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하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왕하7장1절-10절)

남수연 2014. 3. 5. 14:04

 

오늘 제목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배경은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깔린 암울한 사마리아성입니다.

우리의 어두운 그늘과 근심스런 문제에도 오늘 말씀을 통해 아름답고 기쁜 소식이 힘차게 들려지시길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지금 북이스라엘의 사마리아성은 아람왕 벤하닷에 의해 포위되어 있습니다.

사마리아성은 고지대에 견고히 지어져 적의 침공이 여의치 않은 곳입니다.

사마리아성을 함락하기 위해서는 성을 포위하고 외부로 부터의 공급을 차단해 굶어죽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전술입니다.

본문에서 얼마나 오래 성이 포위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앞6장을 보면 사마리아성의 형편이 얼마나 절박한지 알 수 있습니다.

성안의 식량이 바닥 나 백성들이 굶어죽어 가고 있었습니다.

고기감도 안되는 나귀머리 한 개 값이 80세겔, 우리 돈으로 대강 환산해보니 이삼백만원쯤 되는 것 같습니다.

비둘기 똥이라고 불리우는 박한 곡물도 1킬로에 40만원이 넘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사람들의 멘탈이 붕괴되기 시작했습니다.

궁지에 빠진 인간이 무슨 짓까지 하는 지를 볼 수 있는 일이 벌어집니다.

당시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왕은 악한 왕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아합왕의 아들인 여호람이었습니다.

그도 역시 부전자전이었습니다.

여호람왕이 성위를 지나는 데 두 여인이 다투다 한 여인이 고함을 치며 도움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두 여인이 약속하기를 오늘은 네 아들을 삶아서 먹고 내일은 내 아들을 삶아먹자 했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약속대로 아들을 내놓아 삶아 먹었는데 다른 여인이 자기 아들을 감추고 내놓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게 극한 상황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짓입니다.

생존 앞에서는 평소에 나라고 생각했던 것도 여지없이 깨집니다.

급할 때 불쑥 나타나는 것을 보면 평소에 나 같지가 않죠.

북이스라엘이 오늘 왜 이렇게 끔찍한 파멸의 위기에 직면한 것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버리고 심판받을 죄로 심각하게 부패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와 보호를 벗어 버리니 가나안부족의 잔인한 약육강식의 생태계에 희생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잔혹한 전쟁역사가 곧 인간역사이지 않습니까?

우리나라도 언제 요즘 같은 평화시대를 이렇게 오래 누려보았습니까?

일제 찬탈에 6.25에, 민주화 항쟁에 우리나라도 오랜 전쟁의 참상을 다 겪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지금 우리가 이런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왜 하나님신앙을 버리고 이교신앙을 받아들이고 부패했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인간이 하는 짓이 다 비슷하기 때문에 그걸 통해 우리의 믿음을 잘 단도리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신앙을 완전히 버린 게 아니라 혼합 종교를 만들었습니다.

가나안민족이 만들어낸 우상신과 하나님신앙을 섞어서 믿은 것입니다.

이교도신앙의 매력이 무엇입니까?

죄와 도덕성이 문제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죄를 짓고도 남에게 걸리지만 않으면 되는 것입니다.

신앙도 도덕도 같이 타락하게 되는 것이죠.

이게 이스라엘이 멸망당할 죄의 늪에 빠진 원인입니다.

지금도 기독교에 무속신앙이 혼합되고 이교적인 것들이 은밀하게 혼합되고 있습니다.

기독교를 종교화시키려는 것이죠.

종교는 절대 인간의 죄를 다루지 않습니다.

인간이 만들어 냈는데 왜 인간의 치부를 드러내고 죄 문제를 다루겠습니까?

모든 종교는 인간의 죄를 적당히 무마하고 복을 구하고 심리적인 위안을 구하며 만인 구원을 염원하는 것입니다.

죄를 직시하고 멸망의 근원인 죄 문제를 다루지 않으면 바르게 하나님을 믿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인간은 바로 죄 때문에 멸망하기 때문입니다.

죄를 다루지 않고 복을 받으라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죄가 문제되지 않으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기독교를 인간의 종교 중 하나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종교가 아니라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이 세계를 통치하시는 엄연한 사실과 공의로 심판하실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를 감추지 않고 드러내고 그 문제를 십자가에서 해결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나서 끊임없이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 성도라는 이름인 것입니다.

죄도 은폐하고, 퇴폐적이고 은밀한 이교적인 향취를 풍기는 가나안의 종교도 즐기니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만사가 다 편하고 잘 돌아가는 것 같았겠죠.

그러나 강대국이 잔인한 야심을 갖고 침공했을 때 그들을 보호해 줄 하나님을 스스로 버린 것입니다.

사마리아성의 이 참상은 하나님을 벗어난 인간사의 고통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즘도 주변에서 사마리아성 못지않은 기막힌 일들이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얼마 전엔 부부싸움을 하다 어린 아들을 벽에 집어던져 죽게 한 비정한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이에 못지않은 해괴한 일들이 화려하고 풍요로운 21세기 신흥경제대국을 꿈꾸는 우리나라에서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평화를 말하고 풍요를 말하지만 세상이 병들고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보호와 은혜가 없이는 우리 인생도, 우리 가정도 다르지 않습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더욱 예수님을 단단히 의지하며 죄를 멀리하고 보호와 은혜 안에 거하는 모두가 되길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오늘 이런 북이스라엘의 참상은 자기의 힘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 때 자기 백성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임하신 것입니다.

당해도 싼 고통을 자청한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고 또 품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지금도 우리의 연약함을 감싸고 계신 것이 믿음이 부족한 우리에게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참 독하게 자녀교육을 시키셨더군요.

아이가 어릴 때 자꾸 다리미를 만지려고 하면 손가락을 다리미에 살짝 대서 물집이 생길 만큼 뜨거운 맛을 보여줬다는 거예요.

다시는 다리미에 접근 안한답니다.

바늘을 자꾸 집으려 하면 바늘로 피가 한 방울 나게 찔러 주면 다시는 바늘을 가지고 놀려하지 않는답니다.

오늘 사마리아는 뜨거운 맛을 보았지만 아버지의 사랑은 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엘리사선지자를 통해 단 하루 만에 사마리아성의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갈 것을 예고하십니다.

굶어서 죽어가는 그들을 한 순간에 다 구원해주신다는 것이죠.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아람군대가 철수한다 한들 단 하루 사이에 어떻게 성안의 식료품가격이 안정되고 굶주림이 완전 해결 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왕의 신하 한사람이 되지도 않을 소리라고 찬물을 끼얹지 않습니까?

본문에서 읽은 대로 사마리아의 구원은 상상도 못한 방법으로 일어납니다.

아람군대들의 귀에 굉장한 군대의 함성과 마차가 달리는 굉음과 무수한 말발굽소리가 진을 향해 습격해오는 소리를 보내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돈을 주고 용병을 불러왔다는 근거없는 소문이 순식간에 퍼집니다.

엄청난 군사들의 함성이 점점 가까이 들리자 정신이 나간 아람군대가 막사를 거둘 틈도 없이 앞을 다투어 도망칩니다.

군량미와 위용을 과시하기 위해 동원 된 금은 기구들과 말과 나귀를 그대로 남겨 놓고 목숨만 건지려고 뛰어 달아난 것이죠.

하나님의 전술은 우리의 생각과 지혜를 뛰어넘습니다.

하나님이신들 어찌하랴라는 소리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무슨 제약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완전한 절망과 실패 속에서도 우리를 도우시고 건져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0세기에도 이런 초자연적인 기적이 전쟁사에 있었다는 것을 아십니까?

이스라엘과 아랍연합군이 격전했던 6일전쟁이라는 전쟁이 있었습니다.

1967년 이스라엘과 아랍연합군의 돌발적인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전쟁은 6일만에 끝났고 이스라엘은 대승을 거두고 과거 영토의 대부분을 탈환했습니다.

그런데 군사력으로 볼 때 상대가 되지 않는 이스라엘이 어떻게 그런 승리를 했는지가 전쟁역사의 미스터리입니다.

이 전쟁에서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일들이 있었다는 기록이 X파일로 남아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지대공미사일 기지를 공격할 때도 무슨 이유인지 이집트군대가 대항도 하지 않고 퇴각합니다.

왜 이집트군이 싸우지도 않고 수천억원에 달하는 미사일을 기지에 다 버리고 퇴각했는지가 지금도 미스터리로 남아있습니다.

크고 작은 신비한 전쟁기록을 보면 사람이 아닌 전능자의 손이 전쟁에 개입되었다는 것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가장 이상한 일은 예루살렘 동쪽지역을 탈환 때 일어납니다.

당시 예루살렘 동쪽을 지배하고 있던 요르단과 이스라엘군이 접전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아침 갑자기 요르단 구역에서 들여오던 총성이 멎고 고요해졌습니다.

잔뜩 경계를 하며 동예루살렘에 입성한 이스라엘 군대는 자기들의 눈을 의심했습니다.

도시는 으스스한 고요함에 쌓여있었고 인적이 끊긴 채 텅 비어 있었습니다.

여기저기 군수품을 버려둔 채 요르단군대가 황급히 예루살렘에서 철수해버린 것입니다.

총 한발 쏘지 않고 꿈에도 그리던 예루살렘시가지와 옛성전의 유일한 흔적인 한 쪽 벽인 통곡의 벽을 다시 찾게 된 것이죠.

지금도 하나님은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인간 역사에 개입하십니다.

하나님은 뒷짐 지고 계시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아버지께서 지금도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셨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 지금도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 일하십니다.

우리 삶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많은 일들 뒤에 하나님의 손길이 역사하시는 것을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얼마 전에 다혜자매가 의대입학하며 거액의 장학금을 받았지 않습니까?

다혜자매가 하나님이 주신거라고 말했다고 해서 참 기특하고 마음이 흐뭇했습니다.

앞으로 다혜자매가 더 공부 잘해서 더 많은 장학금도 주실 줄 믿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다혜자매 부담 되서 죽는거죠.

지금도 충분히 잘했으니 할 수 있는 만큼만 최선을 다하고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기시길 바랍니다.

그때 제가 밥을 먹다 우리 서원이는 뭐하고 있나 하는 소릴 들으신 분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도 그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지난 주에 기대도 않았던 국가장학금이 삼백만원 나온 것입니다.

해당되는 사항이 절대로 없는 데 어떻게 나왔는지 아직도 미스터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각 사람의 형편을 다 알고 계십니다.

간절히 주님을 의지하고 도움을 구할 때 절대 실망시키지 않고 놀라운 방법으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 성도님들의 자녀들의 진로와 학업과 학자금까지 다 예비하고 우리를 인도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6일전쟁 같은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젠 이 엄청난 기쁨의 소식이 사마리아성에 알려져야겠죠.

그 경위가 오늘 본문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람군의 퇴각 사실을 최초로 목격한 사람들은 네 명의 나병환자였습니다.

나병환자는 부정하게 취급되어 성 밖에서 살도록 율법에 규정되어 있습니다.

전염병이 공동체에 퍼지지 못하게 하신 규례였던 것이죠.

나병환자들은 성 밖에 살며 가족들이 갖다 주는 음식으로 연명했습니다.

그런데 성 안의 형편이 그렇다 보니 누가 나병환자까지 챙기겠습니까?

영락없이 굶어죽게 되어 버린 것이죠.

그래서 이들이 결심을 하고 아람군대에 투항하러 들어간 것입니다.

투항이 말이나 되는 결정입니까?

장교도 아닌 나병환자들의 투항을 누가 반기겠습니까?

진영에 가까이 가기도 전에 화살에 맞아 죽거나 돌에 맞아 죽을 게 분명합니다.

그런데 네 사람이 엉뚱한 결정을 하고 희망을 갖고 아람진영으로 찾아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간섭하신 것입니다.

때로 되지도 않을 상황인 데 알 수 없는 희망을 갖게 될 때가 있습니다.

믿음으로 조금씩 해 나가다보면 소망했던 일이 이뤄지는 일이 많습니다.

이런 일을 성경에 이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2장13절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귀중한 소원을 품게 하시고 그 길로 인도해 주시길 축복드립니다.

작정하신 하나님은 정확한 시각에 일하십니다.

5절에 보면 나병환자들이 결심하고 떠난 시간이 해질 무렵이었습니다.

6절에 보면 아람군대가 도망하기 시작한 시간도 해질 무렵이었습니다.

나병환자들이 조금만 일찍 출발했어도 죽음입니다.

하나님이 시간을 맞춰주시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이 때에 맞춰 일하시길 기도하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아는 모두가 되길 원합니다.

이들이 진영 끝에 도착했을 때 아람진영은 6일전쟁의 예루살렘처럼 으스스한 적막감이 감돌았습니다.

얼마나 황급히 퇴각했는지 길에 아람군대가 버리고 간 군수물품이 즐비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눈앞에 펼쳐진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보던 나병환자들은 정신없이 실컷 먹고 마셨습니다.

막사에 들어가 은금과 의복들을 거둬들여 감추고 또 다른 막사를 털었습니다.

아마 평생 먹고 살 만큼 챙겼을 것입니다.

그러다 이 사람들이 심경이 점점 불편해지기기 시작합니다.

9절에 보면 서로 이렇게 말하죠.

우리가 이렇게 해서는 안되겠다. 오늘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거늘 우리가 침묵하고 있도다.

그들이 각자가 속으로 망설이고 있다 불편한 마음을 털어놨다는 것입니다.

이 기쁜 소식을 우리만 알고 있을 수는 없다, 아침까지 기다릴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들이 해질 무렵에 일어나 진영으로 왔으니 이미 날은 어두웠습니다.

깜깜한 밤길을 돌아가 이 소식을 전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원문을 직역하면 그 분께서 우리에게 벌을 내리실 것이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밤을 넘기며 굶주려 죽는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이 좋은 소식을 알리지 않으면 죽지 않아도 될 사람이 죽을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 죄를 물으실 것 같은 두려운 생각이 들었던 것이죠.

나병환자들은 그 밤에 불편한 다리를 끌고 어두운 밤길을 더듬으며 사마리아 왕궁을 향해 떠났습니다.

이 아름다운 소식이 그 사망의 밤을 보내는 사람들에게 전해지게 된 것입니다.

이 소식에 백성들이 몰려 나가 아람진영을 노략하니 사마리아 성중에 곡물이 넘쳐나게 됩니다.

엘리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루 만에 사마리아성의 모든 삶은 완벽한 일상으로 돌아왔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이 역사적인 사건을 만들어 내셨고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 지를 잘 적용해 보아야 하겠죠.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는 나와 너의 구원입니다.

내가 구원을 받고 너도 구원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구원에 대한 다양한 진리를 이 사건을 통해 그림언어로 보여주시는 것이죠.

우선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인간의 구원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성은 굶주려 죽어가면서도 아무도 하나님께 손을 벌리지 않았습니다.

교회밖에 무수한 사람들이 그들의 인생에 하나님을 끼워넣기를 조금도 원하지 않습니다.

다들 자기 능력으로 자기 식으로 독자적인 인생을 꾸려나가길 원합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은 구원이 필요한 줄을 모릅니다.

사람들은 아무도 구원받기를 요청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혼자 팔을 걷어 부치셔야 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 스스로가 인간의 죄를 대신해 자신을 심판하시고 구원의 길을 내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끌어다가 이 구원의 맛을 억지로 보게 하고 구원을 선택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걸 보여주는 것이 나병환자들의 구원받는 과정입니다.

아람진영을 찾아 나선 나병환자들의 동기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이적행위였을 뿐이지 무슨 믿음도 아니고 선한 의도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처음에 교회에 나오는 의도도 비슷합니다.

내 삶이 좀 나아질 무언가가 혹시 교회에 있지 않을까,

도저히 살아갈 길이 막막한 환경에 몰려 어떻게 좀 해결될 수 있을까,

불안한 마음에 평안이나 좀 얻어볼까.

뭐라도 믿으면 좀 복을 받지 않을까

그런 정도의 마음으로 대부분 교회에 발을 들여놓는 것이죠.

그러다 나병환자들처럼 구원의 복된 소식을 점점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들이 눈 앞에 벌어진 일들을 보고 무엇을 발견합니까?

하나님이 이 일을 하셨다는 것을 분명하게 지각하게 됩니다.

이 일을 성에 알리지 않으면 그 분이 벌을 내리실 것이라는 그들의 말은 정말 하나님의 존재를 믿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구원이 정말 하나님께로 부터 왔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인정하는 믿음이 생겼다는 것이죠.

그들의 믿음이 진짜라는 것은 밤의 위험을 무릎쓰고 사마리아성을 찾아간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나병환자의 말을 누가 들어줄지, 말도 꺼내기 전에 돌에 맞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의식하니 안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진짜 믿음은 사람을 움직이게 합니다.

이것이 또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먼저 구원받은 사람은 아름다운 소식을 성안에서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일 밝았을 때가 아닌 오늘 어두울 때 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밤을 지내며 누군가가 죽음을 맞고 구원의 기회를 놓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많이 알려진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 과학기술처장관을 지낸 정근0 장로님과 전두0전대통령 때 경제수석을 지낸 김재0씨가 막역한 친구사이였습니다.

그런데 정장로님이 친구를 전도하지 않은 것에 항상 마음에 찔림이 있었습니다.

몇 번 기회를 보다 어느 날 자네 나하고 교회 좀 나가세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김재0 씨가 순순히 그럴 생각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 대통령을 모시고 미얀마에 가니 다녀와서 함께 교회에 가보자고 말했습니다.

더 이상 강요할 수 없어 그러자고 헤어졌습니다.

김경제수석은 전대통령과 함께 미얀마로 갔고 정장로님은 중국 원자로 회의에 참석하러 갔습니다.

회의를 끝내고 호텔에 들어와 텔레비전을 켜는 순간 엄청난 사건이 뉴스에서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바로 아웅산 폭발사고로 17명의 고위인사들이 죽었고 사망자 명단에 김재익씨 이름이 들어있었던 것입니다.

복음을 전할 기회를 놓쳤다는 생각에 가슴을 치며 괴로워했다고 합니다.

내일이면 늦는 사람이 있기에 오늘 구원의 복된 소식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한다고 다 믿지는 않습니다.

본문에서 이 기쁜 날 죽은 왕의 신하를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엘리사를 통해 주신 구원의 기쁜 소식을 믿지 않았기에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엘리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고 이미 앞 장에서 놀랄만한 이적들로 여러 번 이스라엘을 구했습니다.

그런데도 엘리사를 통해 하신 말씀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으면 구원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이런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건 정말 버려야 할 아무 영향가가 없는 신앙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아무리 하나님을 믿어봤자 의심하는 마음에는 좋은 것을 주시지 않습니다.

기도할 때도 이게 뭐 응답이나 되겠나 이런 생각 갖고 하면 무슨 응답이 있겠습니까?

성경은 그것을 두 마음을 품었다고 말씀하고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필요해서 기도한다면 좋으신 하나님이 좋은 것으로 응답할 것을 믿고 감사한 마음으로 기대하며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좋으신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데 왜 부정적인 생각으로 기도합니까?

우리 자식들이 부모를 의심하고 좋은 것을 내게 주실리가 없다는 생각으로 우리를 대한다면 부모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관계에서 가장 나쁜 것은 의심입니다.

상대의 인격을 믿지 않고 의심하는 게 가장 나쁜 관계입니다.

하나님을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게 해가 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다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신 구원을 불신하며 믿지 않았던 신하에게 엘리사가 경고합니다.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그 말씀대로 뒤에 보면 성문을 지키다 흥분한 군중들에게 밟혀 죽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들이지 않아 결국 심판을 받을 불신앙의 사람들을 경고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고 구원받기로 결심하는 것은 듣는 이의 몫입니다.

영혼이 구원받는 크고 놀라운 일은 하나님이 하실 것이고 우리는 평범한 일상에서 내가 만나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필그0교회를 담임하는 양춘0목사님이 설교 중에 이런 말씀을 하더군요.

교인 중에 평생을 충성되게 하나님을 섬긴 권사님이 있으셨답니다.

젊을 때는 주방에서, 주일학교에서 참 아름답게 봉사하셨고 나이가 드시니 유아방에서 아이들을 봐주는 봉사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돌아가시고 90세가 다 되시니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행동반경도 좁아져서 집에서 교회, 집에서 병원을 오가는 정도 밖에 할 수 없었죠.

그러다 권사님이 이제 예수님 앞에 갈 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마지막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생각하다 생전에 세 명만 전도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 대상자가 권사님이 치료받는 병원의 의사였습니다.

치료받으러 갈 때 마다 선생님, 예수님 믿으세요.

이렇게 번번이 전도를 하는데, 모시고 간 자식들이 창피하다고 집에서 기도만 하면 되지 뭐하러 치료받는 사람이 그러냐는 것입니다.

그래도 권사님이 꾸준히 의사를 볼 때마다 교회나가시고 예수님 믿으라고 계속 권하셨습니다.

그러다 권사님이 넘어져 다리를 수술하게 되었습니다.

마취제를 맞고 의식이 사라졌을 때 권사님이 뭐라고 무의식 속에서 중얼 중얼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의사가 귀를 기울여 들어보았더니 선생님, 예수님 믿으셔야 합니다. 라는 말이었습니다.

이때 의사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무의식 속에서도 이 분이 왜 내게 이렇게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는 것일까 감동을 받고 가족들을 다 데리고 교회에 나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양목사님이 자기도 그런 경험이 있어서 안다는 것입니다.

운동을 너무 좋아하던 양목사님이 운동을 하다 아킬레스건이 끊어져서 수술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마취제를 맞고 수술실로 이동 중에 의식이 흐려지는 데 양목사님이 의사를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선생님, 수술한 뒤에도 저 운동할 수 있을까요?

목사가 되어 전도를 한 것도 아니고, 수술 뒤에도 목회를 계속할 수 있냐 묻는 것도 아니고 운동할 수 있을지가 제일 큰 관심사였다는 것이죠.

권사님의 말씀을 들은 뒤 그때를 생각하면 그렇게 부끄럽다고 하십니다.

그 권사님은 지금 아마 예수님 앞에서 자신이 복음을 전해 구원을 받은 의사 가족으로 인해 기뻐하고 계실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앞에 가서 구원의 큰 비밀이 모두 사실로 밝혀졌을 때, 주님이 우리에게 뭐라고 말씀하실까요?

왜 너 그때 네 가족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았니, 왜 직장 그 사람에게 복음을 좀 전하지 그랬니.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 때 천국의 아름다운 유업을 우리 눈으로 볼 때 가족을 데려오지 못하고 친구를 데려오지 못한 것에 우리 스스로가 가슴을 치며 애통해 할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올해도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지 못해도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을 위해 마음을 다해 일년동안 간절히 기도하고 권면하길 원합니다.

그 분들을 우리가 천국에서 만날 때 우리에게 벅차오르는 그 환희와 안도감이 바로 우리에게 주시는 영원한 상급입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전도대상자를 정하고 열심히 섬기기로 작정한 우리 모두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이분들을 구원하시고 또 순종하는 모두에게 소원하는 좋은 것도 넘치게 허락하실 줄 믿습니다. 아멘.

 

  2014.2.16 주일설교 남수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