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a6JiLTrlG9c
누구나에게나 인생에 흉년이 있고, 흉년 중에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가장 많은 것을 잃었던 고난의 남자대표자는 욥일 것입니다.
그리고 여자대표자는 나오미라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룻기의 마지막장을 미리 훔쳐보자면 나오미의 말년은 그의 이름의 뜻대로 ‘희락’으로 막을 내립니다.
다시 행복으로, 다시 회복으로 향하는 걸음이 오늘 본문에서 시작됩니다.
룻기의 대주제는 제각각 살아가는 인생을 찾아오셔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히브리어로 헤세드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헤세드가 없다면 우리에게는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그 하나님의 헤세드 아래서 사람들의 사랑이 어우러져 구원의 공동체를 이뤄가는 것도 룻기의 중요한 내용입니다.
룻기의 특이점은 영적 어둠이 짙던 사사기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훈훈한 사랑이 스토리 전체를 감싸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 사랑을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지난 한 주도 사랑이 부족해 괴로웠던 우리에게 교훈과 위로를 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1. 먼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1) 하나님이 사랑이신 것은 다 아시지만 룻기에서 어떤 사랑을 보여주시는지를 살피려는 것입니다.
룻기의 사랑은 징계 중에도 여전히 진행 중인 사랑입니다.
지난 주 룻기는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은 명백한 징계였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징계 중에도 구원의 소망의 근거입니다.
그렇기에 얻어 맞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맞아야 합니다.
살다보면 삶에 필요한 것들이 고갈되고 마음마저 푸석푸석 메말라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본문 앞 다섯 절 사이에서 나오미가 좋았던 모든 것을 순식간에 잃죠.
언제 좋은 시절이 있었냐는 듯 전세가 뒤집어 지는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만일 1절부터 5절까지의 배경이 모압이 아니라 베들레헴이었다면 그 흉년은 그렇게 음산하고 비관적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서는 벌이라면 거기엔 반드시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벌서는 자식들은 이미 엄마의 ‘팔 내려’ 소리가 언제 떨어질지 시간까지 알고 기다립니다.
세상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은 어디서 ‘그만’이 떨어질지 기약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날개 없는 추락과 같은 것이죠.
이사야서57장16절에서도 하나님의 징계 속에 있는 헤세드를 알려주셨습니다.
내가 영원히 다투지 아니하며 내가 끊임없이 노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지은 그의 영과 혼이 내 앞에서 피곤할까 함이라
우리가 이렇게 피곤하게 사는 것이 끊임없이 하나님과 다투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네요.
그런데 우리와 다투시면서도 우리의 피곤함을 걱정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2) 그렇기에 하나님의 사랑은 때가 되면 다시 자기 백성을 돌보시는 사랑입니다.
6절 말씀입니다.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삶에 여러 가지 이유로 결핍이 오지만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지 않으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풍부한 양식으로만 돌보시는 게 아니라 결핍으로도 돌보십니다.
우리가 아이들 용돈을 조이는 게 자식들을 안 돌보는 게 아니잖아요?
본래 하나님의 헤세드의 본질은 결핍된 것을 채워주시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결핍된 것을 찾아가 채워주게 되어 있습니다.
누가 결핍한 것을 보고 채워주지 않는 것은 사랑이 없다는 뜻입니다.
나오미의 고향 베들레헴은 떡집이라는 뜻입니다.
떡이 떨어져 궁핍했던 떡집에 다시 채우시는 하나님의 헤세드가 시작된 것입니다.
3) 그리고 떡집에 떡이 채워졌다는 기쁜 소식이 모든 게 떨어진 나오미에게 들렸습니다.
채워진 떡집으로 다시 불러 들이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떡집에 떡을 준비하시고 사람을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죠.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터이요
하나님이 부르시면 사람은 그 자리가 어디든 일어나 하나님께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사실 나오미처럼 부유하게 고향을 나와 모든 것을 잃었는데, 그 초라하고 창피한 행색으로 고향에 가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사람이 자존심은 지키고 싶잖아요?
자존심을 상하면 그 상처가 참 오래 갑니다.
나오미의 귀환은 쉬운 결정이 아닙니다.
어차피 고향에 돌아가서도 먹고 살길은 막막하고 가난뱅이로 살 것 같다면 차라리 남편과 자식을 묻은 모압 땅에 눌러 앉는 게 더 낫잖아요?
그러나 하나님이 부르시자 나오미는 모압의 삶에서 벌떡 일어나 떡집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운 부르심을 입고 풍요로운 떡집으로 돌아온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지난 한 주도 그 은혜와 사랑의 떡으로 살았지 다른 무엇으로 살았겠습니까?
룻기에서 우리는 점점 더 명료해지는 하나님의 헤세드, 그 사랑의 물줄기가 어디로 흘러서 어떻게 해서 우리를 찾아오셨는지를 계속 나누게 될 것입니다.
2. 나오미 가족의 사랑입니다.
1) 고향으로 돌아가는 나오미를 두 며느리가 따라 나섭니다.
7절, 있던 곳에서 나오고 두 며느리도 그와 함께 하여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가다가
나오미가 고향을 향해 가는 길에 남편을 잃은 두 며느리가 함께 길을 나섰다는 것입니다.
신기한 광경입니다.
자식도 남편도 없이 국적이 다른 며느리가 시어머니 나라로 살러 간다는 것은 평범한 일이 아닙니다.
따라오는 며느리를 설득하다 함께 울고, 다시 따라 오면 설득하고, 그러다 또 함께 울고.
이 장면들은 슬프고 처연하지만 쓸쓸함이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나오미와 가족들이 상당한 사랑과 신뢰로 뭉쳐있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비록 약속의 땅을 벗어난 잘못 된 선택을 했지만, 타국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먼저 떠나보내야 했지만, 그 가족에게 사랑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죠.
혹독한 아픔 속에서도 서로를 의지하여 보듬고 있는 가족이 상상이 됩니다.
전에 우연히 TV에서 한 프로그램에 눈길이 머무른 적이 있습니다.
박재0 이라는 청년가수가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프로였습니다.
이 청년이 한우 광고를 찍었는데 그날 계약금이 입금된다고 잔뜩 기대하며 설레어 기다리더군요.
혼자 살고 있던 집은 아주 작은 원룸이었고, 한 눈에 봐도 짠내 나는 생활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기다리던 계약금이 입금되자 바로 은행에 가서 평생 첫 적금을 들더군요.
아주 건실한 청년인 것 같죠?
그리고 나서 곧바로 아버지와 어머니의 선물을 사러 가는데 아버지 선물로 구두를 사고 싶다고 했습니다.
오래 직장 생활했던 아버지가 뚜벅뚜벅 구두소리를 내며 퇴근해 들어오시는 게 아버지의 상징처럼 기억에 좋게 남아있다는 거예요.
퇴직을 하고 어머니와 함께 작은 식당을 경영하는 지금은 마트에서 산 운동화만 신게 되어서 아쉽다고 했습니다.
구두를 선물하고 싶은 이유가 그 소리가 그리워서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아버지가 구두 신던 옛날을 왠지 그리워하실 것 같아서라는 거예요.
딸도 아니고, 아들이 어떻게 저런 섬세한 생각을 할 수 있을지 좀 신기해서 계속 시청을 했습니다.
20만원 정도의 꽤 비싼 신발을 사더군요.
어머니를 위해서는 백만원 가량이 되게 코트 두 벌을 골랐습니다.
지금 짠내나게 살고 있는 자기 모습과는 안 어울리는 규모의 선물이잖아요?
그렇게 식구들이 오랜만에 레스토랑에서 함께 밥을 먹는 데, 뭐 그다지 살갑게 보이지도 않더군요.
그런데 이 가수가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저한테 가족은 또 다른 저 같아요. 저는 항상 부모님이나 동생한테 굉장히 소중하게 대하거든요. 가족을 위해서 선물을 사고 좋은 것만 드리고 싶고 좋은 것만 보게 하고 싶은. 이렇게 가족을 위해서 하는 일이 저를 위한 일인거예요. 제가 너무 행복해요. 오늘 하루가 태어나서 가장 행복한 순간 중 하루가 될 것 같습니다.’
아버지한테 구두를 선물할 생각을 했던 게 해석이 되더군요.
제가 이 프로를 보고 생각이 많았던 게, 우리는 더 나은 사랑을 아는 데도 왜 저렇게 조차도 사랑하지 못할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가족들이 이런 사랑으로 뭉쳐서 산다면 어떤 어려움인들 이겨내지 못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이렇게 빈털터리로 고향을 찾아가는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나선 두 며느리를 보니 이들의 과거가 보이는 것 같습니다.
남편이 있고, 아들이 있을 때 이 가족이 얼마나 따뜻했을까, 남편이 죽고 아들 둘이 병석에 있을 때조차도 이들이 서로 위로하며 살았겠구나.
두 아들은 틀림없이 어머니 나오미에게 자상하고 공손했을 것입니다.
아들이 부모를 함부로 하는 데 시부모를 존경할 며느리는 없죠.
오늘 읽은 본문에서만도 며느리를 걱정하는 나오미의 마음에서 충분한 진심이 느껴집니다.
11절, 나오미가 이르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며느리를 딸이라고 부르며 그들의 장래를 걱정하는 나오미에게서 고부간의 갈등이나 이기심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어려운 가정에서 최선을 다했던 며느리에 대한 고마움을 치하합니다.
8절,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이렇게 말할 시어머니는 별로 없을 것입니다.
가족들 간에도 이렇게 고마움을 표현한다는 게 쉽지 않죠.
자식들도 부모에게 고맙다고 잘 안 하지만 부모들도 자식들에게 고맙다는 말하기가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부모가 먼저 자식을 위로하고 고맙다고 하고 축복하는 말을 더 자주할 수 있다면 우리 자녀들이 세파에 외롭게 서있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2) 각각 남편을 잃은 세 여인은 베들레헴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처음엔 당연히 가족의 정으로 헤어질 수 없어서 함께 길을 나섰을 것입니다.
그런데 세 여인이 짐 보따리를 이고 걸어가다 보니 나오미가 정신이 퍼뜩 들었을 것입니다.
대체 이 젊은 과부들을 데리고 가서 내가 어쩌자는 것인가.
앞길이 구만리 같은 딸 같은 며느리가 인종차별 심한 유다땅에서 어떻게 결혼을 하고 새 삶을 찾겠는가 생각하니 중도에 멈춰서 다시 며느리들을 설득합니다.
나오미가 며느리를 설득하는 모습이 8절부터 15절까지 나옵니다.
대화의 내용은 당시 유대사회에 있던 계대결혼을 두고 나눈 이야기입니다.
신명기25장5절에서10절을 보면 계대결혼이란 율법이 있습니다.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형제가 대신 남편 노릇을 해 주는 제도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황당한 법이지만 여성들이 스스로를 보호하지 못하던 고대사회에서는 혼자 된 여성들이 최소한의 안전을 보장 받도록 정해주신 법입니다.
물론 대가 끊긴다는 것은 죽은 자나 살아있는 아내에게나 약속의 땅에서 끊어지는 것을 의미했기에 그렇게 대를 잇게 한 것입니다.
나오미는 더 이상 너희에게 계대결혼을 시켜 줄 아들이 내게는 없다는 것이죠.
어떻게 남편 없이 세상을 살겠다고 하느냐, 너희 민족과 가족들에게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나오미의 현실적인 설득에 오르바는 눈물의 작별을 고하고 돌아갔습니다.
3. 룻의 사랑입니다.
1) 이렇게 동서 오르바가 떠나고 룻과 나오미가 남았습니다.
모압부터 베들레헴까지는 여행 경로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80킬로 정도가 됩니다.
걸어서 간다면 일주일은 족히 걸릴 거리입니다.
밤이 오면 노숙이든 주막이든 잠을 자야 합니다.
늙은 나오미 혼자 그 위험한 길을 처량하게 가는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룻은 그렇게 시어머니를 혼자 보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혼자 외롭게 걸어가는 사람의 뒷모습이 마음에 걸리는 게 사랑입니다.
때로는 뒷모습이 더 많은 것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아침에 무거운 가방을 멘 아이들의 뒷모습에서 혼자 미래와 싸우는 고독함이 보이고, 집을 나서는 가장의 어깨 위에 얹혀진 삶의 무게가 보이는 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이렇게 나를 따라 나서 줄 사람이 있는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는 누군가의 뒷모습이 너무 안쓰러워 함께 동행해 줄 수 있을까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오미 가족처럼 이렇게 가족들과 우리 성도들과 내 이웃들과 사랑의 동행을 할 수 있도록 더 기도하며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16절과 17절을 보면 룻은 나오미와 평생을 같이 하기로, 나오미의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나오미의 민족을 자기 민족으로 선택했음을 알 수 있죠.
창세기에 아브라함이 있다면 룻기에는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로 결단한 룻이 있는 것입니다.
룻은 왜 나오미의 하나님을 선택했을까요?
시어머니에게서 모든 것을 뺏어간 신을 왜 믿기로 했을까요?
룻이 하나님을 선택한 것은 인간의 이해로는 백프로 불가능입니다.
하나님이 나오미를 부르셨듯, 룻을 부르셨던 것이죠.
하나님의 은혜가 찾아오면 이해가 아니라 은혜에 이끌려 복의 근원을 찾아 길을 나서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길을 찾아 나섰고 마침내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신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런 성도들은 어디서든 일어나 하나님께로, 계속 하나님께로 회귀하는 연어의 본능을 가집니다.
그래서 한주간도 세상바다를 거슬러 힘겨운 헤엄을 쳤지만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로 이렇게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4. 그렇게 나오미와 룻은 베들레헴에 돌아왔습니다.
19절, 이에 그 두 사람이 베들레헴까지 갔더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로 말미암아 떠들며 이르기를 이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자신의 말대로 풍족하게 나갔던 나오미는 빈 몸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1) 하나님의 땅, 베들레헴에 오면 인생이 해석이 됩니다.
나오미는 자기가 당한 재앙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징계라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20절에도 그렇죠.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21절,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결국 이스라엘 땅의 징계를 피해 떠났지만 그 징계를 피할 수는 없었던 인생이었음이 해석이 되는 것이죠.
당시는 사사기 신앙이기에 언약백성이라 해도 율법 준수를 조건으로 복과 화를 약속하셨기에 그렇게 해석하는 게 일반적으로 맞습니다.
물론 신약시대 임하는 성도들의 고난은 다릅니다.
우리도 여러 이유로 인해 거둘 것 없는 인생의 흉년을 수시로 맞이합니다.
건강이든, 물질이든, 사람관계든, 자식문제든, 풍요롭고 좋았던 때가 있었다면 메말라 쩍쩍 벌어져 갈 때가 있죠.
신약성도들에게 이런 모든 고난은 성도들을 유익하게 연단하고 성장시키시는 목적 외에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그것이 죄로 인한 징계라 해도 반드시 하나님은 연단과 성장의 목적을 이루십니다.
15절에서,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이런 사상도 사사기 시대 신앙관 안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신약적 관점으로 나오미가 전도를 잘못했다고 해석하면 곤란하죠.
그 당시는 유일신 신앙도, 삼위일체하나님도, 제대로 알지 못했을 때입니다.
2) 함께 돌아온 룻은 나오미에게 재기의 소망이었습니다.
그를 쫒아 온 모압 며느리는 남은 것이라기보다 빈 것을 더 생각나게 하는 존재였고 나오미를 더욱 아프게 하는 존재였습니다.
13절,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나오미가 고향에 돌아왔을 때 두려운 눈빛으로 시어머니 뒤에 숨어 있는 외국며느리 룻은 나오미를 한층 더 초라하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차라리 혼자 돌아가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죠.
그러나 우리에게 남아있는 초라하고 작은 것들을 무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흉년 끝에 책임져야 할 문제와 사람들이 나를 더 힘들게 할 수 있습니다.
내 짐을 더 무겁게 하는 것들은 실은 흉년의 상실감에서 나를 지탱해 줄 의외의 동반자입니다.
혼자 가는 것보다 같이 가는 게 더 나아서 붙여주신 것이죠.
뒤에 보면 나오미가 이 혹처럼 매달려 온 룻으로 인해 얼마나 생기를 되찾아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다윗이 왕 되기 전 사울왕을 피해 아둘람 굴로, 광야로 도망 다니던 시절, 그에게 몰려왔던 삶의 실패자들을 먹이기에 얼마나 힘들었습니까?
전에 이스라엘을 방문했을 때, 다윗이 도망 다녔던 엔게디 광야를 가보았는데 정말 삭막한 돌산이고 광야였습니다.
혼자 몸 도망 다니기도 힘든 데 그에게 얹힌 것은 육백명의 식솔이었습니다.
숨어있지도 못하고 늘 먹일 것을 찾아 위험한 노상을 헤매고 다녀야 했던 것이죠.
이들이 없었다면 다윗은 동굴에만 숨어 은둔하는 고독하고 음산한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알고 보니 육 백명의 식솔들은 다윗을 용감하게 살아 움직이게 했던 힘이었고 왕으로 만들어지는 훈련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짐들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의 짐을 함부로 내려놓지 말라는 말이 있죠.
그 짐은 거세게 흐르는 냇물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안고 가는 무거운 돌 같은 것입니다.
때로 그 짐을 지기가 버겁고 내려놓고 싶다 해도 끝까지 지고가면 행복한 결말을 위해 넘어지지 않고 걸어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룻기의 결말이기도 하죠.
하나님은 상처처럼 남겨진 초라한 것, 룻을 통해서 나오미를 다시 회복시켜 주십니다.
힘든 삶에서 멍에처럼 얹혀진 무언가가 나를 더 힘들게 하고 더 비참하게 한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 곁에 따라 붙은 무엇이든 창피하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베들레헴, 하나님 품에 돌아온 이상 룻이 나오미의 여생을 빛내 주었듯이 그렇게 내 영혼을 빛내고 마침내 모든 수고에 대한 만족과 행복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나오미의 모압생활은 세속세상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우리 모습일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지시하는 방향으로 살아가되 나오미처럼 사랑과 인애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나오미가 모압의 우상문화를 거부했고 그의 삶 속으로 룻을 끌어들였던 것처럼 우리도 그런 삶을 살아야 할 줄 믿습니다.
약속의 땅을 떠났던 나오미도 때가 되면 다시 부르십니다.
실패하고 무너진 그 자리로도 다시 찾아와 데리고 가십니다.
그것은 비단 나오미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던 모압의 한 여인 룻이 함께 언약공동체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나오미의 잘못 된 선택 안에다 룻을 데려오실 계획을 세우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기이하고 놀랍습니다.
우리의 자유의지로 실수하고 실패했는데,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은 창세전에 이미 그 자리에 세워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지런히 일하시는 하나님의 원동력은 헤세드,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믿으시고 한주간 힘내서 승리하시길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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