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

룻기2장 (이삭줍기의 은혜)

남수연 2021. 11. 3. 23:19

https://www.youtube.com/watch?v=v_ywmUP2AJ0 

나오미와 룻은 상처만 가득한 모압생활을 청산하고 언약의 땅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습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왔지만 당장 달라진 것은 없었습니다.

흉년 뒤에 회복을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돌아온 이들을 반드시 책임지십니다.

오늘부터 하나님께서 나오미와 룻을 위해 준비하신 것이 하나씩 펼쳐집니다.예수님을 믿고 구원의 땅에 들어왔지만 여전히 삶의 어려움이 있는 모두에게 힘과 위로를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1. 하나님은 베들레헴 떡집에 양식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바로 앞 1장22절은 이렇게 끝납니다.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이스라엘 땅에서 추수는 농사짓지 못한 이들에게도 희망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곡식을 벨 때에 바닥에 떨어진 것은 줍지 말라는 법입니다.

거둘 것이 없는 가난한 자, 과부, 고아, 나그네들도 밭에 떨어진 낟알을 거둬서라도 먹고 살게 해 놓으신 것이죠.

이 법을 지키는 한 이스라엘에 굶어 죽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사람의 본성으로 볼 때는 최선의 사회보장제도라고 볼 수 있는 것이죠.

인간의 탐욕적 본성은 바닥에 떨어진 낟알 한 개도 남에게 허락하지 않잖아요?

황석영씨의 한 소설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가난하던 옛날, 한 가장이 공사판에서 허리를 다쳐 가족의 생계가 막막하게 됩니다.

몇 끼를 굶은 아내와 딸은 한밤중 수확이 다 끝난 남의 고구마 밭에 들어갑니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호미로 흙 속을 뒤져 밤새 고구마 한 자루를 캡니다.

이 고구마로 하루 한끼 씩 먹으면 반 겨울을 날 수가 있게 된 것이죠.

그런데 그때 밭주인이 와서 호통을 치며 캐낸 고구마 자루를 들고 가버립니다.

빈손으로 돌아온 아내는 문 앞에 털썩 주저앉아 울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같이 좀 살자, 이 못된 것들아, 같이 좀 살아’

돌아가신 옥한흠목사님은 강남의 부유한 교인들에게 늘 상 검소한 성도의 삶을 가르쳤습니다.

가족 두 사람 사는 데 왜 큰 집에 살며 기름때고 전기 낭비하느냐.

더 절약해서 가난한 사람들도 좀 같이 살게 하자.

일할 힘이 없고, 열심히 일해도 생계가 어려운 사람들에 대해 단지 딱한 생각을 갖는 정도는 주님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이웃을 나와 똑같이 여기는 수준이잖아요?

우리가 베풀 때도 내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으로, 마땅히 받아야 할 자에게 돌려준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나도 살면서 남의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지 언제나 잘 될 수만도 없고, 도움을 받던 사람들이 언제까지 도움 받게 하시지도 않습니다.

이웃과 함께 사는 것이 주님의 경제원리임을 알고 최대한 따르며 살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신명기24장19절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

그러나 우리의 삶이 풍성한 떡집처럼 늘 베푸는 위치면 좋겠지만 뜻하지 않은 흉년을 만난 나오미와 룻처럼 이삭줍기의 은혜로만 살아가는 때도 있습니다.

흉년 뒤 이삭줍기의 은혜도 큰 은혜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책임지고 계시다는 증표이고 회복의 시작인 것입니다.

 

2. 오늘 룻에게서 우리는 어떻게 이삭줍기의 때를 살아야 할지를 살펴보면 좋을 것입니다.

물론 룻에게도 이삭줍기로 버텨야 하는 베들레헴에서의 삶은 결코 녹록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룻은 자기 연민에 빠지지도 않았고, 절망하지 않았고,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무엇을 해야할 지, 용기 있고, 담대하게 현실에 정말 지혜롭게 대처합니다.

룻기를 촘촘히 묵상해 보면 룻이 기품 있게 살아온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수준 높게 살다가 가난해지는 게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그런데 룻이 어떻게 이삭줍기의 삶을 그렇게 의연하고 흔들리지 않게 대처할 수 있는지 오늘 본문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룻이 은혜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룻의 입에서 은혜라는 말이 세 번 나옵니다.

2절에서 밭으로 나가던 룻이 말합니다.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10절,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

13절, 룻이 이르되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은혜로 사는 방법을 룻이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룻이 은혜를 구하는 것은 사실 사람에게가 아닙니다.

세상에 내게 이유 없이 은혜 베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삶의 모든 은혜가 하나님의 헤세드에서부터 온다는 것을 아는 것이죠.

그렇기에 사람에게 은혜를 구해도 비굴하지 않고 자존감을 잃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룻의 신앙이 지금 우리와 다르지 않죠?우리도 은혜로 살잖아요?내가 가진 것으로 살고 있다, 살 수있다, 생각하는 게 참 위험합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둘러주지 않으시면 실력과 장점으로도 망신당하는 게 세상입니다.

나오미가 십년 만에 자랑했던 재산과 남편과 자식을 모두 잃잖아요?베들레헴에 와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지 않는다면 나오미처럼 무너집니다.

본문을 보면 룻은 이삭을 주우러 혼자 밭으로 갑니다.

2절입니다.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내가 밭으로 가서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하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갈지어다 하매

나오미의 지시를 기다리던 룻이 혼자라도 이삭을 주우러 가겠다고 합니다.

나오미의 힘없는 대답이 돌아옵니다.

내 딸아 갈지어다

좀 이상한 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1장에 비해 나오미의 말이 짧습니다.

사람이 말이 짧아지면 희망이 끊기고 우울하다는 뜻입니다.

막상 고향에 와 보니 옛날 풍부했던 때와 얼마나 비교가 됩니까?어두운 방구석에 앉아 자신의 불행을 곱씹으며 연민에 빠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베들레헴엔 처음인 며느리를, 그것도 사랑하는 며느리를, 낯선 모압의 이방인을 흘겨 볼 사람들 틈으로 혼자 내 보낸 것입니다.

나오미가 거동을 못할 만큼 늙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모압서 부터 걸어서 베들레헴에 돌아왔잖아요?

며느리와 함께 나갔다면 서로 의지하고 더 많은 곡식을 모을 수 있을 텐데, 그러질 못합니다.

안 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것입니다.

모두가 자기를 알아보는 베들레헴에서 허리를 구부리고 바닥에 떨어진 곡식 낟알을 줍고 있는 모습을 누가 보이고 싶겠습니까?

사람의 멘탈은 그렇게 강하지 않습니다.

강하다고 생각하고, 잘 견딘다고 생각하다가도 한 마디 말에 무너지고, 절망적인 생각 하나에 무너집니다.

우리 가족이나 공동체 중에 누군가는 어느 때든 그런 상태에 놓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은혜로 서 있는 사람이 이삭을 거둬 힘을 얻게 도와야 합니다.

진심으로 하는 위로의 한마디, 격려의 한마디에 힘을 얻은 적이 다 있으실 것입니다.

언제 나오미가 정신을 차리고 다시 삶의 힘을 얻는지 아십니까?

룻이 나가서 이삭을 거뒀는데 보아스의 배려로 그 날 20킬로나 되는 자루를 채워 돌아왔을 때입니다.

룻이 나오미의 유력한 친척 보아스를 만났고 큰 호의를 받았다는 것을 들었을 때 말솜씨 좋은 나오미의 입이 다시 열립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말이 술술 나옵니다.

아무리 믿음이 있어도 혹독한 현실에선 섰다 넘어졌다를 반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는 누군가를 통해 베푸시는 은혜의 징표를 의지하여 힘을 얻으며 지나는 것입니다.

가족이든 어떤 사람들의 관계 안에서든 이 사실을 우리가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은 흙으로 지으셨기에 도자기처럼 깨지기 쉽습니다.

때로 우리의 멘탈은 유리 같다는 생각도 들잖아요?

힘든 이삭줍기의 시기를 지날 때 서로를 세워주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모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3. 하나님의 땅에서 이 이삭줍기의 삶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우리 중 먼저 이삭줍기가 끝난 분들이 많잖아요?

물론 인생에 여러 이유로, 다시 여러 가지 종류의 흉년이 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연단하시기 위해 이삭줍기의 시기를 또 허락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또한 미리 염려하지 않습니다.

보아스가 말한 대로 우리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12절,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그렇게 하나님이 룻을 그의 날개로 보호하고 상을 주시기 위해 준비하신 인물, 보아스가 등장합니다.

룻기는 룻이라는 실제 인물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이 보내주신 이 보아스를 만나 언약백성의 새로운 삶을 얻는다는 이야기죠.

물론 보아스는 우리의 운명을 사망에서 생명으로, 심판에서 영생으로 반전시켜주신 예수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본문에서 룻이 보아스를 만나는 과정 속에서 성도들을 하나님의 회복으로 이끄시는 과정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하시는 부분이 있고, 룻이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는 룻처럼 행하면 되는 것이죠.

1) 우선 룻은 생계를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유일한 일터로 나갑니다.

매일 나에게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다음 것들과 연결되는 통로입니다.

만일 룻이 수치심에 사로잡혀 그 밭에 나가지 않았다면 보아스를 만날 수는 없었습니다.

내게 주어진 일이 비록 바닥에 떨어진 곡식 낟알을 줍는 것과 같다 해도 그것을 부지런히 하면 소망이 있습니다.

세상에서도 소소한 일을 평생한 사람을 달인으로 인정합니다.

우리가 하는 일들이 초라해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오미가 얼마나 소중히 낟알 하나하나를 주워 모으는지 추수하는 사람들이 보고 있었습니다.

밭을 둘러보러 온 보아스가 사환에게 저 소녀가 누구냐고 묻습니다.

6절, 사환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는 나오미와 함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모압 소녀입니다.

그러면 되는 데 거기서 끝내지 않고 계속 룻에 대해 얘기합니다.

7절, 그의 말이 나로 베는 자를 따라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하소서 하였고

이삭줍기는 율법으로 정해져 누구든 어느 밭이든 들어갈 수 있었지만 룻의 이런 공손함이 사환의 마음에 들어온 것입니다.

공손함은 사람의 마음에 깊숙이 들어갑니다.

또,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에서 쉰 외에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이니이다

내게 주어진 일이 무엇이든 성실히 감당하는 것을 누군가가 보고 있습니다.

함께 일하는데 성실하다면 좀 재능이 부족해도 누구든 그 사람을 붙잡을 것이고 더 중요한 일을 맡길 게 분명합니다.

우리교회도 오너들이 계시지만 성실히 책임을 감당하는 직원이 얼마나 귀합니까?

사환이 이렇게 룻을 소개한 것은 당연히 보아스의 마음에 호감을 일으켰을 것입니다.

또 11절에서 보아스 역시 룻에 대해 이미 이런 소문을 들었다 얘기합니다.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알려졌느니라

우리가 모든 시간, 모든 장소, 모든 사람들과에서 성실히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은 그것이 내게 평판으로 따라다니기 때문입니다.

좋은 평판은 거의 더 좋은 여건으로 옮겨가는 다리가 됩니다.

또 룻에게는 은혜를 베푸는 자를 향한 겸손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누구에겐가 은혜를 입을 때 겸손하게 고개를 숙이기보다 속에서 자존심이 더 고개를 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룻은 자기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는 보아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10절, 룻이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그에게 이르되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 하니

얼굴을 땅을 향해 떨어뜨리고 진심으로 그 은혜에 감사하는 룻의 모습에 은혜를 베푸는 보아스의 마음이 오히려 감동을 받았을 것 같습니다.

사람이 은혜를 입고 그 은혜를 감사하는 게 마땅한 것 같지만 안 그렇잖아요?

저는 이 구절에서 감동을 받고 최근엔 하나님께 감사할 때 고개를 깊이 떨구어 감사를 표하곤 합니다.

몸의 자세를 갖추면 마음이 더 잘 담기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보아스와 룻을 만나게 하시려는 데 강제로야 어쩌시겠습니까?

사람의 만남은 상대방을 관찰하고 좋은 점을 발견하고 맘에 드는 부분들이 있을 때 감정도 생기고 함께 일할 결심도 되는 것이죠.

룻은 구약의 성도로, 우리는 신약의 성도로, 오늘 룻에게 있는 이 좋은 인격과 태도들을 항상 생각하고 갖추어 가야 하겠습니다.

 

2) 룻을 위해 하나님은 무슨 일을 하십니까?

하나님은 보아스를 예비해 놓으셨습니다.

1절,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으로 유력한 자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보아스더라

룻기의 저자는 아마도 처음부터 이 말을 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했을 것 같습니다.

베들레헴에는 나오미의 친족, 대부호 보아스가 살고 있었습니다.

나오미와 룻의 생활이 흑백영화라면, 보아스가 나오는 장면은 환한 햇빛에 다채로운 색깔들이 반짝이는 총천연색 영화입니다.

그 이유는 4절에 보아스와 그의 추수일꾼들이 나누는 대화에서 알 수 있습니다.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베는 자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그들이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

곡식 낟가리가 밭에 그득하다고 그곳이 행복으로 반짝이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풍성한 복을 주시기에 보아스의 영역들이 밝고 희망 적이고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그 곳으로 룻을 보내기 위한 하나님이 계획이 한걸음 더 룻을 인도하십니다.

3절,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 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성 밖으로 나가 넓디넓은 보리밭 중에서 한 밭을 찾아 들어갔는데 ‘우연히’ 이 보아스의 밭에 들어가게 됩니다.

재미있는 것은 우연이라는 말엔 이미 우연이 없습니다.

우연이라는 말 속엔 그냥 일어난 일이 아니라 초월적인 어떤 강한 힘이 개입했다는 의미가 들어 있는 것이죠.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날 때 그것은 흔히 우연히 일어난 것처럼 보입니다.

그 때 그 우연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내가 아닌 다른 내가 되었을 것이잖아요?

어쩌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우연들이 계속 엮이며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우리가 벗어나지 않고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룻에게도 이 우연이 계속 일어납니다.

4절,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베는 자들에게 이르되

마침, 룻이 이삭을 주우러 간 그 날 보아스가 자기 밭의 추수상황을 보러 나온 것입니다.

보아스의 밭은 지평선이 보일만큼 광활했을 것입니다.

너른 들판에 여기저기서 곡식단을 베고 묶는 일군들 틈에서 이삭을 줍는 사람들도 많았을 것이구요.

흉년 끝이잖아요?

그런데 보아스의 눈에 우연히 룻이 들어온 것입니다.

보아스는 나오미의 먼 친척이라지만 룻과 관계될 입장이 아닙니다.

그는 베들레헴의 대부호이며 권세 있는 인물입니다.

이런 상류층 사람이 가난한 이방여인 룻과 무슨 상관이 되겠습니까?

그냥 우리도 한 사람 쯤 가지고 있을 먼 부자 친척일 뿐이죠.

내 힘으로는 닿을 수 없는 그 사람, 그 일, 그 상황을, 만나게 하시고 관계를 맺게 하시는 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모든 일들은 무엇과의 만남을 통해서 이뤄집니다.

하나님은 이 ‘우연’을 통해 사람을 만나게 하시고, 평생 직업을 만나게 하시고, 교회를 만나게 하시고, 삶의 여러 가지 사건들을 만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것만 준비시키신 게 아닙니다.

더 오래전부터 보아스와 룻의 만남을 준비하셨다는 것을 알면 참 놀랍습니다.

이방인과의 혼인을 금기하는 유대인 남자에게 아무리 계대결혼이 율법에 명시되었다 해도 이방 여인 룻을 아내로 맞이하게 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신데렐라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믿음 좋은 보아스가 어떻게 모압여인에게 이렇게 쉽게 마음이 열렸을까요?

그 이유는 보아스의 어머니가 이방여인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바로 그 여인입니다.

보아스의 가정이 정통 이스라엘 가정이 아니었습니다.

룻기 마지막에도 나오고 마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에 보아스가 나옵니다.

보아스의 아버지가 살몬인데, 마태복음에 보면 살몬이 라합에게서 보아스를낳았다고 합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전쟁을 할 때 제일 먼저 난공불락의 요새 여리고성을 점령하잖아요?

첫 성 여리고를 미리 정탐하러 보냈을 때 하나님을 믿고 정탐꾼을 숨겨주었던 기생 라합이 바로 보아스의 어머니였던 것입니다.

보아스의 마음이 이방여인에 대해 쉽게 호의를 가질 수 있었던 것도 그런 가정 배경이 작용했을 수밖에 없는 것이죠.

민족과 그 신들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왔던 자신의 어머니처럼 우상의 땅을 떠나 하나님께 돌아온 이 용감한 여인에게 어떻게 마음이 가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걸음도 준비하시고, 큰 걸음도 준비하십니다.

그리고 더 영원한 걸음도 준비하십니다.

그렇게 룻의 큰 걸음이 예수님의 족보에 보석처럼 박혔듯이 우리의 이름도 이미 보석처럼 예수님 안에 영원히 박혀있는 줄 믿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2장 마지막을 보면 룻은 보리추수로부터 밀추수가 끝날 때까지 넉 달 정도를 밭에서 이삭줍기를 했다고 합니다.

땅에 허리를 굽히고 살아야 하는 이 고단한 삶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기간만큼 감당해야 합니다.

이삭줍기의 시기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야 합니다.

큰일은 다 작은 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비천해 보이고 대단치 않은 그 일을 감사함으로 성실하게 감당할 때 하나님께서 그걸 통해 놀라운 일을 시작하십니다.

누군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우리는 평평하고 탄탄한 삶을 원하지만 판판한 종이보다 구겨진 종이가 더 멀리 날아간다. 구겨진 인생이 더 멀리 날아간다.

지금 내 인생도, 일도, 관계도, 마음도 다 구겨진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 멀리 보내기 위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기가 하나님의 땅이라면 지금 내가 하루 하루 이삭을 줍는 것 같이 살아가는 것 또한 은혜라고 생각하시길 바랍니다.

룻에게 3,4장이 기다리고 있듯이,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준비하신 어떤 계획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