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우리 학창시절에 좋아했던 시인 중 한 분이 김남0 시인입니다.
며칠 전 뉴스에 보니 아흔 살이 되셔서 정지용문학상을 수상했다고 합니다.
수상작이 ‘시계’라는 시 인데 한 부분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대의 나이 90이라고 시계가 말한다/알고 있어, 내가 대답한다/
시계가 나에게 묻는다 그대의 소망은 무엇인가/내가 대답한다/
내면에서 꽃피는 자아와 최선을 다하는 분발이라고/
그러나 잠시 후 나의 대답을 수정한다/사랑과 재물과 오래 사는 일이라고/
아름다운 시를 지으며 부단히 삶의 의미를 밝히고자 했지만 아흔 노령에 남은 것은 사랑과 재물과 오래 살고 싶은 욕망이고 합니다.
모두에게 감추고 싶은 욕망을 숨기지 않고 노래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시인이 진솔하게 인생을 파헤치며 살았다는 뜻일 것입니다.
사랑과 재물과 오래 사는 일.
노시인의 바램이 우리 모두의 본성적인 바램이겠죠.
사랑하는 사람들과 부를 누리며 오래 사는 것.
오늘 본문은 누구나 공감하는 이 상식을 가차 없이 깨뜨리는 나봇이라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살면서 절대로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이 오늘 본문의 사건일 것입니다.
한 때 나봇은 아름다운 포도원을 가꾸며 가족들과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어느날 갑자기 그 일이 일어났습니다.
시대는 북왕조 이스라엘의 아합왕 때입니다.
남왕조 유다는 다윗의 뒤를 이어 후손들이 왕위를 이어갔지만 북이스라엘은 쿠데타를 통해 악한 왕들이 정권을 이어갔습니다.
그 중 아합은 특히 손꼽히는 나쁜 왕입니다.
아합은 수도인 사마리아 뿐 아니라 이스르엘이란 지방에도 왕궁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왕궁 가까이에 나봇의 아름다운 그 포도원이 있었습니다.
아합은 그 포도원이 탐이 났습니다.
예쁜 정원도 꾸미고 싱싱한 채소도 심고 싶었습니다.
아합은 목축과 농사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포도원 주인인 나봇을 불러 땅을 넘길 것을 제안합니다.
그 댓가로 더 아름다운 포도원을 주겠다, 그걸 원치 않으면 돈으로 주겠다.
누가봐도 합리적인 거래가 성사 될 상황입니다.
아합이 무척 신사적인 것 같이 보이지만 이 거래는 부당거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땅 거래는 율법으로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봇은 조상의 유산을 왕에게 주는 것은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일이라며 매매를 거절합니다.
아합은 나봇의 거절에 화가 나고 낙심했지만 율법에 금지된 일이기에 어쩔 수 없는지라 식음을 전폐하고 침상에 누워버립니다.
이때 왕비 이세벨이 해결사로 등장합니다.
이세벨은 바알을 섬기던 시돈이라는 나라의 왕 엣바알의 딸입니다.
이세벨은 이스라엘로 시집올 때 바알신과 아세라신을 혼수로 가져옵니다.
그렇잖아도 금송아지 우상을 섬기는 변질된 신앙에서 출발한 북이스라엘은 바알과 아세라까지 들어와 급속히 몰락합니다.
이세벨은 북이스라엘에 있는 하나님의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을 다 잡아 죽이고 바알과 아세라 제사장 칠백오십명을 양성해 국민들을 우상숭배에 몰아넣습니다.
엘리야와 이 바알 제사장들이 갈멜산에서 세기의 대결을 벌이죠.
엘리야의 승리로 바알제사장들을 다 처단하자,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벼르던 여인이 이세벨입니다.
엘리야도 무서워 광야로 도망쳤을 정도로 잔혹한 피의 여인입니다.
왕의 권력으로 포도원 하나를 뺏지 못하고 앓아 누운 남편의 처신에 실소를 할 수 밖에요.
이세벨은 본문에서 읽은 대로 거짓 증인을 세워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했다고 모함해 죽인 뒤 아합에게 나봇의 포도원을 선사합니다.
본문은 나봇의 죽음만을 말하지만 뒤에 보면 아들들도 함께 죽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의 부당함에 맞서다 같이 죽은 것 같습니다.
그 땅의 상속자들이니 당연히 죽였겠죠.
권력에 의해 약자가 억울하게 큰 해를 당하는 일은 세상에서 흔한 일입니다.
그런 상황을 일컬어 ‘나봇의 포도원’이라고 합니다.
사드문제로 약소국인 우리나라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당하는 억울한 일들이 바로 ‘나봇의 포도원’ 입니다.
대기업의 횡포에 우는 하청업체들도 ‘나봇의 포도원’입니다.
우리는 이 나봇의 포도원 사건을 읽으며 뭔가 석연찮고 씁쓸한 뒷맛을 느낍니다.
나봇의 죽음은 단지 세상 권력의 희생양에 대한 이야기인가?
조상의 유산인 땅을 지키겠다고 죽은 나봇은 바람이 불면 누울 줄 모르고 원리원칙만 고수하다 죽은 꽉 막힌 인물은 아닌가?
그래도 하나님의 법대로 살려는 나봇이 악한 이세벨에게 죽는 것을 왜 하나님은 방관하시는가?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무엇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려는 것일까?
이런 질문을 갖고 본문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나봇은 죽음으로 내몰리며까지 포도원을 지키려고 했냐는 문제입니다.
그까짓 포도원이 뭐길래요?
아합이 더 좋은 포도원을 준다고 하잖아요?
충청도 산골 땅을 내주면 분당에 있는 땅을 준다는 데 거절하시겠습니까?
이런 제안을 받으셨다면 어떻게 하셨겠어요?
주일에 근무하면 특근 수당을 열배로 주겠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나봇이 왕의 명령과 현실적인 이득을 앞에 두고 너무 융통성 없이 굴다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조상이 물려 준 땅을 지키는 것은 괜한 옹고집이 아닙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제비뽑기를 통해 지파와 개인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하셨습니다.
그리고 절대로 땅을 남에게 넘기지 말라고 레위기25장23절에서 명령하셨습니다.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땅을 매매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땅의 주인임을 망각한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가나안땅은 장차 하나님이 주셔서 누리게 하실 천국시민의 영원한 기업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구약시대 성령이 오시지 않았기에 천국을 설명해도 모릅니다.
지금도 성령받은 사람만 천국이 현실임을 알잖아요.
실존하지만 지금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현재 경작하고 추수하며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땅을 통해 가르치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땅의 풍성한 수확, 기름진 삶을 천국의 삶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영생을 어떻게 가르쳐주시겠습니까?
그 땅에서 후손 대대로 이어지는 삶은 영생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나안땅에서 자손이 끊기는 것은 심판의 저주를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구약성경에서 여러 번 실례를 통해 밝힙니다.
가나안 땅을 벗어나는 자는 하나님의 영토를 벗어나는 것이고, 하나님의 백성의 자격을 잃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땅을 잃으면 구원도 잃습니다.
나봇시대에 모든 사람들은 그 명령을 버리고 모든 사람들이 바알을 섬겼습니다.
엘리야가 하소연하잖아요, 모든 사람이 주를 버리고 나만 남았다고.
그때 하나님께서 내가 바알에게 꿇지 않은 칠천명을 남겼다고 말씀하시죠.
나봇이 칠천명 중의 한 사람인 것입니다.
나봇은 뼛속까지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만난 사람들은 최고의 자존감을 가지게 됩니다.
그것은 교만과 다릅니다.
남태평양 연안에 있는 한 섬에 동네사람들에게 칭찬받는 조니 링고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실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그 나라엔 결혼할 아내를 데려올 때 장인 될 사람에게 소를 바쳐야 합니다.
소 값이 워낙 비싸니까 몇 마리의 소를 바치느냐에 따라 신부의 가치가 평가 됩니다.
그런데 조니 링고가 장인에게 바친 소는 여덟마리나 되었습니다.
그 마을 역사상 최고의 지참금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 술렁인 것은 신랑이 데려오겠다는 신부가 특별난 데가 전혀 없는 평범하고 소심한 여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장인이 사위에게 바가지를 씌웠다고 조롱했습니다.
몇 개월 뒤 한 방문객이 그 섬에 왔다가 마을에서 회자되는 여덟마리 소를 주고 얻은 평범한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호기심이 생겨 부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부부를 만나 본 방문객은 깜짝 놀랐습니다.
조니 링고의 부인은 결코 평범하지도 않았고 소심하지도 않았습니다.
마을에서 최고라고 할 만큼 아름답고 우아하고 자신만만한 여인이었습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마을 여인들 중 최고의 지참금에 시집 온 자신의 가치를 깨달은 여인이 거기에 따른 자존감으로 인해 변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대우 받는 것에 따라 자존감의 정도가 달라지지 않습니까?
연애할 때 왜 예뻐집니까?
적어도 이 사람에게는 내가 최고의 존재라는 데서 자존감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지를 알 때 자존감이 생깁니다.
그걸 지켜내려는 것이 자존심입니다.
그 자존심은 내게 자존감을 준 상대의 자존심과 같은 것입니다.
자신을 소 여덞마리나 주고 데려온 남편의 자존심을 세워주려는 생각이 스스로를 거기에 걸맞은 존재로 가꿔가게 하는 것이죠.
우리를 신부로 맞이하기 위해 예수님은 소 몇 마리를 지불하셨습니까?
우리 안에 깊이 뿌리박혀 우리를 끊임없이 더럽게 하는 그 죄를 깨끗이 씻기고 순결한 신부로 맞으시기 위해 예수님은 소 몇 마리가 아닌 자신의 목숨을 주셨습니다.
이 사랑을 믿게 된 사람들은 얼마나 자기가 귀한 존재인지 진정한 자존감이 생깁니다.
그 믿음을 지켜내려는 것이 성도의 자존심입니다.
또 그 하나님의 자존심을 지켜드리기 위해 세상과 타협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봇의 포도원 사건은 약자가 재수 없이 권력자를 만난 사건이 아닙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백성인 나봇의 자존심 싸움인 것입니다.
나봇의 자존심과 아합의 자존심의 차이를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발견합니다.
아합은 나봇의 거절에 자존심이 상해 근심하고 답답하여 밥도 먹지 않고 드러 누워버립니다.
자신을 거절 당한 것에 대해 상처받고, 내 자존감을 채워주지 못하는 환경과 처지에 자존심이 상하며 사람들은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신앙의 자존심으로 삽니다.
나를 위해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을 최고로 섬기고, 자녀에 걸맞게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자존심입니다.
기껏해야 돈 몇 푼에, 사람들의 압박에 신앙을 팔아버린다면 그런 나를 위해 목숨을 걸고 사랑하신 예수님은 뭐가 되십니까?
나봇은 아합이 헌신짝처럼 버렸던 그 하나님이 당신의 명령보다 더 높다는 것을 죽음으로써 당당히 증명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까지 하나님을 위할 필요가 있냐고 할지 모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한 각자의 헌신과 희생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아직 어린 신앙의 작은 헌신도 기쁘게 받으시고, 나봇의 헌신도 기쁘게 받으십니다.
하나님을 위한 사랑과 헌신의 정도는 각자의 선택이고 장차 각자가 누리게 될 상급입니다.
세상의 배후에서 사탄은 교활하게 신자들의 자존심에 도전합니다.
돈의 유혹에, 잠시의 쾌락에, 세속적인 인간관계에 넘어가 사람들은 신앙의 자존심을 버립니다.
유승0 바른정당 대표가 대구선대위 해단식에서 한 말이 저는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우리 자신을 헐값에 팔아버리면 미래는 없다"
하나님이 아합을 어떻게 평가하셨는지 20절은 기록합니다.
네가 네 자신을 팔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또 25절에도 반복해서 말씀합니다.
예로부터 아합과 같이 그 자신을 팔아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한 자가 없음은 그를 그의 아내 이세벨이 충동하였음이라
세상이 우리를 충동하고 믿음보다 더 나은게 있다고 속이고 충동할 때 자신을 팔지 않고, 끝까지 신앙의 자존심을 지켜나가는 모두가 되길 간절히 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이런 나봇을 죽음에서 구해주지 않으셨습니까?
우리가 원하는 결말은 무엇입니까?
‘나봇이 불리한 판결을 받는 순간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 가짜 증인들을 죽이고 모든 사람들이 나봇을 받들게 되었더라’ 이런 것이죠.
‘그 뒤 하나님이 아합과 이세벨을 죽이시고 그 화려한 궁전을 나봇에게 주었더라’ 라면 더욱 좋구요.
이래야 성도를 사랑하고 원수를 갚아 주시는 하나님의 양식에 맞는 것이지 어쩜 이렇게 돌에 맞아 허무하게 죽게 만드십니까?
나봇이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아합에게 조상의 유산을 팔아 넘겼으면 살수 있었겠죠.
그러나 어차피 나봇은 죽었을 것입니다.
다만 아합에게 받은 더 좋은 포도원에서 더 많은 포도를 수확해서 호의호식하고 살다 죽었겠죠.
아니면 포도주를 너무 많이 마셔 간이 나빠져서 일찍 죽었을지도요.
우리가 보기에 나쁜 놈들의 돌에 맞아 죽는 나봇이 참혹하고 끔찍한 죽음이라고 생각하지만 누구든 죽습니다.
돌에 맞아 죽는 거나 지진이 나서 건물더미에 깔려 죽는 거나 다를 게 뭐 있겠습니까?
이렇게 죽든 저렇게 죽든 사람은 죽잖아요?
암으로 투병하며 수년간을 고통당하든, 교통사고로 죽든, 노환으로 오래 병석을 지키다 죽든 어차피 사람의 종국은 죽음입니다.
지난 주 제가 이비인후과를 갔는데 40대 젊은 의사인데 약간 고개를 떨더군요.
의사라 할지라도 죽음의 그늘에 살 수 밖에 없는 것이죠.
험난한 산을 정복하는 산악인들은 그들이 그렇게 좋아하던 산에서 조난당해 죽더군요.
자기가 좋아서 늘 가는 곳에서, 늘 하던 일들로 사람은 죽습니다.
술을 좋아하고, 담배를 끊지 못하다 거기서 생긴 병으로 죽잖아요?
나봇의 죽음은 얼마나 아름다운 죽음입니까?
나봇이 아합왕의 제안을 거절할 땐, 바보가 아닌 이상 그 말이 쉽게 나왔겠습니까?
악명 높은 왕의 제안을 거절할 때 나봇은 죽음도 각오하지 않았겠습니까?
나봇이 그만한 믿음이 없었다면 당연히 아합과 타협했을 것입니다.
나봇의 이 고귀한 선택에 하나님이 그 영광스런 기회를 왜 가로막으시겠습니까?
다만 하나님은 나봇이 돌에 맞아 죽어갈 때 한순간도 거기서 눈을 떼지 않으셨습니다.
열왕기하9장26절에 보면 선지자를 시켜 아합과 그 가문의 멸망을 경고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어제 나봇의 피와 그의 아들들의 피를 분명히 보았노라
하나님이 이들의 죽음의 순간과 그 피를 분명히 보셨다고 말씀합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순간 예수님께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앉아 계시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서 그를 맞으시던 그 모습이 연상되지 않습니까?
그 하나님께서 나봇과 그의 아들들을 맞으시고 가나안땅보다 더 완전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뜰에 거하도록 허락하신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보고 히브리서는 말씀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중략)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중략)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현실이 불편하고, 가진 것이 없고, 여전히 하루하루 견뎌야 하지만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바닷물 만큼이나 넘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당장은 어찌되었든 앞으로 내게 베푸실 은혜가 더 클 것이라는 것이 의심 없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하는 게 이뤄져도 감사하고 늦으면 기다립니다.
지금 받지 못하고 누리지 못한 것은 미래의 어느날을 위해 저축해 둔 것을 알기에 낙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며 받는 모든 고난이라면 복이 있다고 성경은 가르쳐주십니다.
그리고 성도들의 모든 고난 중에 하나님은 반드시 함께 하고 계십니다.
나봇이 돌에 맞아 죽을 때, 하나님은 분명히 그를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나봇의 죽음으로 하나님은 중대한 결심을 하십니다.
아합왕가를 멸망시키고 이세벨을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십니다.
이전에 아합의 죄악에 대해 하나님은 이미 그의 죽음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러나 나봇과 그 아들들의 죽음을 통해 아합 뿐 아니라 자식들까지 모조리 죽일 것을 정하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서 영구제명 시키신 것입니다.
악랄한 우상의 여인 이세벨은 죽어서 그 시체가 나봇이 피흘린 그의 포도원에 던져지고 개들이 뜯어 먹을 것임을 선고하십니다.
비열하고 사악한 행위에 꼭 맞는 심판입니다.
신자들이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명령하신 뜻을 목숨 걸고 지키는 것은 악인들의 악이 드러나고 심판이 공의로우심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합당히 경외하며 섬길 때 세상은 우리 앞에서 두 갈래로 갈라집니다.
우리의 착한 행실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와 영광을 돌리든지, 하나님과 우리를 조롱하며 등을 돌리든지.
그렇게 선인과 악인에 대해 하나님의 증인이 되라고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나봇처럼 신앙의 자존심을 가진 사람을 통해 하나님은 그 일을 이루십니다.
신앙이 혼탁하고 악이 횡행한 말세의 세상에서 자존심을 지키려면 믿음이 강해야 됩니다.
오늘 나봇의 포도원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분명한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이든지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든지 둘 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나봇에게는 하나님이 모든 것이었습니다.
이세벨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명분상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아합과 가짜 증인들과 성중의 귀족과 장로들에게 하나님은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모든 것이 아니라면 아직 하나님은 내게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망할 본성이 우리 순종의 발목을 잡는다 할지라도, 아직 용기가 부족하다 할지라도, 성도들은 하나님은 세상의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위대한 가치라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힘을 다해 주님을 섬겨도 항상 부족하다고 느끼고 겸손히 주님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잠언 4장8절의 지혜를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하나님을 나의 모든 것으로 만나게 되기까지 믿음을 위한 모든 열심을 다하시길 바랍니다.
반드시 하나님을 지상 최고의 분으로 만나시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모든 것이 되셨다면 나봇 같은 신앙의 자존심을 지키고, 나를 존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자존심을 지켜드리며 존귀함을 잃지 않는 성도들이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아멘.
2017년5월14일 주일설교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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