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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기는 다시 하나님의 땅으로 돌아온 나오미와 룻의 회복을 아름다운 서사시처럼 그려주는 성경입니다.
우리는 룻기의 해피엔딩을 알고 있지만 오늘 이들에게는 아직 아닙니다.
2장까지 베들레헴에 돌아왔지만 기다리고 있던 것은 이삭줍기로 먹고 살아야 하는 현실이었죠.
오늘도 여전히 현실은 만만치 않습니다.
그러나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나오미와 룻을 복되게 인도해 가시는지 오늘 3장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이렇게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깨닫게 되는 시간되시길 바랍니다.
나오미, 룻, 보아스에게 차례로 포커스를 맞춰서 말씀드리겠습니다.
1. 나오미는 룻을 보아스에게 시집보내기 위한 작전을 펼칩니다.
그동안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주워 안정적으로 살았지만 이제 추수기가 끝나갑니다.
나오미와 룻에게도 다시 어두운 그림자가 다가옵니다.
곡식의 노적가리가 점점 쌓여갈 때 서서히 밀려오는 것은 앞으로의 삶에 대한 염려였습니다.
흉년에 모든 걸 잃을까 두려워 베들레헴을 떠났던 나오미에게 다시 이삭줍기 이후의 삶이 두려워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을 신뢰하지 못하면 항상 삶이 두렵습니다.
무엇이 내 인생을 보장해 주겠습니까?
인생에 진지한 사람이라면 스스로 안간힘을 쓰면서도 항상 불안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나오미와 같은 노년의 삶은 더욱 불안하죠.
건강도 물질도 사람관계도 어쩌면 이삭줍기 같은 생활이잖아요?그러니 약간의 문제 앞에서도 큰 불안의 그림자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젊을 때부터,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훈련이 되어지길 바랍니다.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사는 것이 은혜로 사는 훈련입니다.
노년기의 성도님들은 더욱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해 불안이 사라지고 강건하시길 축복드립니다.
생활대책도 문제지만 나오미에겐 자기를 따라온 룻도 문제였습니다.
나오미는 오늘 중대한 결정을 내립니다.
1절,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여자가 복되게 안식하는 것은 당시로는 좋은 남편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룻을 보아스에게 시집보내기 위한 나오미의 작전이 펼쳐집니다.
나오미의 작전은 전에 잠깐 말씀드렸던 대로 이스라엘 율법에 있는 계대결혼과 기업 무르는 법에 근거한 것입니다.
계대결혼은 수혼이라고도 합니다.
계대결혼은 결혼을 계승한다는 뜻이고, 수혼은 형수나 제수와의 혼인이란 뜻입니다.
자식이 없이 누군가 죽었을 때, 그 가문이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죽은 사람의 형제가 미망인과 결혼해서 자식을 낳게 하는 법입니다.
요즘으로는 황당한 법이지만 남성 중심의 고대사회에서 과부가 된 여성들이 살아가게 한 최소의 사회보장제도 같은 것입니다.
또 친족의 기업을 물러주는 법이 있습니다.
이것은 경제적으로 어려워 조상들에게 물려받은 땅을 팔았을 경우 능력이 있는 친족이 그 땅을 되 사서 본인에게 돌려주게 한 법입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약속의 땅을 차지하고, 대를 이어 거기서 살아야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증표였기에 대가 끊어지지 않는 게 중요했던 것이죠.
이렇게 대를 이어주고, 기업을 물러 주는 사람이 원어로는 고엘입니다.
고엘제도는 고엘이 된 친척에게는 전혀 득이 없는 이상한 제도죠.
과연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 법을 제대로 지켰을지 의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법들을 주신 속뜻을 알고 있죠.
이사야서를 보면 하나님께서 ‘나는 너희의 고엘이다’ 라고 열 네 번이나 말씀하십니다.
우리말로는 나는 너희의 구속자다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우리가 죄로 인해 잃어버렸던 모든 것을 다시 되찾아 줄 고엘이 하나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누가 아무 이득도 없고 손해만 보는 고엘이 되려고 하겠어요?
고엘제도는 자신의 몸으로 우리 죄값을 대신 지불하고 구원해 주실 예수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삭줍기, 계대결혼, 기업 물려주기 같은 은혜의 율법이 베들레헴에 실제로 적용되고 있었습니다.
나오미 가정에도 고엘이 대를 이어주고 저당 잡힌 땅도 되사서 물러주어야 하는 것이죠.
베들레헴의 대부호 보아스는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으로 이 일을 행해야 할 법적인 의무가 있는 고엘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나오미가 이렇게 의무 이행을 요구하는 것은 합법입니다.
그런데 방법이 합법적인지는 좀 갸우뚱하죠?
보아스가 탈곡을 하는 날, 룻은 목욕하고 기름 바르고 의복을 갖춰 입고 탈곡마당에 숨어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아스가 자는 곳을 보아두었다가 잠든 뒤에 발치 이불을 들추고 거기에 누워 있으라는 것입니다.
대체 이게 며느리에게 지시할 작전입니까?룻이 들을 때 뭐 이런 시어머니가 있나 분노할만한 하죠.우리 생각엔 보아스를 만나서 고엘이 되어 달라고 의논하는 게 맞잖아요?
그러나 고엘제도는 율법으로 정해졌다지만 실정법은 아닙니다.
그래서 신명기25장에 보면 고엘이 의무를 거절할 경우, 신을 벗기고 그 얼굴에 침을 뱉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후로 그 사람의 집은 동네에서 ‘신 벗김 받은 자의 집’으로 불리게 되는 불명예를 안게 됩니다.
사람들은 물질적 손해보다 차라리 불명예를 택하죠.
그러니까 보아스에게도 정식으로 제안했다 거절당할 것이 두려웠을 것입니다.
게다가 룻은 모압여인이었잖아요?
그러기에 노골적인 분위기를 조장해 룻과 보아스의 결혼을 진행시켜 보려는 궁여지책을 낸 것이겠죠.
나오미와 룻에게 보아스와의 결혼이 이만큼 절실했던 것입니다.
벼랑 끝에 몰렸을 때 누구나 별의 별 방법을 다 생각하잖아요?
살아날 길만 있다면 뭐든 하겠다는 마음이 왜 안 들겠습니까?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나오미의 작전이 다 먹힙니다.
보아스가 나오미의 뜻대로 다 들어줍니다.
물론 이것은 나오미의 작전이 정당하고 선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미 룻과 보아스의 결혼을 통해 복을 주시기로 계획하셨기 때문에 방법이 어떻든 간에 이뤄진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도 나오미와 크게 다르지 않게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나름대로는 믿음 안에서 걸어가려고 노력하고 기도하며 주님의 뜻을 따라 살려고 합니다.
그런데 기도해 보면 하나님이 어느 길로 가라고 가르쳐 주시던가요?그렇지도 않으십니다.
결국 고민을 거듭하고 이런 저런 문제들을 고려하고, 거기에 어떤 환경에 몰려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어떤 일은 큰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사소한 이유나 감정, 체면 때문에 길이 결정되었던 적도 종종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작대기로 몰고 가듯이 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믿으시고, 믿음과 합리적 이성으로 판단해 스스로 결정하도록 자유로운 인생을 허락하십니다.
잘 선택하면 좋지만 잘못 선택하면 거기서 또 배우며 성장하는 것이고 실패한 자리에서도 하나님은 얼마든지 선을 이루실 수 있기 때문이죠.
바리새인처럼 자꾸 613개의 원칙을 만들어 틀에 맞춰 살 필요가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 인생이 조심스레 하나님의 뜻만을 따라 왔다기보다 다 인간적 결정의 연속으로 여기까지 온 것 아닌가요?
혹시 잘못 된 선택으로 길을 잠시 벗어난다 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반드시 궁극적인 하나님의 계획으로 이끄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주권적 인도하심을 믿고 지금 선택한 일을 스스로 책임지며 최선을 다하면 되는 것입니다.
단 오늘 나오미는 유일한 희망인 보아스를 향해 자신의 간절한 처지를 응급상황에 실어 전달한 것입니다.
나오미가 이런 절차로라도 보아스에게 알리지 않았다면 이 일은 언제 성사될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나오미에게 배울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열쇠는 우리의 고엘이신 예수님께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구원이라는 큰 답을 얻지만 살면서 흉년을 만날 때, 이삭줍기의 때에도 여전히 답은 예수님께 있습니다.
이삭줍기마저 끝날까 두려워하지 말고 예수님께 나가야 합니다.
추수기가 끝나고 곡식이 비어 가는데도 해결의 열쇠를 가진 분께 응급상황을 알리지 않으면 문제가 길어집니다.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고 인도를 구하는 태도로 산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선택을 은혜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2.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의 계획에 순종합니다.
5절, 룻이 시어머니에게 이르되 어머니의 말씀대로 내가 다 행하리이다 하니라
나오미의 작전도 이해가 안 되지만 이 말에 또 순종하는 룻도 이해가 안되죠.
상황 판단 못하는 어린 소녀도 아니고 기품 있게 살아 왔던 룻이 어떻게 여성으로서 이런 수치스럽고 불명예스러운 명령을 따릅니까?
룻이 나오미의 계획을 따른 것은 그의 말대로 어머니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나오미를 어머니로 모셔 평생 함께 하기로 결정했다면 공경하고 순종하기로 역시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계명은 피차 순종하는 것입니다.
가정이든, 회사든, 교회든, 함께 갈 사람들은 피차 순종해야 합니다.
사람에 대한 순종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순종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잘 순종하지 않는 자식들에겐 하나님에 대한 순종과 경외심을 먼저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만 시모에 대한 순종만으로 따른 것은 아닙니다.
룻이 보아스에게 발각된 뒤에 나누는 대화를 보면 알 수 있죠.
9절, 이르되 네가 누구냐 하니 대답하되 나는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 당신의 여종을 덮으소서 이는 당신이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하니
이건 나오미가 시킨 말이 아닙니다.
룻은 자기가 하는 일이 하나님의 율법을 근거로 한 당연한 권리임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진실한 믿음의 보아스 또한 이 율법대로 순종할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또 추수하는 여러 달 동안 매일 이삭을 줍는 룻과 수확을 관리하는 보아스는 틀림없이 자주 보았겠죠.
서로에게 호감이 있다는 걸 모르겠습니까?
룻이 나오미의 작전에 무작정 복종했던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렇게 룻은 숨을 죽이고 밤새 잠든 보아스의 발치 이불을 들추고 누워있었습니다.
늦은 밤 일군들과 추수의 기쁨으로 먹고 마신 보아스는 볏단 끝자락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8절입니다.
밤중에 그가 놀라 몸을 돌이켜 본즉 한 여인이 자기 발치에 누워 있는지라
우리 성경을 보면 보아스가 룻의 기척에 놀라 깬 것 같지만 원문은 좀 다릅니다.
보아스가 한밤중에 무언가에 깜짝 놀라 두려워 부르르 떨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보아스를 깨운 것입니다.
이 경외감 속에 몸을 일으켜 보니 발치에 누운 룻을 발견하게 된 것이죠.
하나님이 나오미의 무리한 작전에 일조하신 것 아니겠습니까?
사도행전12장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다 옥에 갇힙니다.
베드로가 군사 둘 사이에서 쇠사슬에 매여 자고 있는데 홀연히 나타난 천사가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서 깨우잖아요?
그런 상황인 것입니다.
만일 술에 취한 보아스가 밤새 골아 떨어졌다 아침에 깨었다면 이런 난감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룻이 자고 있는 보아스를 깨울 수도 없잖아요?
만일 보아스 스스로 깨었다 해도 타작마당에 숨어들어온 여자를 보고 ‘대체 왠 여자가 이런 짓을 하지?’ 이런 부정적인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뭔가 신비한 두려움에 깨어난 보아스는 발치에 누워있는 여자를 신중하게 응대하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이 이런 섬세하고도 중요한 부분을 맡아주지 않으신다면 우리가 계획하고 행하는 많은 일들이 성사되지 못합니다.
지금 간절히 기도하지만 죽은 듯이 잠들어 있는 그 무엇이든 하나님이 옆구리를 걷어 차 깨워주시길 소망합니다.
3. 그리고 두려워하는 룻을 거룩하게 사랑하는 보아스입니다.
발치에 누운 여인이 룻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은 고엘에 대한 요구임을 안 보아스의 말이 은혜입니다.
10절, 그가 이르되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가난하건 부하건 젊은 자를 따르지 아니하였으니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남편을 잃고 하나님의 날개아래 보호받으려 찾아 온 룻이 하나님이 법으로 정해 놓으신 은혜, 헤세드를 구하고 있잖아요?
이런 룻의 복을 빌어준다는 것은 자신의 의무를 다하겠다는 뜻인 것이죠.
또 보아스는 룻의 이런 행위도 오히려 헤세드라고 칭찬합니다.
룻이 젊은 자를 만나 새 삶을 시작하려는 게 아니라 죽은 남편의 기업을 잇기 위해서 나이든 자신을 선택했다는 것이죠.
또 1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고 이제 내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
죽은 남편의 가문과 나오미를 위해 보아스의 발치에 누웠지만 여자로서 룻이 얼마나 가슴 떨리고 두려웠겠습니까?
여자로서는 큰 성적 수치심을 느낄 상황이잖아요?
성적 수치심은 여성들에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문신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수십 년이 지난 일을 괴로워하다 미투 하는 것이죠.
보아스가 그런 룻의 마음을 얼마나 진심으로 위로하는지 놀랍습니다.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
이건 믿음의 용기이지 부끄러운 짓이 절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현숙하다는 단어는 여성을 높일 수 있는 최상급 단어입니다.
앞에서 보아스를 유력한 자라고 소개했던 바로 그 단어와 똑같은 말을 우리 말로 현숙하다로 번역한 것입니다.
현모양처, 정숙, 그런 의미가 아니라 능력 있고 강한 여성이라는 뜻입니다.
잠언 31장에 나오는 현숙한 여인도 같은 단어입니다.
성경에서 여성에게 단 세 번 사용합니다.
믿음을 따른 강한 여인이라고 보아스가 룻을 치하하는 것입니다.
여자로서 명예를 버린 행동에 두려워하는 룻에게 이 이상의 위로가 어디 있겠습니까?
내 자존심과 명예를 지켜내지 못할 때 참 힘들죠.
가난하고 힘이 없을 때 우리를 더 절망시키는 것은 자존심과 명예를 스스로 지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힘들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내 자식이 자존심 짓밟히고 명예를 못 지킬 때입니다.
하나님아버지도 자식인 우리가 그런 처지에 있을 때 우리를 깊이 동정하십니다.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고, 남보다 못한 대우를 받아야 하고, 남들이 나를 무례히 대하고, 자존감이 점점 무너질 때.
하나님은 그런 우리에 대한 긍휼로 마음이 동하십니다.
보아스가 룻을 위로하듯, 어떤 방법으로든 누구를 통해서든 우리를 위로하고 만져주십니다.
하나님이 아버지의 마음으로 그런 우리를 다 알고 계시기에 세상에서 그런 일을 만난다 해도 너무 속상해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에게 다 이해받는 것보다 하나님 한 분께 인정받는 게 복입니다.
사람들은 말 뿐이나, 하나님은 보상해 주실 능력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어쩌면 세상살이에 상한 우리의 마음들을 위로 하시는 지 모릅니다.
내 딸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그런데 보아스가 고엘의 역할을 해주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습니다.
보아스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베들레헴에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보아스는 내가 그 문제를 해결하고 네가 원하는 대로 행하겠다 말합니다.
13절, 만일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하리라 아침까지 누워있을지니라 하는지라
본문에서 드러나는 보아스의 인격과 사랑을 보십시오.
그렇기에 룻의 고엘 보아스가 예수님의 상징일 수 있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이 고엘의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 법을 경외하며 지키는 사람은 하나님을 그대로 드러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면 하나님의 마음을 압니다.
그 다음 말씀대로 지키며 예수님의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죠.
보아스가 베푼 사랑이 통속적이지 않고, 이기적이지도 않고 얼마나 거룩한 하나님의 사랑을 닮았습니까?
룻은 그날 거룩하게 사랑받는 게 어떤 것인지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우리 주님으로부터 거룩하게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이것을 통해 이해하고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보아스는 룻에게 특별한 선물을 줍니다.
15절, 보아스가 이르되 네 겉옷을 가져다가 그것을 펴서 잡으라 하매 그것을 펴서 잡으니 보리를 여섯 번 되어 룻에게 지워 주고 성읍으로 들어가니라
보리를 여섯 번 되어서 주었다고 하죠.
그리고 돌아온 룻에게 나오미가 어찌 되었냐고 물을 때 룻이 또 대답합니다.
17절, 그가 내게 이 보리를 여섯 번 되어 주며 이르기를 빈 손으로 네 시어머니에게 가지 말라 하더이다 하니라
보리를 여섯 번 되어 주었다고 반복해서 이야기하죠.
보리를 이만큼 주었다하지 않고 굳이 여섯 번 되어 주었다고 성경이 강조하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여섯 다음엔 일곱이죠.
이스라엘에서 일곱하면 제일 먼저 떠올리는 게 무엇이냐면 안식일입니다.
지금 보아스가 보리를 여섯 번 되어 주었다는 것은 약속의 증표인 것이죠.
그 다음 일곱 번 째의 안식, 혼인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그 뜻을 금방 눈치채잖아요?
됐다, 그 사람이 오늘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예수님은 우리의 고엘로서 자신을 값으로 주시고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영원한 구원에 이르기 까지 오늘도 우리를 위해 쉬지 않으십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나오미와 룻의 회복의 과정을 전해 주시는 것은 우리의 구원의 과정과 믿음의 일상을 이해하고 배우라는 것입니다.
나오미에게서 배울 것은 문제의 해결자에게 나갔다는 것입니다.
이삭줍기의 계절조차 끝나가고 삶에 여러 가지 염려가 다가올 때 해결의 능력이 있고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아버지께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주님은 기도할 때마다 안심하라고 보리를 여섯 번 되어주며 함께 하고 계심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천국가기 전까지 매일 이 은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룻에게서 믿음을 배웁니다.
내게 어떤 불이익이나 부끄러운 처지를 당한다 해도 말씀대로 믿고 순종하며 우리의 고엘이신 예수님을 따르시길 바랍니다.
보아스는 율법에 담아 놓으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대로 살았던 사람입니다.
매일 말씀을 연구하고 묵상한다면 성경 안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보아스처럼 그 말씀대로 실천하여 점점 우리가 알고 믿는 것이 인격에 새겨져 예수그리스도의 형상을 드러내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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