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하

요시야왕의 종교개혁 (열왕기하22장10절-20절)

남수연 2015. 5. 20. 13:58

말씀 앞에 옷을 찢으라

  

오늘 말씀은 역사의 등불이 가물거리며 꺼져 가던 이스라엘의 남왕조 유다에서 일어났던 신앙의 부흥과 개혁을 기록한 내용입니다.

이미 북왕조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멸망해 흩어졌고, 남아있는 남왕조 유다도 바벨론에 의해 패망이 임박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이 단지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 중 하나라고 생각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성경은 지금 우리가 몸담은 세계와 각자의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들을 해석하고 답을 얻을 수 있는 중요한 단서입니다.

오늘 젊은 요시야왕은 쇠퇴해가는 국가의 위기를 신앙의 개혁으로 돌파했습니다.

우리가 당면하는 현실의 문제가 현실의 수단만으로 다 풀리지 않는다는 것은 다 아실 것입니다.

요시야왕은 이 땅의 문제가 믿음이라는 열쇠로 풀린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믿음의 강화는 단지 천국의 삶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매순간 믿음으로 바로서는 것은 우선 발을 딛고 있는 이 땅의 문제와 더 관련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패망할 운명에 놓인 이유와 신앙으로 현실의 문제를 타개한 요시야왕의 종교개혁을 통해 믿음의 큰 지혜를 깨닫게 되길 원합니다.

 

1. 요시야 왕은 누구인가

이스라엘의 역사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이 요시야왕이 누구인지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요시야는 히스기야왕이 낳은 므낫세의 손자입니다.

므낫세는 성전 안에 우상의 제단을 세웠고, 신접한 자를 들여 점을 치고, 아들을 불태워 이방신에게 바친 최악의 유다왕입니다.

그의 오십오년 통치에 백성들도 그를 따라 혼탁한 우상숭배에 빠지고 멸망 길로 갔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 므낫세가 죽고 왕위에 오른 사람은 요시아의 아버지인 아몬왕입니다.

성경은 아몬이 부친이 행함 같이 여호와 앞에 악을 행했다고 기록합니다.

아몬은 제위 2년만에 쿠데타에 의해 피살되고 여덟살 난 요시야가 왕위에 오릅니다.

그러니까 요시야의 출신으로 보면 영적 배경이 좋지가 않습니다.

아마도 부친의 피살로 인한 트라우마도 있었을 것입니다.

부친이 조용히 암살되었겠습니까?

큰 소요와 죽음의 피냄새가 궁정에 가득했을 것입니다.

왕 위가 얼마나 위태로운 자리인지 요시야가 일찌기 깨달았을 것입니다.

게다가 요시야가 다스려야 할 이스라엘은 멸망당할 날을 이미 받아놓은 상태입니다.

어느 것 하나 희망적이지 않은 암울한 조건입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하나님 앞에 저지른 죄의 무게와 거국적인 우상숭배 풍토, 아버지의 피살에 따른 트라우마, 이미 멸망이 선고된 나라, 그리고 나이는 여덟살.

이게 요시야왕이 가진 현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요시야가 정말 예상치도 못한 대 종교개혁을 완수하고 국력을 크게 회복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역사 중에 다윗왕 다음으로 꼽으라면 솔로몬이 아니라 요시야왕입니다.

우리가 어떤 형편에서 태어났고, 다른 사람보다 얼마나 불리한 환경 속에서 시작하고 있는지는 요시야왕을 볼 때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요시야처럼 일찍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그의 정치와 인생의 목적으로 삼은 것이 우리에게도 인생 성패의 관건일 뿐입니다.

그가 종교개혁을 시작한 나이가 열두살이라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특히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배우고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푯대로 삼는 사람에게 더 많은 소망이 있는 줄 믿습니다.

한국갤럽이 발표한 한국인의 종교실태에서 기독교신앙을 갖게 된 것이 언제냐는 질문에 9살 이전에 믿었다는 사람이 가장 많았습니다.

60세 이후 믿음을 가졌다는 사람은 백명 중 여섯명에 불과했습니다.

60세 이후 가지는 믿음은 이미 고착화 된 자기 문화의 틀에 신앙을 받아들이기가 쉽습니다.

우리나라는 무속적인 문화가 바탕이라 하나님을 믿는 것도 그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못합니다.

제가 어느 댁에 심방을 갔더니 얼굴에 화색을 띠시며 꿈에 목사님이 나타나서 복권을 샀다시는 겁니다.

조금이라도 더 어려서, 세속적인 사고방식이 굳어지기 전에 믿음의 기초를 든든히 놓아야 합니다.

어린 요시야왕이 종교개혁을 한다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우상숭배와 혼합종교가 자리 잡은 지 근 육십년이 지난 상황에서 민족 전체를 하나님 신앙으로 돌이키는 게 쉬운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어떤 처지에서 어떤 일을 하든, 어떤 지위에 있든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요시야처럼 지금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을 하느냐는 것인 줄 믿습니다.

그 일이 하나님보시기에 바르면 반드시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

요시야왕이 종교개혁에 매달린 것은 현실을 회피하고 신앙에만 매달린 것이 아닙니다.

그가 해야 할 일이 정치였고, 이스라엘의 정치는 하나님이 백성을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백성들을 하나님께 돌이키는 신앙의 회복이 그가 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우리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과 평범한 일상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통치하게 하시는 게 그게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럴 때 믿음의 성장과 땅의 일들이 다 아름답게 성취되는 것입니다.

신실한 믿음의 결과는 신앙적인 면에서만 나타나는 게 아니라 우리가 몸담고 사는 땅의 일로도 나타납니다.

요시야왕의 종교개혁의 결과로 민족신앙이 부흥된 것 뿐 아니라 국력이 회복되는 축복이 따라왔던 것입니다.

요시아왕 당시에 급변한 주변 정세가 있었습니다.

신흥 바벨론제국이 급성장하며 이스라엘의 옆구리의 가시였던 강대국 앗수르를 파멸시킨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기를 펴고 옛 영토들을 되찾을 수 있었었던 것이죠.

요시야왕 당시에 이스라엘 영토는 지중해 주변까지 확장되어 역사상 가장 광활한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강대국의 눈치나 보며 비굴한 외교정책을 써서 겨우 살아남아야 했던 이전 세대를 볼 때 이건 기적입니다.

이 사실을 아무생각 없이 보면 그냥 주변나라들의 역사가 그렇게 돌아갔나보다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동시대 활약했던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해 예레미야454절에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보라 나는 나의 세운 것을 헐기도 하며 나의 심은 것을 뽑기도 하나니 온 땅에 이러하거늘

앗수르와 바벨론의 흥망성쇠가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요시야가 자기가 할 일이 무언지를 바로 알고 그 중심에 하나님신앙을 두고 열심을 낼 때, 요시야가 결코 할 수 없던 일을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분명히 우리 힘으로는 안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최선을 다해 우리의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고 하나님은 우리가 할 수 없는 부분을 책임져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하면, 하나님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을 해주십니다.

내가 할 일을 하지 않고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성경의 사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잘 경외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근실하게 살면 우리가 재벌이 되지는 못할지라도 내가 가진 조건 중에서 가장 최상의 삶을 주신다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내가 가진 지혜에서 최상의 상태, 내가 가진 능력을 최상으로, 내가 가진 조건에서 가장 큰 일을 이루시게 하실 것입니다.

나이어린 요시야왕이 하나님을 향해 뜻을 정하고 용기 있게 개혁을 추진했던 것을 생각하며 우리도 처한 위치에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도록 열심히 살아가시길 축복드립니다.

하나님은 큰 재앙과 근심 없이 우리 몫의 삶을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2. 요시야의 종교개혁

요시야의 종교개혁은 이스라엘역사상 전무후무하고 전국적으로, 대대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거의 사라질뻔한 여호와 신앙이 다시 되살아난 것이죠.

오늘 본문의 배경도 요시야의 명령으로 성전을 보수하다 깊이 감춰져 있던 율법책을 찾아낸 것입니다.

아마도 조부 므낫세 시절에 여호와신앙을 말살하려던 정책에 위기를 느낀 제사장 누군가가 율법책을 보존하려고 깊은 곳에 숨겨 놓았던 것 같습니다.

명색이 하나님께 선택된 민족이 하나님의 법 없이 살았다는 것입니다.

요즘 신자들이 성경을 덮어 놓고 사는 것은 그들과 똑같이 법 없이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법 없이 살만큼 선량한 존재가 아닙니다.

지난 달 미국 볼티모어에서 발생한 흑인 소요 사태에서도 예외 없이 약탈과 방화가 일어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그 나라에서 지켜야 할 법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은 겉만 다루지 않습니다.

양심의 깊은 곳을 탐색해서 죄에 대한 심각성과 하나님의 심판을 직감하게 합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율법서를 열지 않았기에 그들이 모르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외면한 율법책 안에는 지키면 복이 될 말씀 뿐 아니라 지키지 않을 때 받을 심판과 저주스러운 결말도 분명히 명시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법대로 살지 않으면 복만 받지 못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법을 벗어난 상태는 죄악 속에 굴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우리가 주의해서 살지 않는다면, 우리의 결정과 선택은 결국 죄의 본성에 따르게 됩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법대로 살지 않을 때, 어떻게 되었는지를 본문에서 하나님은 분명하게 지적하십니다.

17절에 이 백성이 나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분향했다고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을 신처럼 떠받들어 섬겼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 속에 창조주를 위한 자리가 있기에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면 다른 허탄한 것들을 섬기게 되어 있습니다.

우상이든, 돈이든, 권력이든, 의지될 만한 대상을 떠받들게 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법을 버렸을 때 그들의 손의 모든 행위가 하나님을 격노하게 했다고 말씀합니다.

므낫세왕을 단적으로 예를 들면 그가 우상숭배를 들여왔을 뿐 아니라 무죄한 피를 예루살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가득하게 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사는 삶이 정도의 차이가 있다 해도 다 이렇다는 것입니다.

이기적인 자기애에 빠져 남의 피를 흘리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성경책을 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지키면 복이 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모두가 되시길 원합니다.

그런데 이 요시야의 종교개혁에서 주목해야 할 특이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요시야의 종교개혁이 이미 오래전, 4백여년 전에 예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때는 북왕조이스라엘이 막 분열되고 여로보암이 왕이 된 때입니다.

여로보암은 북쪽 백성들이 남쪽 성전으로 예배드리러 왕래하는 것을 막기 위해 벧엘에 성소를 짓고 금송아지를 세워 섬기게 합니다.

여로보암이 마침 그 단에서 분향하는 찰나, 하나님이 보내신 유다의 한 선지자가 이렇게 예언을 합니다.

열왕기상13장의 기록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제단을 향하여 여호와의 말씀으로 외쳐 이르되 제단아 제단아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을 낳으리니 그가 네 위에 분향하는 산당 제사장을 네 위에서 제물로 바칠 것이요 또 사람의 뼈를 네 위에서 사르리라 하셨느니라 하고

장차 다윗의 집에 요시야라 이름하는 아들이 태어나 북왕조 이스라엘의 우상숭배의 본산지인 이 벧엘 제단 위에 우상숭배자들의 뼈를 불사를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이 말씀을 봤을 리가 절대로 없는 아몬이 절묘하게 아들의 이름을 요시야라고 지었다는 것도 참 기이한 일이죠.

그리고 과연 요시야는 그 예언대로 남쪽 유다부터 시작해서 북쪽 이스라엘까지 모든 우상을 거둬내고 벧엘의 제단을 헐고 제사장들의 뼈를 불살랐던 것입니다.

그리고 전국에서 사람을 예루살렘으로 모아 유월절을 지키고 율법을 가르치고 지키게 하는 민족적인 신앙회복을 이뤄낸 것입니다.

그러나 요시야왕의 종교개혁이 역사적으로 기억될 일인 것은 분명하지만 구태여 그 일을 예언까지 해서 더욱 특별나게 취급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이것은 이 사건이 그 이상의 더 깊은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각별하게 다루는 일들은 구속사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그 사건을 부각시키시겠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의 단편을 보여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중요 인물들은 부분적으로 하나님께서 보내실 메시야를 암시하는 예표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령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메시야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것이라 한 것은 다윗이 양을 치던 목자였다는 점을 메시야와 연결시킨 것입니다.

왕으로 오실 메시야가 군주가 아니라 목자와 같이 그의 백성을 인도하신다는 것이죠.

다윗이 어떻게 목동으로서 양을 지켰는지 사무엘상17장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이 상황이 하나 하나 좀 의미심장하지 않습니까?

바로 아버지의 잃은 양을 찾으러 오신 예수님의 사역이 그려지지 않습니까?

이렇게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세우신 성경의 인물들을 종합해서 우리에게 메시야에 대한 완성된 몽타주를 갖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요시야왕도 그런 인물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되고 하나님의 법을 주시고 선지자들을 통해 직접 통치하시던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그 이스라엘이 국가의 역사 속에 분명하게 자신을 보여주고 함께 하셨던 하나님을 알면서도 배신한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나타나셔도 인간은 본성적으로 하나님이 싫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기 모습으로 나타나시면 앞으로 하나님 말씀대로 완전히 순종하며 살 수 있을 것 같으십니까?

그렇게는 우리가 못삽니다.

그래서 인간 구원에 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미리 정해 놓은 한 왕이 태어나서 이런 불가능한 절망에 갇혀있는 그들을 회복시키시고, 그냥 태평성대를 안겨 주셨다는 것이 바로 요시야를 통한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이 메시지는 바로 창세기부터 예언되어 온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이 오셔서 완전한 구원과 천국의 기업을 영원히 누리게 하실 것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요시야의 태평성대는 잠깐 맛만 보고 끝이 났지만, 예수님의 구속은 완전하십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오늘 이루어진 것 아닙니까?

죄 가운데 뒹굴며 천국도 심판도 모르고 어둠 속에 살던 우리를 예수님이 오셔서 일방적으로 인도해 내시고 영원한 삶을 선사해주지 않으셨습니까?

요시야의 개혁과 관련 된 모든 것은 바로 예수님의 구속사역의 예표인 것입니다.

3. 요시야의 회개와 하나님의 응답

그런데 요시야의 종교개혁의 백미는 바로 오늘 본문인 요시야의 회개입니다.

본문의 앞 장을 보면 놀라운 추진력으로 종교개혁을 이뤄가는 요시야왕의 업적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 요시야보다 더 하나님 앞에서 바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요시야가 끝까지 개혁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말씀 앞에 옷을 찢고 통곡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서 마음을 찢고 통곡하는 사람이 소망 있는 사람입니다.

서기관 사반이 성전에서 발견 된 율법책을 읽는 동안 요시야의 마음에 죄에 대한 깊은 자각이 일고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일어났습니다.

깊은 회개와 비통한 마음을 참을 수 없어 자기 옷을 잡아 찢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에게 어떻게 역사하시는 지 여기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이 세워 놓으신 율법이 없다면 사람들은 각자 자기 기준으로 하나님을 믿고 자기 기준으로 죄를 정합니다.

그래서 거액의 검은 돈을 받고도 자기는 양심을 따라 살았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양심이 찔리면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가 법이고 자기가 만든 선악의 기준을 갖고 사는 것입니다.

요시야가 그렇게 열성적으로 종교개혁을 주도했지만 그도 역시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비추시니 자신의 본성 속의 깊은 죄와 조상과 백성들의 죄가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회개가 없으면 기독교가 아닙니다.

오래 교회생활을 하고 교회 일에 열심을 냈다고 진정 회심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요시야와 비슷하게 북쪽 이스라엘에서 우상척결에 앞장섰던 사람이 예후라는 사람입니다.

바알신을 들여와 하나님의 자리에 앉혔던 아합왕조를 처단하고 그가 들여온 바알신상과 사제들을 모조리 쓸어버린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전혀 회심한 사람이 아닙니다.

기독교 문화에 젖어 종교화되어 가는 것을 신앙이라고 착각하기가 쉽습니다.

내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게 과거와 똑같은 데 기독교화 된 옷만 걸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이 책망하셨던 바리새인의 옷입니다.

하나님 앞에 올바른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이 지시하신 계명을 듣고 배울 때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 요시야의 마음에 격정을 일으킨 것 같은 역사를 일으키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예리한지 양날을 세운 칼과 같다고 하지 않습니까?

말씀을 듣고 읽을 때 그 예리한 말씀이 우리의 무딘 양심을 막 찔러서 예민한 속살이 나오게 하고 그래서 쓰라리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그런 죄악된 나의 상태를 피할 수 없이 대면시켜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젠 죄가 나쁜 것을 알고 조금씩 죄에서 돌이켜 예수님이 살고 말씀하신 모습을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온 영혼은 계속해서 점점 더 하나님을 향해 나갑니다.

물론 매일 말씀대로 완벽하게 지키며 살지는 못할 것입니다.

어느새 잘난 척을 하고, 잔머리를 써서 이득을 챙기고, 세상 재미에 마음을 뺏겨 시간을 보내기도 하지만 예수님이 계신 쪽을 향해 정말 조금씩이라도, 마치 애벌레처럼 계속 기어가는 것입니다.

과거와 다른 게 있다면 죄에 대해 뻔뻔하던 내가 하나님의 계명대로 살지 못하는 내 자신을 보며 마음을 찢고 속으로 한탄을 한다는 것입니다.

요시야왕이 돌이킬 수 없는 이스라엘의 범죄와 쏟아질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옷을 찢고 하나님께 묻을 때 여선지자 훌다를 통해 말씀하시죠.

이스라엘은 결국 돌이키지 않아서 심판을 받을 것이다.

너에 대해서 말하자면 네 회개와 애통하는 심령을 내가 보았으니 네 눈으로 그 참극을 보게 하지는 않겠다.

너는 정상적인 장례절차를 밟아 묘실에 들어가는 마지막 왕이 될 것이다.

진심으로 죄를 애통하고 회개하는 사람은 용서를 받고 심판을 피할 길을 주십니다.

그 때 세상에는 가려진 용서의 십자가가 비로서 보여집니다.

그리고 거기서 이미 내 죄가 다 해결되었다는 것을 발견하며 말할 수 없는 기쁨과 감사와 죄사함의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전히 내 속에서 죄가 꿈틀거리는 삶을 살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의 속죄로 심판을 벗어나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기에 본질적인 평화가 찾아옵니다.그리고 나서 다음 장에 있는 요시야왕처럼 유월절양을 잡아 예배를 드리고 백성들에게 율법의 말씀을 들려주고 가르치며 믿음의 개혁을 계속해서 해나가는 것입니다.

이게 사실 구원받은 사람들이 성장하고 변화하는 순서입니다.

말씀을 계속 대할 때 성령이 역사하시면 죄를 깨닫고,

예수님의 속죄의 은총을 붙들게 되고,

하나님과 화목되어 참 자유를 누리며,

더욱 주 예수님을 갈망하며,

나만이 아니라 내가 속한 모든 곳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기 위해 나 자신과 이웃을 향한 믿음의 개혁을 죽을 때 까지 해나가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들은 말씀이 우리 심령의 깊은 곳을 드러나게 하시길 원합니다.

그리고 말씀 앞에 우리 마음을 찢고 애통하는 축복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 거룩하고, 사랑과 희락이 충만한 영광스런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되기엔 너무나 한참 모자란 우리를 자녀로 받아주신 아버지께 감사하길 원합니다.

내가 모태에서 형질이 다 만들어지기도 전에 이미 나를 아시고, 십자가에서 내 죄를 끌어 안으신 우리 예수님을 믿고 주님을 향해 매일 매일 다가가는 모두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

  2015년5월17일 주일설교 남수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