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ewAWjp1_iME
가정의 달 5월이라 우리의 가정을 생각하는 말씀들을 좀 나누고 있습니다.
우리 가정들이 왜 행복하지 않은지 지난주에 살펴 보았죠.
선조 아담과 하와를 통해 들어온 죄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우리의 가정이 회복되어 가고 있음은 확실합니다.
그러나 회복은 저절로 되는 게 아니라 가족간의 노력과 배려가 있어야 합니다.
혼자 노력해야 한다면 배나 힘들지만 그래도 나 혼자라도 노력하고 희생하지 않는다면 가정에도 서로를 찌르는 가시와 엉겅퀴가 자랍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가정의 행복을 위해 다들 희생하며 여기까지 달려오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때때로 지쳤다, 다 내려놓고 좀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내가 행복해야 가정이 행복합니다.
한양대교수의 한 강연제목이 인상적이더군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공감하십니까?
행복한 가정을 위해서 먼저 지친 나를 회복시키고 나를 행복하게 해야 합니다.
오늘은 큰 슬럼프에 빠진 엘리야를 통해 그 교훈을 얻으려고 합니다.
1. 오늘 말씀의 시대 배경은 이스라엘이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분단되었던 때입니다.
엘리야는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있던 남유다보다 금송아지를 섬기던 북이스라엘은 더 급속히 신앙이 붕괴되고 있었습니다.
교회를 가까이 하지 않으면 거의 믿음이 붕괴됩니다.
특히 아합과 이세벨왕비 때가 북이스라엘 역사 속에 가장 큰 위기였습니다.
왕비 이세벨은 시돈의 공주입니다.
이스라엘로 시집올 때 혼수로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데려옵니다.
성경에서 가장 잔혹한 왕녀라면 이세벨을 꼽을 것입니다.
이세벨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다 죽이고 국교를 아예 바알종교로 바꾸고 있었습니다.
정말 마귀의 화신 같은 사람도 있는 것 같습니다.
남편 아합왕은 오늘 본문에서 느껴지듯이 무능한 사람입니다.
이런 시대에 하나님이 엘리야선지자를 투입하십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에 삼년 반 동안 비가 오지 않을 심판을 예언합니다.
그리고 삼년 반이 지난 뒤 아합왕에게 나타나 먼저 바알사제들과 갈멜산에서 진짜 신을 가리자는 대결을 제안합니다.
바알신과 여호와께 각각 제물을 올리고 하늘에서 불이 내려 제물을 태우는 신이 진짜 신이라는 것이죠.
이 대결에서 하나님만 불을 내리셔서 제물을 태우십니다.
엘리야는 기적에 놀란 백성들과 함께 바알사제 450명을 처단합니다.
그리고 엘리야가 산 정상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자 큰 비가 내립니다.
그 일이 있은 후 바로 오늘 본문으로 넘어옵니다.
이 큰 기적 뒤에 나라는 어떻게 변했을까요?
변한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1절을 보면 아합이 갈멜산에서 있었던 일을 아내에게 일러 바칩니다.
그러자 이세벨이 노기가 등등해서 엘리야에게 사신을 보내죠.
2절,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왕궁에서 양성한 바알사제들이 다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악에 바친 이세벨이 내일 엘리야를 처형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들을 다 죽였던 이세벨이라면 그것은 빈말이 아닐 것입니다.
당장 잡아가지 않고 죽일 시간을 내일 이맘때로 통보합니다.
엘리야의 피를 말리려는 잔인한 왕녀의 소름 끼치는 복수극을 예고한 것이죠.
이 말에 엘리야가 어떻게 합니까?
3절,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엘리야는 자기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도망칩니다.
엘리야가 도망 온 브엘세바는 남유다의 최남단에 있습니다.
갈 수 있는데 까지 최대한 멀리 간 것입니다.
거기에 자기 사환을 남겨두고 혼자 하루를 걸어서 광야로 더 들어갑니다.
좌절에 빠진 초라한 내 모습을 남에게 보이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자식들 앞에서, 가족들 앞에서도 내가 무너지는 모습 보이기가 싫어서 우리는 버티지만 정말 아무도 없는 데 가서 울고 싶을 때가 있죠.
그럴 수조차 없다면 불현듯 눈물이 주루룩 흘러내리기도 합니다.
잠언 14장13절에서는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다고 합니다.
인생이 얼마나 힘들고 고된지 이 짧은 성경구절이 너무나 잘 드러내죠.
그렇게 엘리야는 홀로 적막한 광야에 남아 하나님께 죽음을 구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2. 오늘 구약의 선지자를 대표하는 엘리야가 이렇게 무너진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1) 몸과 마음이 지쳤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치는 이유도 문제와 싸우며 오래 버텨왔기 때문입니다.
오랜 긴장 속에 문제와 싸웠다면 성공해도 엄청난 정신적 스트레스가 남습니다.
그것을 ‘성공의 멜랑코리’라고 합니다.
성공한 뒤에도 사람이 우울감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만일 실패한다면 말할 것도 없죠.
그때는 완전 탈진하게 되는데 이것을 ‘엘리야신드롬’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탈진하고 심적으로 우울감에 빠져 있다면 오래 힘든 문제들과 싸워왔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에서도 그런 침체가 옵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사실 본성과는 긴장과 갈등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몸과 마음이 지치면 언제든 내 본성이 그만하면 됐으니 놓으라고 사인을 보낼 수가 있는 것이죠.
너무 지치게 일하지는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2) 일의 결과가 기대했던 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엘리야가 이 싸움을 시작한 것은 자기 의사가 아니였습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모든 것을 지시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아, 나를 통해 백성들이 바알신앙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시겠구나’ 생각했을 것입니다.
‘나라를 말아먹을 우상을 들여 온 저 이세벨도 쫒겨나겠지.’
그런데 결과는 Nothing,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내가 뭘 위해서 삼년 반 동안 목숨을 걸고 이 노력을 했는지 허탈한 것이죠.
우리도, 우리의 가정도 그 변하지 않는 Nothing 때문에 지쳐있습니다.
그동안 열심히 살았는데 달라진 건 없고, 미래도 이럴 것 같으면 절망이죠.
그러나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이번 일로 이스라엘이 회개할 거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엘리야가 자기 생각대로 그러리라 확신했던 것이죠.
하나님이 모르시겠습니까?
사람이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는 것을 본다고 바뀌지 않습니다.
이미 바알종교가 편하다는 걸 맛본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기적 한번 본 것으로 돌이키지 않습니다.
솔직히 불교가 믿기 편합니까, 기독교가 믿기 편합니까?
세상종교, 무신론, 그런 게 죄인들에겐 제일 편하고 좋은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 정도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예수님이 왜 대속을 통한 용서로 우리를 구원하셨겠습니까?
엘리야가 자기 기대대로 안됐기에 더 낙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기대가 크면 낙심도 크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점점 기대를 접고 소극적, 부정적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점점 기도도 안 하고 내 힘 닫는데로 살자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기도하고 기대하되, 내 뜻대로가 아니라 더 나은 하나님의 뜻대로 응답 될 것을 기대해야 합니다.
그래야 좋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뜻대로 안 되었다고 실망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싶던, ‘내 뜻’대로 안되서 실망하는 것이죠.
우리가 열심히 수고하며 기도하되 그 다음은 하나님의 뜻대로 될 것을 믿고 내 주장과 욕심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뒤에 보면 하나님은 다른 계획을 갖고 계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회개하는 이스라엘을 기대했지만 하나님은 회개하지 않을 것을 아셨습니다.
알면서도 하나님은 최선을 다해 보십니다.
그리고 다음 계획을 준비하신 것이죠.
그걸 엘리야가 알았다면 저렇게 낙담하고 죽기를 갈구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죠.
기대한 대로 되지 않아도 낙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 뜻대로 되고 내 뜻을 악착같이 관철하는 것이 다 내게 좋은 게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다 되었다면 지금 어떨까요?
지금보다 더 행복하리라는 것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성도들은 주님의 뜻을 살피고 하루하루 그 뜻에 순종하며 사는 것 자체가 영광입니다.
하나님이 영광스러우시기에 주님의 뜻 속에 우리의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이 엘리야를 회복시키시는 과정을 살펴 봅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치고 낙심된 상태에서 회복되는 열쇠입니다.
1) 우리가 회복되려면 다시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4절,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엘리야는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쳤지만 그래도 하나님께로 가서 죽기를 구합니다.
모든 것이 실패한 것 같아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으면 회복이 있습니다.
사실 인생의 무거운 짐을 실제로 해결하지 못하면 쓰러지도록 평생 고생해야 합니다.
가끔 동행이라는 프로를 보면 가난이 평생 가고 대물림까지 되잖아요?
짐을 벗고 쉼을 얻을 방법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 인생이 힘들다, 지친다 생각할수록 쉴 수있는 방법은 예수님께 나가는 것입니다.
하루 일과 중에도 정신적, 육체적으로 몰아칠 때 짧은 시간이라도 예수님께 나가면 신기하게 마음에 안식을 얻게 됩니다.
이런 말씀이 말 잔치가 아니기 위해서는 필요한 게 있습니다.
꾸준히 예수님과의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를 만들고 키워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배, 기도, 성경읽기 같은 성실한 신앙생활이 필요합니다.
이걸 꾸준히 하는 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고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제가 그런 의문이 들더군요.
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더 깊어지는 것을 못 느끼는 것일까.
그런데 그런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내가 매일 하는 기도, 말씀공부, 예배, 그런 경건생활을 꾸준히 하는 것이 바로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게 아니면 우리가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는 하나님을 무슨 방식으로 사랑하겠습니까?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고 하십니다.
소가 멍에를 걸고 일을 하는데 두 개의 멍에를 메고 일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를 지치게 하는 짐들은 내려놓고 싶어도 어쩔 수 없이 지고 가야 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것을 내려놓을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따르라고 하신 그 말씀에 점점 나를 순종하면 세상 짐을 끄는 멍에는 점점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회복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됨을 믿으시고 힘든 걸음일지라도 한걸음씩 더 주님께 가까이 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2) 엘리야는 로뎀나무 아래 앉아 죽을 궁리를 했지만 하나님은 엘리야를 재우셨습니다.
지친 내게는 육체적, 정신적인 쉼도 필요합니다.
5절,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로뎀 나무는 광야 여기저기서 듬성 듬성 자라는 나무입니다.
잎사귀가 풍성하고 그늘이 좋은 나무는 아닙니다.
그나마 사막에서 겨우 해를 가릴 정도입니다.
히브리 속담에서 ‘로뎀 나무 아래 있다’라는 말은 ‘비참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엘리야가 그 빈약한 그늘에 의지해 깊은 잠에 빠진 것입니다.
사람이 아주 힘든 일을 당할 때 잠을 자면 그래도 괜찮습니다.
잠까지 못 잘 정도가 되면 정말 심각한 병이 되죠.
엘리야가 계속 죽기를 생각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그냥 재우신 것입니다.
우리가 아주 큰 어려움을 만날 때 하나님은 때로 그 사건에 대해 우리를 감정적으로 다소 무디게 만들기도 하십니다.
감정이 과열되는 것을 쉬게 하시는 것이죠.
저도 전에 나름 중요하게 지켜오던 명예와 평판이 완전히 무너지는 힘든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평판에 되게 예민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때는 정말 이상하리만치 그게 괴롭지가 않은 거에요.
그냥 남들이 그렇게 생각해도 어쩌겠나, 하나님만 아시면 되지, 그럴 정도로 신경이 안 쓰이더군요.
나를 해명하는 데 급급했다면 아마 문제가 더 복잡해졌을 것입니다.
우리가 힘든 일을 만날 때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지만 문제 해결에 집중하려면 자존심, 연민, 두려움 같은 감정들은 좀 떼어 놓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당하기 힘든 일을 이겨내도록 그냥 푹 재우시고, 불필요한 민감함을 좀 둔하게 하시는 것 같습니다.
3) 엘리야가 잠이 든 동안 천사가 어루만지고 있었습니다.
동사의 형태로 볼 때 지속적으로 계속했다는 뜻입니다.
자는 동안 계속 천사가 엘리야의 몸과 정신을 만져서 회복시키고 있었다는 것이죠.
잠만 재우시는 게 아니라 몸과 영과 마음까지 하나님이 섬세하게 회복시키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죠.
분명히 근심과 슬픔에 잠겨 잠이 들었는데 일어나보니 왠지 견딜만한 마음이 드는 때가 참 많았습니다.
그렇게 또 하루를 견디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이런 회복의 손길이 지친 모두에게 임하시길 축복드립니다.
4) 하나님은 엘리야를 먹이십니다.
5절,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우리는 영과 마음만 있는 게 아니라 몸이 있잖아요?
몸이 지치면 사람은 영과 마음이 다 지칩니다.
하나님은 지친 우리가 회복되도록 잘 먹이십니다.
풍성한 식탁은 분명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 자신도 나를 잘 돌보길 원하십니다.
요즘 TV에 나오는 사람들도 수고한 내게 보상을 준다, 나를 위한 플렉스다, 그러면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그러더군요.
음식이 몸에 에너지만 주는 게 아니라 마음에 위안도 줍니다.
아무 것도 없는 사막에서 허기져 눈을 떴는데 머리 맡에 있는 구운 떡과 물 병은 엘리야를 기쁘게 했을 것입니다.
허겁지겁 떡을 먹고 물을 마셨을 것입니다.
음식도 우리를 회복시키고 위로하는 데 중요한 몫을 합니다.
우리교회가 예배 잘 드리고 맛있는 식사를 나누는 게 좋은 것입니다.
커피도 더 맛있게 드시라고 별다방 원두를 쓰잖아요?
영의 양식과 육의 양식으로 지친 마음을 위로 받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 주나산성도님을 여기 교회에서부터 축복해 주시길 빕니다.
올림픽 아파트에 저하고 믿음의 교제를 나누던 다른 교회 다니는 성도님이 있었습니다.
믿음이 좋고 전도에도 헌신적인 분이셨는데 안 믿는 남편과는 갈등이 많아서 좀 위태로운 가정이었습니다.
어느날 저녁에 제가 올림픽 공원에 운동을 나갔는데 바로 옆길에서 걸어 나오는 그 성도님과 딱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길에서 사람 잘 만나는 사람도 있던데 저는 길에서 아는 사람 만나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그 성도님이 저를 보는 눈빛과 표정에 덜컥 걱정이 되었습니다.
저녁에 공원엔 웬일이냐 물으니 한참을 울먹이다 하는 말이 오늘 법원에 가서 남편과 합의 이혼을 했다는 거예요.
이혼을 하고 각자 헤어져 돌아와 보니 저녁인 데, 어디로 가야할지를 모르겠다는 거예요.
갈 곳도 없는데 전남편이 있는 집으로 들어가야 하나?
이제는 그러면 안되지 않나?
어찌할 바를 몰라 공원으로 왔다고 결국 눈물을 터트리셨습니다.
너무 마음이 안타까워서 무슨 위로를 해야 할지 잘 모르겠더군요.
뭐 좀 드셨냐고 물으니까 어제부터 아무 것도 못 먹었다는 거예요.
거한 음식을 대접하기도 그렇더군요.
그때 날씨가 꽤 쌀쌀했는데, 공원 건너편에 제가 가끔 가는 멸치국수집이 생각났습니다.
간단히 국수 한그릇 드시자고 같이 가서 멸치국수를 시켰습니다.
얼마나 국수를 맛있게 드시는지 국물도 남기지 않고 그릇을 비우셨습니다.
그렇게 국수 한그릇을 다 드시고 얼굴에 좀 핏기가 돌아오더니 이런 말을 꺼내더군요.
저를 공원에서 만나는 순간 ‘하나님이 목사님을 보내셨구나, 하나님이 지금 내 슬픈 마음을 알고 위로하러 보내셨구나’ 왈칵 눈물이 났다는 거예요.
‘그래, 하나님이 다 아시니 괜찮다’, 그렇게 용기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맛있는 멸치국수 처음 먹어봤다고 힘이 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살길을 연구해 보겠다며 이제는 전남편이 된 남편의 집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하나님이 그날 저를 보내셔서 사랑하는 딸이 비참에 빠지지 않도록 위로하셨습니다.
엘리야에게 천사를 보내셨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람을 보내십니다.
뭐라도 좀 먹었어?
반찬통을 내놓으며 손에 수저를 쥐어 주는 사람들, 근심 어린 눈으로 지켜봐 주는 사람들을 하나님은 우리 곁에 보내주십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마음이고 하나님의 위로와 만져주심입니다.
가족들이 서로에게 그렇게 하고 성도들이 서로에게 그렇게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 지치고 낙심한 마음을 하나님께서 이모저모로 만져주시고 회복시켜 주시길 축복드립니다.
5) 그리고 엘리야가 낙담했던 문제에 해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도 이렇게 앞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면 낙심에서 일어설 수 있을 것입니다.
떡과 물을 먹고 다시 잠이 든 엘리야를 천사가 또 다시 어루만지며 깨웁니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서 먹으라고 합니다.
7절,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지치고 낙심한 우리를 하나님은 낙오시키지 않으십니다.
알아서 따라오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네가 갈 길이 멀고 해야 할 일이 아직 많다고 하십니다.
떡 먹고 물 마시고 다시 나와 함께 가자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곳은 모세가 하나님께 십계명을 받았던 시내산, 다른 말로 호렙산입니다.
8절,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정교하게 인도하시는 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스스로 두렵고 낙담한 마음에 이세벨의 손이 닿지 않는 최남단까지 도망을 온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더 아래로 내려오면 호렙산입니다.
엘리야가 도망가려 생각할 때 하나님의 인도가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가 당면한 여러 가지 문제들을 내가 벌인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조차도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우리의 모든 인생 안에 이미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결정을 잘못하고, 내가 선택을 잘못해서 지금 이런 어려움에 빠졌다 할지라도 이미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함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잘못한 게 없는데도 나와 우리 집에 덮친 불우한 일들 가운데도 이미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개입되고 있습니다.
가정, 노후, 장래, 결혼, 그런 것들이 내가 기대하는 대로 되고 있지 않다고 해서 낙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뒷 부분을 읽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은 이미 차후의 모든 일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우리 인생의 내일도 그렇게 하나님이 준비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많이들 지치셨죠?
그래도 위로받을 곳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지치게 하는 문제의 해답도 하나님께 있습니다.
또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 지친 우리를 위로하신다는 것을 알고 우리가 가족과 이웃간에 서로 위로하는 손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낙심하지 말 것은 과연 어떤 것이 정말 나를 행복하게 하는지 하나님만 아시고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주님을 믿고 모든 짐을 주님께 맡기고 주님이 주신 멍에를 메고 배우며 안식을 얻으시길 축복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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