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ojHKQHgLFdg&t=733s
지난 주는 이태원발 코로나 집단감염 소식에 코로나 망령이 되살아난 것 같이 불안한 한 주였습니다.
세계보건기구는 코로나19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지 모른다고 발표했죠.
해법은 백신 밖에 없는데 실용화되기까지 버틸 수밖에 없다고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그때까지는 확진자가 줄어들면 생활방역으로 돌렸다가 많아지면 다시 방역을 강화하기를 반복할 수 밖에 없다고 합니다.
코로나사태 이후 세계인의 삶을 전문가들은 다양하게 전망합니다.
분명한 것은 예전과는 달라질 거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불안하게 다가오는 미래를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오늘 말씀이 예측불가의 앞날을 살아가는 우리와 우리 가정에 주시는 복된 말씀이 되리라 믿습니다.
1. 본문 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대의 배경을 좀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솔로몬왕 이후에 우리나라처럼 남북으로 갈리게 되죠.
열왕기서는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왕들의 통치시대를 쭉 기록한 역사서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북이스라엘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탈무드 전승에 의하면 예레미야선지자가 이 열왕기서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경 속에서는 저자의 이름이 명확히 나오지 않습니다.
열왕기 저자는 어떤 왕이 하나님을 잘 섬겼는지 어떤 왕이 우상숭배를 했는지에 중점을 두고 역사를 기록합니다.
전쟁의 승리나 왕의 업적, 나라가 부강하고 평안했는지도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왕의 신앙과 직결되어 있다는 것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역사서에서 그런 것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또 그 사이에 엘리야나 엘리사처럼 하나님이 보내시는 선지자들이 나옵니다.
선지자들은 다 왕을 상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합니다.
하나님이 역사에 개입하고 계심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러면 이 수넴여인 같은 개인의 이야기는 왜 역사서에 기록해서 전하게 하셨을까요?
단지 아들을 낳지 못했던 여인에게 아들을 주셨다는 기적의 하나님을 보여주시려는 건 아니시겠죠.
하나님께 아들을 낳게 해 주시는 게 무슨 기적이나 됩니까?
당연한 능력이시죠.
오늘 본문이 포함 된 열왕기란 성경을 잘 이해하면 정답이 나옵니다.
이 열왕기하의 마지막은 남유다가 바벨론에 멸망해서 다 포로로 잡혀갔다는 이야기로 끝납니다.
북이스라엘은 열왕기하 19장에서 진작 앗수르에 멸망하죠.
이 열왕기 역사서는 나라가 다 망한 다음에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망하고 나서 왜 역사를 기록하겠습니까?
망한 역사를 보고 배우라는 것이죠.
다시는 이렇게 살지 말고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라는 것입니다.
이미 망했는데 이제 와서 그런 건 아무 소용없는 것 아닌가요?그렇지 않습니다.
이때 이미 예레미야선지자는 포로생활 70년이 지나면 다시 고국으로 돌아와 나라를 회복시켜 주실 것을 예언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뼈저린 역사를 통해 잘 배워야 그나마 미래에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삶이 실패할 때라면 이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신앙의 암흑기에 독보적으로 하나님을 믿었던 수넴여인을 소개합니다.
꽤 길게 이어지는 이 수넴여인의 이야기를 잘 읽어보면 ‘이것은 단지 한 가정이 축복받는 이야기가 아니네’ 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라면 수넴여인의 기사에서 금방 메시지를 볼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수넴여인은 남편의 나이로 볼 때 절대 불가능한 상황에서 아들을 얻죠?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손을 통해 축복의 땅을 대대로 누리는 것을 하나님의 구원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구약성경 시대엔 부활과 영생에 대한 진리가 아직 희미하게 드러납니다.
신약시대에 와서도 사두개파 사람들은 죽음 뒤에 부활이란 건 없다고 믿잖아요?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알고 있는 이 진리들은 예수님의 대속 과정을 통해서 완벽하게 밝혀진 것입니다.
수넴여인이 하나님을 잘 섬김으로 아들을 받은 이야기는 다른 말로 구원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수넴여인의 이야기는 포로가 된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수넴 여인 같았다면 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을 하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누구같이 살라는 것입니까?
수넴여인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라는 것이죠.
열왕기서를 읽어보면 사실 수넴여인 같은 꼿꼿한 믿음을 만나보기 힘듭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말씀을 듣는 우리에게는 뭐라고 하시는 것이죠?
수넴 여인처럼 신실한 믿음으로 살면 수넴 여인이 얻은 복을 얻을 거라는 말씀이죠.
요즘 뉴스를 보면 세계가 돌아가고 있는 모습이 정말 예전과 다릅니다.
국가를 아예 봉쇄하고 회사 문을 걸어 잠근 일들이 현실 같지가 않습니다.
비행기가 뜨지 않은지 몇 달이 된 공항들이 너무 이상하지 않습니까?
미국인들은 빈곤층의 40%가 일자리를 잃었다고 하죠.
이전처럼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그때가 언제일지, 우리 집은 문제가 없을지 막연한 불안감이 듭니다.
시국이 불안해서 믿음에 집중하지 못한다면 불안은 현실이 될지 모릅니다.
앞으로는 신앙생활의 여건도 어려워지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교회사에서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꽃 길이었던 적은 없습니다.
수넴여인의 시대도 우리시대 못지 않았습니다.
본문 앞뒤에는 끊이지 않는 전쟁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는 전쟁 통에 살고 있지는 않잖아요?또 엘리야시대에 삼년 반의 큰 가뭄이 있었고 수넴여인 시대에도 칠년의 긴 가뭄이 옵니다.
수넴여인 시대엔 수많은 사람들이 가난에 시달리고 가뭄에 굶어 죽었습니다.
사회 전체가 굶주린 중에 자기만 배불리며 좋을 수는 없는 것이죠.
우리는 생존을 위협하는 식량부족과는 거리가 먼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아무리 힘들다 해도 다들 먹을 게 너무 많아서 다이어트가 더 힘들죠.
또 이 시대는 영적으로 어두운 시대였습니다.
북쪽 이스라엘사람들은 남쪽 유다에 있는 성전에서 예배하지 못했습니다.
대신 북이스라엘이 갈라지면서부터 만들었던 금송아지 우상과 바알을 숭배해 오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영적으로 혼탁한 사회 속에서 외롭게 하나님을 섬기는 게 쉽겠습니까?
우리는 성령님의 조명 아래서 얼마나 확실한 것을 믿고 있습니까?믿음의 동역자는 또 얼마나 많구요?
수넴여인은 우리 이상으로 결핍되고 불안한 환경 속에서 어떻게 살았기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이 귀히 여기시는 구원받은 성도의 표본이 되었을까요?
이를 통해 우리의 믿음도 점검하며 교훈을 얻고 잘 지켜서 우리 가정들이 다 복되길 소망합니다.
2. 수넴여인은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선지자를 섬겼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곧 사람을 섬기는 것입니다.
8절, 하루는 엘리사가 수넴에 이르렀더니 거기에 한 귀한 여인이 그를 간권하여 음식을 먹게 하였으므로 엘리사가 그 곳을 지날 때마다 음식을 먹으러 그리로 들어갔더라
여기서 저자는 수넴여인을 ‘귀한 여인’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귀하다는 말 안에는 명성, 부, 명예, 권력, 위대함 같은 뜻이 들어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 ‘귀한’ 이란 단어는 모세와 아브라함 같은 큰 인물들에게 붙였던 수식어입니다.
여인에게 이런 수식어를 붙였다는 것은 단지 재산이 많은 부자 여인이란 뜻이 아닌 것이죠.
하나님은 경건한 성도들을 아브라함과 모세와 동일하게 귀하게 여기신다는 말씀입니다.
시편 16장3절에서도 말씀하죠.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수넴여인은 단순하 부자 여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귀하게 여기는 성도였습니다.
그리고 그 삶을 통해 그것이 증명된 것입니다.
23절을 보면 여인이 정기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 예배의 진실함이 섬김이라는 행위로 나타나는 것이죠.
우리가 진정으로 예배했다면 그 다음은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정에서 당연히 성도인 가족이 먼저 섬겨야 맞는 것입니다.
여인은 엘리사를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엘리사가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9절, 항상 우리를 지나가는 이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인 줄을 내가 아노니
그의 어깨에 나라의 운명이 얹혀져진 것을 알았던 것이죠.
참된 성도들은 하나님의 일에 헌신합니다.
엘리사선지자는 갈멜산에 본거지를 두고 있었고 수넴을 지나 다른 지역을 오가며 사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마을을 지나쳐 가는 엘리사를 위해 여인은 때마다 식사를 대접했던 것입니다.
9절에 보면 거기서 끝난 게 아니죠.
남편과 의논해서 아예 엘리사가 묵을 수 있도록 방을 들여 줍니다.
노정에 피곤을 풀며 쉬어가도록 필요한 것들을 잘 갖춘 방을 마련해 줍니다.
남을 위해 거처할 곳을 따로 마련해 주고 생활을 지원해 주는 것은 잘 사는 지금 시대에도 절대 쉽지 않습니다.
본문 다음에 보면 엘리사와 학생들은 정말 궁하게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난을 짊어진 사람을 가까이 한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부담이 됩니다.
도와줘야 하잖아요?
엘리사와 제자들에게 정성껏 식사 대접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은데 수넴여인은 하나님의 일에 점점 더 자신을 내어 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이 대개 이렇죠.
저렇게 까지 하나 싶게 그들은 계산하지 않고 점점 더 헌신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아무리 최선을 다해서 최대의 헌신을 하고도 내가 받은 은혜에 비하면 이것도 부족하다고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점점 많이 주님께 헌신한다고 나중에 남는 게 없을까봐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많이 헌신해서 망하는 사람은 못 봤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자기만 누릴 때 오히려 점점 삶이 팍팍해 지는 건 많이 보았습니다.
내가 피해도 될 일을 자진해서 지고 있다면 우리 믿음은 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크던 작던 성도들이 다 같이 짐을 지고 움직일 때 교회는 서로에게 축복이 됩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감내하는, 귀찮고 고된 일들은 결과적으로 가장 큰 축복이 될 것입니다.
만일 이 여인이 집 앞을 지나다니는 지친 엘리사를 보고 슬그머니 문을 닫았다면 앞으로 그 인생에 일어날 하나님의 큰 축복도 없었을 것입니다.
3.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움직이는 여인을 위해 하나님도 움직이십니다.
여인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게 있었습니다.
아들이 없었습니다.
아들이라고 했지만 아마 자식이 없었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춰진 가정은 없을 것입니다.
모든 가정에는 다 결핍된 게 있습니다.
만일 지금 모든 게 채워진 가정이라도 한때는 결핍으로 인해 애태우던 때가 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생활에 부족함이 없을 때 영적인 결핍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을 하나님은 아십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부자 라오디게아교회가 그랬다가 예수님께 책망을 받잖아요?
너는 스스로 부요하다며.. 가난하고 헐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그걸 염려하시기에 한 가정에 모든 것을 다 주지 않으십니다.
또 주셨던 것을 세상에서 뺏기고 잃어버릴 때 그것을 허용하기도 하십니다.
결핍이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돈이 없어서 하나님 앞에 나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누군가는 건강의 문제로 하나님께 나갔고 그 불안감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멀어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누군가는 되는 일이 없어서 하나님 앞에 때를 썼을지 모릅니다.
어떤 결핍이 매일 하나님 앞을 찾게 만들고 그것은 결국 가장 귀중한 믿음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는 것이죠.
수넴여인에게 자식이 없는 것은 가장 큰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요즘 같이 결혼도 선택이고 자식도 선택인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와 같이 수넴여인도 자식을 얻기 위해 하나님 앞에 매일 애절하게 간절한 마음으로 호소했을 것입니다.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하나님 앞에서 애통하는 자가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결핍을 느끼지 못할 때가 가장 위태한 때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상의 가장 큰 타락은 모든 것이 완벽했던 에덴동산에서 일어났습니다.
너무 부족한 게 많고 너무 결핍되었다면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 앞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님 앞에 나오는 자녀들을 절대 빈손으로 보내지 않으신다는 게 저의 믿음입니다.
수넴 여인의 세심한 배려로 사역의 위로를 얻은 엘리사는 무엇이든 도와줄 마음이 생겼습니다.
사람을 감동시키지 못하면 하나님을 감동시키지 못합니다.
사람을 감동시키셨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도 감동 되셔서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엘리사는 여인을 불러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를 물어 봅니다.
13절을 보면 내가 너를 위하여 무엇을 하랴 왕에게나 사령관에게 무슨 구할 것이 있느냐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가 무얼 더 해줄까’ 이러면 끝나는 것입니다.
엘리사가 왕이든 사령관이든 다리를 놔 줄 테니 다 부탁하라고 하잖아요?
이때는 이미 엘리사선지자가 군사적으로도 이스라엘의 최고 지휘권자나 다름이 없었을 때입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엘리사가 하나님께 받은 응답대로 움직였습니다.
가족 중 공직이 필요하다면 힘을 써 줄 테고 사업상 도움이 필요하다면 줄을 대주겠다는 것입니다.
이걸 보면 수넴여인의 가문이 이미 고위관직에도 손색없는 집안이었다는 걸 알 수 있죠.
하나님은 성도들이 외적으로 어떤 처지에 살아가든 세상 어디에도 손색없는 존귀한 자녀로 만들어 놓으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런 엘리사의 제안을 수넴여인은 정중하게 거절을 합니다.
그런데 그 말이 좀 특이합니다.
13절 후반, 여인이 이르되 나는 내 백성 중에 거주하나이다 하니라
‘나는 그런 권력에는 마음이 없습니다. 지금 내 고향 사람들과 더불어 만족하게 살고 있습니다’ 이런 뜻이겠죠.
특히 수넴여인이 ‘내 백성’이라고 한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 백성’이라는 말은 왕이 자기 백성을 말할 때나 하는 말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해 내 백성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수넴여인이 그가 지금 어울려 살고 있는 사람들을 남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곧 자기의 백성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책임지고 함께 가야 할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그렇잖아요?
결국 우리가 영원히 함께 할 사람들은 혈연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서 맺어진 하늘의 가족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혈연적 가족들이 반드시 믿음의 가족도 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비록 혈연적 가족은 아닐지라도 교회 안의 성도들이 피차 가족이라는 인식을 갖게 하십니다.
그렇기에 고통당하는 성도가 있으면 함께 아파하고 허리가 휘어지게 무거운 짐을 지고 있으면 좀 같이 지자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성도님들이 서로 어깨를 토닥여 주고, 반찬이나 작은 선물들을 챙겨주고, 때로는 슬쩍 봉투를 건네는 모습들을 자주 봅니다.
남이 아니라 똑같은 하나님의 백성, 내 백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수넴여인은 화려한 세상무대에 나서기 보다 내 백성 중에서 그들을 섬기며 그들과 함께 거하겠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주목을 받는 대단한 사람이라는 인식은 믿음이 성숙할수록 의식 못할 정도로 희미해집니다.
수넴여인의 정중한 거절에 엘리사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그래서 사환을 시켜 여인에게 무엇이 필요하겠는지를 다시 물어 봅니다.
그때에야 엘리사는 여인에게 아들이 없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엘리사는 수넴여인의 딱한 처지를 듣고 일 년 뒤에 아들을 안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수넴여인이 아들을 얻게 된 것은 엘리사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인의 믿음에 대해 주시는 구원이자 보상입니다.
그런데 이 기품 있고 당당했던 여인이 이 말에 무너지는 것을 보십시오.
16절, 엘리사가 이르되 한 해가 지나 이 때쯤에 네가 아들을 안으리라 하니 여인이 이르되 아니로소이다 내 주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의 계집종을 속이지 마옵소서 하니라
얼마나 많이 기다리고 기대했다 실망하기를 계속 해 왔겠습니까?
이제 와서 또 헛된 기대를 했다 그동안 눌러 놓았던 아픈 상처를 다시 건드릴까 두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수넴여인은 결국 아들을 안게 되었습니다.
우리 안에도 이렇게 마음이 무너져 내린 아픔들, 꼭 얻어야 할 간절한 응답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 수넴 여인처럼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에게도 수넴 여인처럼 바라는 것을 안겨주시길 축복드립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역사를 알아야 현재를 잘 살 수 있고 역사를 통해서 배우는 것입니다.
역사는 그 중심에 살던 당대 사람들은 그 의미를 이해 못할 때가 많습니다.
지나고 나서야 보이죠.
지나고 나니까 ‘아 수넴여인과 엘리사의 이야기가 바로 이것이구나’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잘 깨달으셨으리라 믿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코로나 상황에 누구든 불안감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경건하고 헌신적인 수넴 여인처럼 다만 하나님을 잘 섬기시길 간절히 권합니다.
하나님은 구원으로 응답하시고, 우리 삶에 부족한 것들을 더해 주시고 이 불안하고 어두운 사회 속에서도 복되게 살아가도록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이제 더는 필요하지 않아요, 이정도면 충분해요’ 라고 말씀드릴지라도 하나님은 ‘내가 너를 위하여 무엇을 하랴’ 그렇게 우리를 헤아려 모든 것을 안겨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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