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하

열왕기하19장 산헤립의 편지

남수연 2015. 3. 4. 12:55

 

지난 한주도 우리 사회에는 여러 사건과 앞으로 큰 파장을 몰고 올 뉴스들이 많았습니다.

혼자 결핵을 앓고 있는 아내의 병 구완을 하던 70대 노인이 자기에게도 신병이 생기자 아내를 흉기로 살해하고 자신도 목숨을 끊으려고 했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노인의 유서에는 미안하다, 사는 게 힘들었다라고 써있었다고 합니다.

삶의 황혼기가 가난과 만성 질병과 고독 속에서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 이제는 남의 이야기로 들리지 않습니다.

47년간 가정생활의 초병이 되었던 간통죄가 폐지되었다는 갑작스런 소식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쏠렸습니다.

남성피임기구를 만들어내는 회사의 주가가 상승 제한폭까지 급등했다고 합니다.

덩달아 레저관련 주식이 큰 폭으로 올랐다는 말을 들으니 좀 씁쓸했습니다.

그렇잖아도 결혼 상태의 남자들의 40%정도가 불륜 경험이 있다는 뉴스에 놀랐는데 앞으로의 가정과 사회적인 문제들이 걱정이 됩니다.

또 우리나라가 장기 불황의 징조를 보이고 있고, 인구저하 문제로 국가가 총체적인 늪에 가라앉을 위험들이 감지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사회의 이슈들은 우리에게 무관한 일들이 아닙니다.

영등포 쪽방촌에 가면 과거에 나도 큰 아파트에서 떵떵거리고 살았다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쏟아지는 세상의 독화살을 다 피해간다는 것이 우리에게 보장되지는 않았습니다.

이런 일들 중 어떤 일을 만나게 될까 불안함이 항상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죠.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우리에겐 걱정할 게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며 살아온 삶을 돌이켜 보면 결코 손해난 일도 없고 수렁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적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설사 과거보다 지금 물질적으로 궁핍해졌고, 세상적인 실패와 아픔이 있다고 해도 우리가 손해 난 것은 아닙니다.

성도들은 항상 천국에 쌓아 놓은 것을 계산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열심히 붓는 적금을 잊어버리는 사람이 없듯이, 그동안 하나님을 잘 경외하며 따라온 우리에게는 천국에 쌓아 놓은 것들을 항상 세어보고 기뻐하는 삶을 살아야 할 줄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겐 어떤 어려움을 만날 때든 최고의 비밀병기인 기도가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에 신속하게 응답하시는 최고의 지원군이신 하나님이 우리 편이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히스기야왕도 큰 위험에 직면해 있습니다.

북이스라엘을 침몰시킨 앗수르제국이 남유다까지 침공해 온 것입니다.

쉽게 비유를 하자면 북한을 집어삼킨 중국이 남한을 향해 진격해 온 상황입니다.

앗수르의 정복전쟁은 역사적으로 잔인하기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점령한 나라의 왕들은 코에 갈고리를 꿰어 끌고 본국으로 데려가고 귀족들은 껍질을 벗겨 죽이기도 했습니다.

그 잔인한 자들이 남유다의 모든 성읍들을 짓밟고 마지막 남은 예루살렘성을 포위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이 함락되면 히스기야와 귀족들과 주민들은 끔찍한 학살과 봉변을 피할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꿈이 아니라 코 앞에 이런 현실이 닥쳤는데, 해결할 능력이 없을 때 그 두려움을 어떻게 말로 표현하겠습니까?

오죽하면 히스기야왕이 아이를 낳을 때가 되었으나 해산할 힘이 없다고 했을까요?

그러나 이 절망 뿐인 사태가 상상도 못할 결과로 끝났다는 것을 열왕기서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히스기야의 기도에 응답으로 185천명의 앗수르 군사들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 하루 아침에 몰살되었습니다.

이 이해할 수 없는 기적을 이사야서와 열왕기서, 역대서에 동일한 내용으로 기록해서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바울사도의 말씀을 기억하시죠?

로마서154절에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혹시 산헤립의 편지를 받으신 적이 있습니까?

건강검진 결과표에 적힌 질병들이 내 삶에 위기를 가져오는 산헤립의 편지일 수도 있습니다.

날아오는 청구서들일 수도 있겠고, 가정을 뒤흔드는 여러가지 문제일 수 있습니다.

마귀는 쉴 새 없이 산헤립의 편지를 우리에게 날려 보냅니다.

오늘 말씀에서 이 위태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현실적인 큰 힘과 능력이 기도라는 확실한 깨달음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신앙생활 중에 성도들이 자신 없어 하는 부분이 기도입니다.

그런데 기도의 위력이 무엇인지를 알면 기도를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앗수르의 185천 대군을 몰살시킨 것이 기도의 위력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앙하는 삶의 심장은 기도와 말씀입니다.

말씀을 배우고 순종하는 것과 기도라는 탯줄을 통해 하나님께로 부터 생명과 능력을 공급받는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가 없이는 어떤 영혼도 바르게 잘 성장할 수 없습니다.

오늘 기도의 영역 중에서 특별히 도움을 구하는 기도에 대해 살펴볼 것입니다.

간구기도에 대해서는 본문에서만도 많은 교훈이 있지만 핵심 되는 것들만 몇 가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먼저 14절에 보면 히스기야가 사신의 손에서 편지를 받아보고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서 여호와 앞에 편지를 펴 놓고 기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1. 여기에서 보여주시는 기도의 핵심은 히스기야가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성전은 구약시대 하나님이 성도들을 만나는 공식적인 장소였습니다.

솔로몬은 다윗이 하나님께 받아서 그려놓은 설계도 그대로 성전을 지은 뒤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역대하620주께서 전에 말씀하시기를 내 이름을 거기 두리라 하신 곳 이 전을 향하여 주의 눈이 주야로 보옵시며 종이 이 곳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이 때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기도에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역대하715이 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 이는 내가 이미 이 전을 택하고 거룩하게 하여 내 이름으로 여기 영영히 있게 하였음이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 있으리라

하나님이 천지 중에 안 계신 데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특별히 주님이 지정하신 성전에서, 혹은 그 성전을 향하여 하나님을 부르고 기도할 때 응답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니엘도 멀리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상황에서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쪽으로 문을 열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신기한 것은 신약시대의 성도들도 발등에 불이 떨어지면 교회를 찾는다는 것입니다.

절박한 문제가 생기고 간절함이 생기면 교회에 가서 기도하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던 경험이 있으실 것입니다.

물론 구약시대의 성전은 예수님을 상징하는 예표였습니다.

그 큰 나라에 성전을 딱 한개만 두라고 하신 것이 벌써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죄인들이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성전은 장차 오실 유일한 성전이신 예수님 한 분 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이 자랑하는 성전을 보고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만에 다시 일으키리라이렇게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그리고 요한은 해석하길, ‘이는 예수님이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킴이다라고 했습니다.

히스기야가 오늘 성전에서 기도했던 것과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은 똑같은 원리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않았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기도에 있어서 알아야 할 핵심요소는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기도는 그 아들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아버지의 가장 큰 애착은 독생자이신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세상에서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으로 감당하신 것입니다.

죄로 인해 단절되었던 인간을 다시 자녀로 삼으시겠다는 아버지의 계획에 예수님은 전적으로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의 일차적인 의미는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아버지의 뜻에 대한 아들의 완벽한 순종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께 가장 고맙고 값진 아들의 사랑이고 헌신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오시지 않았다면 성부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받아주시고 용납해 주시고 환대하고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은 아들의 고귀한 피가 우리 위에 흘려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자격은 예수님을 앞세우고 아버지의 보좌 앞에 나가는 것 뿐입니다.

내가 장시간 기도를 쌓아 와서 기도가 응답되는 게 아니고,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살아서 기도가 응답되는 것도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순종을 보시고 우리를 받아들여주신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좀 신앙생활이 나태했거나 봉사와 헌신이 부족했다 해도 우리가 언제든지 아버지 앞에 기도하러 나갈 자격이 되는 것입니다.

 

2. 또 히스기야는 기도하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5절에 보면 히스기야가 그룹천사들 위에 계신 하나님이라고 호칭합니다.

또 천하만국에 홀로 하나님이시고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기도드리는 대상인 하나님을 잘 몰라서이기도 합니다.

천하만국의 유일하신 통치자이고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확신하는 사람들은 문제가 생기면 기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하나님이시라면 우리의 문제 따위가 뭐가 문제가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먼저 알아야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그룹들 위에 계신 하나님, 천하 만국에 홀로 하나님이고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이라고 기도합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께 대한 이런 지식들을 어디서 배웠을까요?

그의 아버지 아하스는 앗수르의 제단을 예루살렘성전에 세웠던 악한 불신자였으니 부모에게 상속받은 믿음의 유산은 아닐 것입니다.

히스기야의 믿음은 그의 곁에서 말씀을 통해 가르치고 하나님의 계시대로 조언했던 이사야선지자에게서 배웠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사야서6장을 보면 이사야선지자가 성전에서 높이 계신 하나님과 보좌하는 그룹천사를 보고 소명을 받았던 순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룹천사 위에 거하신다는 히스기야의 믿음은 자신이 본 것이 아니라 바로 이사야선지자의 이 영적 체험을 통해 배우고 알게 된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선지자에게 배운 말씀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확신했던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이사야선지자에게 직접 들었지만 우리는 이사야선지자가 기록해 놓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창조주이고 천하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도 역시 성경을 통해서입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더 알아갈수록 우리의 기도는 히스기야의 기도처럼 확신과 신뢰를 갖고 드려질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해 더 간절함을 갖게 되길 축복드립니다.

 

3. 다음 히스기야가 산헤립왕의 선전 포고문을 하나님 앞에 펴놓고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깨닫는 것은 우리의 기도가 구체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산헤립의 편지에는 하나님을 자기들이 점령했던 나라의 우상신들과 똑같이 여기는 모욕의 글이 써 있었습니다.

이 편지를 히스기야가 성전에 들고 나가 하나님 앞에서 조목조목 기도하는 것이 16절부터 18절까지 기도내용입니다.

우리는 기대하는 게 무엇인지를 모르는 기도를 할 때가 많습니다.

기도하고 일어나는 즉시 기도한 내용을 잊어버리는 기도를 우리가 얼마나 자주합니까?

하나님이 들어주셔도 그만, 안 들어주셔도 그만인 기도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불러 앉으시게 해놓고 드리는 가장 불경스런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하는 입을 보시고 그 말을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진실된 기도는 모든 간구의 내용마다 진실이 담기고, 혼신을 다하는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어려운 상대를 만나 우리의 목적을 이루려고 해도 대화를 할 때 얼마나 혼신을 다하게 됩니까?

그런 대화를 하고 나면 잠시 탈진되는 것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을 얻으려고 해도 건성으로는 되질 않습니다.

정말 간절히 얻고자 하신다면 원하는 것을 분명하고 간절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필사적입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4. 기도는 어떠한 인간적인 대책보다 최우선이어야 합니다.

히스기야왕이 오늘 기도로 승리하기 전 사실 뼈아픈 과거가 있었습니다.

앗수르가 1차 침공했을 당시 애굽의 지원군을 의지했고, 조공을 바쳐서 위기를 모면했던 일입니다.

앗수르왕이 정한 조공의 액수는 은 삼백 달란트와 금 삼십 달란트였다고 합니다.

구약시대 달란트는 34킬로그램 정도의 무게를 말합니다.

금 한달란트만 해도 계산해보면 20억이라는 액수가 나옵니다.

삼십 달란트라면 600억이 조공이었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히스기야왕이 이 금을 조달하려고 어떻게 했는지를 성경은 기록합니다.

히스기야가 이에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을 다 주었고 또 그 때에 유다 왕 히스기야가 여호와의 성전 문의 금과 자기가 모든 기둥에 입힌 금을 벗겨 모두 앗수르 왕에게 주었더라

그 많은 금을 갖다 바치려면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굽을 친 앗수르는 예루살렘을 재차 공격해 들어온 것입니다.

애굽도 없고, 금도 없고 나서야 히스기야는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된 것입니다.

처음부터 하나님께 이 사태를 말씀드리고 도움을 구했다면 막대한 금과 은도 내다주지 않았고 멸시를 당하지도 않았겠죠.

우리가 가정 먼저 할 일이 기도입니다.

대개는 인간적인 방법을 다 써보고 마지막으로 기도하는 게 우리들 입니다.

현실적인 해결책이 언제, 어느 방법으로 올지 모르는 막연한 하나님의 도우심보다 더 나아보이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우리의 방법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방법이 더 완벽합니다.

기도가 모든 일에 최우선이 되게 해서 낭비와 실패가 없는 모두가 되길 원합니다.

 

5. 기도하며 일해야 합니다.

본서에는 없지만 역대하에 같은 내용을 기술한 부분을 보면 히스기야가 했던 앗수르에 대한 전쟁준비에 대해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 밖을 흐르는 기혼샘물의 물길을 지하수로를 파서 성안으로 끌어들인 것입니다.

앗수르대군들이 파죽지세로 진격해 올 때 히스기야는 필사적으로 수로를 파 예루살렘성 안의 식수를 확보했던 것입니다.

이 사실에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기도하며 우리가 지혜롭게 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면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방향으로 움직여야 할 지 모르는 막막한 때라도 기도를 하면 성령께서 어디로 발을 옮겨야 할지 소원을 주십니다.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진심으로 기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면서 자기가 대비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무려 5백미터가 넘는 길이의 수로를 성 밖과 안에서 동시에 파들어갔을 때 놀라운 것은 정확하게 한 지점에서 마주쳤다는 것입니다.

히스기야터널이라고 불리는 수로에는 지금도 그때 맞은편 쪽에서 들리던 망치소리를 들리던 순간의 감격을 기록한 비문이 있습니다.

인간은 기도하며 최선을 다해 굴을 파는 것이고 지질탐사기도 없던 그 시대에 정확하게 양쪽 터널이 한 지점에서 만나게 인도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폴 게티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미국의 석유재벌 폴 게티가 한 망언같기도 하고 잠언같기도 한 말입니다.

세상의 부를 공평하게 나눈 다음, 다시 시작해도 2년이 지나지 않아 다들 원래 상태가 될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우연히 부를 거머쥐어도 평소 삶의 방식과 태도에 따라 또 빈털터리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가 말하는 것은 성공을 위한 비결은 따로 없다. ‘일찍 일어나고 열심히 일하고, 석유를 찾아라라고 합니다.

기도하고 일을 찾고, 일을 하십시오.

하나님이 내 사정을 다 아시니 알아서 해주시겠지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는데, 하나님께 모든 것을 다 해달라는 것은 우스운 것입니다.

기도하며 일하고, 일하며 또 기도하는 우리 모두가 되야 할 줄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히스기야의 기도의 결과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읽지는 않았지만 이어서 나오는 뒷 부분에는 하나님의 응답하신 내용이 나옵니다.

1. 산헤립이 어떤 소문을 듣고 급히 고국으로 돌아갈 것이고 거기서 칼에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2. 또 산헤립의 대군은 화살 한개도 쏘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것이 사실로 일어났다고 본서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성경에만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앗수르의 수도였던 니느웨의 산헤립 궁전에서 발굴 된 산헤립의 명각이라는 육각통 모양의 비문을 보면 산헤립의 업적이 그림과 설형문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정확하게 산헤립이 유댜왕으로 부터 은3백과 금30십을 조공으로 받았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유다의 46개 성읍을 함락시켜 2만명이 넘는 포로를 끌고 간 내용이 있습니다.

또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새처럼 가두었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그런데 포위했다는 내용만 있지 함락시켰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적어도 세상 역사가들도 여기에 의문을 갖습니다.

막대한 군사력을 가진 산헤립이 왜 예루살렘성에 들어가지 못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그 이유를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죠.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영에서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을 친지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

역사가 요세푸스는 당시 산헤립의 진영에 급속한 전염병이 돌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사야를 통해 알려주셨던 것처럼 화살 한 개도 예루살렘을 향해 쏘지 못하고 앗수르이 군대는 끝장이 난 것입니다.

또 성경의 기록과 동일하게 산헤립이 소문을 듣고 고국에 돌아가서 아들에 의해 피살된 것도 이 비문에 정확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3. 반면에 성안에 갇혀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던 사람들은 다시 일상적인 삶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9절에 보면 그 사실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금년에는 스스로 자라난 것을 먹고 내년에는 그것에서 난 것을 먹되 제 삼년에는 심고 거두며 포도원을 심고 그 열매를 먹으리라

여기서 우리가 점검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비록 이번 전투에서 산헤립이 물러나고, 적군이 무너졌지만 모든 일이 한 순간에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올해는 어차피 농사짓지 못했기에 땅에서 저절로 난 것을 먹게 될거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내년에도 앗수르의 위협으로 농사를 지을 수 없을 것이기에 저절로 난 것을 거둘 수 밖에 없다고 하십니다.

삼년에 가서야 제대로 농사를 짓고 일상적인 삶을 누리게 될 거라는 말씀입니다.

앗수르는 물러갔지만, 야욕을 버리지 못하고 또 군사를 동원해서 위협할 것입니다.

그러나 삼년 안에 앗수르는 끝이 난다는 것입니다.

기도응답에 대해 단칼에 시원하게 해결되기만을 바랄 수는 없습니다.

이번에 기적으로 18만 군사를 해치우셨지만 우리를 에워싸는 환경들은 대개 한번에 좋아질 문제들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위로를 얻고 용기를 낼 것은 그동안도 하나님께서 먹이신다는 것입니다.

농사할 수 없는 환경이 와도 저절로 난 식량으로 어떻게든 먹여살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무려 2년간을 그렇게 먹여 살리시겠다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다음장에 보면 히스기야가 바벨론의 사신들에게 자기의 보물고를 다 보여준 것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히스기야가 자기 보물고의 금은과 향품과 보배로운 기름과 그의 군기고와 창고의 모든 것을 다 사자에게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분명히 모든 금은을 앗수르에 조공으로 바쳤지 않습니까?

어디서 사신들에게 자랑할만한 은금과 보배로운 기름과 군기고의 그득한 무기들이 생겼겠습니까?

그의 기도를 통해 전멸한 185천의 대군들에게서 거둬들인 전리품 아니겠습니까?

실패한 정책으로 잃어버린 것까지 하나님께서 만회시켜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래도 기도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말씀을 맺습니다.

히스기야의 기도를 통해 기도에 강한 도전을 받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바로 천하만국이 주 여호와가 홀로 하나님이신 줄 알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로 좋은 학교에 진학하고 좋은 직장에 들어간다면, 좋은 배우자를 만나고, 형통하게 사업이 풀린다면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기도에 대해 오늘 나눈 말씀을 잘 기억하고 기도하며 적용하시기 바랍니다.

성전에서 드리는 기도, 즉 예수님 안에서 드리는 기도가 응답됩니다.

기도하는 대상을 분명히 이해하도록 말씀을 통해 잘 배우고 확신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 편지를 내놓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가 마지막이 되게 하지 말고 첫번째가 되게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기도의 최종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잊지 않을 때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2015년3월1일 주일설교 남수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