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이렇게 우리의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 분들을 초청해서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참석하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고 하나님께서 큰 복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며 받은 은혜와 사랑이 너무 커서 여러분들을 초대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좋은 것, 맛있는 것이 있으면 사랑하는 사람이 생각나듯 그런 마음으로 이 자리에 청한 것이라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기독교신앙에 대해 잘 모르신다 해도 편안한 마음으로 말씀을 들으시면 하나님께서 잔잔한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성경은 예수님이 태어나기 전인 구약시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이스라엘사람이 아닌 한 보잘 것 없는 외국여인의 삶을 기록해 놓은 것이 바로 이 룻기라는 성경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쉽게 만나는 이주민 여성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가난하고 불행한 여인 룻이 이스라엘에 와서 보아스라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리고 보아스의 아내가 되어 그가 가진 모든 부귀와 영광을 누리는 복의 사람이 되는 것이 룻기의 줄거리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삶 가운데 또 오늘 예배를 통해 소중한 만남의 축복이 임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 말씀은 보리추수가 한창인 아름다운 황금들녘에서 펼쳐집니다.
누렇게 익어 출렁이는 보리밭이라면 생각만 해도 마음이 넉넉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모압여인 룻이 이삭을 줍고 있습니다.
이삭줍기가 무엇인지 아시죠?
밀레의 유명한 그림 중에 이삭줍기라는 그림을 보셨을 것입니다.
초라하고 남루한 여인들이 곡식을 베고 난 너른 들판에서 부지런히 허리를 굽히고 떨어진 이삭을 줍고 있는 그림입니다.
하지만 한 알 씩 주운 낱알로 앞치마 위에 두른 주머니를 채우기엔 역부족으로 보입니다.
바닥에 흩어져 있는 쌀알들 모아보셨습니까?
지난 번 미얀마에서 제가 참깨를 좀 샀거든요.
그런데 미얀마의 비닐봉지가 워낙 약해서 그게 가방 안에서 터져버렸습니다.
옷과 뒤섞인 참깨를 털고 줍느라 얼마나 오래 걸렸는지 모릅니다.
낱알을 하나씩 집어내야 하는 이삭줍기로 종일 허리를 펴지 못하고 일해 봤자 아마 간신히 허기를 달랠 양식을 얻었을 것입니다.
풍요로운 낱가리는 높이 쌓여가고 아직도 벌판은 누런 곡식들로 가득한 데 바닥에 떨어진 낱알을 하나씩 줍는 이의 마음이 참 서글프겠죠.
부산의 수영로교회라는 큰 교회가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그 교회 마주 보이는 양계 공장 2층에다 교회를 개척하셨습니다.
주일 아침마다 수 천명이 그 교회 앞을 지나 수영로교회 쪽으로 건너가는 데 2년 동안 한 명도 자기 교회에 들어오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 때 정말 마음이 힘들었다고 합니다.
어쩌면 이렇게 풍요로워 보이는 세상에서 우리도 이삭줍기처럼 각박하게 행복을 줍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항상 빠듯한 월급도 이삭줍기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직장인 10명 가운데 7명은 자신이 항상 돈이 부족한 푸어족이라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일을 해도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노후 생활비가 넉넉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삭줍기 같은 우리 인생에도 무슨 소망이 있기는 한 걸까요?
물론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는 말씀을 주시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가엾은 이방여인에게 상상도 못했던 부귀와 영화로 옷을 입혀주신 것은 단지 한 여인만을 긍휼히 여기셔서가 아닙니다.
본문12절에 말씀하셨듯이 누구든 하나님아버지의 날개 아래 보호 받으러 온 자녀들에게 이런 복과 상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죠.
하나님께 나오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이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이런 믿음을 모두가 갖게 되길 축원드립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에는 룻이 타국에 오게 된 이유가 나와 있지 않습니다.
1장을 보면 됩니다.
룻기 1장은 룻의 시어머니인 나오미의 인생에 포커스를 맞추며 시작됩니다.
나오미는 남편과 두 아들과 함께 고향인 유다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이라는 외국으로 이민을 떠납니다.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자 과감하게 모든 재산을 정리하고 타국에서 새출발을 결심한 것이죠.
이민생활이 그렇게 꿈 같지는 않습니다.
몇 년전 미국교포인 조승희라는 남학생이 버지니아공대에 총기난사한 사건으로 많은 사람이 죽은 사고가 있었죠.
그 부모님 형편이 안정 된 가정이란 보도가 있었지만 거기서 세탁업을 하던 사람의 말은 달랐습니다.
그곳에서 자식 둘을 키우려면 하루에 바지를 2,3백벌은 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제 가정을 돌보고 자식의 외로운 마음을 만져 줄 수 있었겠습니까?
이민생활의 애환입니다.
나오미의 이민의 꿈도 뜻밖에 남편의 죽음으로 산산조각이 나고 맙니다.
그래도 그 곳을 떠나지 못하고 두 아들을 모압여자와 결혼을 시키고 십여년을 버티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나오미의 비극이 거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어찌된 일인지 두 아들도 모두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인생이 이 정도면 그 고통과 쓴 맛을 어디에 비교하겠습니까?
이 집안엔 기구하게도 세 명의 여인네만 남게 된 것입니다.
그야말로 나오미는 잔혹한 삶에 모든 것을 약탈당하고 처절하게 빈 손이 된 것이죠.
정말 모든 것을 털린 것입니다.
모든 것을 털린 나오미의 운명에 동정심을 느끼십니까?
우리도 똑같습니다.
나오미는 한 순간에 털렸고 우리는 서서히 털려가고 있는 차이일 뿐입니다.
한 때 우리도 재산을 불리고 집을 늘리고 자식들을 거느리고 번창을 누리죠.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점 내가 가진 것들이 서서히 털려나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이들 한 창 자랄 때 과일을 짝으로 들여놔도 번쩍 없어지던 그때가 인생의 황금기인 것이죠.
저도 어릴 때 5남매가 크다보니 딸기철이 되면 어머니께서 질보다 양이 우선인지라 좀 물러진 자잘한 딸기를 큰 다라로 이고 오셨던 기억이 납니다.
좀 나은 건 골라먹고 나머진 딸기잼을 담그고, 그 날은 참 잔칫날 같았죠.
북적이던 집안도 결국 자식들 다 출가시키고 나면 두 노인네가 덩그머니 남습니다.
제가 아는 교감선생님은 남편이 대학학장을 지내셨는 데 두 분 다 퇴직하고 집에서 노십니다.
식사래 봤자 아침엔 사다 놓은 빵조각 먹고 점심은 백화점 음식코너에서 국수 한그릇 드시고 저녁거리로 김밥 한 줄 사가지고 돌아오신다고 하더군요.
나이 들면 삶이 평준화된다는 게 실감이 납니다.
점점 집도 줄이게 되고 약봉지는 늘어가도 건강은 쇠약해지니 행복도 희망도 점점 털려나가는 것이죠.
대체 인생이 무엇인지, 사람의 인생이 이렇게 태어나서 평생 염려와 걱정과 괴로움 중에 살다 가야하는 걸까요?
아닙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것은 이런 삶이 아닙니다.
인간의 고통스런 삶에는 원인이 있습니다.
오늘 나오미와 룻의 비극이 그것을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들의 비극이 어디서 발생했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떠난 데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인간의 가장 큰 불행은 세상과 나를 창조하고 돌보시는 하나님아버지를 떠나 자기가 주인으로 살아가는 데서 시작된 것입니다.
이 세상의 천지와 만물은 만드신 주인이 있으십니다.
우리가 조금만 생각해 봐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이 컵 하나만 해도 만든 사람이 있어야 존재합니다.
그게 우리가 살고 있는 자연세계의 법칙입니다.
누군가가 만들어 내지 않고 저절로 생기는 것은 이 세상에 절대로 없습니다.
똑같은 지구인데 이 만물들이 어떻게 과거에는 저절로 생겨 날 수가 있었겠습니까?
이 컵 만드는 과정을 보지 못했다고 컵이 저절로 생겼다고 말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모든 걸 만드셨고 또 통치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것을 믿고 안 믿고에 상관없이 사실입니다.
어떻게 이 우주에 별들, 그 엄청난 무게의 돌덩어리들이 자기 궤도를 한치도 벗어나지 않고 정확한 속도로 계속 돌 수 있겠습니까?
이 생각을 하면 아찔하지 않습니까?
지금 이 순간도 지구는 총알보다 8배나 빠른 가공할 만한 속도로 달리고 있습니다.
바닷물은 왜 육지를 덮칠 듯 사납게 파도로 몰려오지만 허무하게 다시 바다로 돌아갑니까?
하나님께서 경계선을 그으셨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망원경으로 확인한 천억 곱하기 천억개의 별들 중에 오직 지구에만 생명체가 살 수 있습니까?
무신론자인 스티븐 호킹 박사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구에 존재하는 법칙들을 보면 지구에 생명체가 살 수 있도록 마치 누군가가 정밀하게 조합해 놓은 것 같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측량할 수 없는 지혜로 창조하셨고 다스리고 계십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떨어지지 않는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양심 속에 이 모든 것을 볼 때 하나님을 느낄 수 있게 만드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선한 양심이라면 창조주가 존재한다는 것을 어렴풋이라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양심은 부패했고 더듬어 하나님을 찾으려는 사람도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부정하는 죄인들이 아름답게 창조하신 질서를 무시하고 주인행세를 하니 인간 세상이 병들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상을 다스릴 능력도 없는 죄인들이 운전대를 잡았으니 선로를 이탈해 목적지를 잃고 광란하는 인간역사가 스스로 파멸을 향해 치닫고 있는 것이죠.
그 누구도 이렇게 선로를 이탈한 역사 속에서 행복도 안전도 보장되지 않습니다.
혹시 지금 우리 삶이 안전해 보이고 모든 것에 부족할 게 없어보여도 누가 내일을 장담할 수 있습니까?
피하려고 한다고 사고를 피할 수 있습니까?
건강관리를 아무리 잘한들 암을 피해갈 수 있습니까?
사회악의 총체적 산물인 전쟁을 내만 잘한다고 피할 수 있습니까?
세계는 지금 전쟁 중입니다.
왜 지금도 그렇게 무기를 만들고 있습니까?
전쟁 중이라는 뜻입니다.
며칠 전 6.25에 대한 영상 기록물들을 보니 전쟁의 비참함이 새삼스러웠습니다.
그 날 아침 평범한 일상에 불가항력적인 사건과 환경이 덥썩 그들의 삶을 집어 삼킵니다.
누구나 똑같이 공포에 휩싸여 피난보따리를 싸서 정처 없이 피난민 행렬에 끼어들더군요.
물론 차이는 있죠.
종로에서 고려정이란 유명한 음식점을 했던 정명0 씨 부모님은 피아노를 싣고 피난을 갔다고 하더군요.
피난 짐에 피아노를 싸던 이불보따리를 싸던 목숨도 기약 못할 피난길은 다 똑같은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자존심과 허영을 부려도 인생의 불행을 막고 서있을 힘은 없습니다.
이렇게 예기치 못한 쓰나미와 같이 걷잡을 수 없이 밀어닥치는 시련 속에서 살 길은 전능자를 의지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지 않으십니까?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이 우리 삶에 오시면 더 이상 쓰나미에 휩쓸려 이리 저리 부딪치는 인생이 아닙니다.
전능자의 그늘에 안전하게 보호받고 영생하는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됩니다.
호된 풍랑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이 여인들에게도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땅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모압 땅에서 더 이상 먹고 살길이 막막해진 나오미는 고향인 베들레헴을 떠올립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게 되리라고 생각했던 고향, 그래서 모든 것을 팔고 떠났던 그 곳에 다시 돌아간다는 것 또한 힘든 결단이었겠죠.
마침 베들레헴에 하나님께서 풍성한 풍년을 주셨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버티면 결국 시련은 지나고 축복이 옵니다.
하나님의 집을 떠나면 안됩니다.
룻은 시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오기로 결정합니다.
앞 장에 보면 모압에 남으라는 나오미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결연한 룻의 의지를 알 수 있습니다.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은 시어머니의 나라,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미래를 위해 룻은 비장한 결단을 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매순간 결정하는 것 아닙니까?
불확실한 내일을 위해 오늘 결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정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죠.
오늘 룻이 올바른 결정을 했다는 것은 결론에서 증명이 됩니다.
범사에 하나님을 선택하면 실패와 후회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선택했는 데 비참해질 수는 절대로 없습니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선택했는 데 왜 가난하고 실패합니까?
기독교를 받아들인 나라 중에 가난하고 못 사는 나라가 있습니까?
룻은 조국의 토속신을 떠나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을 선택했습니다.
본문 12절에 보면 보아스가 이런 룻의 신앙을 정확하게 보고 축복하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을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보고 계십니다.
각박한 삶에 지치고 시달린 우리가 하나님 안에 보호받고 위로받길 기대하며 하나님께 나오기를 기다리십니다.
하나님만이 우리가 원하는 행복을 주실 전능자이십니다.
이들이 하나님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자 희미한 소망의 빛이 오늘 1절을 비추기 시작합니다.
나오미의 남편인 룻의 시아버지 엘리멜렉의 친족 중에 유력한 자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보아스더라.
여인들의 운명을 뒤집을 보아스를 슬그머니 등장시킵니다.
앞으로 그가 무슨 역할을 할 사람인지 부각시키지 않고 친족이라는 작은 단서만을 던집니다.
하나님의 대단하고 중한 일들이 이렇게 작은 단서들로 시작됩니다.
여기서 보아스는 룻과 관계될 입장이 아닙니다.
그는 베들레헴의 대부호이며 유력한 인물입니다.
여러 날 거쳐 추수를 할 만큼 넓은 농지를 갖고 있었고 성읍에서 권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런 상류층 사람이 가난한 이방여인 룻과 무슨 상관이 되겠습니까?
그냥 우리도 한 사람 쯤 가지고 있을 부자 친척일 뿐이죠.
나와 전혀 상관도 없을 것 같은 그 사람, 그 일을 만나게 하시고 인생을 풀어가게 하시는 게 하나님의 특기십니다.
하나님이 룻을 보아스에게 인도가시는 과정에는 룻의 결단과 선한 행동이 포함되어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절에 보면 룻은 시어머니의 고향에서 방관자가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명석하게 판단하고 과감하게 행동합니다.
어머니를 섬기고 자신의 생계를 위해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위해 용기 있게 나섭니다.
자신이 모압 땅에 있을 때 어떤 신분이였는 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의 전승에 의하면 룻이 모압왕의 딸이었다는 다소 과장 된 이야기도 있지만 유복했던 나오미의 집안으로 시집 온 것을 보면 룻의 친정도 괜찮은 집안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타국에서 와서 바닥에 떨어진 곡식 낱알을 줍는 일을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2절에 보면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다고 말합니다.
과거의 내가 대단한 인물이고 어떤 지위를 가졌던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기가 하나님의 땅이라면 지금 내가 이삭을 줍는 것 또한 은혜라고 생각하시길 축복드립니다.
큰 일은 다 작은 일로 시작되었습니다.
가장 비천해 보이고 사소해 보이는 그 일을 감사함으로 성실하게 감당할 때하나님께서 그걸 통해 놀라운 일을 시작하십니다.
3절을 보니 룻이 허리를 굽혀 이삭을 줍기 시작한 그 밭이 누구의 밭입니까?
‘우연히’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우연히 라는 단어가 참 재미있죠?
우연히라는 말 속엔 이미 우연은 없습니다.
그 일은 평범치 않고 절대적인 존재가 개입되었다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내게 우연히 일어난 그 일이 과연 우연이었을까요?
하나님께서 우연을 가장해서 그 날개아래 보호받으러 온 룻의 삶에 개입하시기 시작하십니다.
보십시오.
4절에 보니 마침 그 때 보아스가 밭을 둘러보기 위해 성읍에서부터 마차를 타고 추수하는 현장에 나타난 것입니다.
우연히와 마침이라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섭리 속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름 커튼 위에서 이렇게 섬세하게 우리를 인도해 가십니다.
단지 우리가 그 내막을 알지 못하기에 때로 답답할 뿐입니다.
우리에겐 그냥 어느날 우연히, 마침 그 때, 일이 일어난 듯 보이는 것이지 하나님은 잠시도 우리를 방임하지 않으십니다.
보아스의 눈길이 왠지 룻에게 머뭅니다.
추수 때 어느 밭에 든 이삭 줍는 여인들이 수없이 많이 있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은 유독 보아스의 마음이 룻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하십니다.
결혼은 그 사람의 눈에 나만 보이게 하셔야 이뤄진다는 것을 청년들은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맘에 드는 사람 만나면 꼭 그렇게 기도하십시오.
룻을 향한 보아스의 따뜻한 배려를 8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내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남의 눈치보고 여기저기 떠돌지 말고 여기 내 보호아래 있어라.
여기서 안전하게 고단한 시절을 보내라.
누가 이렇게 자청해서 우리의 고단한 짐을 풀고 쉬라고 말이라도 하던가요?
내가 궁핍할 때 그냥 힘들고 지친 마음을 좀 의지하고 싶을 뿐인데도 사람들이 슬그머니 나를 피하는 것을 느낄 때 참 서글프죠.
이런 보아스의 보호아래 룻은 매일 먹을 양식을 구하고 매일 안전하게 일하며 그의 물을 마시며 그의 곡식으로 배부르게 됩니다.
그리고 영원히 그의 집에서 그의 옷자락으로 보호를 받습니다.
어찌보면 룻기가 신데렐라이야기의 원조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런 한 가족사를 이렇게 성경 속에 넣으신 것일까?
하나님께서 룻을 이 신비한 인품을 가진 유력자 보아스에게 인도하신 것은 단지 시련에 지친 한 여인을 돌봐주신다는 것만을 말씀하기 위해서일까요?
이 두꺼운 성경은 오직 한 가지 목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잖아요.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이 모든 내용들은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 바로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의 많은 인물들은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에 대한 세밀한 예표입니다.
본서의 마지막을 보면 결론이 앞 부분과 전혀 다른 분위기로 끝납니다.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이 생경해 보이는 결론이 룻기의 핵심인 것입니다.
룻이 보아스와 결혼해서 아들을 낳게 되는 데 그 아들이 또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이 또 아들을 낳았는 데 그가 바로 다윗왕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약 천 년 뒤에 이 다윗의 혈통에서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이 펼쳐지고 있는 이 베들레헴의 마굿간에서 태어나십니다.
오늘 말씀의 메시지는 너무나 명확합니다.
룻을 사랑하고 아내로 맞아 자신의 모든 좋은 것을 누리게 한 보아스가 누구를 예표합니까?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시고 신부로 맞아주시는 예수님입니다.
룻이 교양있고 아름다워서 보아스의 아내가 되었습니까?
볕에 그을리고 인생의 고난의 흔적이 자자한 궁색한 룻이 뭐 그리 아리따웠겠습니까?
예수님이 언제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까?
감당치 못할 삶의 무게에 짓눌리고 근심으로 얼굴을 펴지 못하던 그 때 우리를 찾아오셔서 이렇게 복 된 삶을 주시지 않았습니까?
룻을 아내로 맞기 위해 보아스가 했던 사실을 하나 더 기억하기 원합니다.
보아스는 자기의 재산으로 저당 잡혔던 나오미집안의 밭을 사서 죽은 남편의 이름으로 그 밭을 나오미에게 돌려줍니다.
이 제도는 이스라엘에 있는 독특한 고엘제도인 데 나중에 나눌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4장에 보면 보아스가 룻을 샀다고 말합니다.
(내가) 또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 나의 아내로 맞이하고
이 말씀에 감춰진 뜻을 발견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 보호자도 없이 죄와 죽음의 문제를 안고 살고 있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값을 치르고 우리를 사셨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이 그 값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속죄하시고 하나님의 가족이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왜 베들레헴의 한 가난한 이방인 여인의 삶에 스포트라이트를 밝혀 조명해 주시는 지 아시겠습니까?
우리를 구원하실 주 예수님의 예표를 잘 보고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이방의 보잘것 없는 여인을 예수님의 족보 속으로 이끌어 예수님의 가문에 속하게 하신 것처럼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가문에 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접촉하기만 해도 저주 받은 인생이 복된 인생으로 바뀐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메시지 아니겠습니까?
누구든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앞에 나와 믿음으로 붙들면 모든 고통과 죄의 결과로 인한 괴로움에서 영원히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만났을 때 내 인생이 바뀌었습니까?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물어보십시오.
그들은 망설임 없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내 인생에서 가장 복된 만남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만나고 영의 아버지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만일 지금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 해도 모든 인간은 주어진 인생을 마치면 창조주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을 결산하게 됩니다.
전도서는 말씀합니다.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우리가 본능적으로 알잖아요? 죽으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왜 죽음이 두렵습니까?
죽으면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죽으면 다 끝난다면 뭐가 두렵겠습니까?
죽은 뒤에 무언가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막연하게 알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영원하고 복된 삶을 지금 준비하는 지혜로운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복드립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모든 것이 인생에서 털려나가고 있다고 느끼고 계십니까?
하나님아버지 앞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약속의 땅에 돌아왔지만 여전히 이삭줍기 같은 고단한 인생 중에 있으십니까?
하나님께서 그 미미한 일들을 통해 크고 복된 일을 준비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금 하나님 없이도 모든 게 편안하고 부족함이 없는 삶을 누리고 계십니까?
아니요.
하나님께서 주시려는 삶은 그것보다 더 완전하고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과 만족이 있는 비교할 수 없는 삶입니다.
있다 없다로 인해 삶이 요동하는 그런 불완전한 행복이 아닌 날마다 심령 깊은 곳에서 생수와 같은 시원함과 기쁨이 끝없이 솟아나는 그런 삶입니다.
오늘 말씀을 듣고 예배 중에 마음이 따뜻해지거나 작은 감동이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음성입니다.
그 음성을 제가 해석해 드리겠습니다.
내 딸아, 내 아들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내 소녀들과 내 안에 함께 있으라. 목이 마르면 내게서 마셔라.
하나님께서 그의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오신 우리 모두에게 온전한 상 주실 줄을 믿고 축복합니다. 아멘.
2013년6월30일 주일설교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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