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

보아스와 룻 (룻기4장)

남수연 2021. 11. 16. 14:47

https://www.youtube.com/watch?v=iWTgDjbojY4&t=1432s 

오늘 룻기 마지막 4장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지난 3장에서 룻의 타작마당 잠입사건이 있었죠.

룻은 보아스에게 자신의 기업을 물러 줄 고엘이 되어 달라고 했고 보아스는 룻을 위로하며 그 요청을 다 들어주겠다고 약속합니다.

단 더 우선 순위가 있는 고엘이 있어 그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했습니다.

오늘 4장에서 이 문제가 해결되고 보아스는 나오미와 룻의 고엘의 자격을 얻어 룻을 아내로 데려오고 이야기는 행복하게 막을 내립니다.

4장의 짧은 룻기 성경은 단막극처럼 끝이 나죠.

그런데 오늘 마지막에 간략한 보아스의 족보가 나옵니다.

이 족보로 인해 사실 룻기는 한가족의 일대기를 그린 단막극이 아니라 수 세기를 망라하는 대하소설과 같다는 것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도 오늘 말씀을 보면 좋겠죠.

오늘도 성령께서 이 말씀이 현재를 살아가는 나에게 생생히 들려주시는 말씀이 되게 해 주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1. 먼저 보아스가 어떻게 룻의 고엘이 되었는지 부터 살펴보겠습니다.

1절, 보아스가 성문으로 올라가서 거기 앉아 있더니 마침 보아스가 말하던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가는지라 보아스가 그에게 이르되 아무개여 이리로 와서 앉으라 하니 그가 와서 앉으매

성문에 앉았다는 것은 보통 통치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보아스는 어젯밤 룻에게 오늘 기업무를 우선순위인 친족을 만나겠다고 했었죠.

그 말대로 믿음직한 보아스는 오늘 즉시 이 문제를 처리합니다.

보아스가 룻을 사랑하는 마음이 얼마나 진심인지가 읽혀집니다.

룻의 마음을 알았으니 잠시라도 초조한 시간을 주고 싶지 않은 마음 아니겠습니까?

룻이 기다리며 이런 생각에 불안할 수 있잖아요?

‘보아스의 마음이 바뀌는 건 아닐까?’

‘얼굴도 모르는 다른 고엘이 만약 기업을 무른다고 하면 어쩌지? ’

만일 그 고엘이 기업은 물러줘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어떡하겠습니까?

우리의 고엘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목숨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신다는 게 얼마나 큰 위안이고 안도가 됩니까?

오늘 보아스는 룻을 위해서 부지런히 움직이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사랑한다면 이게 맞는 것이죠.

사랑하면 짐짓 뜸을 들이며 시간을 끌지 않습니다.

우리 자식들이 애가 타고 간절할 때 부모들은 거의 총알처럼 움직이잖아요?

춘향전에서 이몽룡이 어사출두를 한 뒤 신분을 숨기고 옥에 갇힌 춘향에게 수청을 들라고 떠보며 뜸을 들이죠.

사랑한다면 제일 먼저 감옥에 있는 춘향을 풀어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보아스는 며칠 생각해 보지도 않고 마음을 정하자 즉시 룻을 위해 움직입니다.

3장에서 나오미가 예견했던 것이 맞았던 것입니다.

18절, 내 딸아 이 사건이 어떻게 될지 알기까지 앉아 있으라 그 사람이 오늘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가장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의 애타는 문제를 하나님께 간절히 요청했다면 이미 주님께서 문제를 받으셨고 일하기 시작하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기도가 계속 하나님의 귀에 들려지는 한 하나님은 쉬지 않으실 것입니다.

보아스는 룻의 기업을 무를 더 가까운 친족을 부르고 이 일에 증인이 되어 줄 마을 장로 10명을 데려옵니다.

그리고 우선 순위자 고엘에게 나오미와 룻의 기업 무르는 문제를 논의하죠.

3절부터 10절까지가 이 내용입니다.

이 기업 무를 1순위 고엘에 대해서 성경은 끝까지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4장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나옵니까?

그런데 대조적으로 이 사람은 1절에서 단지 ‘아무개여’라고 불리웁니다.

여기서 우리 말 ‘아무개’로 번역한 원 단어는 잡동사니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야말로 대수롭지 않은 사람, 이름도 알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왜 그렇게 불리운지는 결과를 보면 알 수가 있죠.

보아스는 그 사람에게 나오미가 남편 엘리멜렉의 땅을 팔려고 한다고 알립니다.

아마 모압으로 갈 때 팔거나 저당 잡혔던 땅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나오미에게 땅이 있었다면 지금처럼 극빈자로 살 이유가 없는 것이죠.

이스라엘에서는 땅을 팔았어도 오십년 뒤엔 다시 판 사람에게 돌아오게 되는 희년법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땅을 팔거나 저당 잡혔어도 여전히 소유권은 나오미에게 남아 있던 것이죠.

그 땅을 고엘 친족이 되사서 나오미에게 되돌려 달라, 즉 기업을 물러달라고 한다는 사실을 알립니다.

이런 손해를 감수하고 아무개씨가 나오미의 기업을 물러 주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의외로 아무개씨가 선뜻 ‘내가 무르겠소’라고 말합니다.

이야기가 예측하지 못한 방향으로 가고 있죠?
그러자 보아스가 즉시, 고엘이 되려면 땅만 사면 안 되고 다음 의무도 해야 한다고 아무개씨를 압박합니다.

5절, 네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야 할지니라 하니

‘그게 다가 아냐, 그 밭을 사면 모압여인 룻에게 수혼 즉 계대결혼의 의무까지 져야 해.’

‘룻에게 아들을 낳아줘서 네가 산 땅을 그 아들에게 넘겨주어야 해.’

이런 뜻입니다.

아무개씨가 생각해 보니 이건 아닌 것이죠.

나오미의 땅을 물러주면 후사가 없는 늙은 나오미가 죽은 뒤 자연스레 자기 기업이 될 거라고 생각했겠죠.

모압여인 룻에게 기업을 물러줘야 한다니 뭐 하러 그 땅을 사겠습니까?

그러니 머리를 긁적이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죠.

6절,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겠노라 내가 무를 것을 네가 무르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그렇게 해서 룻의 기업 무를 자격이 보아스에게 넘어오게 된 것입니다.

아무개씨는 신을 벗어서 보아스에게 주고 고엘의 권리를 시원하게 포기합니다.

보아스는 이 손해나는 거래가 무엇이 그리 좋은지 당장 동네 사람들을 찾아 다녔을 것입니다.

‘나오미의 밭을 담보로 가진 사람들은 모두 다 내게로 오시오.’

‘내가 후한 값으로 그 땅을 다시 사겠소.’

이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있는 것입니다.

고엘제도, 기업무르기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네가 힘이 좀 되면 가난한 형제도 좀 살게 해 주면 안되겠니 하시는 마음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탐욕으로 볼 때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는 제도인 것이죠.

그러니까 일찌감치 이 제도는 명맥만 남아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 중 유일하게 성공적인 기업무르기, 고엘의 역할을 완수한 사람은 보아스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

보아스를 고엘이신 예수님을 상징하는 예표의 사람으로 세워 놓으신 것이죠.

우리가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날 때 잃어버렸던 모든 기업을 예수님께서 고엘이 되셔서 그 이상으로 완벽하게 되돌려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은 죄의 빚은 다 떠맡으신 것입니다.

보아스와 룻의 실화를 통해 그것을 이렇게 생생하고 아름답게 우리에게 전해 주시는 것입니다.

 

2. 옛 이스라엘에 고엘제도를 주신 하나님은 신약의 성도들에게도 같은 계명을 주셨습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어디서 나오는 말씀이죠?

예수님께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신 뒤, 하셨던 말씀입니다.

여리고로 가던 길에서 강도를 만나 모든 것을 털리고 폭행당해 거의 죽게 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제사장도 레위인도 죽어가는 그 사람을 보고 황급히 지나쳐 갑니다.

주변에 강도가 있을지 모르고, 복잡한 일에 얽히기가 싫은 것이죠.

그런데 유대인이 혼혈이라고 동족 취급도 안 하던 사마리아 사람이 죽어가는 그 사람을 도와줍니다.

상처를 치료해 주고 짐승에 태워 여관에 데려가 선불을 지급합니다.

자기가 돌아올 때까지 돌봐주고 비용이 더 들면 자기가 계산 하겠다고 하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도 가서 네 이웃에게 이와 같이 해라’

너도 삶에서 강도를 만나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이웃이 되어주라는 것이죠.

오늘 그 의무를 더 가깝게 지고 있던 아무개씨는 분명히 나오미가 저당 잡힌 땅을 다 살 수 있는 재산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손해 보는 게 싫어서 고엘의 의무를 저버린 것이죠.

아무개씨의 선택은 세상적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합리적이고 타당합니다.

친척의 빚을 갚아주지 않는다고 누가 탓하겠습니까?

그러나 약속의 땅에 산다면 하나님이 세우신 법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적인 합리성을 따라 금전을 관리하는 게 반드시 옳은 게 아닙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이 주신 물질을 하나님이 지정하신 방법대로 관리하고 사용해야 옳다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아무개씨의 이름을 끝까지 밝히지 않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이 그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공동체를 세우지 않는 사람을 아예 제명시켜 버린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돈과 시간과 재능과 건강 등등을 나만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다릅니다.

더 복되게 사룡하라시는 것이죠.

나만을 위해 살아 온 한평생은 영원한 부끄러움이 될 것입니다.

이 중요한 사실을 예수님은 얼마나 자주, 강조해서 가르쳐 주셨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이웃 사랑을 강조하셨냐하면 천국 백성의 기준을 믿음보다 형제에 대한 사랑행위로 말씀하실 정도였잖아요?

믿음으로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심판대 앞에서 너 왜 나를 안 믿었냐고 묻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믿음은 제각각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다 나는 예수님을 열심히 믿었다고 할테니까요.

믿음의 증거로 형제가 병들었을 때, 감옥에 갇혔을 때, 돌봐주고 마실 물 한 대접이라도 떠다 주었는지로 네 믿음의 진위를 판가름하겠다고 하셨잖아요?

오늘 본문을 잘 읽어보면 지나치기 쉽지만 아주 중요한 포인트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12절에 보면 이 사건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백성과 장로들이 보아스와 룻을 축복합니다.

여호와께서 이 젊은 여자로 말미암아 네게 상속자를 주사 네 집이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보아스에게 상속자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자녀가 없는 결혼이었는지, 아니면 결혼을 하지 않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이 유력하고 신실한 믿음의 사람 보아스에게 상속자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13절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게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보아스에게도 기업을 이을 후손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만일 보아스가 룻의 기업을 물러주지 않았다면 그 역시 예수그리스도의 족보에 이름을 올릴 수가 없었던 것이죠.

우리가 예수님의 명령대로 복음 전파에 희생하고, 이웃을 섬기며 희생하고 그럼으로써 내게 주신 하나님의 기업을 이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한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내 이웃이 누구냐고 묻는 사람에게 되물으셨습니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

불행을 당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은 다 너의 이웃이라는 것입니다.

전에 인터넷에서 한 기사를 읽었는데 정말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탈레반이 장악한 아프간에서 프로잔 사피라는 젊은 여성인권 운동가가 피살된 채 발견되었다는 기사였습니다.

총에 맞아 얼굴을 못 알아 볼 정도라 가족도 입은 옷을 보고야 알았다고 합니다.

머리, 심장, 가슴, 신장, 다리 등 몸 전체에 있는 총상은 셀 수가 없었습니다.

약혼자가 있었지만 탈레반이 자기 뒷조사를 하고 있다는 정보를 듣고 독일로 망명을 준비하던 중이었다고 합니다.

지금 지구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런 수많은 폭력과 전쟁과 가난과 억압을 대할 때 우리는 마음이 불편합니다.

그래서 얼른 시선을 돌려버리게 되죠.

우리의 힘이 도저히 닿지 않을 일들이기에 무기력감만 느끼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자체도 고난과 상처로 얼룩져 있기에 남의 고통을 돌아볼 여력이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우리 모두에게 너도 가서 그와 같이 행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고난과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내 힘이 닿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길 기도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내 미력한 힘이나마 더 고통 받는 이웃을 위해 무언가 해야 한다는 관심을 닫지말라시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성도가 세상에 대해 복음을 전하며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둡고 악한 세상에 둘러싸여 더 큰 고통과 해를 당하게 됩니다.

불행을 당한 사람의 슬픔과 상처와 절망을 유일하게 똑같이 공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의 사람은 이전에 없던 그런 마음으로 사람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나 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악전고투하는 모습들이 참 불쌍하게 보입니다.

우리가 매일 상처받는 것은 그 눈이 너무 나 자신만을 향하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가정에서도 내 아픔만 들여다보고 있다면 가족의 말 한마디에 예민해 지죠.

저 사람도 아픈 데, 왜 저 사람이 저런 말을 하는지 헤아리지 못하면 가족이, 가까운 사람이 더 상처를 주고받는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보아스가 볕에 검게 그을린 룻을 불쌍히 여겨 사랑했고 그의 모든 불행을 자신이 떠안은 것처럼 예수님께서 그렇게 나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 그것이 우리 안에서 메마르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권면드립니다.

 

3. 본문 마지막에 간략하게 보아스의 위 아래 족보가 소개됩니다.

성도님들은 이런 족보나 이름들이 나오면 싫어하지만 족보는 성경을 이해 할 수 있는 수많은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본문의 족보는 아담으로부터 예수님까지 이어지는 구원 족보의 일부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시기 위해 창세전에 그려 놓으신 생명의 핏줄 같은 가계도입니다.

이 가계도는 아담, 노아, 아브라함을 거쳐 야곱의 열두 아들 중 유다지파를 선택합니다.

그런데 이 족보가 창세기와 민수기에서 유다의 아들 베레스, 그 다음 헤스론까지에서 딱 끊어집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18절에서 다시 그 족보가 이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았고 람은 암미나답을 나았고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고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결국 이 족보는 다윗왕의 족보인 것이고 신약성경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로 이어져 끝이 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다윗의 후손인 요셉과 마리아가 고향 베들레헴에 호적을 정리하러 왔다가 이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이 태어나셨던 것입니다.

룻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성경이 아닙니다.

현재 이스라엘엔 어느 가문, 어느 가족에도 예수님 이후의 족보를 가진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40여년 뒤 로마에 멸망한 이스라엘은 땅도, 언어도, 지파도, 족보도 없이 이천년을 전 세계를 떠돌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1948년에 현대 이스라엘이 건국될 때 국민이 될 조건 중에 ‘자신이 유대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모든 게 철저히 사라진 것이죠.

이스라엘의 족보가 예수님을 마지막으로 성경에만 남아있는 것이 참 신비롭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의 족보는 더 이상 이스라엘이라는 혈통이 아니라 모두 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만 이어지는 걸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생명의 가계도 안에 구원받을 하나님의 자녀들이 수많은 실핏줄처럼 이어져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가계도를 이미 갖고 계십니다.

혈통적으로 자식을 통해 이어질 가계도 뿐 아니라, 구원을 받고 예수님의 가계도에 속할 것도 그려놓으셨습니다.

우리의 혈통적 가계도가 이어질 뿐 아니라, 복음을 전한 믿음의 열매들을 통해 영적 가계도 역시 계속 이어지게 되길 축복드립니다.

우리가 이 영광스런 하나님 가족의 가계도 안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놀랍고 감격스런 일인지요.

제가 성경을 묵상하며 이 가계도 안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20절을 보면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고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다고 하죠.

거기 나손이라는 인물은 민수기 7장에 등장합니다.

성막 건축을 끝낸 뒤 열두지파의 대표자가 하나님께 순서대로 제사를 드리는 데 제일 먼저 유다지파가 드립니다.

민수기7장11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지휘관들은 하루 한 사람씩 제단의 봉헌물을 드릴지니라 하셨더라

12절, 첫째 날에 헌물을 드린 자는 유다 지파 암미나답의 아들 나손이라

제일 먼저 백성을 대표로 제사를 드린 사람이 바로 보아스의 증조부 나손이었다는 것이죠.

이 집안이 얼마나 대단한 집안인 줄 아시겠죠?
이 나손이 살몬을 낳았고 살몬이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마어마한 집안에서 왜 라합이라는 가나안 여자, 여관을 운영하던 기생 라합을 아내로 맞이했는지 굉장히 궁금증을 일으키죠.

그래서 이런 스토리를 추측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땅에 입성하기 전에 여리고로 두 명의 정탐꾼을 보내잖아요?

믿음이나 무예나 지혜에 얼마나 출중한 사람을 엄선해서 보냈겠어요.

사십년 전에 대표 열 두 명을 가나안땅 정탐하러 보냈다가 부정적인 보고를 하는 바람에 결국 광야에서 40년을 떠돌게 되었던 걸 여호수아가 알잖아요?

그때 두 명의 정탐꾼 중 한 명이 이 뼈대 있는 유다지파의 살몬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는 것이죠.

살몬이 자기를 살려 준 라합에 대한 감사와 신의로 라합과 결혼했을 거라는 타당한 상상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족보나 역사 부분이 성경에서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아버지 살몬의 신앙과 인격이 보아스에게로 이어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죠.

요즘 매일성경 묵상이 사사기입니다.

가나안 입국 후 한 세대 만에 이스라엘은 가나안 우상신앙으로 인해 초토화가 됩니다.

그런데 같은 사사시대임에도 베들레헴의 분위기는 딴 세상 같지 않습니까?

이 유력한 믿음의 가족이 터를 잡고 살기에 베들레헴이 여타 사사기의 동네와 이렇게 다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거주함으로 인해 가정과 주변이 거룩해 지고, 신앙과 인격을 자식들이 이어가는 아름다운 가계도를 이루시길 축원드립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룻기도 마칩니다.

룻기에서 룻을 사랑했던 보아스와 비교할 수 없는 우리의 고엘이 되신 예수님을 발견하셨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그런 주님의 사랑을 잘 실감하지 못하는 것은 내 마음이 너무 세상적인 것에 가로막혀서 그렇습니다.

룻과 같은 벼랑 끝에 서게 될 때 우리는 알게 됩니다.

내게 주님 밖에 없구나.

주님은 여지없이 우리의 고엘이 되셔서 우리를 낚아채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 우리의 시선을 자꾸 예수님께, 하나님아버지께 모으고 영원한 것을 위해 살아가야 할 줄 믿습니다.

그럴 때 매일의 평범한 날들도 베들레헴의 나날처럼 거룩하고, 또 성령님의 은혜로 누군가에게 고엘의 마음으로 다가갈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성도님들 가정이 예수그리스도의 족보에 연결되어 영원히 복되게 이어지길 간절히 축복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