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 중에 마음에 좀 걸리는 부분은 없으셨습니까?
우리가 평소 알았던 예수님과는 좀 다르시다고 느끼신 분이 있을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에 심판을 내린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제자들도 이런 예수님의 행동이 좀 이상스러웠나 봅니다.
14절에 보면 제자들이 이를 유심히 들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21절을 보면 베드로사도가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 나무가 말랐나이다 라고 합니다.
굳이 저주라는 말을 쓴 것을 보면 베드로 역시 예수님의 유별난 행동에 저항감이 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형이 있었던 마지막 주간에 있었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먼저 본문의 전체적인 구조를 보면 앞에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심판하신 내용이 나옵니다.
그 뒤에 성전 안에 들어가서 물건들을 매매하는 상행위를 엄단하고 성전을 정결하게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 다음에 다시 무화과나무가 뿌리까지 말라서 죽은 내용이 나온 뒤 그 일을 교훈삼아 기도에 대해 가르치시는 내용으로 끝이 납니다.
어찌보면 각 사건이 관계성이 없어 보이는 것 같지만 무화과나무 사건 사이에 성전척결 사건을 배열한 것은 두 사건이 관계가 있다는 암시입니다.
또 무화과나무 사건으로 기도에 대해 교훈하신 것도 다 연결된 내용입니다.
복음서는 대체로 기자들의 기사문과 같은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실을 기술할 뿐이지 친절하게 그 이유를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해석이 필요한 것입니다.
성경전체의 관점에서 해석해야 하고 당시의 역사, 문화적인 배경들을 이해해야 내용에 대한 오해를 줄일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오늘 말씀을 잘 깨닫게 해주시고 각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도 듣게 되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먼저 살펴볼 부분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가 고사하게 된 내용입니다.
이런 내용은 우리를 좀 곤혹스럽게 합니다.
맨슨이라는 사람은 ‘이것은 변덕스러운 성미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이적이 낭비 된 이야기’라고 주님을 비난했습니다.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라는 책을 쓴 러셀이란 사람은 당연히 이 사건에 대해 날을 세웁니다.
‘이 이야기는 이상하다. 왜냐하면 무화과의 때가 아니기 때문이다.
당신도 무화과나무를 비난할 수 없을 것이다.
여기서 예수의 지혜도 덕도 느낄 수 없다.‘
슈바이처박사도 이 부분에 대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두고 불안과 정서적 혼란으로 정상이 아니었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마가는 지금이 무화과의 때가 아니라는 말을 뒤에 덧붙임으로 사람들의 반발심에 불을 지핀 격이 되버렸습니다.
예수님의 인품에 대한 신뢰가 쌓이지 않은 사람에게 이런 내용은 시험이 되기 십상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예수님의 행하신 일을 통해 주님의 인격에 대해 알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해하기 힘든 예수님의 언행에 대해선 무언가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일단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부분에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제대로 걸려 넘어지게 되는 것이죠.
논란의 여지를 만드는 이 사건을 순서대로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생애 마지막 유월절 예배를 위해 예루살렘을 찾아오십니다.
온 세상을 위한 유월절 양이 되셔서 속죄의 제물로 바쳐지기 위해서죠.
예수님은 스가랴서의 예언대로 나귀새끼를 타고 성안으로 들어오십니다.
당시는 다윗왕의 후손이 등장해 이스라엘왕국이 회복될 것이라는 메시야 대망 사상이 충천해 있었습니다.
삼년간의 사역으로 이미 백성들 사이엔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는 분위기가 팽배했기에 열렬한 환대를 받으며 입성하셨습니다.
11절에 보니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오신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셔서 모든 것을 둘러보십니다.
여기서 성전 안의 모든 것을 둘러보신 것이 본문 전체 해석의 실마리입니다.
하나님의 눈이 그 땅의 모든 것을 감찰하신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시기 전에 그 곳의 악독을 최종적으로 실사하러 내려오셨던 경우와 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개인이나 민족을 심판하실 때 행위를 주시하다 마지막의 결정적인 악행을 보고 심판을 확정하시는 것을 성경에서 많이 봅니다.
아합왕의 경우 나답을 죽이고 포도원을 뺏었을 때 심판이 선고됩니다.
사울왕의 경우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명령에 불순종했을 때 파멸의 언도를 받게 됩니다.
과거 이스라엘과 유다의 멸망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언행과 생각을 주시하시고 결정적인 사건을 통해 그 믿음을 달아보십니다.
그것이 종종 축복과 고난의 분수령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이 성숙해지는 것과 현실적인 축복이나 환란이 절대 무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달아보실 때 번번이 실패한다면 어떻게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복을 우리에게 내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직장 상사가 일하는 우리를 지켜보는 것을 의식하듯 하나님의 감찰하시는 눈이 항상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는 것을 의식하며 사는 게 복입니다.
우리를 보시는 하나님의 눈에 조금씩 더 인정받는 모두가 되길 소원합니다.
이스라엘은 오늘 마지막 감찰하시는 예수님의 눈에 역사적인 파멸이 확정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우화적으로 보여주실 사건이 그 날 아침 발생한 것입니다.
예수님과 열두명의 제자들이 유월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오셨지만 경비가 충분하지 못했습니다.
본문을 보면 숙박비가 비싼 예루살렘 성읍 안에 투숙하지 못하고 밤이 되면 성 밖 동네에서 주무시고 아침에 다시 성으로 들어가신 걸 알 수 있습니다.
식사조차 여유 있게 해결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12절에 보니 베다니에서 유숙하고 나오신 예수님이 시장끼를 느끼십니다.
아침을 거르셨던 것이죠.
참 이런 말씀을 대할 때 마다 언뜻 마음이 송구합니다.
예수님께서 끼니조차 어려울 만큼 가난한 삶을 사셨다니 그에 비하면 아무리 어렵다 해도 우리 의식주는 얼마나 호사스럽습니까?
부모님 댁의 궁색한 살림들을 대할 때 오는 속상함과 미안함 같은 마음이 주님의 가난한 삶을 대할 때도 느껴집니다.
마침 시장하신 예수님 눈에 멀리 잎사귀가 달린 무화과나무가 보였습니다.
열매가 있을까 기대하고 가까이 가셨지만 열매는 없고 잎사귀 뿐이었습니다.
마가는 이때가 무화과의 때가 아직 아니라고 덧붙입니다.
바로 이 말 때문에 많은 사람이 걸려 넘어집니다.
열매가 없는 나무를 향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여기서 사람들이 반발하는 것입니다.
때가 아직 아니라 열매가 없는데 그게 무화과나무의 잘못이냐는 것이죠.
단지 허기를 채우지 못해 죄 없는 무화과나무를 말려 죽이는 예수님의 행동은 납득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이 사건에서 중요한 두 가지 사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일단 무화과의 때에 대한 지식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무화과를 많이 생산하고 있죠.
무화과는 일년에 두 번 수확한다고 합니다.
저도 지난 주 충청도에 갔다가 보령에서 나오는 무화과를 몇 개 사봤습니다.
요즘 수확하는 무화과는 단맛이 적고 가을에 수확하는 무화과가 달고 맛이 좋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에서도 3,4월경에 잎이 돋을 때 대추만한 첫 열매가 열립니다.
바로 유월절 명절이 있는 본문의 때가 이 시기입니다.
잎사귀가 나왔다면 당연히 그 잎차례 곁에 쬐그만 첫 열매가 달려있는 것이 정상입니다.
아직 태양빛과 기후 조건이 좋지 않을 때라 첫 열매는 별로 맛이 없습니다. 수확은 하지 않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겐 요긴한 음식입니다.
옛날 우리나라 보리고개 때 먹을 게 없던 아이들이 밭에서 깜부기를 꺽어 먹던 때가 있었죠.
다른 보리 이삭이 여물기 전에 까맣게 올라온 곰팡이병에 걸린 이삭이 깜부기라고 합니다.
그걸로 허기진 배를 달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사루비아 꽃 따서 꿀도 빨아먹고 별거 다 먹었었죠.
먼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어렸을 적만 해도 이렇게 궁핍했었습니다.
그러니 2천년 전 예수님 시절에 얼마나 먹을 게 궁했겠습니까?
포도와 밀 수확 뒤 무화과 수확까지의 사이에 있는 춘궁기를 위해 하나님께서 무화과의 생태프로그램을 그렇게 짜 놓으신 것입니다.
미가 7장 1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재앙이로다 나여 나는 여름 과일을 딴 후와 포도를 거둔 후 같아서 먹을 포도송이가 없으며 내 마음에 사모하는 처음 익은 무화과가 없도다
이 작은 첫 열매가 얼마나 굶주린 사람에게 귀한지를 알 수 있죠.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허기를 좀 면하려 하셨듯이 나그네와 가난한 자들에게 마땅히 제공해야 할 열매가 없는 것은 나무에 문제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나무는 초가을 제 철에도 열매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위해 열매를 맺지 못한 나무는 잎사귀만 무성하게 키우고 땅만 더럽힌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실제 무화과는 엄청난 양분을 흡수해서 토양을 척박하게 만든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무화과나무는 일단 무죄가 아닙니다.
모든 생명을 위해 최상의 프로그램으로 피조세계를 창조하신 예수님께서 본분을 벗어난 이 나무 한그루를 심판 할 권리가 없으십니까?
예수님은 나무 한 그루 죽였다가 지금까지 정말 곤욕을 치르고 계십니다.
그런데 기록자 마가도 첫 열매 때를 알고 있었을 텐데 왜 아직 무화과의 때가 아니라고 덧붙여 이런 논란을 일으켰을까요?
여기서 무화과 때라고 말한 ‘때’에 주목해야 합니다.
마가가 사용한 ‘때’는 식물의 제철을 말할 때 ‘철’이란 단어가 아닙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시간, 하나님의 때를 말하는 카이로스란 단어를 썼습니다.
무화과 철을 말할 때 쓰는 단어로는 전혀 맞지 않는 말을 쓴 것입니다.
이걸 보면 마가가 어떤 의도를 갖고 덧붙인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화과사건과 이스라엘 심판의 관련성을 염두에 둔 말이 확실합니다.
그는 유대인입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견하신 예수님의 의도를 알았을 때 처절한 민족의 심판이 달가웠겠습니까?
나중에 복음서를 기록한 마가는 안타깝게 민족의 심판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민족의 열매가 없어 멸망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때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해석을 붙인 것입니다.
그 말 속에는 유대민족의 구원의 때가 반드시 올 것이라는 종말론적 의미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이 사건의 두 번째 이해 포인트는 마가의 생각대로 이 사건이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단지 무화과나무를 상대로 심판을 명령하신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던 임무가 박탈되고 역사 속에서 사라질 것을 이 사건을 통해 시청각적으로 확실히 보여주는 것이죠.
성경에서 무화과 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나무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호세아 9장10절을 보면 옛적에 내가 (이스라엘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같이 하였으며) 너희 열조 보기를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같이 하였거늘
이스라엘이 무화과의 첫열매로 생각했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을 택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들을 거룩한 백성을 삼아 하나님이 통치하시고 그들을 통해 만민이 하나님을 알게 하고 복을 받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무화과의 첫 열매처럼 미약하지만 완전하신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하나님의 구원을 드러낼 사명이 이스라엘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끝없는 돌봄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원하시는 열매를 맺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사야서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포도나무로 비유해서 열매 없는 이스라엘을 책망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기름진 땅에 포도원을 짓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고 열매를 기다렸지만 먹지도 못할 들포도를 맺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탄식하며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서 사리를 판단하라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으랴
그들을 축복의 백성이 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더 이상 할 일이 없이 모든 것을 다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도 더 할 것이 없을 만큼 전심으로 돌보십니다.
누가복음13장의 농장주인과 과원지기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며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셨음을 말씀하십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에 대해 농장주인이 과원지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과원지기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예수님이 얼마나 이스라엘의 멸망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셨는지 복음서에 예루살렘을 향해 우셨다는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지 않습니까?
무화과나무에 대한 심판도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도 절대 무정하고 냉혹한 심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모든 선을 다 베푸신 뒤 그래도 회개치 않는 세상에 대해 시행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여전히 나무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드시는 분들은 없으시겠죠?
하나님의 선하고 아름다운 창조의 섭리를 따르지 않고 악을 행하는 세상을 하나님은 종말에 반드시 심판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온전하게 이루십니다.
요한계시록 10장7절에는 일곱째 천사가 소리내는 날 그 나팔을 불게 될 때에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
여기서 우리들 또한 경각심을 갖고 우리 자신을 살펴야 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에게도 원하시는 열매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직 성령을 받지 못했던 옛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나라의 열매를 요구하셨다면 성령님이 내주하시는 우리 삶에 당연히 열매를 요구하시지 않겠습니까?
마태복음21장43절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는 자들은 그 나라에 맞는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성도들이 맺어야 할 열매들에 대해 거듭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나라에 속한 열매가 있습니까?
우리에게 성도의 증거인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가 점점 맺혀져야 합니다.
사랑,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입니다.
또 무화과 첫 열매가 생명의 양식이 되듯이 우리 안에 있는 예수님의 생명으로 또 다른 생명을 낳고 키우는 영혼구원의 열매가 있어야겠죠.
입술에는 찬양의 열매가 있어야 하고 물질의 열매로도 감사해야 합니다.
이런 하나님나라의 열매를 맺기 위해 힘쓰라고 성경은 권고하십니다.
풍성한 열매를 맺기 위해 단지 우리의 노력만으로는 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할 때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 우리가 항상 접속되어 있고 주님의 말씀을 깊이 새기며 진실한 마음으로 따를 때 가짜가 아닌 진짜 구원의 증거인 좋은 열매가 풍성하게 맺히는 것입니다.
성숙한 신앙의 열매와 인생의 복된 열매들이 풍성하고 아름답게 맺는 삶이 되기 위해 함께 더 주님을 따르기를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다음은 성전을 정결하게 하신 사건입니다.
무화과나무 사건 뒤에 예수님께서 성전 안에 들어가셨을 때 보신 광경이 무엇입니까?
열매없는 무화과나무처럼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한 이스라엘백성들의 참상이 성전 안에 적나라하게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제사장들은 성전 안에다 장사판을 벌이게 하고 임대료를 받고 있었습니다.
거룩하게 하나님의 임재를 바라며 예배해야 할 성전이 시끄러운 시장터가 되버린 것이죠.
역사가의 기록을 보면 먼 곳에서 제사 드리러 오는 사람들을 위해 감람산 기슭에 제물을 팔던 시장이 이미 네 군데나 있었다고 합니다.
이 장터는 산헤드린공회의 관할이라 이익이 그들에게 넘어갔습니다.
그런데 제사장들이 자기 권한을 이용해 아예 성전 안에다 상점을 차려 임대 수익을 올린 것이죠.
매일 우리가 접하는 뉴스와 기사를 보십시오.
맨 이렇게 자기 지위를 이용해 강도짓을 한 얘기들이잖습니까?
어떤 이는 정말 간이 부었나 싶을 정도로 터무니없이 챙깁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 두려워하며 예배할 성전에서도 그랬다는 것입니다.
제사가 아니라 젯밥에만 다 마음이 있다는 것이죠.
하나님이 아니라 물질과 사람중심의 편의주의가 예배의 대상이 되고 있었습니다.
성전 안에서 이러니 성전 밖이야 더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왜 이스라엘민족이 역사 속에 심판을 받아야 하는 지를 성전 안의 참상을 통해 변명하지 못하게 확실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전은 제사를 통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기는 곳입니다.
시편 50장 5 이르시되 나의 성도를 내 앞에 모으라 곧 제사로 나와 언약한 자니라 하시도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섬길 때 하나님은 그들의 보호자가 되시고 인도자가 되시고 복을 주시는 것이죠.
이 성전예배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형식적인 제물로 때우는 예배가 아니라 진실 된 기도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친근히 다가오는 것입니다.
신명기4장7절에서 모세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의 가까이 함을 얻은 나라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 스스로가 우리가 기도하러 나올 때 가까이 오셔서 들으시고 친근히 우리를 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고 마치 하나님이 귀먹고 눈먼 분인 것처럼 외람되게 섬겼습니다.
제가 미얀마에 갔을 때 많은 불교사원을 다녔는데 참 씁쓸한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미얀마 사람들의 모든 삶은 다 불교사원을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그렇게 가난한 사람들이 힘들여 번 돈으로 몽땅 금박을 사서 부처상에 붙인다고 저번에 말씀드렸죠?
돈이 없으면 천 원쯤 되는 꽃 한 줄을 사서 그 앞에 바칩니다.
그런데 부처상에 공양하는 그들의 행복한 모습이 거짓이 아닙니다.
정말 그 얼굴엔 만족과 행복이 가득합니다.
요즘 교회 안에서도 그런 모습은 정말 찾아보기 힘듭니다.
미얀마사람들은 밥싸가지고 와서 절에서 보내는 휴가를 최고로 칩니다.
제가 갔을 때도 사원마다 부처상 앞에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데 돌바닥에 하루 종일 마냥 앉아 있습니다.
금부처를 숭배하며 바라보다 바닥에 엎드려 기도하다 기둥에 기대고 쉬다 가, 이게 그 사람들의 가장 좋아하는 휴가의 모습입니다.
그냥 하루를 그렇게 부처상 앞에서 기도 하고 그 앞에서 지내는 것만으로 그렇게 행복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질투하시겠어요?
창조주를 몰라보고 엉뚱한 우상을 그렇게 연애하듯 섬기니 참 애가 타시는 것입니다.
그들의 삶에 부처는 먼데 있는 신이 아니라 친근하게 매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신이라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던 게 바로 그렇게 만민이 아버지 앞에 나와 기도로 하나님 앞에 친근하게 나오는 것 아닙니까?
현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고대하는 마음으로 교회에 나와 기도하며 그냥 하나님 앞, 성전이 좋아서 행복하게 머무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됩니까?
그 모습이 너무 부럽기도 하고 속이 상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본 장면은 여기저기서 거룩한 손을 들어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열고 기도하는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예배를 이용해 자기의 잇속을 챙기려는 검은 마음과 하나님의 자리에 자신을 앉힌 거만한 종교인들의 모습만 가득했습니다.
오늘 교회 안에서도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사모하는 열정보다 각자의 이익과 영광을 누리려고 모여드는 예배자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기도로 채워지지 않은 예루살렘 성전은 강도의 소굴이 되었습니다.
우리 몸이 성전이라 해도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않는다면 온갖 악한 영과 극성스런 죄악과 모든 불행하고 나쁜 것들이 몰려들어옵니다.
기도하는 성전이 아닌 강도의 소굴은 반드시 무너집니다.
헤롯이 46년에 거쳐 화려하게 짓고 자랑하던 이 성전은 30년이 지난 뒤 철저하게 파괴됩니다.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며 섬기지 않는 모든 성전은 개인이나 가정이나 교회나 나라까지 호된 하나님의 척결이 있을 것입니다.
바라기는 성전 된 우리들의 삶이 항상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열고 기도로 교제하며 친근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되길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다음 이어지는 기도에 관한 교훈은 좀 다 상세하게 다루어야 할 필요가 있어 다음 주에 이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가 진정 하나님 그 분을 간절히 사모하며 원하는 마음이 너무 부족하지 않았는지를 회개하길 원합니다.
날마다 우리를 향해 손을 벌리시는 전능하신 우리 주님을 너무 외람되게 섬기지 않았는 지 회개하며 성전 된 우리 심령을 아름답고 선하신 주님으로 가득 채우는 삶을 더 간절히 추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13년8월18일 주일설교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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