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선지자 엘리사의 기적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성령께서 오늘 말씀을 잘 깨닫고 우리에게 적용할 수 있도록 눈과 귀를 열어주시길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선지자 엘리사는 우리가 잘 아는 엘리야선지자의 후계자입니다.
스승인 엘리야 선지자의 사역은 아주 강력하게 우리에게 각인되어 있죠.
갈멜산의 대결, 불과 비를 내린 기도의 능력, 불마차를 타고 하늘로 승천한 화려한 퇴역.
엘리사를 떠올리면 대표사역이라 할 만한 게 꼭 집어 생각이 나지 않죠.
당시 이스라엘에서도 그랬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역 초기에 엘리사를 일컬어 ‘전에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부어주던 선지자’라고 불렀습니다.
엘리야의 몸종이었다고 비하했다는 것이죠.
그러나 엘리사가 죽을 때 왕이 울며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라고 부르게 될 만큼 절대적인 영적 지도자가 되었던 걸 알 수 있습니다.
엘리야의 후광에 가려진 엘리사는 모세의 영광에 의해 항상 도전받던 예수님의 사역을 생각나게 합니다.
실제 엘리사는 예수님의 사역을 미리 예표하는 인물 중 하나입니다.
오늘 본문은 엘리사선지자가 살고 있던 도단이라는 성읍을 이스라엘의 대적인 아람군대가 와서 포위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본문의 앞 부분에 그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아람이란 나라는 당시 이스라엘을 침입하고 괴롭히던 나라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 아람왕이 이스라엘군을 습격하려고 매복해 있으면 영락없이 이스라엘왕이 알아차리고 몸을 피하는 것입니다.
번번이 이런 일이 벌어지니 아람왕은 당연히 내통하는 자가 있다고 생각했겠죠.
신하들을 다그치자 내통자가 있는 게 아니라 이스라엘왕을 돕는 엘리사란 선지자가 신통력으로 모든 걸 미리 알아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아람왕은 엘리사를 죽이려고 그 밤에 군대를 보내 성읍을 포위한 것입니다.
14절에 보니 기마병과 전차부대와 많은 보병들을 보냈다고 하죠.
엘리사를 보좌하던 사환이 아침에 일어나 나와 보니 어마어마한 병력이 마을을 포위 해 있는 것입니다.
도망칠 길이 없다고 생각한 그는 절망적으로 엘리사에게 부르짖습니다.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 하리이까
그 때 엘리사가 대답하죠.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이 말씀만 들어도 은혜가 되시죠?
그리고 하나님께 사환의 영적인 눈을 열어줄 것을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사환의 눈을 열어주시자 산에 가득한 천사의 군대가 엘리사를 둘러싸고 있는 기막힌 광경을 보게 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첫 번 째 영적인 사실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이 천사의 군대를 보내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보호한다는 것입니다.
천사들이 우리를 보호해 주는 것은 성경에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편91편11절에는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시편 34편7절에는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
예수님께서도 우리들과 하나님 사이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천사들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보통은 우리 자연적인 감각으로 천사의 존재를 보거나 느끼지 못합니다.
악한 영의 존재도 마찬가지죠.
영적인 존재들이 자연세계의 질서를 혼란시키지 못하게 하신 것이 일반적인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들은 보이지 않게 활동합니다.
아주 특별한 경우 엘리사와 그 사환의 경우처럼 눈을 열어 그 존재를 보여주시는 것이죠.
우리는 이렇게 기록 된 말씀을 통해 지금 우리 교회를 둘러싸고 있고 우리 성도들과 가정을 둘러싸고 보호하는 우리아버지가 보내주신 수행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천사가 하는 일 중에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일은 마귀의 세력으로부터 성도들을 보호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엘리사를 둘러 싼 이 신비한 불마차와 불말을 탄 천사들의 군대는 무엇을 위해서 진을 치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아람군대와 싸우게 하려고 모인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사와 사람을 싸우하시겠습니까?
실제로도 오늘 천사의 군대가 아람군대와 직접 싸웠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16절을 보면 엘리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봅니다.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보다 많다고 하지 않고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다고 하죠.
아람군대 배후에도 영적 세력이 집결해 있다는 뜻입니다.
사환에 눈에 천사의 군대만 보여주셨지만 실은 악한 영들도 그만큼 집결해영적 전투가 벌어지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죠.
오늘 역사적으로 벌어진 사건은 엘리사를 죽이려는 아람왕의 공격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이스라엘을 멸절하고 하나님의 구속사를 망치려는 사탄의 세력을 대항 한 천사들의 영적 싸움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영적인 존재는 영적인 존재끼리 싸운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보이지 않는 사탄의 세력을 대적하여 어떻게 매일 싸우겠습니까?
물론 우리가 신분상으로는 마귀를 제어할 권세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할 때 마귀가 쫒겨갑니다.
마귀가 눈에 보이고 느껴질 때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쫓을 수 있지만 우리가 퇴마사도 아니고 항상 보이지 않는 마귀와 싸울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마귀가 영적인 존재인 데 쫓는다고 어딜 가겠습니까?
어차피 또 우리 주변에서 활동하고 있는 게 마귀의 세력들입니다.
우리는 영적싸움의 실체를 깨닫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며 마귀에게 틈을 주지 않고 경계하는 삶을 살면 됩니다.
크게 위험한 악한 영의 활동들은 천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방어해 주시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눈이 열린다는 것은 말씀을 통해 마귀의 존재를 인식하고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주시해서 보면 우리 삶을 어지럽히는 마귀의 역사를 분별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가정의 화목이 깨지고 다툼이 일어나는 배후도 잘 분별해야 합니다.
돌아서서 생각하면 그렇게 가족 간에 미워할 일도 없는 데 이상하게 자꾸 갈등이 생길 때가 있지 않습니까?
잠든 식구들 얼굴 보면 왠지 측은하고 잘해주고 싶은 데 눈만 뜨면 어느새 서로 상처되는 말과 행동을 하게 되죠.
이 땅에서 우리에게 주신 가정과 직장을 아름답고 행복하게 지키고 안정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고 하나님의 뜻입니다.
다시 한번 우리 가정의 사랑과 화목을 축원드립니다.
우리 주변에 끊임없이 분란이 있고 이 병 나으면 또 다른 병이 생기고 이 문제가 채 해결되지 않았는데 또 다른 문제 터지고 그러면 영적으로 좋은 상황이 아닙니다.
악한 세력들이 천사의 세력보다 힘을 떨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믿음에 방종하거나 무기력하거나 죄를 지을 때 악한 영이 득세해서천사와 마귀의 힘의 균형이 기울어진 상태로 보아야겠죠.
오늘 본문에서 벌어진 영적싸움을 통해 다윗왕 때 이스라엘에 조공을 바쳤던 아람군대가 어쩌다 오늘날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위협적인 존재로 커졌습니까?
이스라엘이 지금 하나님께 범죄하고 그 길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믿음의 삶을 살지 못할 때 악한 세력이 고통스런 환경으로 우리를 둘러쌉니다.
그래서 천사가 하는 영적인 싸움을 성경은 우리에게도 요구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할 일은 악한 영들이 꼬아놓은 현실적인 문제들을 영적으로 이해하고 기도를 통해 풀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그런 영적 원리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천사의 불말과 불병거는 마귀의 세력과 보이지 않는 천상의 싸움을 벌인 것이고 엘리사는 기도를 통해 마귀가 벌여놓은 현실적인 사태를 해결합니다.
엘리사가 기도를 구하고 지혜롭게 알맞은 작전을 구사해 병사들의 눈이 어둡게 하여 사마리아성으로 끌고 들어가지 않습니까?
우리가 할 일은 마귀의 일을 분별하며 우리 삶에서 드러난 문제들을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지혜롭게 인생을 경영해가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에게는 이 두 가지가 없습니다.
마귀의 권세와 싸워 줄 천사가 없고 마귀가 마음대로 망가뜨린 인생을 회복시킬 기도의 능력이 없습니다.
이제 우리가 아는 대로 구원받을 다른 길은 없고 뒤를 돌아 볼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를 사랑해서 독생자를 주셨고 지금도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만을 신뢰하며 오직 주님을 바라보며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일하러 나가고 하나님과 함께 밥을 먹고 하나님과 함께 잠자리에 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곳이 천국입니다.
여기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과 함께 사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주님이 계신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 잠시라도 하나님을 배제하지 말고 수시로 주님을 의식하고 동행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때문에 내 하루 중 무언가가 좀 제약이 된다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산다면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시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우리 말과 행동을 살피고 말씀에 따라 교정하며 범사에 주님과 의논하는 삶이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이럴 때 우리를 사로잡으려는 두려운 환경과 배후의 세력들이 물러가는 줄 믿습니다.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
다음 본문을 계속해서 보겠습니다.
이제 엘리사를 향해 진격해 오는 아람군대를 두고 엘리사가 다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18절에 원하건대 저 무리의 눈을 어둡게 하옵소서.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하셔서 분별력을 상실하게 하시죠.
엘리사는 우왕좌왕하고 있었을 군대의 대장에게 너희가 찾고 있는 사람에게 인도해 주겠다고 그들을 이끌고 사마리아성으로 들어갑니다.
사마리아성은 당시 이스라엘의 왕이 살던 수도입니다.
엘리사가 살던 도단 성에서 사마리아까지 약 18킬로 정도가 되는 꽤 먼 길입니다.
분별력을 잃고 마음이 어두워진 아람군대가 무턱대고 그 먼 길을 의심도 하지 않고 엘리사를 따라 갔다는 것이 하나님의 기적이시죠.
그렇다면 왜 엘리사는 그들을 이끌고 그 먼 길을 인도하여 사마리아성으로 들어갔을까요?
아람군대를 어떻게 처리할 방법을 몰라서 그랬던 것은 아니겠죠.
그것은 우상숭배와 타락의 온상이었던 사마리아성에 하나님의 기적을 보여주기 위는 강력한 메시지였습니다.
바알신을 버리고 이런 권능과 기적을 행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께 돌아오라.
지금도 너희를 사랑하고 너희를 위해서 싸우시는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것이죠.
적군의 전차부대와 기마병과 보병들이 줄줄이 사마리아 성 안으로 자진해서 입성하는 이 어이없는 광경을 볼 때 왕도 놀라고 백성들도 놀랐을 것입니다.
21절을 보면 독 안에 든 쥐가 된 원수 아람군대를 보고 이스라엘 왕이 흥분해서 외치지 않습니까?
내 아버지여 내가 치리이까 치리이까?
언제부터 왕이 엘리사를 이렇게 영적인 아버지 대접을 했습니까?
왕의 아버지 아하시야는 바알을 숭배했던 악한 왕이었고 여호람왕 역시 평소엔 하나님도 선지자도 안중에 없었던 자입니다.
그런데 이제 엘리사가 이끌고 온 군대를 보자 아버지라고 추겨 세우며 자기 손으로 군대를 쳐서 전승을 올리려고 흥분해 있는 것입니다.
내가 치리이까 치리이까 이 말에서 그가 얼마나 안달을 하고 있는지 느껴지죠.
하나님이 이루시는 놀라운 기적과 그 능력을 깨닫고 회개하기는 커녕 자기 앞에 있는 노획물에 군침을 흘리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적인 눈을 열어 주셔서 하나님의 인도와 영광을 보게 하시는 게 축복인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우리를 위해 매일 일하고 기적을 베풀어 주십니다.
별로 기도하지도 않았는 데 어느 날 우리 마음을 환하게 하는 뜻밖의 선물을 주시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깨우치시기 전에 얼마나 많이 우리에게 선물을 주시며 말씀하시는 줄 모릅니다.
단지 우리가 매일의 평범한 날들이 축복인 줄 모르고 고민들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매일 일하시며 베풀어 주시는 선물들을 헤아리며 감사하며 하나님께 집중하는 삶을 살길 원합니다.
그러면 아마 지금보다는 훨씬 우리 삶에 고난이 줄어들으리라 믿습니다.
선물로 말씀할 때 잘 알아듣는 데 왜 고난이 필요하겠습니까?
주님이 주시는 일상의 기적에 감사드리며 순종하며 따를 때 잔잔한 사랑의 감동과 선물을 주시며 우리를 평안하게 인도해 주실 줄 믿습니다.
잠언 1장 33은 말씀합니다.
오직 나를 듣는 자는 안연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평안하리라
결국 이 사건은 엘리사가 그들에 음식을 차려 먹게 하고 고이 아람 왕에게 돌려보내며 마무리가 됩니다.
아무리 악한 것이라도 선으로 갚는 것은 변함없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아람군대를 쳐서 죽이고 무기들을 뺏었다면 결국 더 큰 병력을 이끌고 아람 왕이 쳐들어오지 않았겠습니까?
23절은 기록하죠.
이로부터 아람군사의 부대가 다시는 이스라엘 땅에 들어오지 못하니라.
모든 문제는 하나님의 방식에 맞추어 풀어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악한 사람과 악한 상황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선한 마음으로 풀어가면 반드시 하나님의 약속대로 선으로 악을 이기게 될 줄 믿습니다.
다음은 엘리사의 기도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7절에 엘리사는 사환의 눈을 열어달라는 기도를 하죠.
엘리사의 기도에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그의 기도가 지극히 간결하고 응답을 당연하게 믿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응답되는 기도를 여기서 배울 수가 있죠.
엘리사는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듣고 계시다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들어주실 것을 이미 확신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적게든 많게든 매일 하나님께 기도를 합니다.
그 때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지금 귀를 기울여 듣고 계시다는 믿음입니다.
그런 믿음이 없이 드리는 기도는 응답될 것을 기대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혹시 계시다면 들으시고 혹시 응답하시려면 해주시고 이런 기도는 하나님께서 듣지도 않으시고 응답해주시지도 않습니다.
어차피 이런 기도로 받은 응답이라면 이것이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확신도 안 생깁니다.
그래서 길게 하건 짧게 하건 항상 기도할 때 지금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내 기도를 듣고 계시다는 믿음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면 결코 잊어버리거나 응답을 무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자식이 칭얼대며 부모에게 뭔가를 요구했다면 부모들은 그것을 절대 지나치지 못합니다.
부모님 앞에서 뭐가 맛있었다고 지나가는 말이라도 한 번 해보세요.
갈 때 마다 꼭 그 반찬 올라오지 않습니까?
저도 우리 딸이 간장 새우장이 맛있다고 하는 말에 바쁜 중에도 인터넷을 찾고 찾아서 결국 주문해서 먹였습니다.
우리 다혜자매도 간장 가재장을 좋아한다죠.
유학하고 있을 때 집에 돌아오면 먹이겠다고 부모님이 멀리 가서 가재를 사와서 담가 놓았단 얘기 들은 적 있습니다.
부모 마음이 그렇지 않습니까?
자식 좋아하는 것 있으면 그거 절대 자기 입에 넣지 못하죠.
하나님아버지께서 자녀인 우리가 아버지를 믿고 도와달라는 간절한 음성에 어떻게 무심하시겠습니까?
그걸 믿고 끈기 있게 기도하시면 해가 되지 않는 거라면 반드시 주십니다.
기도는 영적인 전쟁터인 세상에서 지뢰밭을 피하며 안전한 길을 밟으며 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인생에서 지뢰 한번 밟으면 데미지가 큽니다.
오늘 눈 만 뜨면 아람군대가 둘러 싼 것 같은 절망적인 상황이 얼마나 우리 삶에서 자주 일어납니까?
우리 마음이 얼마나 자주 문제 속에서 짓눌리고 신음합니까?
엘리사 같은 믿음의 눈을 갖지 못했던 이 사환의 절망적인 신음이 얼마나 공감이 됩니까?
아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오리까?
쉴새 없이 우리 인생을 덮쳐오는 고비 앞에 무너지지 않으려면 우리가 매일 기도하며 믿음을 세워가야 합니다.
기도로 단련 된 영적 근육을 갖고 엘리사처럼 두려움 없이 삶의 문제들을 대할 것인가 사환처럼 절망의 언어로 사태를 맞을 것인가가 우리 삶의 질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구속사역을 완성하시고 이젠 우리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기도할 길을 열어주신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우리 삶의 문제를 해결 받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알아가려면 끈기 있게 기도해야 합니다.
인격적이고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대면이 없다면 위기에서 무너집니다.
세상일에는 때로 끈기를 발휘하기도 하면서 영적인 훈련에 참 끈기가 부족한 것이 우리 모습입니다.
엘리사의 기도의 능력은 스승 엘리야의 승천을 앞두고 끈질기게 따라다니며자신에게 두 배의 능력을 달라고 강청했던 기도의 응답이었습니다.
영적으로 타락한 민족 가운데서 사역하기 위해 엘리야의 갑절의 능력을 받아야 한다는 절박하고 끈질긴 기도가 응답이 되었던 것이죠.
세상의 스팩이 내 인생에 주는 영향보다 사실 기도의 능력이 내 인생에 더 큰 영향력이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영적으로 육적으로 둘 다 성공하시려면 기도로 인생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세상적인 지혜와 방법으로 애쓰고 수고해서 얻는 것만으로는 우리 인생이 결코 만족하지 못합니다.
우리나라 백70가지 직종의 사람들에게 "당신은 지금 행복하십니까?"라고 물었는 데 사회적 성공자로 분류되는 의사들이 백69번째 였다고 합니다.
우리 삶에 깊은 만족감은 영적인 은혜와 함께 할 때 가장 완전한 것입니다.
청년의 때 목숨도 바칠 것 같던 사랑도 도파민이란 호르몬이 분비되지 않는 순간 사라지고 만다지 않습니까?
도파민이 사라졌을 때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서로를 끝까지 존중하고 사랑하는 배우자를 기도하며 만나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이 땅에서의 인생을 기도와 함께 계획하고 기도와 함께 성장시키고 기도와 함께 다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 지혜이고 축복인 줄 믿습니다.
이런 기도의 삶을 살기를 우리가 다시한번 다짐하길 원합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울리는 경종이 무엇입니까?
마지막 구절에 이로부터 아람 군사의 부대가 다시는 이스라엘 땅에 들어오지 못하니라 라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원문대로 하면 아람군사가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오기를 꺼려했다라는 뜻입니다.
완전히 침략을 그쳤다는 게 아니고 그들의 회개여부에 따라 침략이 유보적인 것을 내포하는 묘한 뉘앙스입니다.
본문에 바로 뒤에 이어서 얼마 뒤 아람왕 벤하닷이 사마리아를 포위한 역사가 기록됩니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다는 뜻이죠.
사마리아성이 고립되어 굶주려서 죽어가는 참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성 안의 상황이 비극적이냐면 서로 자식을 잡아먹는 기가막힌 일이 성 안에서 일어났다고 기록합니다.
오늘 본문과 잘 연결시켜서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은 그들이 적을 포위했지만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않았을 때 적들이 그들을 포위한 것입니다.
포위할 것이냐 포위당할 것이냐.
우리가 환경에 포위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땐 하나님 앞에 나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회개하고 돌이키면 우리를 위해 불말과 불 병거를 예비하시고 모든 고난을 벗어나게 하실 줄 믿습니다.
오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돌이키기 위해 큰 은혜를 베푸셨지만 그들은 끝내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엘리사는 멸망해 가는 이스라엘을 향해 얼마나 애통해 했는지 모릅니다.
아람군대장관 나아만의 문둥병을 고쳐준 사건을 기억하시죠?
엘리사가 치료의 댓가로 아무 것도 받지 않고 나아만의 모든 예물과 보화를 그냥 돌려보냅니다.
그 때 사환인 게하시가 수레에 실려 돌아가는 보물들을 보며 얼마나 아까워합니까?
결국 나아만의 뒤를 따라가 엘리사를 빙자해 보물 얼마를 받아서 집에 감춥니다.
이 모든 것을 꿰뚫어 본 엘리사가 게하시에게 이렇게 말하죠.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으며 감람원이나 포도원이나 양이나 소나 남종이나 여종을 받을 때이냐
하나님의 심판 앞에 가족과 동족들이 놓여있는 데 어떻게 사욕을 채울 재물에 치심하느냐는 말입니다.
우리 주변이 영적으로 이때와 다르지 않습니다.
가족과 친구들이 멸망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을 영적인 눈을 열어 깨닫고 기도해야 합니다.
엘리사가 그의 사역 후기에 아람장군 하사엘을 만났을 때 그를 무안할 만큼 쏘아보다 눈물을 흘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사엘의 침략으로 무참하게 살육당할 이스라엘의 패망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선지자의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그들의 사역과 행동을 통해 성령님의 마음이 드러나고 우리 하나님의 마음이 투영되는 것입니다.
엘리사의 이스라엘을 향한 눈물과 애통은 회개치 않고 고난당하는 자녀들과 심판을 향해 치닫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눈물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님의 사랑을 끝까지 외면한 예루살렘을 향하여 우셨던 장면이 오버랩 되지 않습니까?
어제 기독교 프로그램에서 0덕교회 단기선교팀이 미안마에서 선교활동을 한 영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부모들은 마을에서 캠프를 열고 현지 미안마인들과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청소년부 자녀들은 삼일 동안 걸어서 산을 넘어 다니며 소수종족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삼일 뒤 부모들과 합류하게 되어있었습니다.
어린 청소년들이 사흘 동안 50킬로가 넘는 거리를 가파른 산을 넘으며 복음을 전하는 모습이 너무 놀라웠습니다.
힘이 들어 우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한 명도 포기하지 않고 사역에 동참하고 있었습니다.
캠프에서는 순수하게 복음을 받아들이는 미얀마사람들과 함께 부모들이 은혜와 활력이 넘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자가 지금 위험한 산길을 걸어다니며 전도하는 자녀들이 걱정되지 않냐는 인터뷰를 하고 나서 상황이 급반전되고 말았습니다.
부모님들이 다들 각자 돌아서서 눈물을 훔치느라 일이 진행이 안되는 것입니다.
사흘 뒤 아이들을 맞이하기 위해 부모님들이 마을 어귀에 늘어서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모퉁이를 돌아 아이들의 모습이 보이자 부모님들이 울기 시작하고 부모님 모습을 보자 아이들도 눈물을 흘리기 시작합니다.
힘든 트레킹과 전도사역을 하고 돌아온 아이들을 얼싸안고 완전 눈물의 바다가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비록 짧은 기간일지라도 자식의 고생과 안전이 부모의 마음에 이렇게 고통스러운 것이지요.
하나님아버지께서 우리가 힘든 인생길에서 때로 넘어지고 때로 눈물 흘리며 아버지를 향해 걸어가는 우리를 이런 마음으로 보고 계시다는 마음이 들며 괜히 저도 같이 울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는 마음과 똑같이 죄인을 사랑하시는 창조주의 눈물이 바로 엘리사의 눈을 통해 흘리졌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결론입니다.
하나님아버지는 우리의 전 인생을 인도하시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중보하며 이끌어 주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 지혜를 주시며 믿음으로 살게 하십니다.
그것도 부족해 수많은 천사들을 통해 우리를 침해하는 악의 세력들을 물리쳐주십니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다는 뜻이고 우리가 그 만큼 연약한 존재들이란 뜻이기도 합니다.
오늘 끝까지 돌이키지 않아 망했던 이스라엘백성들을 생각할 때 우리가 아버지의 집에 영원히 거하게 된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지요.
비록 믿음의 길이라 할지라도 눈앞에 보이는 현실적인 문제 속에 엘리사의 사환 같은 두려움에 낙심하지 않기 위해 기도와 영적인 훈련으로 영적인 근육을 강화해 가길 원합니다.
항상 기도로 우리의 영적인 눈을 열어주시도록 간청해야 합니다.
우리의 영적인 눈이 열리지 않으면 세상은 항상 두려울 뿐이고 신앙은 지루하게 느껴질 뿐입니다.
이제 더욱 견고한 믿음 위에 우리의 일생을 세우고 날마다 하나님의 사랑과 풍성한 은혜를 체험하는 신앙으로 성장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아멘.
2012.12.9일 주일예배설교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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