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문은 어릴 때 읽은 전래 동화 금도끼와 은도끼를 연상하게 합니다.
열왕기상하서는 이스라엘의 남북 왕조의 역사를 기록한 책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이 직접 자신을 계시하시고 또 선지자들을 통해 뜻을 보여주시며 이끌어 오신 역사입니다.
특히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선지자들을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은 훨씬 더 우리들 입장에서 알기 쉬운 면이 있습니다.
본문은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하던 엘리사선지자의 일화 중 한가지입니다.
무거운 쇠도끼가 물 위로 떠오르는 기적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왜 이 기사가 역사서 중간에 기록되었는지를 연구하는 것은 좀 고민스러운 일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좀 고민하면서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구약성경을 가지고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셨고, 많은 군중들과 제자들에게 말씀을 계속 가르치고 해석해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던 것이 무엇입니까?
그 해석이 도대체 무엇이냐, 그것을 말씀해 달라는 거 아니었습니까?
잘 해석된 말씀 속에 하나님의 진리가 드러나고 우리의 영을 살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도 하나님이 자연의 법칙을 깨고 기적을 일으키셨다면 분명히 중요한 의미와 의도가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단지 개인의 곤경에서 도움을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만을 말씀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 내용을 통해 우리에게 분명하게 전해주실 메시지가 있으시다는 것이죠.
또 이 내용이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다면 이스라엘의 역사와도 뭔가 연관성이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이런 의문을 갖고 성경을 읽고 말씀을 듣는다면 정말 살아서 활력 있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 안에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령님께서 깨닫게 해주시는 대로 오늘 말씀을 나눌 때 놀라운 말씀의 은혜와 축복이 우리 심령을 채워주시길 간절히 사모합니다.
먼저 선지자의 제자들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본문의 북이스라엘의 시대적인 배경은 극악한 왕으로 손꼽히는 아합왕이 죽고 그 아들 여호람이 다스릴 때입니다.
선왕인 아합왕에게는 사악한 왕비 이세벨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이세벨이 우상숭배를 들여오고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종교 탄압이 휩쓸고 간지 얼마 지나지 않은 상황인데다 지금 왕위에 있는 아합의 아들 여호람 역시 악한 왕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야나 엘리사 같은 선지자들은 대담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직언했고 또 제자들을 모아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가르쳤던 것입니다.
이런 선지자학교가 길갈과 벧엘과 여리고 등지에 있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장소가 비좁아 져서 더 넓은 공간이 필요하게 된 것은 우상숭배가 만연했던 북이스라엘의 상황에서 볼 때 특이한 일입니다.
앞 4장에서도 보면 한 장소에 무려 백여명이 모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선지자가 당시 민족의 신앙부흥을 일으키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또 무지한 백성들에게 영적인 등불을 끄지 않으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열왕기서에서 이 선지자의 제자들이 여러 번 등장합니다.
이런 암흑기에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섬기는 제자들이 얼마나 대단한 믿음이겠습니까?그런데 열왕기서에 나타난 선지자의 제자들이란 사람들이 의외로 그렇지가 않습니다.
어리숙하고 믿음도 없는데다 좀 미련해 보이기까지 할 정도입니다.
엘리야가 승천한 뒤에도 엘리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스승의 시체를 찾겠다고 50명이 나서 사흘을 찾다가 빈 손으로 돌아왔다는 내용이 앞에 나옵니다.
하나님이 하늘로 데려가신 것을 믿지 못했다는 것이죠.
엘리사 곁에서 가장 많은 신앙 교육을 받았을 것 같던 게하시라는 제자조차도 물질에 눈이 어두워 나아만 장군에게서 거짓말로 은과 옷을 받아다 숨겨두지 않았습니까?
어떻게 보면 열왕기서에 나오는 선지자의 제자들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이나, 지금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이나 비슷하지 않은가 싶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평소에 알고 있던 것과 좀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들이 거주할 장소를 신축하려는 의도를 눈여겨 보아야 합니다.
언뜻 보면 지금 모이는 장소가 좁으니 좀 넓히자는 당연한 제안 같아 보이지만 꼭 그런 상황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말하자면 오늘 본문이 ‘제자들이 늘어나 당연히 장소를 신축해야 하고, 열심히 일하다 남의 빌려온 도끼마저 잃어버리는 억울한 수난(?)을 당했다’ 이런 관점에서 보는 것이 정확하겠냐는 것입니다.
열왕기서의 역사를 기록한 사가는 무슨 의도로 이 사건을 한창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비참하게 몰락해 가는 북이스라엘의 역사 중에 끼워 넣었겠냐는 것에 우리가 의문을 가져보아야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본문을 생각해 보려는 것입니다.
우선 1절에 ‘우리가 당신과 함께 거주하는 이곳이 우리에게 좁다’는 말을 원문대로 직역하면 ‘보십시오, 우리가 이렇게 비좁게 거처하는 게 당신에게는 보이지 않습니까?’ 입니다.
그렇게 번역하니 그들의 감정이 좀 느껴지죠?
마치 엘리사가 자기들의 불편한 처지를 방치하고 있다고 탓하는 것 같습니다.
엘리사선지자의 인격이 어떤 지는 열왕기서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한 예로 엘리사가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을 때를 열왕기상 19장21절에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엘리사가 저를 떠나 돌아가서 소 한 겨리를 취하여 잡고 소의 기구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어 먹게 하고 일어나 가서 엘리야를 좇으며 수종 들었더라
가장 백성들의 마음을 잘 살피고 동정했던 선지자를 들라면 당연히 엘리사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항상 자기 유리한 대로 오해를 하는 것이죠.
또 제자들 수가 점점 늘어나니 뭔가 자기들 힘으로 대단한 일이라도 할 것인 양 분위기가 고조되어 있는 것입니다.
2절에서도 잘 보십시오.
우리가 요단으로 가서 거기서 각각 한 재목을 가져다가 그 곳에 우리가 거주할 처소를 세우사이다.
요단강 쪽에 가서 자기들의 거처를 새로 짓겠다는 것입니다.
원문대로 직역하면 ‘우리가, 우리를 위해서 세울 것입니다.’이 말입니다.
또 ‘거기서, 그 곳에’ 라는 말은 이미 정해진 한 장소를 계속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네 있을 곳을 벌써 물색해서 정해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꼭 거기에 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니 문제가 좀 있어 보이죠?
학교를 다시 짓고, 기숙사를 짓는다면 그것을 주도해야 할 사람은 엘리사 아니겠습니까?
정말 장소가 비좁아 운신이 어렵다면 당연히 스승인 엘리사가 조처를 먼저 취하지 않았겠습니까?
엘리사 당시에 제자들이 모이는 학교는 교육장소이기도 하지만 예배처소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사와 사전에 상의도 없이 제자들끼리 다 사전에 답사해 놓고 이제 결재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엘리사에게 따라와서 뒤나 좀 봐 달라는 것입니다.
사실 엘리사에게 동행을 요청한 것도 다 그런 것이 아니라 한 제자만이 그랬다고 본문에서는 밝히고 있죠.
이렇게 살펴보니 자기 원대로 하려는 낯익은 죄인들의 모습 아닙니까?거처를 편안하게 늘리려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의 형편이 그들이 그렇게 안일하게 장소나 넓히고 편리를 도모할 때가 아니지 않냐는 것입니다.
바로 앞 5장26절에서 엘리사가 나아만을 쫒아가 선물을 받아다 감춘 게하시에게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옷을 받으며 감람원이나 포도원이나 양이나 소나 남종이나 여종을 받을 때이냐
엘리사의 눈에는 나라가 기울어가는 게 보이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신앙을 버리고 바알신을 따라 멸망으로 가는 것이 보이는 것입니다.
어찌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일상적인 행복만 좇겠냐는 것입니다.
세상이 심판을 받고 수많은 사람들이 지옥으로 간다 해도, 우리끼리 인생을 즐기고 , 집을 늘리고, 잘 먹고 살면 되는 것 같은 현대교회에도 경종을 울리는 말씀입니다.
엘리사가 스승인 엘리야의 영감의 갑절을 구하고 받았다는 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두 배로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이 우리에게 충만하다면 우리도 하나님의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사가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고 가장 예수님을 닮은 선지자이고 예수님의 예표라는 말을 듣게 된 것입니다.
엘리사는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스스로 자멸을 향해 가고 있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근심하는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선지자였습니다.
엘리사의 일화 중 장차 아람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처절하게 짓밟을 하사엘을 쏘아보다 울었다는 장면은 우리의 마음을 뭉클하게 합니다.
나중에 예루살렘 성이 무너지고 백성들이 로마제국의 칼에 죽는 것을 내다보시며 우셨던 예수님의 그 모습이 엘리사를 통해서 느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에 감동을 받은 엘리사선지자를 통해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알 수가 있는 것이죠.
바알을 숭배하는 백성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제자들조차 이렇게 하나님의 일을 이해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오직 엘리사 혼자 풍전등화 같은 이스라엘 앞에서 침입하는 대적들을 상대하고 막아내고 있다는 것을 열왕기서에서 볼 수 있습니다.
또 오늘 본문처럼 빈곤하고 고통 받는 백성들을 기적을 통해 세심하게 돌보는 모습도 본서에 많이 나타납니다.
영락없이 예수님이 하셨던 구속사역의 모습입니다.
엘리사는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는 게 분명하고 여기 제자들은 항상 이 세상의 성공과 확장에만 관심을 갖는 한국교회와 우리들을 예표하는 것만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제자들이 동행을 요구할 때 엘리사의 반응은 정말 간단합니다.
내가 가리라.
사랑하면 단순하고, 진실하면 단순한 것 같습니다.
행동으로 보여주지 못하니 서론이 길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면 핑계가 길어집니다.
예수님께서 간절히 도움을 구하며 나오는 사람들을 상대할 때도 그러셨습니다.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우리의 의도가 좀 잘못되었어도 예수님의 도움을 구하고 인도를 구하면 주님은 기꺼이 우리와 동행하시며 우리를 바로잡아 주십니다.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나온 이들 중 빈손으로 돌아간 사람은 없었습니다.
영적 암흑기에 기특하게 하나님을 따르지만 여전히 세상적인 가치관과 육신의 필요가 우선이었던 선지자의 제자들이나 우리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데서 오늘 우리가 문제를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연약한 제자들과 기꺼이 동행하는 엘리사의 모습에서 주님은 그런 자신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런 제자들처럼 우리의 동기가 여전히 세속적이고, 이기적일지라도 끝까지 주님을 우리 삶에 동행하시도록 해야 합니다.
결국 우리 길이 예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바르게 교정 되고 축복이 될 것입니다.
다음은 벌목 과정에서 생긴 잃어버린 도끼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렇게 보고 나니 빌려온 도끼를 잃어버린 상황이 그냥 벌어진 일이 아니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살다보면 우리 죄로 인한 어려움도 있고, 세상의 악으로 인해 괜히 겪게 되는 어려움도 있습니다.
그런데 구약의 역사서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당시의 역사관은 하나님을 잘 믿으면 축복이고 잘 못 믿으면 저주라는 사상이 뚜렷했다는 것입니다.율법은 지킴으로 축복이 약속되어진 것이었으니까요.
그러니까 이런 골치 아픈 상황이 벌어졌다면 그 배후는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선지자의 제자들이 집을 짓겠다고 나선 동기에 대해 열왕기 역사가가 시비를 걸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우리가, 우리를 위해, 꼭 거기에 집을 지어야 겠다는 것이 옳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모든 불행이 하나님의 뜻을 어겼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전혀 무관하게 나쁜 일이 일어나는 것만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동기를 살피시고, 교훈할 것이 있을 때 지나치지 않으십니다.
이걸 잘 깨달을수록 믿음에 철이 들어가는 것이죠.
본문에서 빌려온 쇠도끼를 빠트린 사람이 얼마나 놀랐는지 절망적으로 외칩니다.
아아, 내 주여 이는 빌려온 것이니이다.
가뜩이나 빈궁한 생활에 도끼 값 까지 물어줘야 되었으니 눈물이 날 정도로 당황한 젊은이의 모습이 생생히 느껴지죠.
당시 쇠도끼의 값어치는 오늘 날 벌목용 전기톱만큼 서민들이 갖기 힘든 물건이었을 것입니다.
벌목용 전기톱이 한 백만원 정도 하겠죠.
제자들의 어려운 형편에 구비해 놓을 수가 없는 귀중품인 것입니다.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며 빌려다 쓸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남의 것을 빌려서 꾸려가야 하는 인생이 얼마나 고단한지 빚을 져 본 사람은 이해할 것입니다.
그래도 나름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일을 해보겠다고 찾아왔지만 제대로 집에 갖춰 놓은 게 없는 궁핍한 제자들을 엘리사선지자가 측은히 여겼을 게 당연합니다.
빌려온 쇠도끼로 뭔가 해보겠다고 애를 쓰다 그마저 물에 빠뜨린 젊은이 같이 우리가 다 그런 난감한 일들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내 것도 없이 힘겨운 일을 벌여놓고 애를 쓸 때가 있는가 하면 가진 능력도 부족한 데 어떻게든 꾸려나가야 할 문제 속에 허우적거릴 때가 있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이 젊은이처럼 울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단단히 마음에 대비를 하고 있어도 삶이 얼마나 당황스러운 일의 연속입니까?
지금 내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분별이 안되 불안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유가 어찌 되었든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환난에 대해 관심을 가지신다는 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위안이고 소망인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무너지는 상황에서 젊은이가 엘리사를 향해 울부짖었다는 것은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합니다.
분명히 현실적으로 보면 도끼는 물 속 깊이 가라앉았습니다.
어찌 되었든 도끼를 건져 올릴 가능성은 제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젊은이는 엘리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불가능에서 부터 비로서 하나님께서 일하신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 신앙에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며 사는 것은 기본 중에 기본입니다.
엘리사선지자는 젊은이의 간절한 외침에 즉각 문제를 해결하려 나서잖아요.
6절에 보니 엘리사선지자가 빠진 장소를 묻고 나뭇가지를 베어 거기에 던집니다.
그러자 쇠도끼가 둥실 떠오릅니다.
젊은이는 손을 내밀어 잃어버린 도끼를 잡았습니다.
자, 여기서 장면을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분명 도끼날은 강가에서 먼 곳으로 날라 가 깊은 곳에 빠졌을 것입니다.
아무리 떠올랐다 한들 제자가 손을 내밀어 잡을 수 없는 거리였다는 것이죠.
손을 내밀면 될 정도의 강기슭이라면 바지라도 걷어 부치고 들어가서 찾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분명하게 제자가 손을 내밀어 도끼를 잡았다고 말씀합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여기서 ‘떠오르게 하다’라는 단어는 ‘떠다니다’ ‘수영하다’라는 의미로도 쓰이는 단어입니다.
말하자면 도끼 날이 쑥 떠오르더니 제자가 있는 쪽을 향해 헤엄치듯 움직여 왔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장면입니까?
이 장면을 생생하게 목격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도끼를 잃어버리고 절망감에 빠져 탄식하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은 위기에 몰렸을 때만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난이 우리에게 여러모로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매일이 내 힘으로 꾸려나가기 만만하고 평탄하기만 하다면 하나님의 실존체험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또 나를 위해 정말 무언가를 열심히 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사람이 힘들어도 숨쉴 만하면 불평이 나오고 하나님께 은근히 뻣대는 경향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사는 곳이 비좁다고 불평스러운 마음을 가진 거나 마찬가지죠.
그런데 숨소리 내기도 힘들만큼 절망적인 일을 만나면 그 땐 염치불구하고 부르짖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고난과 위기야말로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통할 때는 감사하고, 또 시련이 올 때는 내가 하나님을 더 깊이 알 수 있는 영적 성장의 시기이구나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앞에 또 시련이 닥쳐도 우리는 믿는 바가 있죠.
‘분명히 하나님은 이번에도 도우실 것이고 결과는 나를 더욱 믿음에 굳게 세워주실 것이다. 더 좋은 일이 생길 것이다.’
이런 믿음의 성도들이 다 함께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한편,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잘 깨닫고 적용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내가 나를 위해서 거기에 꼭 그것을 짓겠다고 한다면 엘리사가 ‘가라’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도 우리를 그대로 두실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빌려온 도끼날이 날라 가 물 속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은 우리가 망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기에 엘리사에게 부르짖은 제자처럼 예수님께 부르짖을 때 위기를 넘기게 하시고 도움의 손길도 보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한 없이 그러겠냐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계속 하나님과 상관없이 우리 일을 계획하고 세상에서 욕심을 키워간다면 어느 순간 도끼가 물 속으로 날라가는 게 아니라 내 발등을 찍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왜 엘리사가 나뭇가지를 베어 던졌는지에 대해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엘리사는 기적을 일으킬 때, 때로는 소금을, 때로는 가루를, 때로는 나뭇가지를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을 구속사와 연결시켜 문제를 해결해 준 소금이나 나뭇가지를 예수님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석할 타당한 실마리는 사실 없습니다.
오히려 엘리사가 말로 명령해서 도끼를 떠오르게 하는 것과 나뭇가지를 베어 던져 떠오르게 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나를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어떤 도구나 방편을 사용한다는 것은 분명히 말만 가지고 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만일 누군가 피부병이 생겼는데, 어떤 사역자가 그냥 기도만 했더니 낫는 것과 약을 바르고 기도했더니 낫는 것과 어느 쪽이 더 사역자가 능력이 있어 보이겠습니까?
이런 차원에서 소금이냐, 가루냐, 나뭇가지가 등장했다고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내가 기도했더니 그게 이뤄졌다’ 이런 영적 우월감에 빠지기가 쉬운지 모릅니다.
기도해서 응답된 게 무슨 큰 능력입니까?
기도한다는 게 자기 힘으로 안된다는 무능함의 표현인 데, 그걸 응답하셨더니 공을 자기에게 돌리는 게 어이없이 교만한 우리의 현주소입니다.
엘리사의 경우, 모를 땐 솔직히 하나님이 자기에게 가르쳐주시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을 봅니다.
예수님께서도 기적을 행하실 때 하나님과 성령님께 철저히 의존하셨고 영광을 성부하나님께만 돌리셨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길 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오늘 본문이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데 그럼 역사적인 사건과 관련이 있냐는 의문이 여전히 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문제를 이스라엘의 당시 상황으로 보면 하나님께 아무 것도 묻지 않고 나라를 지키고 재건하려는 어리석은 당시 왕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나오지 않고 하나님의 선지자들에게 묻지 않고 오히려 남의 나라의 군사력을 빌려 정권을 유지하려고 했습니다.
빌려온 도끼를 잃어버린 낭패는 외교력을 통해 왕권을 지키고, 나라를 지키려다 봉변을 당한 이스라엘의 역사적인 상황과 너무 닮지 않았습니까?
이 열왕기서의 기록자는 보수적 견해로는 예레미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기록 시기는 마지막 장을 보면 남유다가 바벨론으로 다 끌려가고 예루살렘이 멸망당한 것으로 보아 바벨론 포로생활 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엘리사선지자의 이 사건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세대가 지나고 나서 이 기록자가 ‘아’ 감을 잡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서 속에 이 기적을 끼워 넣어야 했던 것이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사람을 의지하고 다른 어떤 도움을 기대한 결과가 국가가 공중분해 된 결과에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엘리사에게 부르짖었을 때, 위기를 모면할 수가 있었는데, 이스라엘은 침몰해 가면서도 하나님께 돌아오지를 않았다는 것입니다.
한 국가의 역사나 우리 개인의 인생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내 인생의 모든 계획이 오직 나를 위해서, 하나님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의존하고 해나간다면 오늘 이 사실을 잘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잊지 말 것은 하나님은 엘리사처럼 우리가 의지할 때 얼마든지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 인생을 이끌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삶에 잘 적용되도록 깨달아 지셨습니까?
우리의 삶은 내 욕심껏 살라고 주어진 게 아닙니다.
또 그렇게 욕심껏 잘 살려고 한다고 되지도 않습니다.
만약 그렇게 해서 세상의 좋은 것들로 내 인생을 채운다면 분명히 그것은 복이 아니고 화근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지혜를 구하고 모든 일에 예수님이 동행해주시길 항상 기도하며 하루 하루 주님이 인도하시는 안전한 삶을 살아내시길 축원드립니다.
2014.11.9 주일설교 남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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