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하

열왕기하2장19절-25절 (여리고의 구원과 벧엘의 심판)

남수연 2017. 9. 6. 17:32

엘리야가 승천한 뒤 성령의 사람 엘리사의 사역이 시작되었습니다.

본문성경에서 엘리사선지자는 두 가지의 초자연적인 기적을 행하죠.

하나는 여리고의 물 근원을 고치는 일이고, 또 하나는 벧엘의 아이들을 심판한 것입니다.

뒷 사건은 뭔가 꺼림칙한 느낌이 남죠.

이 두 사건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중점적인 사역을 상징합니다.

바로 구원과 심판의 사역입니다.

이것을 엘리사의 기적을 통해 가시적인 설교를 하시는 것이죠.

오늘 말씀은 삼천년 전 이스라엘이라는 먼 나라에서 일어났던 케케묵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도 동일하신 성령께서 이 말씀을 통해 감동받은 사람들의 영혼을 살리십니다.

오늘도 이 사건들을 역사적인 배경과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래야 성경이 사실에 근거한 하나님의 말씀이신 것을 우리가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이성만으로 믿음이 생기지 않지만 이성이 동원되지 않은 믿음도 참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설득과 이해 없이 믿음을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구원의 원리를 가르쳐 주시고 생명의 사역을 행하시리라 믿습니다.

 

먼저 엘리사의 첫 번째 기적은 여리고에서 일어납니다.

엘리사는 엘리야가 승천한 뒤 여리고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때 여리고 사람들이 찾아와 성읍의 가장 심각한 문제를 꺼내 놓습니다.

우리 주인께서 보시는 바와 같이 이 성읍의 위치는 좋으나 물이 나쁘므로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나이다

단지 과일만 낙과 되는 게 아니고 가축이나 사람들도 낙태가 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성읍사람들의 식수인 샘물이라는 것이죠.

여리고는 인류역사 속에 가장 오래 전 건설 된 성읍 중 하나입니다.

오랜 역사 속에 여러 번 무너지고 또 재건되고 한 도시입니다.

성경에서 종려나무 성읍이라고 불리는 아름다운 오아시스지역이죠.

고고학적으로 보면 약 8천년전에 이미 여리고에 농경문화가 정착되었고 당시 유적지에서 밀과 보리의 낱알들도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여리고의 샘이 본래부터 나쁘지는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여리고성의 수질이 나빠지게 되었을까요?

고고학은 원인을 모르지만 성경은 그 원인을 알려주십니다.

여리고성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 최초로 점령한 성입니다.

여리고성을 일곱 번 돌았을 때 성이 저절로 무너져 내린 이야기를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이 여리고성을 정복한 뒤 특단의 저주를 내립니다.

여호수아626절입니다.

여호수아가 그 때에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누구든지 일어나서 이 여리고 성을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그의 맏아들을 잃을 것이요 그 문을 세울 때에 그의 막내아들을 잃으리라 하였더라

다시는 이 여리고성읍을 재건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의 저주로 봉인했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까지 해야 하는 지는 단순히 국가 간의 전쟁사로 이해할 일이 아닙니다.

성경 속의 모든 사건들은 하나님의 구속사의 관점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가나안 땅의 사람들은 노아의 둘째 아들인 함의 아들 가나안이 낳은 부족입니다.

가공할만한 홍수심판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이들도 다 전수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타락해 우상을 만들어 숭배하며 피와 악으로 땅을 더럽혔기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가나안땅의 정벌은 창조주를 미워하고 본성과 탐욕대로 살아가는 세속세상에 대한 심판을 상징하는 것이죠.

여리고를 다시 재건하지 못하게 막은 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영구성과 엄위성에 대한 경각심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여호수아에 의해 여리고가 완전히 무너지고 오늘 엘리사 시대까지 약 육백여년이 흘렀습니다.

그렇다면 그사이 누군가 다시 여리고에 도시를 건설했다는 것이죠.

누가 겁도 없이 그런 일을 저질렀을까요?

대개 이런 저주에 대한 얘기는 대대로 전해지고 알아서 터부시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금기사항을 무시하고 용감무쌍하게 여리고를 다시 건설한 인물이 열왕기상1634절에 나옵니다.

그 시대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하였는데

그 시대는 바로 직전 왕인 아합과 왕비 이세벨의 시대입니다.

그러니까 시간적으로 보면 여리고는 아직 건설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신도시라고 볼 수 있죠.

이 아합왕 시절엔 하나님을 경시하고 바알을 숭배하던 풍조가 만연했습니다.

히엘은 여호수아의 경고를 비웃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그 터를 쌓을 때에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그 성문을 세울 때에 막내 아들 스굽을 잃었으니 여호와께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히엘은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여리고를 건설했다 예언대로 정확하게 장남과 막내아들을 잃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 입에서 나가는 말이 헛되이 내게 돌아오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아마도 히엘이란 벧엘의 건축업자는 저주받은 여리고 땅을 싼 값에 사들여 신도시를 건설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 목적이 아니면 누가 성을 쌓고 성문을 다는 대공사를 개인적으로 하겠습니까?

앞에서 주민들이 말했듯이 여리고는 위치가 좋았습니다.

사해 길을 따라 남북을 관통하는 교통의 요충지에 있으니 거기 도시를 만들면 딱 좋은 것이죠.

싼 땅에 신도시를 만들고 땅과 가옥을 비싸게 팔아 돈을 벌려고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했던 히엘은 두 아들을 잃는 비싼 값을 치러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엔 분명히 순종과 불순종에 대한 상벌이 따른다는 것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잠언1313절은 가르칩니다.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패망을 이루고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얻느니라

사람들은 콸콸 쏟아지는 오아시스가 있고 나무가 무성한 여리고의 아름다움에 반해서 하나 둘 이주해 왔습니다.

그런데 살다보니 잎은 무성한 데 생산이 안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죽음의 성읍이었던 것이죠.

여호수아의 저주가 여전히 살아있었던 것입니다.

히엘의 아들 두 명이 죽은 것으로 여리고의 저주가 풀릴 그럴 상황이 아닙니다.

이 저주받은 여리고성은 하나님을 등지고 심판의 상태에 있는 죄인들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그럴듯한 무성한 잎사귀와 화려한 꽃을 달고 있지만 근원이 악하기에 그 인생의 결과는 죽음이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가끔 저 사람이 그래도 근본은 괜찮은 사람인데라고 합니다.

근본이 좋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만일 내면을 송두리째 신상털이 당한다면 여기 고개를 들고 앉아 있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성경은 분명히 판단하십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우리도 이 근원이 고쳐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 신앙은 단지 마음의 위안을 얻고 의지할 곳을 구하는 정도가 아니라 근본이 바뀌어야 하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경건으로 자신을 치장해도 근본이 바뀌지 않은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나와 근본이 달라졌는지 스스로에게 자문해야 합니다.

근본이 바뀌는 데 그걸 모를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안에 사망이 생명으로 옮겨진 확신이 없다면 몇 번이고, 매일이라도 오늘 여리고 사람들처럼 하나님 앞으로 나가 고침을 간구해야 합니다.

 

엘리사는 여리고사람들의 간청에 망설임 없이 즉시 응답합니다.

하나님은 진심으로 나오는 사람을 결코 물리치지 않으십니다.

엘리사는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가져오라고 하고 물 근원으로 가서 소금을 던지며 선언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이로부터 다시는 죽음이나 열매 맺지 못함이 없을지니라 하셨느니라.

육백여년을 내려온 저주가 풀리고 죽음의 물이 생명의 물로 고쳐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엘리사가 물근원에 던진 소금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가 성경을 보는 관점은 예수님이 보신 관점과 같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해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그 성경은 곧 내게 대해 증거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미 모든 사건에 예수님이란 정답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여리고의 저주를 풀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근원을 바꿔 버린 이 소금은 바로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소금이 아니라 설탕을 던졌다고 해도 정답은 예수님이십니다.

소금이 예수님과 관련된다는 것은 성경 여러군데에서 발견할 수 있는 데, 역대하135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 것이 아니냐

여기 소금언약이 나오고, 다윗과 그 자손이 나오죠?

다윗의 자손인 그리스도가 영원히 다스리는 나라를 하나님은 약속하셨는데, 그것이 변치 않고 반드시 이뤄질 것이기에 소금언약이라고 합니다.

엘리사가 던진 소금은 바로 이 소금언약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이시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돌이켜 하나님 앞에 나오기만 하면, 나와서 우리를 고쳐주실 예수님의 대속을 진심으로 믿기만 하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주신다는 것을 여리고 샘의 기적을 통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보배로운 것은 결국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진리입니다.

그걸 많은 성경을 통해 여러 방면에서 우리에게 깨닫게 하셔서 깊고 견고한 구원의 진리 위에 서게 하시는 것입니다.

너무 얄팍한 구원의 지식만으로 끝까지 믿음을 지키기가 어렵습니다.

불신세상은 첨단 과학과 여러 학문과 세상권련과 세속의 영광으로 철저히 무장하고 우리를 집요하게 공격해 옵니다.

구원의 진리에 견고히 서지않고 우물쭈물하다 저들에게 발목을 잡혀 주저 않는 신앙이 얼마나 많습니까?

성경 말씀을 샅샅이 배우고 깨닫는 것은 우리 믿음의 견고한 근거가 될 뿐 아니라 영적인 삶을 더욱 복되고 풍성하게 합니다.

그렇게 말씀을 사랑하고 간절히 구할 때 생명의 근원을 바꾸시는 예수님과 진리의 말씀을 반드시 우리 안에 던져주실 것입니다.

영혼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이 땅의 삶도 내가 어떻게 해보려고 발버둥을 친다고 되지 않습니다.

여리고는 오아시스가 펑펑 터지고, 초목이 무성하지만 수확하기도 전에 열매가 더 떨어져 버리니 가난을 면하지 못했습니다.

동물이 새끼를 배도 낙태가 되고, 자식들이 건강하게 번성하지 못하니 인생에 근심과 먹구름이 가득 낄 수 밖에요.

먼저 근원이 바뀌면 점점 현상과 증상이 고쳐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진실 되게 믿는 성도들은 삶에서 점점 그걸 경험하게 됩니다.

내가 그렇게 하나님께 충성하고 헌신하는 것도 아닌 데 이상하게 삶에 좋은 일들이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지만 대단한 일을 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각자에게 맡겨 주시고 바라시는 작은 일들이 있습니다.

그걸 기쁜 마음으로 잘 감당하며 믿음 안에서 살아가면 생활에 필요한 크고작은 은혜를 늘 준비해 주시고 열매가 풍성히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성지순례를 갔을 때 이 엘리사의 샘을 보려고 여리고에 갔었습니다.

주변이 사막지대라고 느껴지지 못할 만큼 맑은 물이 수원지에서 콸콸 쏟아지고 사방의 나무는 무성했습니다.

엘리사의 샘에서 나오는 물은 1분당 4.5톤이나 된다고 합니다.

탱크로리 식수차가 와서 이 샘물을 받아가고, 여리고 생수도 팔리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의 저주가 정확했듯이, 엘리사의 축복도 삼천년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이죠.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아버지의 사랑은 현세에서 영원까지 계속되는 것입니다.

 

다음은 엘리사가 여리고를 떠나 벧엘로 올라가며 일어난 사건입니다.

23절에 보니 작은 아이들이 그 성읍에서 나와서 엘리사를 조롱합니다.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야유를 퍼붓는 말이 무엇입니까?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이 말을 들은 엘리사는 그들을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합니다.

그러자 수풀에서 암곰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 사십이명을 찢었다고 합니다.

이런 내용은 얼핏 읽으면 엘리사선지자가 동네 꼬마들이 철없이 놀린 것에 분개해서 저주를 퍼부은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은 그 저주에 동조해서 철없는 어린아이들을 죽이신 것이 되죠.

불신자들은 이런 말씀을 보고 하나님을 비난합니다.

이것은 여리고의 구원과 반대로 벧엘의 심판이라는 분명한 메시지입니다.

다만 간단한 문장으로 설명 된 이 상황을 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성읍에서 나와서 엘리사를 따라오며 조롱한 이 작은 아이들에 대해서입니다.

24절을 보면 아이들 중 사십 이명이 곰에게 습격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거기 모였던 아이들의 수는 그것보다 더 많았다는 것이죠.

대체 무슨 일이 있어서 아이들이 이렇게 떼를 지어 성 밖으로 몰려나와 엘리사를 조롱했던 것일까요?

얘들이 단순히 놀러 나온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엘리사가 벧엘 성읍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몰려 나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작은아이라고 해석한 단어는 나아르라는 단어인데 열두살부터 열다섯살까지의 청소년을 부르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작은 아이가 아니라 청소년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더 나이든 청년들을 부를 때도 나아르라고 했습니다.

예를 들면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켰을 때 압살롬을 나아르라고 표현했습니다.

다 장성해서 결혼까지 했던 압살롬을 그렇게 불렀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코흘리개 아이들이 철없어서 엘리사를 놀린 게 아닙니다.

왜 이들이 떼로 몰려나와 엘리사를 조롱하고 성에 들어오는 것을 막으려고 했을까요?

물론 성읍의 어른들이 지시한대로 겠죠.

이 벧엘이라는 도시는 북왕국 이스라엘에서 섬기던 금송아지 우상의 신전이 있는 곳입니다.

말하자면 종교 명승지인 셈이죠.

본래 이스라엘에 주신 유일한 성전인 예루살렘으로 가서 절기를 지켜야 했던 북이스라엘사람들이 여로보암왕이 만들어 놓은 금송아지우상 신전에서 제사를 드렸던 곳이 바로 벧엘입니다.

지금도 불국사가 있는 경주 같은 곳은 관광으로 먹고 삽니다.

그리스의 파르테논신전, 캄보디아의 앙코르 와트 그런 곳이 다 종교적 명승지이고 사람들은 관광수입으로 먹고 삽니다.

우상숭배를 실랄하게 비판했던 엘리야의 뒤를 이은 엘리사가 벧엘에 와서 뭔가 문제를 일으킬 것을 성읍사람들이 우려했을 것이 뻔합니다.

이들은 금송아지 마스코트를 만들어 팔고, 예배하러 온 사람들을 대상으로 숙박업을 하고, 제물로 바칠 동물을 비싸게 팔아먹으며 종교관광수입으로 부유하게 살던 사람들입니다.

엘리사가 와서 안정된 삶의 기반을 흔들어 놓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수십명의 청년들이 몰려와 혼자 길을 가는 엘리사를 모욕하고 협박하는 분위기를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이구동성으로 뭐라고 외칩니까?

대머리여 올라가라라고 합니다.

엘리사의 외모를 조롱하는 것도 못된 일이지만 올라가라라는 것에는 더 사악한 의도가 있습니다.

여기서 올라가라는 단어는 엘리야가 회오리바람으로 하늘로 승천했다고 할 때의 단어와 같은 어원을 가진 단어입니다.

말하자면 , 엘리야가 승천했다고? 그럼 너도 한번 올라가 봐라.’

이런 뜻입니다.

지난주 많은 제자들이 증인이 되어 엘리야가 승천한 사실이 벧엘까지 분명히 알려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리고 사람들이 그 사실을 믿고, 엘리사를 통한 하나님의 역사를 믿은 것과 달리 벧엘사람들은 엘리야도 엘리사도, 그리고 하나님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지금 현실적으로 누리는 모든 안일함과 부요함이 그들의 우상이었습니다.

벧엘사람들에겐 당장 돈이 벌리게 하는 금송아지 우상 외엔 더 필요한 게 없었습니다.

며칠 전 생로병사의 비밀을 보니 먹방 일인 방송을 하며 돈을 버는 사람의 심각한 건강 문제가 나오더군요.

먹방 방송은 많이 먹을수록 별풍선을 많이 받고 그게 돈이 되잖아요?

당장 방송하는 재미에, 당장 돈 들어오는 맛에 몸이 백이십킬로가 되도록 그렇게 자기 몸을 갉아 먹고 있는 게 참 안타까웠습니다.

언제까지 일인방송이 전성기겠습니까?

방송도 시들해지고 돈도 안되고 결국 무너진 몸만 남게 되는 것이죠.

사람들은 예수님을 마음과 삶에 깊이 받아들이면 그나마 이렇게라도 살고 있는 것이 당장 위태로워질까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셨잖아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만이 어떤 종류의 삶일지라도 고치고 생명을 주며 복되게 하십니다.

오늘 벧엘의 젊은이를 심판하신 의미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경고하다 징계하시고 또 경고하다 징계하시고 점점 그 수위를 높여 가실 수 밖에 없으셨습니다.

벨엘의 어른들이 심판을 받은 것보다 자식들이 심판받은 것은 훨씬 더 비참한 심판입니다.

우리 자식들의 불신앙은 우리의 불신앙보다 더 비극입니다.

결국 벧엘은 오늘의 징계에도 돌이키지 않고 비참한 종말을 맞게 됩니다.

하나님이 오늘 아무 감정도 없이 사람을 심판하시는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주님을 거부하고 결국 죽이기로 모의한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심판을 경고하실 때 우셨습니다.

엘리사가 인신공격에 분노해서 이스라엘의 청년들을 저주를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뒤에 보면 엘리사가 장차 자기 민족의 학살자가 될 아람의 하사엘장군의 미래를 봅니다.

엘리사는 그를 한참 쏘아보다가 울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한 선지자들은 다 돌아서서 울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듣는 우리는 하나님의 진심어린 경고를 진지하게 받아야 합니다.

 

여리고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나와 사망과 저주의 근원을 생명과 축복으로 바꿀 것이냐, 현재 세속에서 누리는 오락과 부요와 안일한 삶을 위해 금빛 찬란한 송아지 우상을 껴안고 있을 것이냐.

과연 우리가 여리고에 있는지 벧엘에 있는지 스스로를 점검하고 확증하는 삶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한 신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한 남자가 사창가를 찾을 때, 그것은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만나기까지 그 무엇으로도 만족되지 않는 결핍이 인간의 내면에 있다는 말입니다.

한 여자가 쇼핑가방을 주렁주렁 들고 현관문을 열 때, 그것은 하나님을 찾고 있는 것이다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인간의 나쁜 근원은 계속 나쁜 독을 불러들이고, 평생을 불사르지만 그 인생에 생명의 열매는 없습니다.

우리 영혼과 삶의 근원에 예수님을 모시면 어떤 인생이든 고치시고 세상에서 얻지 못했던 풍요와 보람을 주실 것입니다.

열매가 열리지 못하고 속절없이 떨어져 버리던 가난한 인생에 예수님은 새로운 소망과 새생명을 잉태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구하며 그 앞으로 나가는 자마다 치유하고 고쳐서 생명길로 인도하시는 온 세상 모든 민족의 주님께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2017년9월3일 주는나의산성교회 주일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