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가 멘델스존의 역작 중에 ‘엘리야’라는 오라토리오가 있습니다.
멘델스존이 38살의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떠났죠.
그 이유가 이 곡에 너무 열중해 건강을 해쳤기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을 만큼 심혈을 기울인 대작입니다.
이 오페라의 아리아 중에 ‘어찌 내게 그런 일이 있소’ 라는 곡이 있습니다.
누가 부른 노래이겠습니까?
바로 오늘 본문에 등장한 죽은 아들을 안고 부르는 어머니의 노래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여 어찌하여 나에게 이런 일이 있소.
내 죄를 밝히고 내 아들을 죽이려고 왔소.
나의 주 하나님. 내 아들이 병들어 죽게 됐소. 이제 숨결이 끊겼소.
이 슬픔을 못 이겨서 눈물로 지새웠소.
내 사정 아시오?
하나님의 사람이여. 엘리야 선지자여. 도우소서‘
애절한 소프라노를 듣노라면 자식의 죽음 앞에서 하늘이 무너지는 절망을 만나기도 하는 인간사의 아픔이 느껴집니다.
굶어죽을 뻔한 위기를 모면했지만 이젠 자식의 죽음을 보게 됐으니 참 가혹한 운명이죠.
이런 걸 보면 인생이 끝없이 반복되는 롤러코스터 같지 않습니까?
문제가 해결되고 평탄한 삶이 오는가 싶으면 또 다시 추락하는 순간이 옵니다.
여인의 처지가 참 애처롭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우리 역시 삶의 굴곡에 지치고 곤고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겨우 한 고비를 넘기고 나면 또 마음을 심란하게 하는 문제가 대기하고 있잖습니까?
그런데 지금 이 노래를 따라 부르고 싶은 사람이 또 있습니다.
엘리야도 똑같은 심정입니다.
하나님의 선지자에게도 결코 가볍지 않은 사역의 짐과 연단의 삶이 지치도록 얹혀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너무 감사한 것은 오늘 결말이 좋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또 용기를 내는 것이죠.
죽은 자도 살려서 돌려주시는 하나님아버지이신데 우리의 문제를 못 들어주실리 있겠습니까?
여인의 불행이 끝이 아니었듯이 지금 우리의 형편이 내 삶의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매일 기대하십시오.
오늘도 지치고 피곤한 심령에 말씀을 통해 은혜를 주시고 믿음이 더욱 강건해지게 하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본문의 앞 부분을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지금 북이스라엘은 7대 왕인 아합왕의 치세 중에 있습니다.
아합왕의 최악의 실정은 북이스라엘의 치명적인 죄악인 금송아지를 섬기는 데다 한 수 더 떠서 바알 종교를 들여온 것입니다.
이유는 아내 이세벨왕비가 바로 바알의 본산지인 시돈왕의 딸이기 때문입니다.
이세벨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이고 대신 바알 사제들을 양성한 악한 여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영적으로 타락한 이스라엘을 돌이키기 위해 삼년 반 가뭄으로 심판하십니다.
이 사실을 아합왕에게 예고한 사람이 바로 엘리야선지자입니다.
그리고 엘리야의 도피생활이 시작된 것이죠.
처음엔 그릿시냇가에 숨어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떡과 고기로 6개월 정도를 연명합니다.
계곡 물이 마르자 하나님은 다음 은신처로 엘리야를 보내셨는 데 하필 그곳이 이세벨왕비의 친정인 시돈의 사르밧지방입니다.
그리고 기근으로 양식이 떨어져 죽어가던 한 여인의 집에서 엘리야가 은신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인의 집에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기적을 베푸셔서 엘리야를 섬기게 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은 대로 집주인인 여인의 아들이 죽은 사건이 일어납니다.
먼저 이 사건을 집주인 여인을 중심으로 살펴보며 교훈을 나누겠습니다.
이 집주인되는 여인은 절대 곤경에 빠진 인간을 대표합니다.
남편의 죽음, 기근으로 인한 생활고, 결국은 아들과 함께 굶어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절망적인 여인의 삶은 인간의 운명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재산이 많고 권력이 있으면 다를 것 같지만 고통 받는 내면은 누구나 똑같고 죽음의 그림자는 인류 위에 똑같이 덮여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보잘것 없는 이방인 여인에게 하나님은 엘리야선지자를 보내십니다.
마지막 남은 밀가루로 빵을 구워먹고 죽기 위해 나뭇가지 몇 개를 줍던 이 여인에게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이 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중 누구도 목격하지 못한 기적과 하나님의 위대한 실체를 이 이방여인이 알게 된 것은 정말 신비한 일입니다.
누가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이 내용이 구원의 예표라고 해석해 주십니다.
하나님을 모른 채 각자의 환난 속에 신음하는 죄인을 구하기 위해 장차 아무 조건없이 주님이 오시겠다는 것이 이 사건의 핵심적인 메시지인 것입니다.
그 말씀대로 주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시지 않았습니까?
다들 어떠실지 모르지만 제 인생의 가장 깊고 우울한 골짜기를 지날 때 예수님이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제가 원하지도 않고 기다리지도 않았는데 정말 아무 조건 없이 오셔서 구원해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 죄의 십자가를 주저 없이 대신 지시고 우리를 향해 성큼 성큼 다가오신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입니까?
오늘 여인도 하나님의 은총을 입고 사망의 끔찍한 재앙에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매일 아침 일어나보면 밀가루 통에 빵을 구울 밀가루가 담겨있고 기름통엔 올리브기름이 찰랑거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아버지가 되신 이상 주변이 아무리 가물어도 먹을 것을 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고 주님으로 모신 이상 오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내일도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루하루 기적과 같이 공급해 주시는 물질과 은혜로 살아갑니다.
미래를 위해 준비해 놓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준비가 안되었을 때 불안하고 근심하는 것은 나쁜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을 초월하는 능력자이십니다.
아버지 되신 하나님은 우리 삶을 책임져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약속대로 우리 일생을 인도해주실 뿐 아니라 날마다 삶의 짐을 털고 일어날 힘을 주십니다.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기도하고 금방 잊어버리시죠?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은 그 순간 조용히 우리에게 역사하시기 시작합니다.
어느새 불안하고 요동하던 마음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안돈되고 또 힘을 내어 평범한 하루를 살고 있는 내 모습이 바로 기도응답입니다.
하나님은 우레와 같은 힘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게 아니라 매일 먹을 빵과 일용품을 공급해 주시며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작은 은혜, 우리에게 주어진 작은 것들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음을 알고 감사하게 누리는 것이 행복한 삶입니다.
하나님이 매일 주시는 은혜는 어찌보면 이렇게 대단치 않아 보이는 것들, 작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우리 맘에 평안이 있고 잔잔한 기쁨이 있고 내일도 맡길 수 있는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일상의 기쁨과 만족을 놓치지 말고 지키고 누리시길 축복드립니다.
그러나 현실은 감사할 것보다 우리 눈을 항상 불편한 문제로 돌리게 합니다.
이웃이 굶주릴 때 빵을 굽는 향긋한 냄새로 감사한 하루가 시작됩니다.
하지만 좁은 집에서 생면부지의 사람과 함께 사는 것이 얼마나 거북합니까?
아무리 밀가루통의 기적을 눈으로 목격하고 혜택을 받고 있지만 불편한 현실은 또 현실입니다.
구원받은 것만도 감사하다 생각하다가도 작은 문제 하나라도 불거지면 순식간에 우울해버립니다.
우리 육신이 그렇게 강하고 우리 영은 그렇게 허약한 것입니다.
몸 좀 아프면 기도도 잘 안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붙들고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고 계신 것입니다.
여인에게 양식은 해결됐지만 하나님의 선지자와의 불편한 동거는 달갑지 않습니다.
게다가 날마다 보여지는 하나님의 기적과 선지자 앞에서 여인은 왠지 자기죄가 느껴지기 시작하고 마음이 편치가 않았던 것을 여인의 말 속에서 알 수 있습니다.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살았던 여인에게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처음 하나님을 믿게 되었을 때 사람들이 비슷한 감정을 경험하게 됩니다.
왠지 모를 은혜로 하나님을 믿게 되었는 데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면 갑자기 거룩한 성도의 삶이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것이죠.
인간의 자연스런 본성은 세상의 적당한 죄와 방종을 즐기며 사는 것을 좋아합니다.
사람들이 적당히 죄악과 버무려진 이 세상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세상에 대한 우리의 집착과 애정은 생각 이상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과 엮이는 것 자체를 싫어합니다.
전도하면 발끈해서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죠.
하나님 얘기,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 이런 이야기를 듣는 것 만으로도 마음이 불편하고 거북하다 이겁니다.
아래층 식당 관계자들도 우리가 참 친절하게 잘 해주는 데도 저를 보면 슬그머니 피하시는 걸 느낍니다.
안 믿는 분들에게 하나님과 죄를 생각나게 하는 그 어떤 것도 피하고 싶어하는 성향이 있습니다.
거듭난 성도들 속에도 처음엔 이런 자연인의 성품과 영적인 생명 사이에 갈등이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신분은 변했는 데 우리 몸은 옛날 옷이 더 잘 맞는 것이죠.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나고 하나님의 생명을 품는다는 것은 기적이고 천지가 개벽하는 일입니다.
거듭난 생명과 어울리는 육신으로 업그레이드하는 과정에 갈등이 생길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춘기 자녀들의 갈등도 그렇잖습니까?
최성0씨의 청소년 감정코칭이라는 책에 보면 사춘기 질풍노도의 시기를 잘 정리해줍니다.
사춘기가 되면 생각하고 판단하고 조절하는 능력을 관장하는 전두엽에 대대적인 리모델링 확장 공사를 하게 된다고 합니다.
집에 비유하자면 20평 아파트를 100평으로 확장하는 비율과 같다고 합니다.
초등학교 때 가지고 있던 전두엽으로 학교와 집을 오가는 데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인이 되면 복잡다단한 인생을 겪고 처리해야 하기에 20평짜리 머리를 백평으로 리모델링 하는 두뇌의 작업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시기에 아이들이 얼마나 큰 혼란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자녀들의 사춘기를 이해해야 합니다.
큰 공사 중이라는 것이죠.
성령께서 올바른 지혜와 은혜가운데 인도해 주시길 기도하며 기다려줘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육체 뿐이었던 우리가 성령하나님을 모시고 영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 얼마나 큰 갈등과 혼돈이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래서 갑작스레 우리를 뜯어 고치시지 않는 것입니다.
옛사람이 새 생명의 능력으로 서서히 변화되어 가는 것이 신앙의 성숙인 것이죠.
저절로 우리 믿음이 흔들리지 않을 만큼 불쑥 자라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신앙생활과 환경을 통해 조금씩 우리 믿음을 단련하고 하나님을 알아가게 하십니다.
우리 앞에 덜컥 벌어지는 바로 그 사건, 우리를 전전긍긍하게 하는 그 일들은 사실 하나님을 깊이 깨닫는 기가 막힌 기회가 됩니다.
여인은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을 통해 일상의 필요를 채울 뿐 아니라 생사를 다스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깨닫게 되는 것이죠.
물론 고난은 우리를 울부짖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내 아들을 죽게 합니까?
고난이 올 때 죄를 돌아보게 되지만 하나님께 대한 원망과 의심도 일어납니다.
내 죄가 뭐 그리 크다고 이런 고난이 옵니까?
내가 뭐 대단한 존재라고 이런 고난으로 나를 징계하십니까?
우리는 고난의 이유를 섣불리 해석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난과 슬픔을 절대로 가볍게 다루지 않으십니다.
그것이 무슨 이유였든 우리가 절망과 고통 앞에서 하나님 앞에 눈물을 쏟는다면 하나님은 반드시 그 눈물을 씻겨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신 것입니다.
자식들이 세상에 실패하고 상처받고 고뇌의 눈물을 흘릴 때 부모님은 그 이유를 캐묻지 않습니다.
할 수 만 있으면 그 눈물을 다 씻을 수 있게 모든 것을 되돌려 놓고 싶어합니다.
전두0 전대통령을 보십시오.
세상의 아버지도 자식을 위해서라면 불의한 돈일지언정 한 푼이라도 더 남겨주려고 온갖 수를 쓰지 않습니까?
남들은 우리의 곤궁한 처지와 고난을 이야기거리로 대할지 모르지만 성도들의 신음과 고통은 하나님의 마음을 뭉클하게 하는 강력한 동인이 됩니다.
사사기10장16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로 말미암아 마음에 근심하시니라
분명히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을 버리고 못되게 굴다 징계 받는 상황인데도 그들의 곤고함이 하나님의 근심이 된다는 것입니다.
시편 103장 13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 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8장 2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괜찮은 척 해도 다 불쌍하고 가련한 인생이라는 것을 하나님이 너무 잘 알고 계십니다.
여인에게 하나님이 죽은 아들을 살려내실 수 있다는 믿음은 아직 없습니다.
그냥 죽은 아들을 놓고 울부짖을 뿐입니다.
아직 응답을 기대하며 우리도 절망하지 말고 기도하길 원합니다.
끝내야 할 일이었다면 다른 일에 대한 소망을 주실 것입니다.
회생될 수 있는 일이면 기사회생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가져간 문제를 하나님이 책임지지 않는 일은 없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시편 34장 6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여인은 부르짖었고 기적을 통해 가장 소중한 것을 돌려받았습니다.
오늘 말씀이 낙심한 우리 환경과 문제들을 놓고 더욱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게 힘을 주시길 축복드립니다. 아멘.
다음은 선지자 엘리야의 입장에서 교훈을 살펴봅니다.
여인을 통해 죄인이 하나님을 확신하는 믿음의 서정을 볼 수 있었다면 엘리야선지자를 통해서는 하나님의 일군으로 준비되는 과정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람들, 제자들, 일군들은 훈련을 통해 태어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또 주님의 제자와 일군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언제까지 우리가 영적으로 어린 신앙에 머물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영적 생명은 자연스럽게 성장하는 것이고 또 다른 사람을 낳고 양육할 수 있게 됩니다.
크건 작건 하나님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우리가 동참하고 거들 수 있는 기회를 동일하게 주십니다.
그것은 이 땅에서 잘되는 축복과 비교할 수 없는 영원까지 가져 갈 진짜 축복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소명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소명을 따라 사는 복된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소명을 이루며 살 때 지루하고 재미없는 삶은 없습니다.
소명을 이루기 위해 살 때 가정과 직장생활이 생명력으로 충만해집니다.
기독교박해국만 골라서 도전적인 선교를 하는 오픈도어즈 선교회라고 있습니다.
선교회 대표인 브라더 앤드류는 평신도입니다.
그는 성경을 소지할 수 없는 곳에 성경을 밀수출하는 사역을 주로 하고 있습니다.
앤드류가 동유럽을 여행하다 한 집회를 참석했는 데 그 중 성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7명 밖에 없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날 인간이 막아놓은 장벽 뒤에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최대한 많이 성경을 가져다 주기로 하나님께 약속합니다.
그는 15년 동안 한번도 체포당하지 않고 철의 장막 속으로 성경을 부지런히 운반했습니다.
그가 벌인 가장 유명한 성경밀반입작전은 1981년에 있었던 작전명 진주작전입니다.
타임즈는 중국역사상 가장 큰 성경반입작전이었다고 보도했습니다.
진주작전은 군사작전보다 더 정확하고 치밀하게 비밀리에 진행됐습니다.
200톤이 넘는 성경이 방수 컨테이너에 실려 미국에서 홍콩으로 보내졌고 홍콩에서 다시 거룻배에 실려 중국의 각 항구로 보내졌습니다.
이 작전에 투입된 돈은 당시 가치로 60억원이 넘었다고 합니다.
이 방법이 불법이든 아니든을 떠나서 중요한 것은 결코 성경을 볼 수 없었던 수백만명에게 성경이 보급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첩보작전 같은 그의 삶을 볼 때 하나님나라의 역동성과 생명력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삶이 따분하고 의미가 없다면 하나님을 위해 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무실과 학교에서 하나님의 소명을 생각하고 무언가를 시작하면 그곳이 영적전투가 일어나고 기적이 일어나는 선교지로 바뀝니다.
나를 위한 장래를 준비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내 장래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겠다는 소원을 가질 때 진정한 삶의 의미와 기쁨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28년 교직생활에서 학교는 저의 선교지였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일 하는 것만큼 우리를 기쁘고 만족하게 하는 게 세상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에 뛰어들고 헌신하고 봉사하는 사람들이 절대 그걸 놓치 않는 것이죠.
하나님은 우리를 그런 하나님의 일군으로 조금씩 훈련해 가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엘리야는 지금 어떤 훈련 가운데 있습니까?
바알에게 돌아 선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 신앙으로 돌이키고 싶은 강력한 열정이 엘리야의 마음을 들끓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들을 향해서 외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열정적인 사역을 원하는 데 아직 일이 주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일을 준비하며 계속 기다리기만 할 때의 답답함, 그 3년 반의 기다림.
그것도 가택연금이나 다름없이 여인의 집에 은신해야 하는 이 긴 시간이 엘리야를 연단시키고 있습니다.
차라리 남쪽 이집트 쪽으로 은신했다면 자유롭게 외출이라도 했을텐 데, 하필 보내신 곳은 적진 한 가운데 아닙니까?
시돈왕국의 사르밧에 갇혀있는 엘리야는 문 밖 출입조차 못합니다.
아합왕에게 현상수배 된 엘리야는 나갔다 하면 붙잡힐 수 밖에 없습니다.
꼼짝없이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을 배우는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이 기다리는 훈련을 할 때는 박차고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가 없습니다.
아무 문도 열리지 않습니다.
때로 하나님께서 사방이 다 막힌 답답한 환경 속에 우리를 두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조급한 성질, 욱하는 성정은 때로 손과 발이 다 묶인 상황 속에서야 하나님의 사람에 맞게 다뤄지기 때문입니다.
겨우 자신을 억누르고 하루하루를 지내던 엘리야에게 황당한 사건이 터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곳에서 집주인의 아이가 죽는 황당한 사건을 당할 때 엘리야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내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을 죽게 하셨나이까?
본문에서 여인의 말이나 엘리야의 말이 그렇게 길지 않은 데 그들의 생각이 다 드러나는 게 신기하지 않습니까?
엘리야의 말 속에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에 대한 불만이 가득합니다.
또,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시련을 주신 하나님,
정말 너무하신 하나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늘 우리 방식과 달라 불만스러울 때 있으시죠?
하나님의 생각이 불완전한 우리 뜻과 같다면 정말 큰일나지 않았겠습니까?
우리는 항상 우리 수준으로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고 원망하고 애석해 합니다.
사실 하나님이 과부의 집에 재앙을 내리셨다는 근거도 없습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누명을 쓰신 분은 하나님이실 것 같습니다.
좋은 일을 하시고도 사람들에게 항상 원망 불평을 받으셔야 하는 게 하나님의 운명이신 것 같습니다.
아담에게 아름다운 배필을 보내주셨더니 저 여자 때문에 선악과를 먹게 되었다고 하는 우리 조상의 유전자가 그대로 인류 안에 내려오고 있는 것이죠.
여인도, 엘리야도 한결같이 문제의 원인을 하나님께 돌리는 걸 봅니다.
철없는 우리 자식들이 모든 게 다 부모 잘못 만나고 엄마 때문에 잘못됬다고 우기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딸아이가 이를 못생기게 나아놨으니 3백만원 드는 치아교정을 하겠다고 우기니까 엄마가 한 말이 무엇인줄 아세요?
내가 너 낳을 땐 이 그렇게 생기지 않았었거든. 내 책임이 아니라 네 책임이야.
엘리야는 하나님을 원망하며 죽은 아이를 살려내라고 성경역사상 없었던 기도로 떼를 쓰기 시작합니다.
상황이 어떻게 되었든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해결하실 능력이 있다는 믿음입니다.
원망을 좀 해도 눈물을 좀 흘려도 낙심을 좀 해도 반드시 기억할 것은 하나님은 이 문제를 선하게 만드실 수 있다는 믿음인 것입니다.
믿음대로 이뤄집니다.
그런데 21절에 엘리야가 좀 기괴한 행동을 합니다.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폈다 엎드렸다를 반복합니다.
어찌보면 이교도의 주술 같은 행동처럼 보입니다.
정확한 의미를 알 수는 없지만 행동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아이가 살아난 것은 그 행동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셨기 때문이라고 정확히 말씀하고 있으니까요.
단지 그 만큼 절박한 엘리야의 심정이 드러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다급할 때 일을 좀 수습해보려면 정신없이 뭐라도 하게 되지 않습니까?
제가 처음 접촉사고 났을 때 얼마나 정신이 없던지 비상등을 켠다는 게 와이퍼 움직였다 우측 깜빡이 켰다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율법대로 하면 시체를 만지는 것은 자신을 더럽게 하는 일입니다.
자기가 부정하고 더러워지는 것을 개의치 않을 만큼 아이의 생명을 살리려는 엘리야의 절박한 행동인 것이죠.
한 집에서 살며 사랑했던 그 작은 아이가 호흡을 멈추고 죽어있는 모습에 엘리야가 충격을 받고 허둥대는 것입니다.
시위 중에 시민이 총에 맞아 죽는 것을 보는 순간 발화점이 돼서 사람들이 격앙되고 시위가 급속히 확산되는 경우가 많죠.
죽음이 이렇게 강력한 힘이 되는 것은 생명이 그만큼 존귀하기 때문입니다.엘리야는 자신의 생명의 일부라도 아이에게 나눠주고 싶을 만큼 심령이 간절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로서 반드시 가져야 할 것은 죄인이 죄 가운데 죽어가는 것에 대한 절박한 마음입니다.
그 안타까운 마음이 사역도 하게 하고 전도도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곧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의 이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셔서 죽은 아이를 살려주십니다.
기도는 다른 방법이 없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최상의 방법입니다.
시편94편9절은 말씀합니다.
귀를 지으신 자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아니하시랴
죽은 자를 살려내라는 억지 같은 기도일지라도 하나님은 들으십니다.
우리의 눈물과 간절한 호소로 아버지 앞에 나가면 하나님은 들으시고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반드시 알맞은 응답으로 보상하고 위로해주십니다.
지겹게 우리 발목을 잡는 문제들을 아버지 앞에 들고 나가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대하며 바라시길 축복드립니다.
날씨도 더워지고 일상의 삶도 지치기 쉬운 계절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늘 말씀과 기도로 우리의 영을 강건하게 할 때 육신의 삶에도 자신감과 능력과 활력이 충만하리라 믿습니다.
또 하나님을 위해 우리가 할 작은 일들을 충성되게 감당할 때 이제까지 맛보지 못한 하늘의 기쁨이 만족하게 우리 삶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2013년6월9일 주일설교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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