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풍랑을 잔잔케 하신 예수님 (마가복음4장35절-41절)

남수연 2011. 3. 22. 18:52

 

이번에 일본 쓰나미 장면을 하도 많이 보아서인지 오늘 본문의 장면이 다른 때와 좀 다르게 느껴집니다.

지진의 최초 진앙지였던 바다에서 배 한척이 소용돌이치며 바다 속으로 빨려들어 가는 모습을 TV에서 보셨을 겁니다.

그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의 공포를 생각하니 오늘 본문 속 제자들의 심경이 어땠을지 이해가 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탄 배가 거센 바람과 풍랑 속에서 위험하게 표류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죽음에 공포를 느끼며 폭풍과 싸우고 있는 데 예수님은 선체 뒤 고물에서 베게를 베고 깊은 단잠에 빠져 있는 좀 이상한 모습입니다.

이 극적인 장면을 주제로 화가 렘브란트는 풍랑속의 그리스도란 그림을 그렸습니다.

배를 집어삼킬 듯한 실감나는 파도와 극적으로 대조 되는 예수님의 고요함을 그리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완벽한 인성과 신성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역의 고단함으로 깊은 잠 속에 빠져든 것은 연약한 육신을 입은 주님의 인성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풍랑 속에 배가 요동쳐도 완전한 평안을 누리며 잠들 수 있는 것은 만물을 창조하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신성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인성으로 인해 깊은 잠에 떨어진 예수님이 동시에 자지도 졸지도 않으시는 하나님의 신성으로 깨어서 제자들을 지켜보고 계시는 신비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본문 말씀을 통해 험한 폭풍 속도 헤치고 나가야 하는 우리 인생의 항해에함께 하시는 주님을 만나기 원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귀와 마음을 활짝 열어주시고 2천년 전 주님 곁으로 우릴 인도해주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멘.

 

우선 갈릴리바다의 조난 사고가 일어난 배경을 좀 살펴보겠습니다.

본문3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날이 저물어 가는 데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갔다는 것입니다.

갈릴리 바다는 이스라엘의 북쪽 중앙에 위치한 남북거리가 25킬로나 되는 큰 호수입니다

호수 주변이 300미터가 넘는 산지로 둘러싸여 있어서 이 급경사를 타고 내려 오는 바람에 의해 순식간에 바다에 돌풍이 만들어지곤 합니다.

2천년 전과 마찬가지로 요즘도 강한 돌풍과 풍랑으로 어부들과 항해하는 배들을 위협한다고 합니다.

갈릴리바다 주변은 인구 밀집 지역인 데 제2성전 시대에 약50만의 인구가 살고 있었습니다.

좋은 기후와 비옥한 토지가 있고 풍광이 좋아 로마시대에도 휴양지로 각광을 받던 곳입니다.

예수님은 이 갈릴리호수를 중심으로 사역을 하셨습니다.

갈릴리호수의 서쪽은 유대인 생활권이고 동쪽은 이방인들의 도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갈릴리 서쪽 바닷가에서 사역을 하시고 바다를 건너 동쪽 이방인들의 마을로 떠나자고 하십니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 밤을 이용해 건너가길 원하셨던 것 같습니다.

주님의 사역이 쉴 틈도 없이 이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갈릴리 바다의 동서 거리는 12킬로미터나 됩니다.

노 젓는 고깃 배로 이동하기엔 꽤 되는거리였죠.

제자들은 교대로 노를 저으며 배에서 쪽 잠을 청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갈릴리 바다의 그 고약한 광풍이 몰아닥쳤습니다.

37절에 보니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항해하던 중이고 예수님이 타고 계신 데도 위기가 닥친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항해에서 우리는 아무 풍파가 없길 원합니다.

그러나 인생에 어떻게 풍파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예수님 안에서 사는 삶이라 해도 우리 인생에 크고 작은 풍랑을 피해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 삶이 잔잔한 항해를 하는 가 싶으면 어느새 작은 풍랑을 만납니다.

믿음으로 풍랑을 이기면 순항의 기쁨이 찾아오고 잠시 뒤엔 또 물결이 거세지기 시작하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전도서7장 14절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고 말씀하십니다.

피할 수 없는 인생의 풍랑을 겪어야 할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몇 가지 교훈을 얻습니다.

 

첫째는 위기 속에서는 풍랑을 잠잠케 하실 주님을 불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제자들은 거센 너울이 이는 바다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함께 타신 예수님은 깊이 잠들어 계십니다.

제자들은 처음엔 뱃사람의 실력을 발휘해 노를 저으며 풍랑과 맞섰습니다.

어부 출신이 많았던 제자들에게 갈릴리 바다의 이 험한 풍랑을 처음 당하는 것은 아니었을 겁니다.

풍랑을 벗어나는 데는 어부 출신의 제자들이 목수 출신의 예수님보다야 더 나을 것이라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우리들 생각도 그렇지 않습니까?

저도 아이들을 가르치는 문제에 있어서는 제 방식이 더 낫다고 생각하거든요.

예수님 방식대로 끈기 있게 사랑으로 대하다 결국은 화가 폭발해 버립니다.

사랑만으로는 요즘 세대의 청소년들 가르치기 힘듭니다.

내 일은 내가 더 잘 알고 내 방법대로 하는 게 더 낫다고 우리는 착각을 합니다.

제자들도 과거의 경험을 살리고 전공을 발휘해서 풍랑을 빠져나가려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생각대로 잘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태가 더 심각해져 물이 배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배가 가라앉아 다 죽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자 그때서 제자들이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웁니다.

38절에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때로 문제가 점점 악화되고 주님을 불러도 마치 주무시기라도 하는 것 같은 막막함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고대하는 응답이 오지 않습니다.

박종순 목사님께 한 청년의 어머니가 자기 아들이 이제 교회를 다니지 않겠다고 선언했으니 어쩌면 좋겠냐고 상담을 해 왔다고 합니다.

이유는 어려서부터 하나님께 한 기도가 한 개도 응답되지 않아서 더 이상 믿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키가 크게 해달라는 것과 대학 합격 기도를 외면했다는 겁니다.

기도 응답은 자연의 이치와 관계 된 사람들과 상황과 시간이 절묘하게 조합된 하나님만의 놀라운 섭리입니다.

모든 기도가 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응답되고 일정한 공식도 없습니다.

기도 응답은 우리 기도 행위에 대한 보상이 아니고 다만 하나님의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응답받지 못한 기도가 과연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만 의지했던 기도인가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오늘 제자들이 예수님 밖에는 방법이 없음을 깨닫고 노를 포기하고 주님을 깨웠을 때 주님은 즉각 응답하셨습니다.

인간의 방법과 꼼수를 모두 포기하고 하나님께만 매달리는 자녀의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아버지는 절대로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내 인생과 문제의 주권을 완전히 하나님께 맡긴 기도를 했다고 자신할 수 있을 때 그 때 응답이 없는 하나님을 떠나셔도 늦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여전히 한 손에 노를 붙들고 있는 한 그것을 놓을 때까지 응답을 미루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국민일보에 연재되는 역경의 열매에 채의0장로님이 소개된 적이 있습니다.

채장로님은 연매출 1조원을 바라보는 9개 자회사를 거느린 대의그룹 회장입니다.

GM대우를 비롯한 해외 자동차회사의 주요 부품 생산이 주업종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초등학교 하나밖에 없는 충남 서산 산골에서 자식을 키울 수 없다고 생각해 봇짐을 싸 가족을 이끌고 산을 넘었습니다.

믿음 하나를 붙잡고 집을 떠난 부친은 하나님께 기도하며 잡고 있던 지팡이를 하늘로 던졌습니다.

하나님, 이 지팡이 끝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가겠습니다.

우리를 인도해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당도한 곳이 대천이고 천막 친 교회 앞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가족의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채장로님은 대천농고 시절 믿음으로 세 가지를 하나님께 구했습니다.

첫째는 박사학위를 가진 교수가 되는 것, 둘째는 큰 회사의 사장이 되는 것,

세 번째는 교회를 백 개 건축하는 것이었습니다.

찢어지게 가난한 농고학생인 그의 처지에 얼마나 허황 된 꿈 처럼 보였겠습니까?.

그러나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최선을 다한 그의 기도에 하나님은 신실하게 응답해 가셨습니다.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고 겸임교수가 되었고 대우아메리카 사장을 지내고 기업의 회장이 되었습니다.

100개의 교회를 짓는 꿈은 아직도 진행 중인 데 현재 15개국에 41개 교회를 지었습니다.

그의 험란한 인생 여정에서 하나님은 언제든 간절한 그의 기도에 응답하셨다고 그는 고백합니다.

2006년 그는 평생 일군 기업을 송두리째 삼킬 듯 위협하는 풍랑을 만났습니다.

모든 것이 승승장구하던 어느날 자동차의 부품 생산라인에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가동되던 기계들이 연달아 경고음을 내며 작동을 멈추었습니다.

답답한 것은 도무지 원인을 찾아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수출했던 불량 부품들을 일일이 회수하러 다니는 와중에 해외 공장에선 자동차 조립을 못하고 있다고 납품 독촉이 빗발쳤습니다.

신용과 제품을 다 잃을 위기에 처했습니다.

아무리 기술진을 동원해 조사를 해도 도무지 원인을 알 수없는 불량품이 계속 만들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자신 있던 사업인 만큼 자기 힘으로 해결하려 안간힘을 썼으나 하루 하루 마음은 타들어 가고 나중엔 회사에 출근하는 것 조차 공포와 두려움이었습니다.

삼 개월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뛰어 다닌 그는 더 이상 버티는 게 불가능함을 깨닫고 공장 문을 닫기로 결정했습니다.

이젠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기도나 실컷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도원에 올라가 통곡하며 고생하며 쌓아온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하나님 이제 항복합니다. 하나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고함을 치는 데

그 순간 그의 마음 속에 커다란 울림 하나가 온 몸으로 전해졌습니다.

나는 네가 돌아올 줄 알았다. 이제부터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염려하지 말라, 조금도 걱정하지 말라

말씀을 듣는 순간 한줄기 희망의 빛이 보이고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찬송을 부르며 기도원에서 내려오는 중에 공장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기계의 결함을 찾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뛸 듯이 기뻐 회사로 돌아온 그는 이 큰 풍랑 속에서 건져주신 주님의 은혜를 감사하다 문득 이상한 점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원래 기계는 정상적으로 작동되고 있었는 데 세 달전 한 중년 남자가 찾아와 기계의 사용법을 자세히 지도하고 돌아갔던 것이 떠올랐던 것입니다.

그 풍랑을 몰고 온 그 남자가 도대체 누구였는지 지금도 미스테리라고 합니다.

우리 인생의 항해에 큰 풍랑의 배후에 도대체 무엇이 있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다급하게 부르짖는 제자들의 음성에 즉시 일어나셔서 바람을 꾸짖으시고 바다에게 명하여 잔잔하라고 하십니다.

왜 예수님은 아무 인격도 없는 무생물인 바람을 보고 꾸짖으셨을까요?

아기들이 걸음마하다 넘어졌을 때 처럼 방바닥을 치며 떼찌하는 겁니까?

이 꾸짖었다는 단어가 본문의 앞 절에서 귀신을 내어 쫒을 때 꾸짖었다는 단어와 동의어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밤에 불어 닥친 위협적인 돌풍 속에 관여한 사탄의 세력을 꾸짖으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욥의 시련을 기억하시죠?

사탄이 욥의 자녀를 다 죽이자 하인들이 와서 욥기1장 19절에 이렇게 욥에게 고합니다.

거친 들에서 큰 바람이 와서 집 네 모퉁이를 치매 그 청년들 위에 무너지므로 그들이 죽었나이다

욥의 자녀를 죽이려 거센 바람을 일으켰던 사탄은 오늘 예수님과 제자들을 죽이려 덤벼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을 믿는 우리 곁에도 어둠의 세력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우리의 주변에 풍랑을 만들고 파도를 만들어 위협해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계시록12장15에는 여자로 표현 된 교회를 향한 사탄의 공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 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 내려 가게 하려 하되

이번에 쓰나미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모든 것을 바라보며 사탄의 거대한 영적 쓰나미에 셀 수 없는 영혼들이 휩쓸려가고 있는 현실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와 주님을 믿는 우리들을 향해서도 사탄은 결코 포기하지 않고 덤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삶을 덮쳐오는 풍랑의 배후에는 악한 세력의 음모가 있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주고 받은 무심한 말에 서로 상처를 받게 되고 심각한 부부관계로 이어지는 것 역시 가정을 분열시키려는 어둠의 영이 배후에서 조정하고 있음을 파악해야 합니다.

이유 없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직장생활에 어려움이 오는 것도 상당 부분 악한 영이 우리를 시험하려 술수를 쓰고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풍랑이 일 때 주님만을 바라보고 도움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풍랑 속에서 자신의 힘으로 노를 젓느라 안간힘을 쓰던 제자들 처럼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내 힘으로 꿋꿋이 해나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셨죠?

사탄의 세력은 우리가 홀로 상대할 만만한 대상이 안됩니다.

주님을 의지해야만 작은 일이든 큰 일이든 안전하게 갈 수 있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다급한 요청에 즉시 깨어 바다를 잔잔하게 해주셨습니다.

우리의 시끄럽고 복잡한 모든 문제를 놓고 기도할 때 갑자기 모든게 잠잠하고 고요해지는 걸 느끼게 됩니다.

실제로 스코틀랜드 출신의 존 알렉산더 도위 목사님은 부흥회를 인도하러 다닐 때 종종 풍랑을 만났다고 합니다.

그때마다 예수님이 바다의 풍랑을 꾸짖듯이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풍랑아 잠잠하라. 풍랑아 떠나가라고 할 때 바다의 풍랑이 잠잠해 졌다고 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우리는 담대하게 풍랑을 대적하고 이길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타고 있는 인생의 배 안에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고 주님의 도우심을 의지하면 어떤 악한 풍파에도 안전합니다.

주님이 함께 타고 계신 우리 가정과 교회가 결코 침몰하지 않습니다.

이사야 43장 2절에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생의 풍랑이 다가올 때 보호와 안전을 약속하신 주님을 부르시기를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아멘.

 

두 번째 교훈은 인생의 풍랑을 지나며 나의 믿음이 견고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풍랑이 닥칠 때 비로서 우리 믿음도 드러납니다.

오늘 풍랑 속에서 제자들이 이렇게 외칩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이 말 속에 주님에 대한 제자들의 믿음이 고스란히 드러남을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아직 예수님이 누구인지 잘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아직 예수님을 신통한 능력을 가진 랍비로 생각하기에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배 안에 함께 타신 예수님이란 걸 모르기에 제자들은 물에 빠져 다 죽게 되었다고 야단 법석입니다.

이미 앞 장에서 나병을 고치시고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치신 주님의 사역에 함께 했던 제자들입니다.

그러나 오늘 바람과 바다 까지 다스리시는 주님의 신적인 능력을 보고나서야 이렇게 말합니다.

41절에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제자들의 부르짖음에서 그들이 예수님의 사랑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발각나 버립니다.

그들은 우리가 죽어가는 데 주님은 모른 채 하냐고 원망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 목숨까지 주러 오신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믿지 못하기에 눈 앞에 일이 망쳐지면 곧 예수님을 원망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과 상관 없이 멋대로 일하다가도 일이 잘 안되면 꼭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우리 인생의 풍랑을 하나씩 넘을 때 마다 어느새 우리는 조금씩 하나님에 대해 알고 주님의 사랑을 마음으로 알아가게 되는 줄을 믿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0절에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주님은 오늘 함께 있는 주님의 능력을 신뢰하지 못하고 곧 죽을 듯이 아우성을 치는 제자들을 나무라십니다.

너희가 언제까지 나의 사랑을 믿지 못하고 매번 그렇게 두려워할 것이냐고 책망하십니다.

주님의 능력과 사랑을 경험했으면 제발 다음에 벌어지는 상황에서도 안심하고 믿으라는 것입니다.

우리 집 강아지가 참 겁이 많습니다.

공동현관에서 누가 초인종을 누르면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에 올라올 때 까지 두려워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애처로울 정도입니다.

주인이 지켜주는데도 매번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는 걸 봅니다.

개의 머리 속엔 두려움만 프로그래밍 되어 있고 안전했었던 경험은 바로 뇌 속에서 삭제 되어 버리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강아지도 아닌 데 왜 매번 풍파가 닥칠 때 마다 두려워합니까?

주님의 사랑을 신뢰하지 못하기에 작은 물결만 일어도 우리가 두려워하고 낙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나치게 우리 인생의 형통만을 바라는 것도 오히려 우리를 매사에 소심하고 두려워하게 만듭니다.

주님은 우리 인생을 무풍지대로 인도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풍랑 속에서 함께 하시며 이길 힘을 주시고 지켜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풍랑을 이기며 우리 영혼이 비로서 담대하고 강해지는 걸 누가 부인할 수 있습니까?

앞서 말씀드렸던 채장로님은 명절 때 마다 교회를 세우기 위해 각 국에 단기선교를 떠나십니다.

2006년은 남태평양의 섬나라 피지에 교회를 세우기 위해 떠났는 데 그가 탄 비행기가 공항에 착륙하는 순간 굉음과 함께 기체가 요동하더니 다시 공중으로 튀어 올라갔습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습니다.

바퀴에 문제가 생겼구나 생각하며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공중을 몇 번 선회하던 비행기가 다시 착륙을 시도하는 데 똑같은 굉음이 심하게 들리더니 비행기는 급상승하고 기체가 심하게 흔들렸습니다.

기장은 다급한 기내방송을 하고 승객들은 두려움에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세 번째 시도에 굉음과 불꽃을 발하며 비행기가 착륙에 성공했습니다.

가슴 조리던 승객들이 모두 환호성을 지를 때 옆에 있던 한 외국인이 진지하게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왜 이런 위기 속에서도 그렇게 평안해 보이는가?

채장로님은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긴 사람들이다.

죽으면 하나님 품으로 가니 좋고 살면 하나님 일을 해서 좋은 데 뭐가 걱정이냐고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 끄덕 하더랍니다.

그의 견고한 믿음과 위기 속에서의 평안은 그의 평생에 주님과 함께 헤쳐나온 풍랑 속에서 얻게 된 줄로 믿습니다.

우리 인생의 풍파를 견디기가 참 고달프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 풍파를 인해 우리의 죄성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줄을 알게 되고 마침내 더 견고한 믿음으로 당당히 서게 될 줄로 믿습니다. 아멘.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풍랑 속을 헤치고 건너가자고 한 저 쪽에는 도대체 무슨 볼 일이 있으셨을까 생각해봅니다.

다음 장으로 이어지는 마가복음5장1절말씀을 보니

예수께서 바다 건너편 거라사인의 지방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거라사는 알렉산더대왕에 의해 세워진 헬라의 도시입니다.

이방인의 도시이죠.

그리고 2절에 보니 배에서 나오시매 곧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라

이 사람이 얼마나 흉악하고 사나운지 이어서 그 사람은 무덤 사이에 거처하는데 이제는 아무도 그를 쇠사슬로도 맬 수 없게 되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구원할 가치가 없다고 여긴 이방인에다 사탄에게 지배당해 손쓸 수 없이 귀신들린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이 주님이 바다를 건너온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옷도 벗어 던진 채 수천의 군대귀신에 붙잡혀 인격을 짓밟히고 무덤사이에서 살던 한 영혼을 구하는 것이 주님이 고단한 몸으로 바다를 건너신 유일한 이유입니다.

5장21절에 보면 예수님이 이 사람을 고쳐주신 다음 배를 타시고 다시 맞은편으로 건너가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이곳에서 하신 일은 단지 이 한 사람을 살리신 일 뿐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그것 아닙니까?

좌와 사망에 매여 종노릇하던 우리를 구하려고 오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주님의 교회와 우리가 해야 할 사명을 말씀하시는 줄 믿습니다.

아무리 사탄의 세력이 이 어두운 세상에서 득세하여 우리를 넘어뜨리려 해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영혼을 구하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살리시려는 주님의 간절한 마음이 오늘 본문에 실려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복음을 들고 땅 끝까지 갈 것입니다.

구원의 방주에 함께 탄 우리 성도님들께도 영혼을 구할 때 그 손 맛을 알게 하시고 기쁨과 감격의 길을 가게 해주시길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아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는 성도님들 인생의 항해길이 평탄하시길 축원드립니다.

그러나 악의 세력도 악한 인간의 죄성도 우리를 가만두지 않는 것이 인생입니다.

우리와 함께 배를 타고 계신 성령님께서 위기마다 도와주시고 기도할 때 마다 도움의 손길을 내미시는 줄 믿습니다.

걸음마를 하는 아기들 옆에는 항상 엄마의 손이 있습니다.

아기가 넘어지려하면 얼른 그 손을 잡아줍니다.

그러나 엄마들은 자신이 발을 헛디뎌 넘어지려할 때는 잡았던 아이의 손을 얼른 놓아버립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 손을 놓으시고 홀로 우리의 죄 값을 치르셨지만 풍랑 속에 부르짖을 때 우리의 손을 반드시 잡아주십니다.

오늘 밤 풍랑을 마다 않고 예수님이 찾으러 오신 것은 바로 죄와 사망에 매여 있던 나 자신입니다.

풍랑 중에 주님의 사랑을 믿고 의지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아멘.

오늘 교회와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습니다.

쓰나미에 쓸려간 영혼들처럼 우리 곁에서 영원히 떠나버릴 가족과 이웃들이 있습니까?

심판은 반드시 옵니다.

경고의 나팔을 불고 그들을 안전한 배로 끌어 올려 주어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주셔서 우리 영의 눈을 열고 사악한 파도에 휩쓸려 죽어가는 영혼을 구해내는 축복된 삶을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