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하

세미한 소리 (왕상19장9절-18절)

남수연 2013. 8. 14. 13:58

 

성경인물들의 삶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자신의 사역들 속에 감춰졌던 영적인 진리들을 천국에서 알았을 때 그들이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낙심한 한 사역자를 다시 붙들어 세우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을 기록하고 있지만 그 안에는 더 아름답고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말씀을 나누는 가운데 역시 피곤하고 지친 우리 심령을 회복시켜주시고 중대 메시지를 깨닫고 진리 위에 우리 믿음을 굳게 세워주시길 소원합니다.

 

본문에서 먼저 낙심한 자를 세워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알게 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크게 낙망한 엘리야를 떠나지 못하고 계십니다.

낙심한 우리 곁에는 항상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삶에 지쳐 마음이 상하고 믿음마저 흔들릴 때가 우리에게도 많이 있습니다.

애써 믿음을 발휘하고 낙관적으로 살다가도 작은 일이 계기가 돼서 한순간 낙망해 버릴 때도 있습니다.

이런 낙망에 빠지면 마음을 회복하기가 쉽지 않죠.

우울감과 절망감이 마치 해초처럼 어둡게 마음을 휘감고 끈끈하게 달라붙어 떨쳐내기가 힘듭니다.

저도 기질이 우울질이라 부정적인 생각에 한번 빠지면 추스르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렇게 매일 낙심에 빠지는 우리가 그래도 이렇게 소망을 붙잡고 서 있는 것은 낙망한 우리 곁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극심한 우울감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는 엘리야를 찾아오십니다.

하나님이 찾아오시지 않았다면 그는 로뎀나무 아래에서 죽어갔을 것입니다.우리가 하나님을 찾을 의지조차 없는 낙망과 슬픔 가운데 있을 때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믿음이 좋아서 절망의 나락에 빠지지 않은 게 아닙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방법으로 항상 하나님은 낙심한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육신의 한계를 가진 우리에겐 몸과 정신의 안식이 필요합니다.

먹지도 않고 기진해서 로뎀나무 아래 누워있던 엘리야를 하나님이 어떻게 다루셨는지 기억이 나시죠?

천사가 엘리야를 주물러주고 어루만졌다고 합니다.

큰 일을 해치운 뒤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이 없이 드러누운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누군가 좀 몸을 주물러 주고 풀어주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이 들죠.

그런데 가족과 함께 살아도 선뜻 말이 떨어지지 않아 혼자 끙끙거리며 밤을 지새지기도 합니다.

가족이면서도 왜 다들 이렇게 외롭게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힘들고 위로가 필요할 때 서로를 위해 가족을 보내주신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좀 반성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우리 가족과 이웃에게 보내실 때 순종함으로  피곤하고 낙심한 세상에서 서로가 주님의 위로하는 손길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천사는 엘리야에게 구운 떡과 물 한병을 먹이고 더 자게 내버려 두죠.

우리의 몸이 힘들면 마음의 낙심도 떨쳐내기가 더 어렵습니다.

몸을 잘 돌보고 알맞은 휴식을 갖는 것도 성도들의 지혜로운 삶입니다.

피로가 다 풀릴 만큼 푹 좀 자고 쉬고 싶은 게 현대인의 소원 아닙니까?

지난 3년동안 인터넷 키워드로 본 한국인의 일상어 1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지친다’라고 합니다.

‘지친다’ 말만 들어도 현대인들의 피곤한 일상이 막 느껴집니다.

지치고 나른하고 잠을 자도 피로가 계속되는 증세가 6개월 이상 지속되면 만성피로증후군이라고 합니다.

현대인이 다 만성피로증후군에 시달리며 살고 있는 것이죠.

문제는 아무리 잠을 자고 쉬었는 데도 그 피로감이 회복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피로감이 완전하게 회복되기 위해서는 심령이 같이 생기를 얻어야 합니다.

심령의 회복을 위해 수많은 힐링 방법이 나오고 있지만 우리 심령은 하나님 안에서 주님의 은혜의 손길로 만져주실 때 비로서 소생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심령의 회복을 위해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만져주시는 자리로 나가야 하는 것이죠.

기도의 자리, 말씀을 묵상하는 자리, 예배의 자리로 그래서 매일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오늘 예배드리는 우리 모두를 이렇게 만져주셔서 영육이 다 강건하게 회복시켜 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예배를 드리고 은혜를 받으면 실제 피곤하고 지친 몸에 활력을 되찾지 않습니까?

항상 우리 심령과 몸이 최상의 상태를 유지할 수있도록 잘 주의를 기울여야 할 줄 믿습니다.

그런데 마음에 큰 문제도 없고 몸도 건강한 상태 중에 있는데 여전히 삶에 기력이 없는 분들이 있습니다.

기력과 활기가 없는 삶의 이유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발견하지 못하고 사명을 따라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작은 믿음이라도 하나님은 그 자녀들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어느 부모가 자식을 낳아 평생 먹여살리기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길 원하겠습니까?

우리의 능력이나 재능이나 정도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다 작은 사명이라도 주셨다는 것입니다.

직장에서건 가정에서건, 교회에서건 그걸 발견하고 살아갈 때 우리 삶에 활력이 있고 흥미진진한 재미와 긴장감이 넘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허망과 무기력에 빠지지 않게 우리를 이끄는 동인이 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바라기는 우리에게 주신 작은 사명을 잘 깨닫고 날마다 보람있는 즐거움과 활력을 누리며 살게되기를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엘리야를 완전하게 회복시키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육신과 심령을 만져주시고 그에게 다시 사명감을 회복시켜주시는 것을 본문에서 봅니다.

그리고 사명을 알고 다시 힘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서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부르셔서 호렙산 동굴에서 대화가 시작하시는 것을 볼 수 있듯이 우리가 낙심하고 자신감을 다 잃었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기도의 자리로 부르십니다.

낙심할 때 자꾸 기도해야 하는 데 하는 생각이 자꾸 들지 않습니까?

기도의 자리로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인 것입니다.

낙심한 믿음에서 탈출하려면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대화가 필요합니다.

기도를 시작하면 현재 상황이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 보게 됩니다.

애매한 불안에 짓눌렸던 현실이 기도를 시작하면 안개가 걷히고 사물이 드러나듯 그 실체가 객관적으로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죠.

불안한 감정으로 시작했던 기도도 일어날 땐 확실히 낙관적인 마음으로 바뀌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낙심한 자들에게 기도하라고 그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우리가 문제를 드러내고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이 그 일에 해답을 주시기 위해서죠.

엘리야가 입을 열자 그가 낙망한 이유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한마디로 말해 하나님을 배반한 민족을 위해 그렇게 열심히 뛰었는데 결과가 이게 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해 일하고 기도하고 결과를 기대했지만 그것이 무너질 때 그 실망감은 참 이겨내기 힘듭니다.

그가 목숨을 걸고 바알 선지자들을 상대했고 기도에 승부를 걸고 간구해서 비를 내리게 했지만 결과가 무라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달라진 게 없고 이젠 자기 목숨마저 위태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맥이 풀리고 눈물이 쑥 빠지지 않겠습니까?

엘리야의 호소에는 낙망한 심령의 특징들이 드러납니다.

자기열심에 대한 공치사와 결과에 대한 책임전가와 자기연민이죠.

우리 안에 이런 마음이 자꾸 들면 그게 지금 낙망했다는 뜻입니다.

내가 그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그렇게 몸을 아끼지 않고 사역했는데, 상황은 똑같고, 인간들은 바뀌지 않고, 하나님께도 섭섭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무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영적 사명을 감당한 엘리야의 좌절과 낙망이 어디서 왔을까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현실에서 낙망하고 침체되는 이유도 다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엘리야의 낙심은 노력의 결과에 대한 근거 없는 확신이 원인이었습니다.

갈멜산의 긴박한 대결과 승리로 이스라엘에 영적대각성과 회개가 일어날 것을 지나치게 확신했었다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그런 결과를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실망감으로 곤두박칠 칠 때도 비슷하지 않습니까?

대개 원하는 결과를 내 마음대로 예측했다 그대로 되지 않을 때입니다.

기대했다 되지 않을 때 그 실망감이 순식간에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기도한다고 원하는 대로 되지도 않고 노력했다고 반드시 그 결과대로 되지도 않습니다.

뒤죽박죽 된 죄악 세상에서 우리 인생이 어디로 굴러갈지 모르는 게 그게 죄의 결과이고 인생이 만만치 않은 이유입니다.

우리 주변엔 이해할 수 없는 일들로 가득합니다.

전두환대통령을 닮았던 배우 박용0씨가 얼마 전 소천하셨습니다.

이장0감독과 함께 선교사들의 순교를 다룬 ‘시선’이란 영화 촬영을 위해 캄보디아에 한 달간 머물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유비저균에 감염되어 돌아와 결국 패혈증으로 사망한 것입니다.

이장0감독과 동문이었던 고인은 이 선교영화제작을 누구보다 기뻐하며 누구보다 열심히 촬영 중이었다고 합니다.

고인의 죽음에 이장0감독은 이틀을 탈진해 일어나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이런 일들이 얼마나 우리 주변에서 많이 일어납니까?

사랑했던 사람의 죽음, 살 소망을 앗아간 질병, 몰락한 가세, 변심하는 사람들.

이 땅에 살아있는 한 모든 폭탄을 다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단지 내가 원하고 노력했다고, 내가 기도했다고 그대로 될 것을 기대했다면 저만큼 실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걸 경험할 것입니다.

그럼 뭐하러 기도하고 왜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는 것입니까?

그냥 안 믿는 사람들처럼 내 의지대로 살다 실패하고 낙심하나 똑같지 않냐는 것이죠.

인생의 과정도 다르고 결과도 다릅니다.

빌립보서4장 6절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우리가 염려하지 않고 평강 가운데 일을 처리해 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도중에 잘못 판단하고 대오를 범하지 않도록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결과가 명백하게 다릅니다.

로마서 8장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 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당장은 이해할 수 없는 어려움과 시련을 겪고 있다 해도 그 끝은 반드시 우리에게 좋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유익한 데로 된다는 것이죠.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은 이 땅이 아닌 앞으로 영원한 세상에서 그렇게 됩니다.

지금은 우리가 원하는 게 절대로 다 옳지도 않습니다.

살아온 날들을 돌이켜 보면 기도한 대로, 원하는 대로 다 되지 않았죠.

전 작가가 되길 원했는데 교사가 됐고 교사로 정년퇴직을 하려고 했는데 난데없이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 기대했던 것보다 더 만족스럽고 좋은 길이었습니다.

매사에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최선을 다하고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지혜입니다.

원대로 되지 않아 그때는 낙망하고 우울했지만 나중에 더 잘 된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께 충성심을 갖고 하나님나라를 위해 많이 애쓰는 사람들일수록 자기의 원하는 결과가 아니면 더 큰 시험에 들기도 합니다.

기도를 좀 열심히 했는 데 안될 때 더 시험에 들죠.

최선을 다한 만큼 지금 엘리야처럼 하나님까지 가르치려고 하기 쉽습니다.

우리의 한계와 미련함을 인정하고 항상 결과에 감사하고 순복하는 것이 결국은 영과 육의 복을 가져오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엘리야의 낙망에는 결과를 좀 기다려야 할 때 인내하지 못하고 둘러엎고 뛰쳐나온 성급함도 원인입니다.

좀 기다려야 될 때인 데 당장 결과가 없다고 스스로 낙심한다는 것이죠.

일에는 빠르지 못한 사람도 참 인내하고 기다리는 것은 잘 못합니다.

몇 년 전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국인의 빨리 빨리 베스트 10을 뽑았다고 합니다.

1위가 자판기에서 뜨거운 커피가 나오는 중인 데 손을 집어넣어 컵을 붙잡고 기다리는 거라고 합니다.

그 외에 3분 전에 컵라면 뚜껑 열기, 웹 페이지 3초 안에 안열리면 닫아버리기, 편의점에서 음료수 먼저 마시고 빈병 들고 와 계산하기 이런 것들이 있었습니다.

기다리지 못하는 인내심의 부족으로 빨리 낙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힘든 일은 좀 보지 않고 모든 상황이 일사천리로 이뤄지길 바랍니다.

그런 일은 이 세상에 일어날 수 없습니다.

땀 흘려 수고하고 땅에 배신당하고 가시와 엉컹퀴에 찔리며 사는 게 이 땅의 인생입니다.

그러나 야고보서 5장 11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인내하면 욥과 같은 아름다운 결말을 볼 것을 확신하는 것은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인내하며 축복의 날을 기대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축복드립니다.

 

또 엘리야의 낙망에는 하나님의 뜻을 앞서서 자기 뜻을 빨리 관철시키려는 문제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하라는 데 까지 하지 않고 자기 생각으로 앞서 나가 일을 해치우다 결과가 실패로 끝나는 일이 많습니다.

의도가 좋다고 결과도 좋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일을 해나가는 과정도 하나님의 뜻을 신실하게 순종하고 최선의 방법을 따라야 하는 것이죠.

제 생각이긴 하지만 엘리야가 바알사제 450명을 죽인 일은 따져 볼 여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확하게 그런 명령을 하셨는지는 성경에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바알사제들을 죽임으로 이세벨의 보복심을 일으켰고 결국 스스로 도망자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로 갈멜산의 사건을 통해 각성한 이스라엘백성들을 가르치고 하나님께 돌이키게 할 뒷 일을 결국 못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서 엘리야의 사역의 의미는 다만 백성들의 마음을 아버지께로 돌이키는 일이였다고 기록합니다.

17절에 보면 아합집안과 바알신앙을 척결하는 임무는 예후에게 주어집니다.

나중에 예후가 바알사제들과 숭배자들을 처형할 때 그들을 신당에 모았는 데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가득했다고 합니다.

이세벨이 죽은 사제들 대신 어차피 다른 사제들들을 또 들여온 것이죠.

하나님의 뜻을 앞서 내 경험과 판단으로 일을 추진하다 시험에 들고 낙망할 때가 우리에게 많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분들은 대개 인생이 좀 거칩니다.

엘리야의 사역과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열정은 우리 같은 사람이 따라 하기도 힘든 일이지만 그의 실패와 낙망을 통해 오늘 잘 깨닫길 원합니다.

항상 기도하며 내 머리를 의지하지 말고 모든 걸 하나님께 맡기고 인도함을 받길 바랍니다.

결과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하나님의 선하신 결말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좀 더 인내하며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아버지의 인도를 따라간다면 큰 낭패 없이 매일 만족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젠 하나님이 응답하실 차례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물으셨고 엘리야는 볼멘 소리로 일이 제대로 처리되지 않고 애꿎은 자기만 곤경에 빠졌다고 대답했죠.

그런데 11절에서 하나님은 말씀대신 엘리야 앞을 지나가시는 것으로 응답을 대신합니다.

그리고 나서 자, 봤지? 이젠 이해하지?

이런 식으로 대화가 전개됩니다.

좀 난해하죠.

엘리야도 잘 이해하지 못해 똑같은 대답을 두 번하는 걸 봅니다.

어쨌든 하나님이 엘리야의 앞을 지나가신 것이 그의 질문과 낙심과 불만의 해답이 된다는 뜻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먼저 하나님께서 세미한 소리 가운데 임재하신 부분을 보겠습니다.

엘리야의 의문에 하나님께서 대답 대신 갑자기 그의 앞에 내려오셔서 그 앞을 지나가십니다.

이 땅에 하나님이 현현하실 때는 언제나 엄청난 위력을 가진 초자연적 현상이 동반됩니다.

산을 가를 것 같은 강한 바람에 바위들이 부서져 나갑니다.

돌산의 암반이 쫙쫙 갈라지는 두려운 지진이 있고 그 위에 불이 타오릅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뒤에 이어지는 고요함과 세미한 소리 속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의미가 무엇일까요?

지금 엘리야는 하나님의 심판을 미루시기 때문에 저들이 회개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즉각적으로 악을 다스리지 않는 것이 불만인 것입니다.

모든 인간이 정의의 사도가 된 듯 하나님을 향해 던지는 질문이죠.

왜 악을 심판하지 않으시냐고.

심판받을 악인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은 깨닫지 못한 것일까요?

11절에서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폭풍과 지진과 불이 지나는 하나님 면전에 엘리야가 설 수 있었습니까?

동굴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다 고요하고 세미한 소리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자 그때서야 밖으로 나가서 하나님을 대면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공의와 심판 앞에 그 어떤 죄인도 구원받지 못합니다.

엘리야도 마찬가지죠.

그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세상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고 세상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미 세상은 심판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속죄의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아서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그들이 심판받은 증거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16절에서 이미 그들이 하사엘과 예후와 엘리사에 의해 심판받을 자들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오늘 엘리야 앞에서 선포하시는 것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 구원을 준비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경륜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이 호렙산 동굴에 대해서 과거에 있었던 일을 아십니까?

지금 엘리야와 하나님이 대면한 시내산 동굴, 그 곳으로 가기 위해 이동했던 40일, 이 단어들 속에서 연상되는 인물이 있죠?

바로 모세입니다.

이 시내산 이 동굴에서 40일간 하나님과 모세가 대면했고 하나님과 백성들의 계약서인 십계명 돌판을 받았습니다.

9절에 보면 그 곳 굴이라고 기록된 히브리원어는 그냥 굴이 아니라 정관사가 붙어있어서 정확하게 이미 알려진 바로 ‘그’ 굴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하나님은 율법으로 모세와 언약했지만 율법은 실패했습니다.

회개하라고 수없이 보내신 선지자를 대표하는 엘리야도 실패했습니다.

계명으로 가르쳐도 심판을 호소하고 불을 내려도 절대 죄인들은 하나님 앞에 구원받겠다고 나서질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미한 소리로 완전한 구원을 준비하셨습니다.

엘리야의 심정을 가진 세례요한울 가리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해 이사야선지자는 어떻게 예언합니까?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율법의 심판으로도, 선지자의 책망과 기적으로도 죄인은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만지는 세미한 소리로 하나님은 죄인을 구원하시러 오셨습니다.

회개한 성도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에서 회개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실체를 성령의 조명아래서 똑바로 대면할 때 그 일이 일어납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고 진정한 회개의 순간이 없었다면 십자가의 예수님을 떠올리며 자꾸 기도하며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왜 저 분이 십자가에서 저렇게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형벌을 당하고 계신가?

예수님은 신적권능으로 원하면 언제고 고통을 풀고 내려오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거기서 내려오지 않으시는 것은 분명 이유가 있는 희생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저렇게 죽으시는 것은 인류의 죄의 댓가를 치르기 위해서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죄인이구나.

예수님이 죽음으로 내 죄를 속죄해 주셔야만 내가 오염되고 중독 된 죄에서 씻겨지고 하나님 나라에서 영생할 수 있구나.

이것을 십자가 아래에 나가 매일 생각하십시오.

성령께서 어느 순간 예수님의 그 사랑을 가슴 뭉클하게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결코 순종하고 사랑하지도 못하는 내 영혼 깊은 곳의 원죄가 얼마나 끔찍하고 큰일 날 것인지를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죄로 오염된 인간인지를 알게 하시고 예수님이 그것을 씻기 위해 내 대신 십자가의 세례를 받고 계시다는 것을 분명히 믿어지게 하실 것입니다.

이 구속사적인 하나님의 계획을 보이시기 위해 오늘 하나님께서 직접 내려오셔서 엘리야 앞을 지나가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이 땅에 내려오신 것은 모세 이후 없었던 일입니다.

단지 엘리야의 심령을 회복시키시기 위해 오늘 그 영광스런 현현을 하셨다는 건 말이 되지 않습니다.

세미한 소리 속에 자신의 영광과 권능을 감추신 성자하나님,

모세로도 엘리야로도 이룰 수 없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 미천한 몸을 입으시고 내려오실 예수님을 보여주시는 놀라운 계시가 세미한 소리인 것입니다.

이 관계를 나중 신약시대 한 장소에서 확실하게 그림으로 보여주십니다.

변화산 기억하시죠?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께 내려와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굳이 그들이 내려와 인류의 구원에 대해 주님과 말씀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런 영적 원리를 한 눈에 깨닫도록 보여주고 짝을 맞춰 해석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세미한 음성으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좀 지진과 우레 같은 음성으로 우리를 부르시면 똑바로 들을 것 같은 데 아니라고 하십니다.

또 우리 평생에 역시 세미한 음성으로 인도하십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을 보십시오.

성령님의 권능이 사도행전에 얼마나 잘 드러납니까?

성령을 속이고 초대교회의 부흥의 불길을 죄악으로 교란시키려 했던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그 자리에서 죽을 만큼 성령님의 거룩함은 죄인에게 치명적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을 구원하시고 성장시키기 위해 성령님의 역량에 비해 너무나 미미한 일을 우리 안에서 평생 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얼마나 고요하고 세미하게 우리를 이끄십니까?

너무나 세미해서 그 일이 마치 자연적으로 일어나지 않았나 의심이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미하지만 분명하게 계시고 또 일하십니다.

하나님의 기적 같은 큰 은혜, 우리 앞에서 지진이 나고 바위가 터지는 은혜를 너무 기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엘리야는 사르밧과부의 집에서 밀가루통의 가루가 줄어들지 않는 기적을 삼년 간 목도했습니다.

기도할 때 하늘에서 불이 내리고 삼년 반 가뭄을 종식시킬 소낙비가 내리는 기적을 일으킨 주인공이었습니다.

그래서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이세벨의 협박에 화려했던 믿음의 경력이 무슨 소용이 있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은혜는 참 작고 세미한 것으로 나타내십니다.

낙심한 중에 우연한 곳에서 실마리가 잡히고 뜻하지 않은 곳에서 슬그머니 문이 열리며 우리의 진로를 인도하십니다.

매일 보던 나무와 떠다니는 구름 속에서 문득 하나님의 따스한 눈길을 느끼게도 하십니다.

하나님의 섬세하신 인도를 따르기 위해 우리 마음을 하나님을 향해 항시 열어두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루에도 수 없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시고 힘을 주시고 지혜와 용기를 주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점점 명료하게 느끼며 담대하게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예레미야선지자의 동역자이던 바룩에게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보라 나는 내가 세운 것을 헐기도 하며 내가 심은 것을 뽑기도 하나니 (온 땅에 그리하겠거늘) 네가 너를 위하여 큰 일을 찾느냐 그것을 찾지 말라

우리는 너무 크고 화려한 일에 대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지 않은가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내 역량에 맞게 주어진 일에 감사함으로 최선을 다하고 즐겁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주님, 이정도면 좋아요. 좀 이렇게 살 수는 없을 까요?

하늘을 바라보며 이렇게 고백하는 자족하고 감사한 믿음의 사람들이 다 되기를 원합니다.

심기도 하고 뽑기도 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준비에 맞춰서 영향력을 키워주시고 삶의 지경을 넓혀주실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의 낙망한 마음과 불신을 정말 최선을 다해 위로하시고 다시 회복시켜 주십니다.

매일 삶에 지치고 낙심하는 우리도 성령께서 섬세한 손길로 만져주시고 새 힘을 주시는 줄 믿습니다.

이 은혜를 매일 맛보지 못한다면 무엇보다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매일 눈을 감고 그 고통스럽게 목숨을 주신 사랑을 깨닫길 기도하십시오.

독생자를 주신 아버지의 사랑과 우리를 위해 죽으신 아들의 사랑을 꼭 확신하시고 기쁨과 감사함으로 날마다 새 힘으로 회복되는 삶을 사시길 축복드립니다. 아멘.

  2013.8.11. 주일설교 남수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