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

룻기3장 (기업 무를 자 보아스)

남수연 2017. 2. 1. 14:22

설 명절 잘 보내셨습니까?

오늘 주일예배를 위해 서둘러 일정을 조정하고 나오셨을 성도님들을 주님께서 축복하시리라 믿습니다.

지난주에 이어 룻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합니다.

지난주엔 나오미의 실패를 통해, 어떤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떠나지 말 것을, 그리고 믿음에서 벗어나 실패했다면 언제든 돌이키는 순간부터 소망이 시작된다는 것을 나눴습니다.

오늘은 나오미를 따라 약속의 땅으로 들어온 모압며느리 룻을 재혼시키려는 나오미의 활약사를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절망 속의 두 여인 나오미와 룻에게는 마치 준비되었었다는 듯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기이한 축복이 주어집니다.

이 의미들을 잘 깨닫고 우리도 그런 복을 누리게 되길 원합니다.

 

1장에서 베들레헴에 살던 나오미 가족은 흉년을 만나 모압으로 이민을 떠났었죠.

타국에서 안타깝게 남편과 두 아들을 앞세운 나오미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을 듣고 귀향을 결심합니다.

모압에서 모든 것을 잃고 빈손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오는 나오미를 붙잡고 따라오는 사람이 있었으니 모압 며느리 룻이었습니다.

나오미가 룻과 함께 귀향했을 때 베들레헴에는 보리추수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당장 먹고 살 방편이 없는 룻은 부자집 밭에 나가 이삭줍기를 시작합니다.

마침 그 부자는 나오미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었고 신앙과 인격을 겸비한 훌륭한 인물 보아스였습니다.

나오미는 룻에게 안정적인 새가정을 만들어주기 위해 보아스가 적격자로 생각하고 룻을 시집보내려는 대대적인 작전을 펼칩니다.

거사일은 보아스가 추수한 보리의 타작을 마치는 날.

이 날은 대개 주인과 일군들이 잔치를 하고 곡식을 지킬 겸 타작마당에서 자던 풍습을 기회로 삼은 것이죠.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의 명령대로 목욕을 하고 기름을 바르고 좋은 옷을 입고 숨어서 타작마당을 살핍니다.

그리고 잔치가 끝난 뒤 보아스가 잠들기를 기다렸다 그 발치의 이불을 걷고 몰래 누웠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서 그 이후에 벌어지는 일들을 아주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보아스가 룻을 아내로 맞고, 그 둘 사이에서 다윗의 증조 할아버지인 오벳이 나오고 후에 예수님이 이들 족보에서 나오는 위대한 역사가 씌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나오미의 이런 작전은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일까요?
따지고 보면 19금에 해당하는 좀 민망한 작전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고대 사사시대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라고 해도 예수님의 족보에 끼어든 부도덕의 냄새를 결과가 좋으니 잘한 일이라고 넘어가기는 좀 마음에 걸리는 게 사실입니다.

이런 의문을 갖고 이 사건을 깊이 들여다보면 구원을 이뤄 가시는 하나님의 원대한 경륜과 인간의 약점과 예수님의 구속의 의미가 풍부하게 함축되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잘 살피고 깨달을 때 믿음의 세계가 풍성해지고 더 공고하게 다져지는 것입니다.

 

먼저 나오미가 왜 이런 작전을 펼쳤냐는 것입니다.

이 사건의 배경에는 본문에서 반복해서 나오는 특별한 율법의 조항이 근거가 됩니다.

나오미는 정당한 것을 요구했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있는 데 찾으셨습니까?

바로 기업을 무를 자라는 단어입니다.

본문에서만도 일곱 번이 나오죠.

그렇다면 이 기업 무를 자가 본 사건에서 상당히 중요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겠죠?

우리나라 문화로는 좀 생소한 내용인데,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에서 이 기업 무르는 법을 상세하게 명시해 놓으셨습니다.

간단히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개인마다 땅을 배분받았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땅의 사유화는 고대 국가들에 없던 개념입니다.

대개는 왕과 영주들이 땅을 독차지하고 국민들은 소작농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사람들에게 일일이 다 땅을 나눠주게 하셨습니다.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받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 구원을 받는다는 것과 동일한 개념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마음이 온유한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유대인들은 이 말이 구원이라고 금방 알아들었습니다.

하나님은 각 지파와 개인에 분배해주신 그 땅이 절대로 남의 소유로 넘어가지 못하도록 몇 가지 조치를 취하셨습니다.

땅을 뺏긴다는 것은 구원을 잃는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기 때문입니다.

그 중 하나가 희년제도입니다.

내가 어떤 이유로 가난해져서 땅을 남에게 팔았다고 합시다.

오십년 단위로 반복되는 희년이 돌아오면 그 땅은 다시 원주인에게 돌려주게 법을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구원을 굳게 지키게 해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땅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기 위한 또 다른 율법이 바로 기업을 무르게 하는법입니다.

누군가 돈이 필요해서 땅을 팔았을 때, 친척 중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이 그 땅을 다시 사서 본인에게 돌려주게 하는 제도입니다.

이렇게 친척의 기업을 되 사서 땅을 돌려주는 사람을 기업 무를 자라고 하고 성경 원어로는 고엘이라고 합니다.

고엘이 된 친척에게는 전혀 득이 없는 이상한 제도죠.

땅이 구원을 상징하기에 공동책임으로 철저히 지키게 하시고, 사람이 살기 위해 필수적인 땅을 보존해서 극빈자가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제도입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고엘에게는 한 가지 묘한 부가사항이 덧 붙여집니다.

땅만 있다고 약속의 땅의 영구한 주인이 되는 게 아니죠.

대를 이을 자식이 없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공동체에서 끊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땅만 찾아주는 게 아니라 고엘이 된 사람은 대를 잇도록 아들까지 낳게 해주라는 제도를 추가하신 것이죠.

자식이 없이 누군가 죽었을 때, 그 가문이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죽은 사람에게 가장 가까운 친인척이 미망인과 결혼해서 자식을 낳게 합니다.

태어난 그 자식은 명분상 죽은 사람의 자손이 되고 기업을 물러 준 그 땅의 소유자가 되어 죽은 사람의 이름을 잇게 하는 것이죠.

이런 율법이었기에 나오미가 이걸 근거로 이런 남부끄러운 작전을 펼치고 있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아마도 베들레헴을 떠날 때 누군가에게 땅을 저당 잡혔을 것입니다.

또 자손이 없기에 하나님의 백성 중에 명맥이 끊길 위기에 있었습니다.

나오미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 두 가지를 해결해 줄 기업무를 자 고엘을 구하는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룻이 우연히 들어간 밭주인인 보아스가 바로 죽은 남편의 친족으로 고엘의 자격자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기에게 이익이 안 될 이런 율법을 잘 지켰겠습니까?

성경을 보면 잘 지켜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본문에 보면 보아스보다 더 가까운 친척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기업을 무르지 않겠다고 해서 그 다음 책임자인 보아스가 룻을 아내로 맞게 됩니다.

사람들이 고엘이 되길 결코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런 위기에 빠졌다면 과연 누가 고엘이 되주려고 하겠습니까?

누가 기꺼이 자기를 희생해서 고엘이 되려고 하겠어요?

이런 배경을 알면 룻기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알만하지 않습니까?

미리 만들어 놓으신 고엘제도는 우리에게 천국의 기업을 되찾아 줄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 분이 바로 자신의 모든 것을 주고 천국의 기업을 우리에게 되찾게 해주신 우리의 고엘이신 예수님입니다.

그 고엘사건의 아름다운 성취를 룻과 보아스를 통해 미리 보여주시고, 우리의 고엘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더 확실히 못을 박으시려고 그 후손으로 다윗이 출생하고 그 후에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모를까봐 이렇게 노골적으로 족보를 엮어 놓으신 것이죠.

실제 이사야서 후반부에 보면 하나님이 자신을 나는 너희 고엘이다라고 열 네 번이나 말씀합니다.

우리 번역으로는 나는 너의 구속자다이렇게 되어 있죠.

이런 중요하고 은혜로운 구원의 원리가 어렵다는 이유로 거의 가르쳐지지 않습니다.

이런 것을 풍성하게 아는 신앙과 단지 예수님을 믿으니 구원받는다는 기본적인 원리만을 아는 신앙은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원리를 이해하는 면에서 큰 차이가 납니다.

그래서 루터는 성경은 그리스도가 누워있는 구유와 같다고 말한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깊이 발견하고 우리에게 행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깨달아갈 때 우리는 점점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오미는 왜 당당하게 보아스에게 가서 우리 가문의 기업을 물러주고 룻과 결혼해서 자식을 낳게 해 달라고 하지 않았을까요?

왜 이런 부도덕한 작전을 세워서 일을 진행시키려 했을까요?
나오미에게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있었습니다.

구원받은 우리의 본성에도 여전히 불안감은 존재합니다.

지난 주 말씀에서도 나오미 가족이 모압으로 떠난 이유가 당장 굶어 죽게 되어서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풍족하게 나갔다고 했거든요.

흉년이 계속되면 결국 양식이 점점 바닥날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이민을 간 것입니다.

오늘 나오미가 보아스를 당당하게 찾아가지 못한 이유도 동일합니다.

찾아가서 우리 기업을 물러달라고 할 때, 보아스가 거절하면 어떡하냐는 두려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1순위 친척이 고엘의 책임을 거절하잖아요?

땅을 자기 돈으로 사고, 자식을 낳아주고, 그 자식에게 그 땅을 주고 죽은 사람의 이름을 잇게 하는 손해보는 일을 누가 하려고 하겠습니까?

나오미는 보아스가 과연 이런 일을 하겠다고 할지 두려웠던 것입니다.

만일 거절해 버리면 그걸로 끝입니다.

다시 절망이 오고 내일이 막막해지는 것이죠.

그래서 거기에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바로 남심을 유혹하는 인간적인 작전을 펴기로 한 것이죠.

보리 타작이 끝난 날, 보아스의 기분이 매우 즐거웠다고 하죠.

먹고 마시기까지 하고 타작마당에서 잠든 느긋한 보아스에게, 발치에 누운 젊은 여인 룻은 분명 마음을 정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는 계산입니다.

이런 복잡미묘한 일들이 얽혀 있는 것이 타작마당 잠입 작전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고,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불안한 마음에 온갖 안전장치를 생각하고 인간적인 방법을 총동원해서 살아가는 모습이죠.

우리의 구원의 길 안에 완전하고 곧은 걸음만 있지 않잖아요?

그러나 나오미가 이렇게 여전히 미래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일을 꾸미지만 모압행을 결심했던 때와는 다릅니다.

이 일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돌아와서 하나님의 백성이 지켜야 할 율법을 근거로 일어났고 며느리의 장래를 준비하자는 사랑의 마음으로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은 자로 잰 듯한 방법 뿐 아니라 그 내면의 진정성도 중요히 보십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을 잘 믿고 순종하며 살려는 마음, 우리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길 바라는 마음이 기본적으로 있잖아요?
그렇기에 방법적인 면에서 우리의 인간적인 실수 역시 나오미의 실수처럼 과거와는 다릅니다.

모두가 다 연약한 인간이기에 염려와 죄성에서 자동적으로 튀어나오는 인간적인 고육책이지 고의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게 아닙니다.

나오미가 룻에게 모든 것을 지시한 뒤에 한 말이 있습니다.

그가 네 할 일을 네게 알게 하리라

결국 보아스의 말에 순종하리라는 의지가 있다는 말이죠.

우리가 원하는 대로 기도하고, 인간적인 고육책을쓰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응답해주시길 원하다고 맡기는 것도 같은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나오미의 인간적인 죄의 냄새가 풀풀 풍겨오는 이 작전에도 은혜를 베푸시고 긍휼을 더해 주신 것입니다.

나오미의 꼼수가 얼마나 허술합니까?

만일 보아스가 이런 조작 된 작전으로 자신을 이용하려고 한다는 것에 아주 기분나쁘게 생각하면 일은 망하는 것입니다.

만일 즐거운 기분에 술을 마시고 취한 보아스가 날이 훤히 밝을 때까지 일어나지 못했다면요?

준비한 모든 것은 물거품이 되고 두 여인의 수치스러움만 남았겠죠.

그런데 하나님은 보아스를 한 밤중에 깨워주십니다.

8절에 보면 우리 말 번역은 보아스가 룻의 기척을 느껴서 놀라서 깬 것 같지만 본래 원어 문장은 무언가에 두려워서 먼저 깼다는 의미입니다.

무언가 어떤 경이로운 느낌이 보아스를 깜짝 놀라게 함으로 보아스가 잠에서 깨었고 발치에 누운 룻을 발견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작전에 일조를 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인간적인 방법으로 계획하는 일들이 때로 잘되고 아직까지 모든 것을 그런대로 꾸려온 것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작전에 일조하셨다는 것입니다.

내일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으로 온전히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우리 모습을 얄밉기보다 불쌍히 보시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은 우리의 죄에 동조하지 않으시고 바로잡으시며 인도하십니다.

나오미의 허점이 가득하고 죄의 냄새가 풍기는 작전을 보아스는 온유하지만 신속하게 바로 잡습니다.

먼저 이 잘못 된 작전으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룻의 문제를 바로잡습니다.

보아스의 발치에 누웠던 룻은 어땠겠습니까?

아마 여성으로는 평생 떨쳐버리지 못할 수치심을 갖게 되지 않았겠습니까?

여성에게 성적 수치심은 평생에 상처입니다.

부정하지도 않은 룻이 마치 부정한 여인처럼 남자의 발아래 누울 때 이미 룻은 상처가 난 것입니다.

보아스는 그런 룻의 마음을 먼저 바로잡습니다.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가난하건 부하건 젊은 자들을 따르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룻이 나오미를 모시기 위해 따라온 것도 큰 사랑이지만 보아스처럼 늙은 사람에게 시집 가 기업을 이으려는 이 믿음의 행위가 더 큰 인애라는 것입니다.

이런 보아스이 말이라면 룻의 마음이 치료가 되지 않았겠습니까?

왜 룻의 고엘이 된 보아스가 우리의 고엘이 되신 예수님의 단편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인물이 되는지 아시겠죠?

보아스의 자상한 배려와 관심은 그치지 않고 거침없이 계속됩니다.

그 밤을 뜬 눈으로 새웠을 나오미와 아무런 확답도 없이 돌아가는 룻을 빈손으로 보내지 않고 보리 여섯 번을 재서 들려 보냅니다.

또 룻의 명예를 염려해서 다른 사람보기 전에 일찍 일어나 돌아가라 지시합니다.

그리고 부도덕한 방식이 아니라 정당한 율법의 방식을 따라 법적 과정을 거친 뒤 한 치의 거리낌 없이 나오미와 룻의 고엘이 되어 줍니다.

우리의 고엘이신 주님도 마찬가지십니다.

우리가 때로 세상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삶을 꾸려간다 할지라도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며 순종하고자 할 때, 하나님은 잘못을 시정하시며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성취시켜 주시리라 저는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생각할 것은 본서가 룻기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나오미의 활약상이 크다지만 누가 뭐래도 본서의 주인공은 룻입니다.

하나님은 룻의 믿음의 결단과 신의를 칭찬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룻을 소극적으로 시어머니의 뜻에 복종하는 여인으로 생각하는 것은 오해입니다.

남편은 죽고 떠났지만 자기보다 더 가련한 늙은 시어머니를 가족으로 섬기기 위해 끝까지 떠나지 않은 강직하고 의리 있는 여성이 룻 아니겠습니까?

자기 고향과 친척을 두고 낯선 이스라엘 땅으로 시어머니의 하나님을 믿기 위해 떠나는 룻을 누가 아브라함만 못하다고 하겠습니까?

미지의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 모험심이 가득찬 눈빛으로, 때로는 수치심을 무릅쓰고 기업을 지키는 용기를 가진 당당한 여성이 룻입니다.

자신을 위해 젊고 유력한 사람을 택할 수 있었지만 늙은 보아스를 고엘로 선택해 가문을 일으키고 메시야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룻은 여러모로 우리가 본받을 만한 아름다운 신앙인입니다.

그런 룻에게 믿음직한 고엘이 되어 준 보아스가 있었듯이 룻과 같은 이방인으로서 하나님을 믿기로 결단한 우리에겐 아낌없이 모든 것을 내주고 고엘이 되어 주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보아스가 룻을 위해 일했듯이 지금도 주님은 우리를 위해 일하십니다.

오늘 마지막 절에서 나오미는 이렇게 말하죠.

내 딸아 이 사건이 어떻게 될지 알기까지 앉아 있으라 그 사람이 오늘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

이 말은 나오미가 보아스에 대해 감 잡았다는 것입니다.

보아스의 인격을 보아 앞으로 이 일을 어떻게 책임껏 처리할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고 감을 잡았다는 것이죠.

하나님에 대해 감 잡으셨습니까?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무슨 일을 해오셨고, 앞으로 해나가실지 감 잡으셨습니까?

하나님을 공경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렇게 우리를 위해 쉬지 않고 일하시며 실패와 약함을 고쳐주시고 동행하신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아는 사람들은 적습니다.

끊임없이 우리를 채근만 하시는 하나님을 기쁨과 감사로 끝까지 섬기기는 어렵습니다.

우리는 죄와 세속을 멀리하며 예수님의 본을 따라 살아가려고 끊임없이 애를 쓸 것입니다.

그러나 보아스의 넓은 도량을 통해 보여주신 예수님의 관대하심과 인자하심을 생각하며 우리 자신에도, 남에게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긴 믿음의 여정을 지치지 않고 걸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길은 그리 짧지 않습니다.

항상 말씀과 기도를 통해 이런 하나님을 몸소 체득해가며 위로받고 힘을 얻으며 끝까지 주님을 따르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