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조지 바나 연구소에서 이런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하나님께 한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다면 당신은 어떤 질문을 하시겠습니까’
가장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고 싶은 질문은 무엇이었을까요?
‘하나님, 세상에는 왜 아픔과 고난이 있습니까?’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하나님께 묻고 싶다고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아픔과 고난을 겪으며 산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종종 한숨을 쉬며 이런 질문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십 오년 전에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한 분은 지금도 ‘하나님 왜요? 왜 남편을 이렇게 빨리 데려가셔야 했나요?’라고 되묻곤 한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나오미라는 여인이야말로 수도 없이 이 질문을 하나님께 던졌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나오미의 전체 삶을 통해 이런 우리 질문에 응답하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에서 이웃나라인 모압으로 이민을 떠난 한 유대인 가족사를 이야기 합니다.
성경에 이런 한 가족사가 등장하는 이유는 결국 우리에게 인생사를 보여주시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원리를 알려주시고 현실적인 문제에 적용하는 것은 각자의 몫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삶을 통찰하는 믿음의 안목을 갖게 되길 바라며 이 땅에 계속되는 크고 작은 고통을 대할 능력을 갖게 되길 소망합니다.
유대땅 베들레헴에서 살던 엘리멜렉은 아내 나오미와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을 데리고 모압나라로 이민을 떠납니다.
이유는 그 땅에 흉년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1절은 설명합니다.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일이죠.
삶에는 때때로 흉년이 들고, 사람들은 거기에 대처해서 고향을 떠나기도 하고 직장을 바꾸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여기가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구원의 언약을 맺은 가나안 땅이라는 데 있습니다.
이 땅을 벗어나면 계약이 파기된다는 것이 구약백성들에게 주셨던 율법입니다.
시대는 사사들이 백성을 다스리던 때라고 1절에서 밝힙니다.
사사시대는 이스라엘 역사 중에 가나안 땅에 나라를 세운 뒤 사울이 왕이 되기까지 사이의 기간을 말합니다.
여호수아와 당대 사람들이 죽고 다음 세대에 신앙이 제대로 전수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신앙이 없으면 모든 인류는 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가나안 부족들의 문명과 똑같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세상에 두 가지 문명이 있다면 하나님을 믿는 문명과 하나님을 믿지 않는 문명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신앙을 버리고 가나안신앙으로 급속히 변질되었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이 정착한 가나안 복지 땅에도 심판이 옵니다.
1절이 이렇게 말씀하죠.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구약성경시대에 흉년은 십중팔구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이 땅에 대한 무한한 권리를 주지 않으셨습니다.
죄로 땅을 더럽힐 때, 땅은 충분한 소산물을 내지 않을 것을 이미 경고하신바 있습니다.
하나님은 흉년이라는 자연적인 징벌로 환경을 괴롭게 해서 백성들이 회개하고 죄에서 돌이키게 하셨습니다.
성도들의 삶도 마찬가지죠.
죄가 쌓이면 환경에 점점 흉년이 듭니다.
세상살이에 있는 모든 생노병사의 고통과 악은 죄의 결과로 들어온 것입니다.
죄가 있는 곳에서 좋은 것을 기대한다는 것은 팥을 심고 콩을 기대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우리가 좋은 것을 원한다면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 죄를 멀리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번에 제가 이스라엘을 다니며 분명히 느낀 것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땅에는 두 문명이 공존합니다.
유대인들의 땅과 아랍인들의 땅입니다.
경계선도 복잡하고 예루살렘이라는 한 도시 안에도 아랍인지구와 유대인지구가 복잡하게 섞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동네가 어느 나라에 속했는지는 가이드가 말해주지 않아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무엇으로 알 수 있겠어요?
동네가 잘사냐 못사냐로 보면 됩니다.
같은 땅에 공존하는 데 신기하게도 이스라엘지역은 도시가 정갈하고 초목들까지 윤기가 납니다.
아랍인 지역은 동네가 낙후되고 길이 지저분합니다.
정치 경제적인 여러 가지 문제가 내면에 있기 때문이지만 두 나라 중에 더 악조건에서 출발한 것은 이스라엘입니다.
제가 2박을 묵었던 베들레헴 숙소가 아랍인 지구에 있었고 여행 내내 유대인지구와 아랍인 지구를 넘나들며 두 민족의 차이가 극명하게 보였던 것 같습니다.
인종차별적인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정말 달랐습니다.
유대인지역에서 안식일인 토요일엔 밥 사먹을 곳을 찾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들이 율법적으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가나안 복지에서 영원히 살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지 못해 영혼은 복을 얻지 못했지만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성경의 예언대로 마지막 때 회개하며 예수님 앞으로 나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에서 분명히 보여주시는 것은 선한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는 사람은 반드시 예수님께로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그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는 진정한 복을 주시기 위해서죠.
나오미의 가족사를 통해 보여주신 것이나 우리 성도들의 삶이나 저는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 예수님 안에서 말씀대로 지키며 사는 성도들의 영혼은 항상 기름지고 삶에는 풍요로운 열매가 가득한 것은 자명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인 이 가족사의 문제가 무엇인지 다 짐작하셨을 것입니다.
그들이 받은 복이 하나님의 축복의 땅에서 받은 것이라는 것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1장 21절을 보면 나오미가 나중에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이들이 흉년에도 풍족했다는 것은 그동안 받은 축복이 얼마나 컸는지를 입증하는 것입니다.
나오미 가족이 베들레헴을 떠난 것은 현재의 궁핍보다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이었습니다.
지금도 꾸려갈만큼 충분한데, 말하자면 더 나은 생활을 위해 신앙의 범위를 줄여가는 것이 나오미의 비극적인 선택입니다.
돈을 더 벌면 행복할 것 같지만 사람이 행복한 게 물질에서 옵니까?
물질에서 안정을 찾고 풍요에서 만족을 찾으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우리는 나오미 가족을 통해 잘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도 소망은 하나님의 안에 있습니다.
다만 축복의 땅에 흉년이 오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할 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약속의 땅을 떠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온전한 믿음을 회복하도록 돌이켜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환경을 복구하고 회복시킬 유일한 능력자이신 하나님께 기도하며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에 기근이 오고, 기름지던 삶이 삭막해 질 때 더욱 필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나를 돌이켜 보고 더 하나님께 밀착되는 것 밖에 다른 대안은 없다는 것을 잘 깨달아야 할 줄 믿습니다.
결국 약속의 땅을 떠난 이 가족이 몰락하는 모습은 사람이 이렇게 쉽게 망하나 싶게 당황스럽습니다.
어떤 이들은 정말 한순간에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을 우리 주변에서 때로 목격하게 됩니다.
먼저 1절에 보면 처음에는 이들이 모압지방에 가서 거류했다고 합니다.
거류했다는 것은 잠시 머문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잠시 머물러 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2절에 보면 그들이 모압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살더니’ 라고 말이 바뀝니다.
처음엔 잠시 흉년을 피하며 간만 볼 생각이었는데 시간이 가자 결국 거기에 눌러 앉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믿음이 시들해져서 잠시 하나님 곁을 떠나있다가 결국 오래동안, 혹은 영영 하나님 앞에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는 경고를 떠올리게 합니다.
잘 살기 위해 떠났던 모압에서 나오미는 무슨 일을 만납니까?
3절에서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두 아들만 남았다고 합니다.
살기 위해 나갔는데 죽음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물질의 흉년은 모면했을지 모르지만 살다보면 분명히 또 다른 고통이 있는 것이 인생입니다.
겪어야 할 어려움을 한번은 피했을지 모르지만 오히려 더 큰 슬픔을 만나기도 합니다.
만일 우리 삶의 고통이 하나님의 징계라면 우리의 의지적인 노력으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피하면 피할수록 고통의 범위는 넓어지고 깊어집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징계는 하나님이 풀어주실 때까지 죄를 돌이키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기다려야 합니다.
엘리멜렉의 죽음은 한 이민자의 죽음만을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파기하고 불신의 땅 모압으로 들어갔던 엘리멜렉이 결국 하나님의 언약백성에서 영원히 끊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더 나은 풍요를 얻기 위해 들어갔던 모압에서 결국 나오미는 가장 귀중한 동반자를 잃고 말았습니다.
3절에 보니 이제 이 가정엔 나오미와 두 아들이 남았습니다.
풍요를 찾아 모압으로 왔건만 인생의 반쪽을 잃은 나오미는 거기서 다시 한번 회개의 기회를 맞은 것입니다.
포근했던 둥지가 우리를 찌를 때, 편안함이 깨지고 삶이 흔들거릴 때, 하나님을 찾으면 언제든지 위기는 다시 축복의 기회가 됩니다.
그때라도 가나안 땅의 언약을 어기고 모압으로 들어온 것에 대한 철저한 회개와 함께 아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언약백성으로 있어야 아들이 살죠.
그런데 4절을 보십시오.
나오미는 거기 그대로 머물렀고 두 아들은 모압여자를 아내로 맞이합니다.
부모로부터 신앙이 전수되지 않으면 자식들은 세상의 방식대로 아내를 맞이하고 세상과 짝을 맺습니다.
나오미는 오르바와 룻을 며느리로 맞이했고 십년 동안 모든 것은 다시 좋아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삶이 잔인한 것은 모든 게 한순간에 뒤집어지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말론과 기룐 두 아들마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호세아선지자를 통해 하신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말론과 기룐이 젊은 나이에 죽은 것이 가장 큰 비극이 아니라 구원의 백성에서 끊어진 것이 가장 큰 비극입니다.
결국 두 아들마저 약속의 땅에서 멀어진 채 죽음을 맞이한 것입니다.
이제 5절에서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다고 기록합니다.
나오미 홀로 남겨진 것입니다.
성경은 이들의 비운의 삶을 조망하도록 우리를 이끄십니다.
하나님을 벗어난 인간들이 점점 무엇을 잃어가는지를 나오미의 모습을 통해 보여주시는 것이죠.
하나님을 버리고 세상에서 만족과 성공을 구하는 사람들의 결과가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세상과 세상에서 권세를 부리는 사탄의 세력은 매가 병아리를 낚아채듯이 영혼을 사냥하고 비참한 최후로 끌고 갑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암탉 병아리를 품듯이 내가 너희를 품으려 한 것이 몇 번이더냐.
하나님은 이런 영적 사각지대에 놓인 인간을 안전하게 품기 위해서 예수님까지 보내주신 것입니다.
왜 어미 닭이 병아리를 품습니까?
어릴 때 보면 솔개가 나타나 마을 위를 빙빙 돌면 위험을 느낀 어미 닭이 얼른 병아리를 모아서 자기 품에 품는 것 보였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인지조차 못하는 악한 세력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고 안전하게 품으시기 위해 우리를 모으신 것입니다.
남편이 죽은 데다 졸지에 아들 둘까지 잃은 나오미는 그제서야 결국 하나님께로 돌아가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됩니다.
좀 더 일찍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6절을 보면 나오미가 고향 소식을 듣습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었다고 합니다.
흉년을 버텨 낸 이스라엘엔 다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심판하고는 다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지만 아직 심판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런 중에 하나님의 긍휼로 다시 소출을 얻을 수 있을 만큼 모든 것이 회복되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모든 것을 잃은 나오미는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대로 풍족하게 나갔다가 비어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때로 우리는 실패한 삶, 잘 풀리지 않는 환경이 구차하게 계속될 때 사람들 앞에서 은둔하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남들처럼 잘 되지 못하는 내 모습이 남부끄러워 숨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다들 먹을 게 없어 고생하는 고향사람들 앞에서 화려한 가재도구를 바리바리 낙타에 실고 떠나왔던 나오미입니다.
남편과 두 아들을 다 잃고 재산도 없이 빈 손으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오미가 모압에 은둔자처럼 살았다면 그의 생에 소망은 없고 이것으로 인생은 끝입니다.
그러나 룻기의 클리이막스는 6절입니다.
그 여인이 모압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지방으로 돌아오려하여 있던 곳에서 나오고
아무리 숨고 싶고 사람들의 눈을 피하고 싶어도 그래도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야합니다.
그곳은 베들레헴입니다.
베들레헴의 뜻은 ‘떡집’입니다.
하나님은 떡집에서 자기 백성을 돌보셔서 양식을 주십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함을 듣고
때가 되면 환경을 돌아보셔서 살 길을 열어주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믿습니다.
가뭄을 내려 다 아사시켜 버리시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선조들을 40년간 겸손하게 하나님만 바라도록 연단시키시고 약속의 땅을 주신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가뭄이 결코 우리를 내버리는게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베들레헴에서 이들에게 양식을 주셨습니다.
베들레헴이라는 지명을 다 아시겠죠?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사람이 누구십니까?
다윗이 베들레헴 사람이고 다윗의 후손이신 예수님께서 정확히 베들레헴의 여관 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이번에 제가 이틀 간 묵었던 숙소 이름이 베들레헴 인입니다.
베들레헴 여관이란 뜻이죠.
물론 그 여관이 예수님이 태어나신 그 여관은 아니지만 왠지 그런 기분이 들어 은혜로왔습니다.
예수님이 베들레헴, 떡집이란 동네에서 태어나신 것이 얼마나 친밀하게 주님이 오신 이유를 분명한 이미지로 보여주는 것인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하늘에서 내려 온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잖아요.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갖고 떡집에 머무는 것, 주님의 교회 안에서 항상 영의 양식을 구하는 것이 성도들의 복된 삶입니다.
그럴 때 우리 삶에는 항상 소망이 시작됩니다.
22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나오미가 다시 마음을 정하고 베들레헴에 이르렀는데 보리추수가 시작됩니다.
저는 이 말씀이 이렇게 들립니다.
이미 고통이 시작되었지만 내 마음을 하나님을 향해, 예수님을 향해 돌이킬 때 해결의 실마리가 준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루의 피곤한 업무 중에 잠시라도 마음을 예수님께로 돌이켜 말씀을 묵상하고 3분이라도 기도를 한다면.
이미 하나님께서는 영과 육의 풍성한 힘을 부어주기 시작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전적으로 부탁드리고 맡기지 않은 문제들을 적극적으로 예수님 안에서 기도하기 시작할 때, 이미 응답을 준비하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절망 적인 상황에도 하나님께는 답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됩니다.
모든 것을 다 잃은 것 같지만 나오미에게 남겨진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며느리 룻입니다.
룻의 활약은 2장부터 나옵니다.
나오미는 며느리 룻이 보아스와 재혼해서 오벳이라는 손주를 낳아줍니다.
그 오벳이 바로 다윗의 증조부입니다.
가장 연약한 며느리, 나를 도와주시는커녕 내가 책임져야 할 연약한 인물을 통해 나오미의 인생이 뜻밖에 메시야의 계보에 관련이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 남아있는 작은 것들을 무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현재 내가 책임져야 할 문제와 사람들, 내게 더 짐이 되는 것만 같은 귀찮은 일들, 이런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섬기는 데 큰 도구입니다.
다윗이 왕되기 전 사울왕을 피해 아둘람 굴로, 광야로 도망다니던 시절, 그에게 몰려왔던 삶의 실패자들을 먹이기에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이번에 다윗이 도망다녔던 엔게디 광야를 가보았는데 정말 삭막하고 먹고 살 수 있는 곳이 아니더군요.
그런데 숨어 다녀야 되는 입장이니 어쩌겠습니까?
게다가 육백여명이나 되는 식솔들이 달려 있으니 다윗의 심정이 어땠을지 이해가 되었습니다.
다윗이 이들을 품고 받아들여 끝까지 함께 한 것은 왕이 되는 훈련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어떤 환경도 결국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고 왕 같은 계승자가 되게 하는 하나님의 배려이십니다.
나오미가 당한 고난, 정말 피하고 싶고 일어나선 안 될 일이지만, 그런 고난조차도 하나님은 나오미를 베들레헴 떡집으로 돌아와 생명의 떡으로 오시는 메시야의 계보에 접붙이는 놀라운 축복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가장 마지막에 하나님과 기도를 떠올리지 말고 모든 일에 가장 먼저 기도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여야 합니다.
세상에서 안전망을 구하지 말고 모든 풍부한 양식을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자기 백성을 돌보시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도 분명히 책임지고 인도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아멘.
2017년1월22일 주일설교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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