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하

열왕기상19장19절-21절 (엘리사의 소명)

남수연 2017. 8. 15. 17:37


오늘 본문성경은 엘리야선지자의 뒤를 이을 엘리사를 선지자로 부르시는 내용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선지자나 사역자를 부르실 때는 하나님의 목소리나 영광으로 현현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엘리사를 부르시는 장면은 그런 신비로운 장면이 나오지 않습니다.

마치 베드로가 물고기를 잡다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처럼 엘리사는 농사를 짓다가 선지자로 부름을 받습니다.

우리처럼 그냥 일상적인 삶 속에서 이렇다 할 기적도 없이 하나님께 나온 것이죠.

엘리사가 선지자의 사명을 받는 장면은 평신도들에겐 피부에 닿을 만큼 절실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모든 성도들을 위해 기록된 말씀입니다.

과거 모든 죄인들에게 선지자와 예언자가 필요했듯이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현대에는 선지자나 예언자의 직분을 가진 특별한 사람이 없습니다.

성도들이 다 왕 같은 제사장들이고 선지자이고 예언자입니다.

엘리사의 부르심은 목사나 선교사가 될 사람만을 위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통해 우리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과 사명을 깊이 생각하는 귀한 시간이 되길 축복드립니다.

 

본문성경 열왕기서는 이스라엘 남북조 왕들의 통치를 기록한 역사서입니다.

성경엔 시편 같은 시가서도 있고, 모세오경 같은 율법서도 있고, 잠언과 같은 지혜서도 있고, 이사야서 같은 예언서도 있습니다.

오늘 같은 역사서 본문을 배울 때는 역사적인 배경을 알아야 올바르게 뜻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야기의 앞 부분인 엘리야부터 잠깐 훑어 보겠습니다.

엘리야는 설교에 자주 등장하는 선지자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하나님신앙을 버리고 바알신을 숭배하는 위기를 맞습니다.

우리나라 기독교인이 다 이슬람교로 개종했다고 생각하면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이스라엘을 돌이키기 위해 가뭄으로 심판을 내리십니다.

인생에 가뭄이 들 때, 신앙을 점검하고 바로 잡는 것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엘리야선지자는 아합왕조에 기근의 선전포고를 한 뒤 그릿시냇가에 숨어 지냅니다.

까마귀가 매일 엘리야에게 고기와 물을 날라다 준 이야기는 궁핍한 중에도 일용할 것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동일하게 체험한 많은 성도들의 간증제목이기도 하죠.

극심한 가뭄이 삼년 반이 계속되던 때 엘리야는 아합에게 나타나 바알사제들을 갈멜산에 모으라고 합니다.

바알사제와 엘리야가 각각 제물을 놓고 기도를 했을 때 불을 내려 제물을 불사르는 신을 진짜 신으로 믿자는 것이죠.

하나님은 엘리야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불을 내려 제단의 제물을 불태워주십니다.

엘리야는 여호와가 하나님이시다라며 외치는 백성들과 함께 바알사제들을 모조리 처단합니다.

그리고 다시 간절히 기도해서 비를 내림으로 삼년 반의 가뭄을 종식시키는 놀라운 기적을 일으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나타내 보이고 다시 하나님께로 돌이킨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이 바알숭배자인 왕비 이세벨에게 전해지자 독기를 품고 엘리야를 죽이려 합니다.

엘리야는 목숨을 구하기 위해 광야로 도망가 로뎀나무 아래서 기진한 채 죽기를 구합니다.

큰일을 감당하거나 오랜 긴장 속에 살다보면 누구나 이런 탈진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은 천사를 통해 탈진한 엘리야를 먹이시고 시내산으로 인도하십니다.

우리 가운데 오랜 갈등과 고민으로 지친 몸과 마음을 오늘 주님의 은혜로운 손길로 치유하여 주시길 축원드립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만나셨던 그 호렙산에서 악한 아합 왕조에 대해 심판을 예고하시고, 엘리야의 뒤를 이을 후계자로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명하십니다.

인간의 약함으로 하나님의 일이 막히는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각자의 한계를 아시고, 이미 그에게 맞는 사명을 부여하신 것입니다.

모세가 출애굽과 광야 40년까지를 맡는 것이 그의 사명이고 가나안 정벌은 여호수아의 사명입니다.

우리 각자에게도 꼭 맞는 사명을 준비하고 인도하시는 줄 믿습니다

오늘 19절에 엘리야가 거기서 떠나라고 되어 있는데, ‘거기가 바로 하나님을 만난 호렙산, 다른 말로 시내산입니다.

이런 배경을 알면 본문을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엘리야는 즉시 시내산을 떠나 아벨므홀라라는 곳에 와서 엘리사를 만납니다.

이 때 엘리사는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왜 이때 하필 밭을 갈고 있었겠습니까?

삼년 반 가뭄이 끝나서 이제 농사를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동안은 가뭄으로 농사를 짓지 못했잖아요?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진노가 지나고 은혜의 시대가 왔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엘리사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예수님을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말라기에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오리라는 예언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엘리야가 세례요한이라고 하셨습니다.

엘리야 다음이 엘리사라는 순서로 볼 때, 세례요한이 엘리야와 같은 회개의 사역을 한 것이고 예수님의 사역은 엘리사의 은혜와 구원 사역과 상통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엘리사의 사역을 보면 예수님이 하신 일과 비슷한 일을 많이 하는 것이 보일 것입니다.

 

엘리사는 열두 겨릿소를 앞세워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열두 겨릿소는 열두 쌍을 말합니다.

넓은 밭은 대개 소 두 마리에 한 멍에를 메워 굳은 땅을 갈아 엎습니다.

스물네 마리의 소와 일군들을 거느리고 농사를 짓고 있는 엘리사는 상당한 부자이고 유력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그리고 열두번 째 겨릿소를 몰고 직접 농사를 짓고 있었습니다.

부유한 지주이지만 스스로 농사를 짓고 있는 엘리사는 성실하고 부지런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게으른 사람들을 하나님이 일군으로 잘 쓰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왜 바쁜 사람한테 일을 맡기라고 하는지 사회생활 해 본 사람들은 다 이해되실 것입니다.

엘리사를 만난 엘리야는 다가가서 자신의 외투를 벗어 엘리사에게 던집니다.

뭔가 좀 이상해 보이는 행동이지만 자기의 겉옷을 벗어서 입혀준다는 것은 대개 권력을 나누거나 넘겨준다는 의미입니다.

목사안수를 받을 때 보면 선배 목사님들이 목사 가운을 입혀주기도 합니다.

엘리야는 엘리사에게 외투를 벗어 던진 것은 너를 내 후계자로 삼겠다는 뜻입니다.

거기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는 엘리사의 몫입니다.

우리도 다 하나님의 어떤 부르심을 느꼈고 거기에 믿음으로 반응해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20절에 보니 엘리사도 밭 갈던 소를 버려두고 즉시 엘리야에게 달려 나가 그의 부름을 수락합니다.

 

그런데 본문 성경에서 우리는 엘리사의 순종이 너무 즉흥적이고 비합리적으로 느껴집니다.

엘리사는 부자였고, 부지런했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계속 살면 부족할 것 하나 없고 미래도 보장되어 있습니다.

반면 엘리야의 후계자가 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알숭배와의 영적전투에서 선봉장이 되는 것입니다.

이미 우상숭배에 쩔어있는 무지하고 타락한 백성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우치고 이끌어야 하는 힘든 사역을 해야 합니다.

현 왕비 이세벨은 여호와의 선지자를 잡으면 모조리 죽이는 악랄한 바알숭배자였습니다.

게다가 자신을 부른 엘리야는 왕궁의 지명수배를 받은 처지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선뜻 후계자가 되겠다고 수락하겠습니까?

엘리사는 적어도 며칠은 고민했어야 맞지 않을까요?

신학교 가기로 결정하는 데도 몇 년, 몇 달은 기도하며 고민합니다.

엘리사의 즉각적인 응답은 엘리야의 명성이 탐이 나서도 아니고, 무언가에 홀린 것도 아닙니다.

그가 이미 준비 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앞서 시내산에서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엘리야는 극심한 우울감에 빠져 하나님 앞에 울분을 터뜨립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자기 혼자뿐인데 자기도 죽게 생겼다고 비관적으로 말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사람 칠천명을 남겨 두셨다고 말씀했습니다.

바알 종교가 여호와 신앙을 완전히 삼켜버리고 씨가 말랐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그 가운데 은혜를 주셔서 신앙을 지킬 사람을 남겨두셨다는 것입니다.

그 예로 하나님이 정해주신 포도원과 신앙의 자존심을 지키다 죽은 나봇 같은 사람이 21장에서 등장하는 것입니다.

엘리사 역시 바알신앙이 숨막히게 이스라엘사회를 덮고 있는 와중에도 하나님에 대한 충정과 신앙을 간직한 남겨진 칠천명 중 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런데 스스로 남은 게 아니라 남겨두셨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지 않으면 우리 중에 믿고 구원받을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남겨진 자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부르시지만 끝까지 붙들어 주시는 자만 남는 것입니다.

이런 저런 문제로 수많은 교인들이 믿음에서 돌아섭니다.

먹고 살기가 힘들면 주일에 일하러 다니다 점점 멀어져 갑니다.

경제가 살아나고, 월급이 오르면 주일에 놀러 다니느라 우수수 떨어져 나갑니다.

병마가 덮치면 의술을 의지하려고 황급히 교회를 떠납니다.

시험이 닥치면 하나님을 원망하며 또 빠져 나갑니다.

그런 가운데서 우리는 남고, 남고, 또 남은 것입니다.

사실은 하나님이 남겨 주신 것이죠.

엘리사시대처럼 지금도 하나님이 붙드시는 사람은 항상 사명에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신기한 것은 신앙생활을 한 경력과 상관없이 어떤 성도들은 즉시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갑자기 나타나 알아서 결정하라는 듯 터프하게 겉옷을 던지지만 엘리사는 이미 하나님의 뜻이면 어떤 일이든 순종할 모든 준비가 완료 된 사람입니다.

우리 남겨진 자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어떤 부르심에도 순종할 수 있도록 자신을 잘 준비해 나가야 할 줄 믿습니다.

 

엘리사는 부모님과 먼저 작별을 한 뒤 엘리야를 따르겠다고 말을 합니다.

그때 엘리야가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돌아가라 내가 네게 어떻게 행하였느냐

이 말은 어떻게 하든 그것은 네 스스로 결정할 문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응답의 책임은 각자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간곡하게 우리를 부르시지만 우리의 결심이 없이 혼자 모든 것을 성취하지 않으십니다.

성령의 감화와 그에 대한 인간의 의지적인 호응은 서로 신비한 상호작용을 합니다.

성령께서 말씀을 들을 때 감동하시는 은혜를 지나치면 안되는 이유입니다.

우리의 작은 지식과 경험과 생각의 한계를 인정하고 조금씩 말씀을 받아들이면 성령의 큰 선물이 반드시 심령에 임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21절을 보면 결심한 엘리사는 돌아가 좀 특이하고 의미 있는 행동을 합니다.

엘리사가 그를 떠나 돌아가서 한 겨릿소를 가져다가 잡고 소의 기구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어 먹게 하고

소는 잡고 멍에는 불태웠다는 것은 부유한 지주의 삶은 끝났다는 것입니다.

앞날이 지금과는 다른 험난한 길이지만 부르심에 한번 응답한 이상 돌아서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믿기로 결심한 이상 다시는 돌아서지 않을 아름다운 결단을 하시길 축복드립니다.

그리고 엘리사는 삶은 소고기를 백성들에게 나눠 먹였습니다.

그동안 기근에 굶주린 가난한 마을 사람들에게 베푼 이 풍성한 잔치는 앞으로 엘리사가 어떤 일을 할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백성은 올바로 신앙을 배우지 못하고 우상숭배에 찌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박탈당하고 가난과 억압 속에서 살아가는 백성들에게 말씀으로 먹여서 생명을 살리는 것이 자기 사명임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엘리사는 선지자후보들을 키워내고 많은 기적을 통해 가난한 서민들을 돌봐주고, 전쟁에서 혼자 국민을 지켜내는 놀라운 일들을 해냅니다.

이 또한 예수님의 삶을 엿보여 주는 것입니다.

우리를 수많은 사람 가운데서 부르신 목적과 사명을 발견하셨습니까?

예수님은 굶주린 군중들에게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먹이실 때,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말씀과 은혜의 신령한 양식으로 영적 굶주림과 갈증을 해결 받았습니다.

지금 오래돼서 다들 잊어버리셨겠지만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영적 굶주림은 세상의 어떤 결핍에 비할 수 없습니다.

마치 공허하고 큰 구렁텅이가 입을 벌리고 내 속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아직 하나님을 모르는 가족과 이웃과 동료들과 많은 사람들이 유럽이 폭염 루시퍼의 강타에 타들어 가듯이 그 심령이 나날이 말라 죽어가고 있습니다.

죽어가는 환자를 살려 본 사람들이 느끼는 희열과 보람은 그 삶의 가치관을 바꿀 정도로 충격적입니다.

하물며 한 영혼이 영원한 지옥의 사망에서 건져내어 생명의 구원을 얻는 것을 보는 기쁨은 어떻겠습니까?

아무리 전도가 힘들고, 섬김이 힘들어도 성령께서 그런 주님의 기쁨을 우리 안에 주시기에 성도들이 충성하며 복음을 위해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엘리사는 이렇게 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엘리야를 따라 나섰습니다.

그런데 엘리사에게 대단한 예언자의 일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엘리사가 한 일은 스승인 엘리야의 수종을 드는 일이었습니다.

엘리야를 따르며 수종 들었더라.

여러 일군을 거느리고 명령을 내리던 입장에서 엘리야의 식사를 차리고, 허드렛일을 도와주는 사환이 된 것입니다.

얼마나 엘리사가 오랫동안 엘리야의 수종을 들었는지 엘리사에게 붙은 별명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엘리야가 죽고 난 뒤 최고선지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를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붓던 엘리사라고 불렀습니다.

세수할 때 곁에서 씻을 물을 챙겨주던 몸종이란 의미입니다.

신앙의 여정과 사명을 감당하는 데는 인내해야 할 시간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겸손하게 다듬는 필수 코스입니다.

남에게 미천하게 보일만큼 낮아지는 훈련을 하나님은 꼭 거치게 하십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모든 것을 두고 미천해 보이는 길로 떠나는 엘리사를 보며 뭐하러 사서 고생길을 가냐며 수근댔을지 모릅니다.

저도 종종 뭐하러 힘든 개척교회를 하냐는 소리를 듣습니다.

오늘도 이런 저런 이유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교회에 가냐는 식구들의 핀잔을 듣고 나오셨을지도 모릅니다.

한 사람을 전도할 마음을 먹으면 모욕적인 말투도 감수하고 견딜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엘리사처럼 부유한 삶도 내려놓고, 바울처럼 사회적으로 보장 된 삶도 내려놓고 험난한 길을 가는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예수님을 본받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눈앞에 있는 영광을 위해 이 땅에서 잠시 당하는 십자가의 고난을 아무렇지 않게 감내하셨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더 가치 있는 영생을 확신하기에 수고와 고난을 감수하고도 예수님을 뒤 따르는 것입니다.

최후의 승자가 누구일지 분명하게 확신하기 때문이죠.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엘리사를 부르신 하나님과 모든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는 엘리사의 아름다운 마음의 화답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부르실 때는 자녀로만 부르시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함께 이루는 데 각자가 할 수 있는 사명과 함께 우리를 부르십니다.

성도님들이 만일 큰 기업을 경영하는 재산가라면 자식을 평생 먹고 놀게 하시겠습니까?귀한 자식이니 힘든 회사 운영은 하지 말고 돈이나 쓰고 관광이나 다니고 취미활동이나 하라고 하시겠습니까?

뛰어난 기업인 워렌 버핏이란 사람은 기업의 세습에 대해 이런 부정적인 말을 했습니다.

경영권 세습은 2020년 올림픽 대표팀을 2000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자식들 중에서 선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너들은 자식들에게 기업을 물려주려고 온갖 경영수업과 훈련을 시키며 안간힘을 씁니다.

재벌들의 후계자 경영수업은 상상이상으로 치밀하고 혹독합니다.

재벌 자식들이 놀고 싶다고 아무 때나 노는 게 아닙니다.

동원그룹의 김재0 회장은 큰 아들을 동원산업의 신입사원으로 들여보내 실전경험을 쌓으라고 4개월 동안 원양어선을 태웠습니다.

남태평양과 베링해로 참치잡이를 나섰던 것이죠.

하루 16시간씩 중노동을 했지만 아무도 그가 회장님 아들인 것을 몰랐다고 합니다.

기능적으로, 인격적으로, 학문적으로 두루 갖추도록 만들어내는 게 후계자 수업입니다.

최근 구속된 이재0 씨의 경우도 서울대와 일본 게이오대와 하버드대 박사과정을 마치며 경영자의 기반을 철저히 준비시켰습니다.

내 재산이 이렇게 많으니 너는 평생 놀고만 먹으라는 재벌은 한사람도 없습니다.

온 우주를 경영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삼으셨다면 어떻겠습니까?

이젠 두 손 가득 부귀와 영화를 줄 테니 무위도식하며 그것들을 누리기만 하라고 하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녀로 부르시고,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시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우리에게 함께 하도록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소명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성도들에게는 하나님나라를 위해 하도록 주시는 소명이 있습니다.

비록 겉으로 엘리사처럼 모든 현실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아니지만 이미 믿는 우리에겐 세상 것은 버린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가치는 이미 버려졌습니다.

직장도 공부도 일상의 일과 가정도 과거 생각했던 것과 똑같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단지 예수님을 따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기 위한 수단일 뿐이지 우리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의 현재의 위치에서 어떻게 예수님을 따르고 선지자로 예언자로 살아갈 수 있을지가 우리의 가장 큰 고민이고 열정이 되어야 합니다.

현재 내게 주신 일이 농부라면 열심히 밭을 갈며 그곳이 내게 주신 사명의 장소임을 믿고 성실히 수행하시길 바랍니다.

엘리사처럼 혹 다른 일로 우리를 부르실 때도 순종할 수 있도록 항상 믿음을 잘 간수하며 준비하는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엘리사가 그냥 부유한 지주의 안일한 삶을 선택했다면 그의 이름은 우리에게도 잊혀진 이름이고 하나님께도 잊혀졌을지 모릅니다.

사람은 고차원적인 존재라 무의미한 삶에 만족하지 못합니다.

나의 영광스런 구원의 기쁨과 만족으로 충만한 삶을 살며, 내가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작은 사명에 충실한 삶을 하루하루 살아가는 가장 복된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2017년8월13일 주일설교 남수연



 

엘리사의 소명 (2017 성지순례 중 사역자 대상 설교)

본문은 엘리사가 소명을 받는 내용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일군들이 부름을 받는 장면들이 많이 나오죠.

소명을 받는 장면들은 각각 다르지만 어떤 소명이든 마음을 사로잡고 깊이 가슴에 남는 것 같습니다.

엘리사의 소명은 설화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지만 어느 사역자의 소명 장면보다 감동적이라는 생각을 해 왔습니다.

오늘 함께 부름을 받은 전도사님들과 이 말씀을 간단하게나마 나누게 되어 참 좋은 것 같습니다.

엘리사의 소명을 통해 같은 길을 결심한 우리 모두에게 조금 더 확신과 결단을 갖게 되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엘리사의 소명에서 먼저 생각해보고 싶은 것은 그가 부르심을 받았을 때 마음이 어땠을까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열두겨리의 소로 밭을 가는 엘리사는 좀 부유하게 살고 있었으리라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어느날 엘리야가 불쑥 그를 찾아왔습니다.

온 이스라엘을 떠들썩하게 했던 갈멜산의 엘리야, 혼자 바알의 선지자와 맞붙었던 선지자가 자기를 후계자로 삼으려 찾아온 것이죠.

영광이라고 생각할 수만은 없는 것이 지금 엘리야는 이세벨의 복수 전갈에 도망자가 된 처지였습니다.

지명수배자의 제자가 되는 것, 바알신의 어두운 그늘에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퇴색되어 가던 그런 시국에 선지자가 된다는 것은 쉬운 결단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대부분의 예언자들은 하나님께 직접 소명을 받고 능력을 받았지만 엘리사의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앞에 보면 하나님께서 호렙산에서 엘리야를 불러 하사엘, 예후를 왕으로 세우고 엘리사를 선지자로 세우라는 지시를 하십니다.

엘리사는 하나님도 보지 못했고, 능력도 받지 못했던 것이죠.

왜 엘리사가 승천하려는 엘리야를 그렇게 따라 다니며 능력을 받으려고 했는지 아시겠죠?

그런 상황에서 안정된 가업을 버리고 엘리야를 따르겠다는 엘리사의 결단은 그가 얼마나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각별한 마음을 갖고 있었는지 말해주는 것입니다.

저는 그 마음을 21절에서 읽습니다.

엘리사가 한 겨릿소를 잡아 그 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어서 잔치를 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 귀한 소고기를 얼마 전 까지 흉년에 시달리던 백성들에게 아낌없이 베풀어 먹게 하는 이 모습은 엘리사의 결심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못된 지도자 밑에서 제대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가뭄의 징계에 시달리며 가난하게 살아가는 이 백성을 내가 돌보겠다, 다시 하나님의 복된 백성으로 이끌겠다.

이런 엘리사의 마음의 결심과 사역의 상징성을 이 본문이 말해주는 것이죠.

실제로 엘리사의 사역은 엘리야처럼 왕을 상대하고 나라들을 상대하는 쪽보다는 가난한 과부들을 보살피고 먹을 것이 없던 생도들을 위해 기적을 베푸는 등의 세심한 사역을 합니다.

우리가 각자 어떤 삶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는 다 다릅니다.

그러나 우리 역시 엘리사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온 것도 아니고 특별한 능력을 받고 사역자가 된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때로 이 길이 과연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인가, 내가 정말 하나님의 일군으로 사명을 받은 것인가 주춤거리게 될 때도 있습니다.

아니, 저 같은 경우는 아직도 그런 흔들림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우리의 자발적인 반응도 한 짝이라고 생각합니다.

엘리야가 부모를 작별하겠다는 엘리사에게 돌아가라 내가 네게 어떻게 행하였느냐 라고 말합니다.

해석하기에 매끄러운 문장은 아니지만 문맥 상으로 볼 때, 결단은 언제하든지, 어떤 방법으로 하든지 네가 할 일이다 라고 느껴집니다.

하나님이 우리 코를 꿰서 여기까지 끌고 오신 것은 아닙니다.

부족하지만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복음의 일군이 되어 어둠을 헤메고 있는 영혼들을 복된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해 스스로 헌신한 것입니다.

교계의 큰 명사가 되고, 큰 교회를 이끌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엘리사와 같이 기름 한 병 밖에 남은 게 없는 절망적인 과부 같은 불쌍한 사람들을 예수님께 인도할 수 있다면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으시다고 바울사도는 로마서에서 말씀했습니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은 후회가 없으십니다.

다만 우리에게도 엘리사가 구한 것 같은 능력이 필요합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갑절의 능력을 요구합니다.

엘리사가 스승보다 더 큰 영적 거장이 되고 더 큰 일을 해내려는 공명심에서 그랬겠습니까?

엘리사의 시대는 엘리야의 시대보다 점점 더 어두워가고 있었고, 아합 왕조의 패악이 극도에 달했을 때입니다.

엘리야보다 갑절의 능력이 없이는 도저히 선지자의 사역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름 받은 오늘은 어떻습니까?

말하지 않아도 우리에게는 70, 80년대 선배목회자들에 비할 때 갑절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사역자는 하나님 앞에서 고독하게 독대하는 경건이 사역의 성패를 가른다고 생각합니다.

성령님의 힘을 얻어 말씀 속의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고 주예수님을 더 사랑하는 사역자가 되는 것이 제가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 힘으로 만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몇몇 영혼들을 안고 해산의 수고를 할 수 있는 것이죠.

어떤 목사님이 하신 말씀이 제게 깊은 도전이 되었습니다.

모름지기 목사란 자기 성도들의 이름이 닳도록 기도해야 한다.’

우리가 다 어려운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왜 여기까지 왔습니까?

성경의 땅에서 예수님의 발자취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숨결을 더 깊이 느끼고 우리 성도들에게 무어라도 말씀을 먹이는 데 좀 도움이 될까 해서 아니겠습니까?

엘리사에겐 엘리야의 손에 물을 붓던 엘리사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녔더군요.

엘리야의 종이었다는 뜻입니다.

얼마나 격이 떨어지는 수식어입니까?

저는 우리 모두에게 누가 봐도 예수님의 종이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녔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성지순례의 첫날을 맞이 하는데 우리가 사모하는 주님의 체취에 흠뻑 젖어드는 은혜로운 날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