혼이 얼마나 세간의 부러움을 샀습니까?
엄청난 돈과 인기와 명성, 뭐 하나 빠질 것 없는 가정이었지만 그러나 졸리에게 유방암과 난소암 인자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스티브잡스는 애플을 작년 한 해 세금 3조원을 내는 공룡기업으로 키웠지만 그러나 그는 췌장암이었다는 것이죠.
우리에게도 이런 ‘그러나’ 다음에 나오는 삶의 어려움이 다 있습니다.
건강, 돈, 가정과 자녀, 직장, 결혼 등등.
이것만 없으면 좀 살 것 같은 데 좀 편해지려다가도 그 생각을 하는 순간 모든 행복이 신기루처럼 사그러드는 그 문제들 때문에 우리가 참 괴로울 때가 많습니다.
나아만이 나병으로 서서히 죽어가는 자신의 몸을 바라볼 때 화려한 명성과 권력이 무슨 소용이 있었겠습니가?
자식이 하나 속 썩이면 다른 자식이 잘하는 게 별로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부부가 불화하면 고급침대가 다 무슨 의미입니까?
나아만이 이런 삶을 살았다는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목하셨고 그를 사랑하고 계셨습니다.
나병으로 나아만장군이 망하지 않았듯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우리는 그러나로 인해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뒤에 또 다른 그러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나쁜 환경과 시련 속에 있다할지라도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다.
그러면 해피 엔딩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나아만장군은 결국 이 나병으로 인해 오히려 하나님을 만나는 축복의 사람이 되지 않습니까?
고통하는 그에게 그에게 뜻하지 않은 희망의 메시지가 날라 옵니다.
저기에 길이 있다.
이스라엘에 병을 고쳐줄 선지자가 있다는 기쁜 소식이 날라 온 것입니다.
전에 전쟁터에서 끌어왔던 여종이 하필 이스라엘 사람이었던 것이죠.
여종이 주인이 흉측한 나병으로 죽어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 여종이 마침 엘리사선지자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아만이 신빙성 없는 여자아이의 정보에 왠지 설레이고 마음이 끌립니다.
이 모든 일이 우연히 발생한 일입니까?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 삶이 바로 이와같이 하나님의 인도로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그 때 생각지도 못했던 사건들이 발생하고 누군가를 알게 되고 그것이 내 인생의 변곡점이 된 일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을 생각도 없었는 데 누군가와의 만남을 통해 이렇게 교회에 나와 앉아있는 것이구요.
잠언 16장 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하나님아버지께서 우리 걸음을 인도하셔서 축복의 자리에 오게 하셨습니다.
그런 주님이 모든 일을 이루시기 까지 우리와 함께 하심을 꼭 믿으시길 축복드립니다.
다음은 나아만장군이 치유되는 과정을 살펴보겠습니다.
나아만은 왕의 허락을 받고 병을 고치기 위해 나섭니다.
본문의 앞 부분을 보면 그가 군대를 거느리고 엄청난 양의 선물을 가지고 엘리사에게 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마음이 설레었을까요?
이제 불치병을 고치고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다는 기대감에 얼마나 두근거렸겠습니까?
병이 낫는다니 생각만 해도 가슴이 터질 것 같았겠죠.
한편 만일 못 고치고 돌아가면 어떻게 하나 불안과 조바심으로 컸을 것입니다.
오래 기대하던 것이 이루어질 조짐이 보일 때 더 불안하잖아요?
그런데 10절에 보니 엘리사를 찾아 간 나아만 앞에 엘리사가 아니라 심부름하는 사람하나가 덜렁 나타나서 말만 대신 전하는 것입니다.
문전박대 당해보셨습니까?
어렵게 말을 꺼냈는 데 너무나 냉정하게 거절당할 때 얼마나 무안하고 마음이 많이 상하는지 모릅니다.
웃으며 전도티슈를 건네는 데 싸늘한 얼굴로 비켜설 때 얼굴이 화끈하고 누가 보았을까 창피한 마음이 듭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위한 일이라지만 문전박대 당하는 기분은 늘 씁쓸합니다.
그러나 더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문전박대를 당한다고 생각할 때입니다.
때로 하나님이 내 형편을 알고나 계시는 지 나를 위한 무슨 계획을 갖고 계신지 막막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문전박대 역시 하나님의 훈련 중 하나라는 것을 우리가 나중에 깨닫게 되죠.
하나님은 절대 우리를 외면하지도 않으시고 잊어버리지도 않으십니다.
지금의 현실과 감정을 보는 게 아니라 그래도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안심하는 것이 문전박대 훈련입니다.
문전박대에 나아만은 울컥 화가 올라옵니다.
약소국 선지자 주제에 아람왕의 친서를 들고 온 자기를 홀대하다니.
게다가 그 자리에서 돌아서서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담그라니.
이게 물에 씻어서 나을 병입니까?
나아만장군이 분을 참지 못하고 돌아서는 것도 이해가 갑니다.
사람들은 다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고정관념을 갖고 하나님을 믿으려합니다.
우리가 기대했던 것, 내가 원하던 결과와 다를 때 나아만과 같이 실망하고 분노해서 돌아서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나아만은 치료하는 방법을 자기 나름대로 추측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알고 있던 미신과 무속행위처럼 신을 부르고 상처 부위에 손을 흔드는 종교적인 주술행위를 기대했던 것이죠.
인간이 다 편견에 사로잡혀있고 자기 생각이 진리인 아성에 갇혀 삽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기 전까지는 나아만처럼 이런 저런 이유들이 다 시험이 되기 쉽습니다.
기대했던 기도응답을 받지 못했을 때 흥미를 잃고 떠나기도 합니다.
교회를 떠난 가나안성도들의 이탈 이유 1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다른 성도들의 모습을 보고 실망해서라고 합니다.
피차 서로를 보고 실망하고 시험에 들어 또 교회를 떠난다는 것이죠.
항상 예수님만을 바라보는 믿음이면 실족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항상 이런 면을 염두에 두고 성도들 간에 예의와 진정성을 갖고 믿음 안에서 교제해야 합니다.
우리교회가 지금처럼 서로를 사랑하고 존중한다면 끝까지 주님이 주인되신 아름다운 믿음의 공동체가 되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이런 편견과 고집과 의심에도 불구하고 일하십니다.
신하들을 통해 나아만을 설득하고 붙잡아 주십니다.
우리도 여러 번 이렇게 해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되지 않았습니까?
결국 그는 문전박대와 고정관념과 실망감을 극복하고 요단강으로 입수하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는 과정에도 이런 과정들을 다 겪게 됩니다.
믿음생활이 일사천리, 승승장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믿음 안에 자신을 던지기로 결정한 나아만이 비로서 요단강에 몸을 씻기 시작합니다.
신약시대 이 요단강은 세례를 베풀던 곳입니다.
자기 인생에 주인이었던 자아가 죽고 하나님이 주인 되신 새로운 나로 거듭나는 것이 세례의 의미죠.
우리가 다 이렇게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나아만에게도 장군의 갑옷을 벗고 죽을 수 밖에 없는 자기의 몸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은혜의 강물에 죄를 씻는 과정이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알몸이 되어 요단강 물에 일곱 번 들락달락 할 때 나아만의 마음이 어땠을 것 같습니까?
옷 속에 감춰두었던 흉한 몰골이 둘러 선 부하들 앞에 다 드러나고 맙니다.
그런 자신을 보고 사람들이 병 좀 나아보겠다고 저런 황당한 짓을 하고 있나 조롱하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약점이고 상처라고 생각하는 것엔 유독 창피와 자격지심을 느낍니다.
누가 뭐래서가 아니라 그냥 조금이라도 그 부분을 건들면 화들짝 놀라고 얼굴이 확 달아오르죠.
아물지 않은 상처처럼 번번히 쓰라린 통증을 느끼는 게 우리의 약점이고 상처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가장 감추고 싶은 상처와 자존심, 끝까지 안고가고 싶은 나에 대한 연민까지 하나님 앞에 내려 놓아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깊은 열등감과 거절감과 실패의 기억을 깨끗이 씻어주실 수 있습니다.
내가 환자라는 것,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하나님 앞과 사람들 앞에서 시인하는 것이 없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우리 연약함과 부족함도 그냥 있는 대로 다 보여주면 살기 편합니다.
그런데 나아만에게 한 번이 아니라 일곱 번을 물에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진짜냐는 것입니다.
진짜가 아니면 끝까지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여섯 번을 인내하고 일곱 번 째 일어납니다.
경제학에서도 티핑 포인트란 말이 있죠.
아무리 자극을 줘도 아무런 변화가 없다가 마지막 한 번 자극에 불현 듯 변화가 일어나는 그 시점을 말합니다.
그 전에 포기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자존심을 내려놓고 여섯 번을 물에 들락달락해도 작은 변화도 없을 때 얼마나 조바심이 납니까?
그러나 마지막 일곱 번 째 순식간에 치료는 일어납니다.
여리고 성을 여섯 번 돌 때까지 벽돌 한 장 떨어지지 않다가 마지막 일곱 번째 바퀴를 돌았을 때 성벽이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린 것과 같죠?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품고 문제를 놓고 기도할 때도 인내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나아만에게는 여섯 번이었지만 우리에겐 몇 달, 몇 년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이 여섯 번의 순종 속에서 우리는 인내를 배우고 나의 무능함을 배우고 하나님이 아니면 안된다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이죠.
네 번, 다섯 번 확신도 없는 일을 지속하고 있는 나를 보고 어느 순간 울컥 눈물이 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지금 뭐하는 짓인가?
과연 이 일이 될까? 전도가 될까?
취업이 될까? 병이 나을까?
나를 보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맡고 계시다는 확신과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최경주선수는 완도의 가난한 섬집에서 태어나 미국 PGA에서 8승을 거둔 자랑스런 한국 프로골퍼입니다.
그는 기도하고 하나님께 맡긴 것은 이뤄지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끝까지 하나님아버지를 믿고 내 삶과 고민과 문제를 의뢰하면 반드시 인도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인내의 시간을 지나면 하나님의 축복의 순간이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사야49장10절입니다.
그들이 주리거나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며 더위와 볕이 그들을 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자가 그들을 이끌되 샘물 근원으로 인도할 것임이니라
제가 평생에 두 가지 병으로 오래 기도를 했었습니다.
축농증과 몸 안에 양성종양을 기적적으로 치유해 달라고 오래 기도했지만 응답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수술을 통해 두 가지 문제가 다 해결이 되는 응답을 받았습니다.
정말 유능한 의사를 만났고 수술도 회복도 완벽했습니다.
무엇보다 수술에 대한 두려움이 없이 그냥 편안하게 모든 것을 마친 과정들이 참 신기할 뿐입니다.
물론 믿음 안에서 얼마든지 기적적인 치유도 일어납니다.
레알마드리드에서 미드 필더로 뛰고 있는 히카도르 카카라는 축구선수가 있습니다.
잘 모르시는 분이 많으니 이렇게 말씀드리면 얼마나 대단한 선수인지 아실 것입니다.
밀란에 있을 때 이적 제의를 받게 되는 데 주급이 10억이었다고 합니다.
확실히 돈으로 하니까 감이 확 오네요.
머리도 좋고 잘 생기고 집안도 좋고 무엇보다 믿음에서 흠잡을 것 없는 선수입니다.
결혼 후 가십거리를 찾으려는 파파라치가 원정경기에 나선 카카를 밀착 추적을 했지만 기간 내내 파파라치가 발견한 것은 공원에서 산책하고 호텔로비에서 성경책 읽는 모습 뿐이었다고 합니다.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들고 하나님께 영광과 기쁨을 돌리는 골세레머니가 유명하죠.
가끔 유니폼을 벗고 속옷에 새겨진 ‘I belong to Jesus' 라는 문구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본래 의사가 되려고 했지만 카카는 축구가 너무 좋아 선수의 길을 선택합니다.
15세에 상파울로 입단 제의를 받고 선수로 발탁되었지만 18세 때 불의의 사고를 당하게 됩니다.
수영장에서 머리가 먼저 떨어지는 바람에 척추뼈 2개가 부러지는 골절상을 당한 것입니다.
의사는 회복율이 2%에 불과하고 나아도 정상적인 생활은 어려울 거라고 판정 합니다.
그에 대한 의학적 판정은 회복불능이었습니다.
그는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축구를 할 수 있게 고쳐 달라고.
그의 선수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1년 뒤 말도 안 되는 장면을 TV에서 목격합니다.
카카가 교체 투입되어 달리는 놀라운 장면과 그가 역전골을 터뜨리는 모습을 보게 된 것이죠.
그리고 정말 아름답고 신실한 모습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지금도 살고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 기적은 우리의 상식이나 똑 같습니다.
그렇다고 기도하는 대로 모든 기적이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기적을 창출할 만한 믿음이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밖에 길이 없을 때, 그래서 우리의 기도가 정말 간절할 때는하나님은 기적으로도 응답하십니다.
다만 우리의 호기심을 끌고 가려운 데를 긁어 줄 목적으로는 아주 작은 기적이라도 절대 일으키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는 큰 기적이나 작은 기적이나 똑같이 원칙에 따라 행하십니다.
제자들이 능력을 받고 나가 귀신도 쫒고 병도 고치고 기뻐서 돌아왔을 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천국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구원받고 천국을 보장받은 것이 어떤 기적보다 더 큰 기적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꾸로 생각하죠.
초자연적인 기적의 절정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거부하던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게 된 이 사실입니다.
우리가 한 일도 없는 데 천국에서 부요하고 만족한 영광스런 삶을 영원히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도 안수기도하면 병이 척척 나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기도의 많은 부분이 단지 귀찮은 일을 좀 쉽게 해결해보려고? 손 안대고 코풀려는 마음이 섞여있는 것을 가려내야 할 줄 믿습니다.
육신의 연약함으로 오늘도 여기저기 많이 힘드시죠?
성경은 말씀합니다.
기름을 바르고 기도해라.
하나님께서 약효가 신속하게 하시고 모든 신체조직들이 활발하게 회복되게 하실 것입니다.
불치병도 얼마든지 우리의 노력과 의술과 합력해서 하나님은 낫게 해 주실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영적인 신비함에 깊은 호기심을 갖게 되어있기에 기적을 구하죠.
지나치게 신비한 일과 비상식적인 영적 세계에 혹해서 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신앙인격에 품위가 없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서14장 40절에서 말씀합니다.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
우리는 거룩하신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고귀하고 아름다운 인격으로 완성되어 가는 성도들입니다.
신비한 것을 쫒다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면 성령님인 줄 알고 마귀하고 평생 교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결과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점점 그리스도를 닮아가느냐 아니면 마귀적인 것을 닮아가느냐.
이 세상의 자연적인 삶의 방식은 죄의 성분만 제거하면 다 하나님이 주신 아름답고 소중한 것들입니다.
먹고 마시고 가정을 잘 가꾸고 열심히 장사하고 최선을 다해 공부하고 그렇게 인생을 채워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우리의 몫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완전한 자연의 법칙 안에서 본래의 창조 목적대로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며 아름답고 복스럽게 살아가는 것이죠.
하나님이 기적은 마치 미풍이 얼굴을 스치듯 그렇게 자연과 조화롭게 일어납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법을 따르며 하나님의 통치가 이뤄지는 안전하고 복된 삶을 사시길 축원드립니다.
마지막으로 기적을 통해 하나님을 만난 나아만 장군의 태도를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일으키신 기적은 필연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정확한 자각을 불러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시면 우리 영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직관적으로 알게 됩니다.
누가 우리의 구주가 되시는 지 정확히 예수님의 정체에 대해 알게 하십니다.
그리고 피조물의 자리가 어딘지를 즉시 파악하고 예배자의 자리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나아만은 15절에서 즉시 신앙고백을 하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
또 17절에 보면 노새 두 마리에 흙을 싣고 가서 자기 땅에 덮고 그 위에서 오직 하나님께만 제사를 드리는 예배자가 되겠다고 말합니다.
자기 나라의 모든 땅이 우상숭배로 더러워진 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거듭난 성도들은 점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관광지에서 사오는 미신적인 조각품 이런 것조차 멀리하게 됩니다.
아무리 등산을 가도 절에는 잘 안 들어가게 됩니다.
잘 맞지를 않습니다.
아직도 산사에 가면 고즈넉한 게 너무 마음이 편안해 진다면 글쎄요입니다.
19절에서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에게 한 가지 이해를 구합니다.
군대장관으로 왕을 보필하다보면 할 수 없이 신당에도 따라가야 하고 몸을 굽힐 수 밖에 없으니 이를 하나님께서 용서해달라는 것이죠.
직책상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이라 해도 그의 마음에 거리낌이 오는 것입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나아만은 지금 막 구원받은 새신자 아닙니까?
정확히 하나님을 섬기는 법을 스스로 깨닫고 죄를 구별해 내는 것이 신기하지 않습니까?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모든 것을 지도하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리끼는 마음을 주셨다면 그건 죄가 분명합니다.
전혀 아무렇지도 않게 했던 일이 어느 날부터 마음에 거리끼게 되면 그건 죄를 깨닫게 해주시고 이젠 해결할 때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전에 괜찮았으니 그냥 무시해야지 그랬다가는 별로 좋지 않습니다.
엘리사는 그의 말에 평안히 가라는 말로 응대합니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애매한 대답이죠.
그 말은 네가 알아서 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나아만이란 이름은 이것으로 아람과 이스라엘의 전쟁사에서 사라집니다.
다음 장에서 아람 왕의 최측근으로 하사엘이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나아만은 관직을 내려놓고 거리낌 없이 마음껏 하나님만 섬기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 때로 세상적인 이익과 보장된 것들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이집트에는 초대교회 때부터 계승되어 온 콥틱 기독교인들이 있습니다.
이슬람국가에서 그들이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은 국민의 모든 권리를 포기한다는 뜻입니다.
사회적으로 아무 직업을 가질 수가 없고 심지어 학교도 갈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난지도 쓰레기 하치장 같은 곳에 모여서 쓰레기를 뒤져 재활용품을 분리하고 그 속에서 필요한 것들을 챙겨서 살아갑니다.
그 더러운 일을 누군가는 해야 하기에 정부에서도 묵인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결코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믿음을 버리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하고 이슬람교에 입교하는 순간 모든 권리를 되찾을 수 있지만 차라리 쓰레기를 뒤질지언정 믿음을 지키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주일에 모여 예배드리는 장면을 보면 그 얼굴이 그렇게 기쁨으로 충만하고 아름다울 수가 없습니다.
로마서8장의 말씀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말씀을 마칩니다.
영적 죽음에서 건져주신 하나님아버지와 우리 구주예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나아만이 일곱 번을 물에 들어간 인내가 모두에게 필요한 줄 믿습니다.
고난과 연단은 아름다운 성도로 우리를 변모시키고 복된 믿음을 갖게 할 것입니다.
또 나아만과 같이 성령 안에서 죄를 버리고 하나님만을 섬기는 신실한 예배자가 되어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 안에 평안히 거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2013년5월26일 주일설교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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