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하

열왕기상2장1절-14절 (엘리야의 승천과 엘리사)

남수연 2017. 8. 28. 14:11

오늘 본문말씀은 엘리야가 하늘로 승천한 내용입니다.

사람들은 이 사건을 나무꾼과 선녀에서 날개옷을 입고 하늘로 승천한 선녀의 이야기정도로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승천이야 하나님이시니 그렇지만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대기권을 넘어 어딘가로 날아가버렸다는 것은 현실감이 들지 않죠.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은 대부분 하나님께 받은 계시의 말씀을 선포하고 또 글로 써서 성경으로 남겼습니다.

이사야나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호세아 등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우는 성경기록을 남긴 선지자들을 신학 쪽에서는 문서 선지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엘리야나 엘리사 같은 선지자들은 자신의 이름으로 남은 성경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선지자들은 그들이 행한 기적이나 삶의 흔적 자체가 메시지입니다.

오늘 승천하는 광경 그 자체가 우리에게 설교하고 교훈하는 것이죠.

이런 기적들이 성경이라고 덮어놓고 믿는 것도 권장할 일이 아닙니다.

그건 믿는 게 아니라 믿는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아주 분명한 현실의 문제와 이런 착각하는 믿음이 상충하면 백프로 현실을 선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기적 같은 기사들은 성경 자체 내에 있는 사실성을 찾아내서 믿는 근거를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인지 이해도 안 되고 성경이 우리의 현실과 동떨어지게 생각됩니다.

오늘 엘리야의 승천 기사를 통해 큰 은혜와 교훈을 받게 해주시리라 믿습니다.

 

먼저 본문이 좀 길어서 내용이 한 눈에 잘 들어오지 않으실 것입니다.

내용을 간추려 보면, 엘리야가 하나님이 자신을 하늘로 올리실 것을 알고 거처하던 길갈을 떠나 벧엘로 갑니다.

그런데 후계자인 엘리사를 보고 따라오지 말라고 합니다.

엘리사는 절대 그럴 수 없다며 엘리야를 따라 가죠.

벧엘로 간 엘리야는 다시 여리고로 떠납니다.

거기서도 엘리사에게 따라오지 말라 하고 엘리사는 따라갑니다.

그 다음 여리고를 떠나 다시 요단강으로 갑니다.

이번에도 따라오지 말라 하고 엘리사는 따라갑니다.

그러니까 이런 면에서 본문이 좀 난해한 것입니다.

요단강에 이른 엘리야가 겉옷으로 강물을 치자 강물이 갈라지고 두 사람은 요단강을 건너갑니다.

요단강을 건너가고 나서야 엘리야는 원하는 것을 구하라고 말합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임한 성령의 능력이 두배로 자기에게 임하길 구합니다.

그때 하늘에서 불말과 불병거가 나타나 두 사람을 떼어 놓더니 엘리야는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승천해서 사라집니다.

엘리사가 엘리야의 겉옷을 주워서 건너왔던 요단강물을 치니 강물이 갈라지는 똑같은 기적이 일어나 강을 건너옵니다.

성령의 능력이 엘리사에게 임하셨고 영적 승계가 잘 이루어진 것입니다.

 

1. 그러면 먼저 엘리야의 승천의 사실성에 대해서 짚어 봐야겠습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설화가 아니라 실화입니다.

이 사건이 픽션이 아니라 실화라는 것은 증인이 많다는 데 있습니다.

이야기는 무성한 데 증인이 나타나지 않으면 그것은 지어낸 말이죠.

본문에 보면 엘리야가 승천할 것을 안 뒤에 여러 군데를 돌아다닙니다.

길갈에서 벧엘로, 그 다음 여리고로, 그리고 요단강으로 이동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좀 이상하죠?

길갈, 벧엘, 여리고, 요단강은 이스라엘민족들에게 신앙적으로 의미가 깊은 장소들입니다.

물론 이 땅을 떠나기 전에 엘리야가 유서 깊은 장소들을 순회라도 하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엘리야가 이 곳을 지날 때 마다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선지자의 제자들입니다.

엘리야가 들른 이 장소들은 엘리야가 제자들을 교육하던 학교가 있던 곳입니다.

그래서 어디를 가도 선지자의 제자들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이곳들을 방문한 것과 관련 된 내용은 제자들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들른 목적이 마지막으로 제자들을 방문해 자신의 승천을 알리고 작별을 고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제자들이 모두 엘리야가 승천할 것을 알고 있죠.

엘리야의 승천에는 그래서 많은 증인이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도 최소한 백이십여명의 제자들이 그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들이 그대로 마가의 다락방으로 이동해서 성령받기를 기도했던 것이죠.

엘리야의 승천 때도 많은 제자들이 그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고 요단강 건너에서 멀리 현장을 지켜 본 사람들만도 오십명이나 됩니다.

하나님이 역사를 행하실 때 숨기고 일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성경에 남기신 모든 일들은 증인이 있는 실제 역사라는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지금 서울극장에서 예수는 역사다라는 기독교영화가 상영되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시카고트리뷴 신문기자인 리 스트로벨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어느날 식당에서 사탕이 목에 걸려 죽을 뻔한 기자의 어린 딸이 한 기독교인 간호사의 응급처지 덕에 극적으로 살아납니다.

평소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던 아내는 이것을 기회로 믿음을 갖게 되지만 보이는 것만 믿는 무신론자 남편은 아내의 믿음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역사가 아니라 허구라는 것을 증명해 간다는 영화입니다.

남편은 기자정신을 발휘해서 과학자, 신학자, 고고학자, 의사, 심리학자들을 만나가며 집요하게 예수님의 뒤를 캐고 다닙니다.

그러나 결국 예수님과 성경이 실제 역사라는 결론을 내리고 예수님을 믿게 된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리 스트로벨은 현재 목사가 되었고 기독교를 변증하는 책들을 쓰고 있습니다.

엘리야의 승천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야 승천 사건에 대해 제자들을 증인으로 세우게 하셨습니다.

덜렁 데려가 버리는 게 목적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본보기이기 때문에, 증인을 세우시고, 또 기록에 남기신 것이죠.

일차적으로 엘리야의 승천을 통해 하나님에 대해 확고한 믿음을 갖게 된 것은 엘리사를 포함한 제자들입니다.

또 이 여러 증인들의 입을 통해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소문이 퍼져 나갔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도 엘리야의 승천 사실이 전해지고 이것이 역사적으로 실제 일어났던 사실이라는 것을 믿게 된 것입니다.

2.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렇게 자연계의 원리를 벗어난 파격적인 승천을 계획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엘리야의 승천에는 여러 가지 목적과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대단한 사건 안에는 당연히 대단한 의미들이 있어야 맞는 것이죠.

엘리야의 승천은 장차 예수님의 승천에 대한 선험적 지식을 갖게 하고 이해를 돕기 위해서입니다.

누군가 하늘로 오를 수 있다는 것을 먼저 경험하게 하시는 것이죠.

또 성도들의 승천에 대한 모델입니다.

우리는 장차 잠시 머물던 이 땅을 떠나 곧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도 먼저 죽은 성도들이 정말 천국으로 갔는지 본 적이 없습니다.

천국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들이 있지만 성경의 범위를 벗어난 체험들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엘리야가 회오리바람을 타고 이 자연세계를 벗어나 어느 장소로 옮겨간 것은 하나님나라가 공간적으로 존재한다는 증거입니다.

만일 엘리야가 새로운 공간과 장소로 이동되지 않았다면 토네이도에 휩싸여 올라가다 어느 높은 산이나 광야에 떨어져 죽어야 맞습니다.

엘리야의 제자들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엘리야가 승천한 뒤 제자들이 엘리사를 찾아와 뭐라고 하는지16절에 이어서 나옵니다.

당신의 종들에게 용감한 사람 오십 명이 있으니 청하건대 그들이 가서 당신의 주인을 찾게 하소서 염려하건대 여호와의 성령이 그를 들고 가다가 어느 산에나 어느 골짜기에 던지셨을까 하나이다 하니라

성경이 얼마나 진실되게 사실을 기록하는 지 이런 부분에서도 알 수 있죠.

제자들도 엘리야의 승천을 이 정도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회오리바람에 좀 날라가다가 떨어져 죽었을거라는 것이죠.

그러나 엘리사는 찾아봤자 소용없다고 말합니다.

엘리야는 천국으로 입성했으니까요.

영적인 눈이 열린 사람은 천국이 시공간적으로 존재하고 지금 그 문이 머리 위에 열려져 있는 것이 믿어집니다.

결국 오십명의 제자들이 삼일을 뒤져서 엘리야의 시체를 찾지 못했습니다.

엘리야가 승천했다는 또 하나의 증거를 남기게 된 것이죠.

 

 

또 엘리야를 산 채로 천국으로 데려가신 이유는 다시 보내시기 위해서입니다.

죽지 않고 올라갔기에 다시 내려올 수도 있다는 기대감을 가질 수 있는 것이죠.

말라기서에 보면 종말적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 선지 엘리야가 먼저 올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엘리야가 올 것이 분명하면 그리스도의 출현도 분명한 것입니다.

엘리야는 살아서 승천했기에 다시 내려 올 것에 대한 기대감이 컸고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기대감도 클 수 밖에 없었던 것이죠.

이 예언의 주인공은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님께 돌리게 하고 그리스도를 맞을 준비를 시킬 엘리야 같은 선지자 세례요한입니다.

그런데 실제 신약시대에 엘리야가 잠시 이 땅에 내려왔었습니다.

바로 변화산 사건 때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와 요한과 야곱과 함께 한 산에 오른 내용이 복음서에 나옵니다.

그때 예수님의 형체가 신비하게 변화되었고 모세와 엘리야가 내려와서 예수님과 대화하는 것을 제자들이 목격했습니다.

승천했던 엘리야가 팔백년이 지나 예수님과 베드로 앞에 내려왔다니 이거야말로 영생을 실감할 수 있지 않습니까?

 

성도들이 죽음의 순간 어떤 영적인 변화가 일어나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엘리야를 장엄하게 하늘로 올리우시는 하나님은 이것을 통해 성도들이 죽음의 순간 어떻게 하나님 앞으로 올리워지는지 상상할 수 있는 아름다운 모델을 보여주셨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엘리야는 아합왕조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신앙을 버리고 바알신앙으로 돌아서는 모습에 자기의 가슴을 치며 통렬히 회개를 외쳤습니다.

너희가 어느 때 까지 머뭇거리려느냐, 바알이 하나님이면 바알을 섬기고 여호와가 하나님이면 여호와를 섬기라.’

탈진하여 쓰러지기까지 백성들을 일깨우려던 그의 분투를 하나님이 모르셨겠습니까?

현실적인 불이익과 죽음의 위협과 두려움에 맞섰던 엘리야를 하나님은 불말과 불병거를 보내 성대하게 맞이하셨습니다.

믿음을 지킨 성도에 대한 하나님의 영접을 보여주신 것이죠.

얼마전에 북한에 억류되었다가 석방 된 임현0 목사님 소식이 뉴스에 나왔었습니다.

31개월을 강제 노동에 시달리며 독방에 수감되었던 임목사님은 가장 힘든 게 고독이었다고 합니다.

독방에 혼자 있다 보니 일년에 성경을 다섯 번 읽게 되었다고 합니다.

임목사님이 석방되어 캐나다의 모교회로 돌아갔을 때 가족과 성도들이 얼마나 환영하고 감격하고 기뻐했겠습니까?

경건한 성도들은 세상에서는 고독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과 하늘의 가족인 성도들에게 돌아가는 그날 상상치 못했던 영광과 환대와 감격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비록 이들처럼 남다른 헌신과 믿음의 삶을 살지는 못한다 해도 이 불신사회 속에서 때로 비웃음을 당하며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신실하게 지켜가는 우리 모두를 하나님은 똑같이 환대해 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엘리야는 천국으로 승천할 우리 모두를 대표해 하늘로 올라간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눈을 감을 때 하나님은 불말과 불병거를 보내 우리를 안전하게 인도해 가실 것입니다.

평생 전도자로 주님을 위해 살았던 충성된 종 무디가 죽을 때 증언했습니다.

그가 눈을 감는 순간 환희로 가득 찬 얼굴에 기쁨으로 들떠 외쳤습니다.

'! 무엇으로도 더 이상 나를 붙잡아둘 수 없도다. 나를 태워 갈 마차가 방안에 와 있도다.'

우리도 이렇게 돌아가 주님 품에 안길 것입니다.

 

3. 다음은 성령의 능력으로 후계자가 된 엘리사에 대해서입니다.

본문을 보면 엘리야는 승천하기 전에 마치 엘리사를 따돌리려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됩니다.

엘리사를 후계자로 택해 놓고 제대로 승계를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좀 이상하죠?

엘리사 입장에선 이게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 아십니까?

엘리사는 아직 선지자의 능력을 받지 못했습니다.

선지자 능력보다 아직 농사짓는 기술이 더 나았을 것입니다.

엘리야는 아직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깊이 체험하지도 못했습니다.

엘리사가 하나님을 부를 때 엘리야의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죠.

하나님을 만난 성도라면 먼 데 계신 초월적인 하나님도 아니고, 누구에게 매번 설명을 들어야 하는 하나님도 아닌, ‘나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여전히 하나님은 엘리야의 하나님이셨고, 엘리야도 하나님도 자신을 외면하는 것 같았습니다.

게다가 다른 제자들은 비꼬듯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오늘 당신의 선생을 당신의 머리 위로 데려가실 줄을 아시나이까

아무 능력도 받지 못했는데 이제 어떻게 하겠냐는 것이죠.

닭 좇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길에도 비꼬며 실망시키는 이들이 꼭 있습니다.

엘리사는 나도 알고 있으니 잠잠하라고 일축하며 바짝 엘리야를 따라 갑니다.

이런 과정은 하나님도, 엘리야도 치밀하고 신중하게 영적지위를 계승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분명히 엘리사는 후계자로 지명되었지만 모든 게 기계적으로 성취되는 게 아닙니다.

한번 부르심에 응답했다고 신앙이 흔들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엘리야도 이미 영적으로 탈진하고 낙망해서 죽기를 구한 전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꽃길만 걷자며 우리를 부르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우리가 따르는 길이 자기를 부인하는 십자가의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를 부르실 때 예수님은 진지하게 초청하셨지만 달래고 얼러서 데려가지 않으셨습니다.

스스로가 계산하고 선택하고 결단하는 사람만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과 결단은 믿음의 여정에 늘 지속됩니다.

엘리사도 많은 것을 버리고 따랐지만 여전히 매 순간 자신의 믿음으로 결단해야 했습니다.

오늘 엘리사를 시험하는 믿음의 최종 관문은 거절입니다.

사람이 견디기 힘든 감정 중 하나가 거절입니다.

거절당했을 때, 자존심은 처참히 무너지고 수치심에 얼굴이 달아 오릅니다.

상대방에 대한 깊은 확신과 신뢰가 없다면 거절당했을 때 관계는 깨집니다.

엘리사는 하나님과 스승의 거절 앞에 선 것입니다.

다시 과거 부유한 지주의 삶으로 돌아갈 것인지 끝까지 이 길을 갈 것인지 거절 앞에서 선택해야 합니다.

여러 가지 동기로 교회에 나왔지만 하나님에 대한 특별한 체험이 없고, 믿음의 획기적인 변화도 없으면 신앙적인 소외감을 느낍니다.

이때 거절의 시험 앞에 선 것입니다.

또 잘 믿던 사람도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할 때 하나님이 거절하는 것처럼 느끼게 됩니다.

조금만 상황을 조정해 주시면 모든 게 잘 될텐데.

과한 것을 구하는 것도 아니고 불가능한 것도 아닌데, 섭섭한 마음이 듭니다.

거절의 시험 앞에 선 것입니다.

거절 앞에서 진정 하나님을 신뢰하는 지 드러나는지가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거절과 외면을 경험하셨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고 외치신 것이 그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신뢰와 믿음의 관계가 아니셨다면 거절당했던 순간 십자가에서 내려오셔서 하나님의 자리로 돌아가셨을 것입니다.

절대적 신뢰와 믿음이 외면과 거절의 시험을 이기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실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으로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때로 하나님이 침묵하시고 우리의 믿음은 소용돌이치며 아래로 가라앉는 것 같은 때가 있습니다.

그때가 바로 그동안 닦아온 하나님의 신뢰를 바탕으로 내 자신의 믿음을 갖고 하나님께 나가는 가장 중요한 단계인 것입니다.

엘리사가 그 침묵과 거절의 시험을 통과한 것입니다.

요단을 건넌 뒤 비로서 엘리야는 구하는 게 무어냐 묻습니다.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

엘리야가 행한 능력의 두 배로 성령께서 역사하시길 원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더 큰 능력을 얻어 스승보다 더 명성을 얻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엘리사 시대의 영적무지와 우상숭배, 강대국의 침입에서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자기에겐 더 강력한 성령의 역사하심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대답에서 그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

이것은 네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짊어지려 하는구나라는 뜻입니다.

시대의 위기를 직감하는 엘리사의 비장한 각오를 느낀 엘리야는 제자인 엘리사에 대한 연민과 염려 속에 이 말을 한 것입니다.

저는 이 말 속에서 세례요한이 요단강가를 거니시는 예수님을 보고 제자들에게 한 말이 생각났습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예수님은 만민의 고통을 그 어깨에 짊어지고 십자가의 어려운 길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현실을 짊어지기 위해서 갑절의 능력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교회는 다니지만 현실의 문제들은 여전히 믿음과 따로 놀지 않습니까?

믿음이 실제로 강력한 힘이 되어야죠.

또 우리가 바로 영적 지도자가 되어야할 자녀와 가족들과 이웃을 이끌기엔 역부족이지 않습니까?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엘리사의 끈질김은 또한 기도의 끈질김을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정말 될 것 같지 않은 일도 끈질기게 기도하면 어느 순간 서서히 문이 열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게 죄가 아니라면 우리의 간절한 필요에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연단하시고 언젠가 문을 열어주십니다.

모든 것을 끈기있게 기도하되 더욱 성령충만 받기를 구하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세상이 우리를 늘 유혹하고 현실만이 전부인 것처럼 보이지만 엘리야가 들려 올라간 천국의 영원한 삶은 진짜입니다.

현실에 현혹되지 않고 영원을 준비하며 살아가려면 지금보다 갑절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를 강하게 무장시켜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와 성령충만입니다.

그렇게 능력을 받아 우리 자신의 삶을 방어하고, 우리가 영적 지도자 된 가정과 일터와 삶의 터전에서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2017년8월20일 주일설교 남수연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