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 (마가복음9장14절-29절)

남수연 2013. 7. 10. 23:50

지난 주 새생명전도축제에 수고하신 모든 성도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매일 전도하지 못해도 일년에 두 차례 전도축제를 지정하고 함께 노력하는 일은 정말 아름답고 복된 일입니다.

우리가 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가운데 교회도 견고하게 성장하고 성도들의 가정도 강성하게 세워지게 하시리라 믿습니다.

이번에 오지 못한 분들은 10월20일 2차 초청주일에 또 모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부담으로 생각하지 마시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우리의 구원을 위한 큰 기쁨과 감사의 축제로 정착되길 원합니다.

함께 동참한 모든 성도들께 하나님께서 좋은 상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오늘 본문은 순복음교회에서 무척 좋아하는 말씀입니다.

믿는 자에겐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

뭔가 주먹을 불끈 쥐게 하고 우리에게 큰 용기와 도전을 주는 말씀이죠.

오늘 설교를 순복음스타일로 할 수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장로교스타일로 하겠습니다.

그것보다는 성경이 말씀하려는 의도를 신중하게 따라가 보려는 것입니다.

우리도 순복음스타일로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믿음으로 도전했다 실패한 경험이 한번쯤은 있지 않습니까?

이 말씀 근거해서 ‘병이 나으리라고 믿습니다’ 기도해봤잖아요?

막혀있는 환경을 향해 꾸짖기도 하고 혹시 귀신이 그런가 쫒아도 봤습니다.

그런데 결과가 별로 신통치 않았던 트라우마가 성도들에게 다 있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이런 우리 트라우마가 깨끗이 치유되길 바랍니다.

오늘 사건을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자들도 꽤 혼이 났기에 이 사건을 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 사건을 잘 이해하기 위해선 특별히 전후 사건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복음서는 제자들이 각자 의미를 둔 사건을 독자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성령님의 감동에 의해서죠.

그런데 이 사건에서 특이할만한 사실은 이 사건을 마태, 마가, 누가가 다 기록했고 앞 뒤에 벌어진 사건까지도 똑같이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의 바로 앞에는 세 제자만을 따로 데리고 산에 올라가신 예수님께서 갑자기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된 변화산 사건이 나옵니다.

입으셨던 옷이 말할 수 없이 희게 변하고 광채가 예수님을 둘렀고 모세와 엘리야가 하늘에서 내려와 예수님과 말씀하셨던 그 내용입니다.

그리고 본문의 사건 뒤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세 복음서에서 다 똑같이 이 순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치 세 이야기가 한 세트 같은 느낌이 듭니다.

본문 자체에서 교훈을 찾아보아도 은혜가 되겠지만 성경에 기록한 의도가 있다면 그것을 살펴보는 것이 우선입니다.

분명히 변화산과 귀신을 쫒은 본 사건과 십자가의 사건이 관련성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고 느껴지지 않습니까?

먼저 본문의 전반부를 읽어보면 한 마디로 짙은 절망이 느껴집니다.

세상 속에서 일어나는 좌절과 실패와 고통들이 고스란히 벌어지고 있습니다.

혼신을 다해 가르쳐도 도무지 변하지 않는 사람들,

여전히 무능력한 제자들,

끝도 없이 밀려오는 불행한 사람들의 그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 비참함.

사랑하는 자식에게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 철저히 무능한 아비의 울부짖음.

이 모습을 보고 예수님께서도 절망에 가까운 깊은 탄식을 하십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빠져있지만 원문에는 오! 라는 탄식어가 붙어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이 아이를 고치신 뒤 예수님께서 바로 연이어 이런 비장한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리라

주님의 십자가의 수난은 바로 이 같은 인생을 건져내기 위해서라는 것을 가장 적절한 시점에서 분명히 표명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슨 자격으로 예수님이 인간의 죄를 대속하실 수 있습니까?

그래서 앞에 변화산의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본래의 신분인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로 변모하신 하나님의 아들만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사건을 문장으로 표현하면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저주아래 놓인 인간을 구원하고 사탄을 멸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다

이 사실을 명료하게 보여주시기 위해 사건들이 절묘하게 배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신다는 메시지를 담은 본문이 의도한 큰 그림입니다.

성경은 구원에 대한 책입니다.

어느 곳을 떼어서 본다해도 우리를 속죄하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본문의 귀신들려 고통당하는 아이와 아버지가 예수님의 은혜로 치유되는 기적은 우리가 구원받은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죠.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전에 다 보이지 않는 마귀의 농간에 고생하고 도저히 끊어내지 못할 죄의 근성대로 살지 않았습니까?

주님은 이런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고 승천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셨기 때문에 이제 완전히 다른 생명으로 거듭난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삶의 축복을 어디에 비교하겠습니까?

한 주간 바쁜 생활 속에서 지치고 시달리며 살다보니 구원에 대한 기쁨도 어느새 시들해지셨나요?

우리에게 아직 죄의 그림자가 우리 성품과 환경 속에 드리워져있습니다..

원래 우리가 그런 부정적이고 무기력하고 의심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면 매일이 그런 날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구렁텅이에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히브리서2장3절은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보응을 피하리요 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보통 구원이 아님을 자꾸 상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받게 된 말도 안되게 과분한 구원입니다.

지금으로서는 아무리 상상하려해도 상상조차 되지 않는, 진짜 완벽한 영원하고 복된 인생, 모든 죄와 악이 제거되고 진짜 인간답게 살아갈 그 삶을 보장받은 크고도 놀라운 구원입니다.

이 구원의 감격과 은혜를 매일 우리 심령에 새롭게 부어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본문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인 영적 구원에 대한 것으로 마칠 수는 없지요.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우리의 삶도 책임져주시는 줄 믿습니다.

본문을 보면 이 땅에서 우리가 시달리고 고생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속상해 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귀신에 짓눌려 고통가운데 있는 자들과 믿음이 없어 쩔쩔매는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믿음이 없는 이 딱한 세대여..도대체..

믿음이 없어서 그 고생을 하는 것은 주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아버지의 마음은 이 땅에선 그냥 매일 허덕이며 그럭저럭 살아가라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귀신이 짓누르는 억압된 삶과 질병으로 매일 시달리고만 있다면 그게 무슨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우리 영육간에 유익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오늘 말씀하십니다.

믿는 자들에겐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우리의 믿음에 따라 이 세상에 고생과 환란이 올 때도 넉넉히 벗어나고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처음에 말했듯이 문제는 항상 믿음이 부족한 우리들로서는 이 말씀이 단지 용기를 주는 구호에 그치고 마는 것 같이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믿어야 이렇게 모든 것이 가능한 삶을 살 수 있냐는 것이죠.

기도하고도 항상 의심이 들고 자신이 없는 우리 믿음은 영영 기도응답을 받을 수 없는 걸까요?

아닙니다.

무슨 국가고시도 아니고 내 문제에 대한 기도응답을 받는 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힘들고 엄격한 조건을 만들어 놓으셨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이 믿음으로 세상에서도 나쁜 환경과 악한 영을 이기고 복된 삶을 누리게 하신 줄 믿습니다.

그러면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능치못함이 없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도 다 이런 능력있고 복된 믿음을 갖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오늘 귀신들린 아이와 아버지의 형편이 얼마나 딱합니까?

가족 중에 우울증 걸린 사람 하나만 있어도 온 가족의 삶이 고통당하는 데 이렇게 흉측하게 귀신들린 아들이 있다는 것은 벗어날 수 없는 형벌입니다.

성경의 많은 기도 중에서 자식을 위한 부모의 간구는 정말 애닯죠.

자신의 일보다 더 애를 끓게 하는 것이 자식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태권도대회에서 아들이 편파 판정으로 패배한 것을 견디지 못해 목숨을 끊은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이 받은 상처를 달래려고 보낸 문자메시지를 보니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억울하게 생각말고, 아들, 더 단단해지자, 더 높은 곳을 바라봐 파이팅!’

그러나 그 일이 자기가 아닌 아들이 당한 일이기에 끝내 분을 삭이지 못하고 일을 저지르고 만 것입니다.

아마 자신이 그런 억울한 판정을 받았다면 어떻게든 이겨냈겠죠.

그러니 귀신들려 고통당하고 죽어가는 아들을 둔 아비의 심정이 매일 얼마나 타들어갔겠습니까?

같은 내용을 기록한 누가 복음에 보면 더 절절한 아버지의 말이 덧붙여 있습니다.

이는 내 외아들이니이다.

이 귀한 아들이 귀신에게 잡힐 때 마다 만신창이가 되고 상하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게다가 잠시만 방심하면 언제 불이든 물이든 뛰어들어 죽을지 모르니 한 순간도 맘을 놓치 못하고 살았을 것입니다.

아이는 점점 커가고 아버지의 힘으로는 보호하기도 더욱 어려워 갑니다.

TV에서 가끔 장애아를 키우는 부모들의 힘겨운 삶을 봅니다.

지체 장애를 가진 아들의 덩치는 점점 커가고 아들을 돌보는 부모는 점점 늙어가죠.

무거운 아이를 휠체어에 한번 옮기려면 늙은 어머니의 얼굴에서 땀이 비오듯 하는 광경들을 볼 때 얼마나 안쓰럽습니까?

자식으로 인한 무거운 짐을 진 부모의 마음을 하나님아버지께서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런 부모의 마음을 누가 창조했습니까?

바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그 하나님아버지의 마음을 그대로 부모에게 주신 것입니다.

귀신으로 고통 받는 가련한 아이를 보는 주님의 마음은 아비의 마음과 똑같습니다.

우리를 바라보는 하나님아버지의 마음이 항상 우리를 안쓰러워하시고 긍휼히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일로 우리가 고통당하고 있든 주님 앞에 가져오길 원하십니다.

물론 우리의 질병으로 간절히 기도해도 오래 동안 차도가 없을 때 마음에 상처가 됩니다.

이렇게 귀신들린 아이도 한 순간에 쫒아내고 죽는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께서 왜 우리 몸의 약한 것은 돌보지 않으시나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치유사역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인을 고쳐주신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을 불쌍히 여겨서 고쳐주셨다고 분명하게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많은 치료의 기적은 오늘날로 말하면 의료선교팀이 약이 없어 죽어가는 사람들을 치료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당시엔 주님의 기적이 아니면 그들을 치료해 줄 수가 없었잖아요.

지금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자연적인 이 세계와 법칙을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그러셨잖습니까?

의술은 하나님이 주신 모든 사람을 위한 일반 은총입니다.

의사가 고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고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의사가 고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이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길로 반드시 응답해 주십니다.

귀신들린 아이의 문제가 점점 절망적이 되 가던 중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됩니다.

한 줄기 희망을 갖고 예수님이 머무시는 곳을 찾아왔지만 마침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변화산에 올라가셨을 때입니다.

예수님이 안계시니 대신 제자들에게 귀신을 쫒아달라고 부탁합니다.

9명의 제자들이 달라붙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쫒으려 애를 썼지만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그 곤혹스런 현장을 생각하면 제가 얼굴이 뻘개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돌아와 보니 이렇게 야단법석이 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시자 이 일이 어떻게 될지 호기심에 가득찬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보자 귀신이 오히려 아이에게 경련을 일으키게 합니다.

아이는 사람들 앞에서 거품을 물고 엎드러져 구르기 시작합니다.

우리 생각에 예수님이 나타나시면 귀신이 썩 물러나야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귀신을 꾸짖고 명령해서 쫒아내셨습니다.

그러니 믿음도 없이 악령에게 십자가를 들이대고 마늘을 던진다고 쫒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귀신을 쫒아내는 것도 무조건 우리에게 똑같이 적용하면 안됩니다.

부흥 집회같은 데서 귀신 쫒는 장면을 가끔 봅니다.

대부분 바닥에 넘어져 거품을 흘리고 경련을 일으킬 때가 많습니다.

소름끼치는 소리로 안 나간다고 고래 고래 소리 지르고 아주 굉장합니다.

때로 귀신들린 사람이 어찌나 거세게 저항하던지 대여섯 명이 둘러서서 고전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귀신을 내쫒는 일이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믿음이 생길 경우엔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명해서 쫒아낼 수 있습니다.

그런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은 쫒아내실 수 있다는 믿음은 있으시죠?

그 믿음으로 악한 영을 떼어내 주시길 기도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겐 결코 본문의 귀신들린 아이처럼 인격전체를 장악하고 지배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과 감정에 종종 귀신들은 악한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합니다.

지나친 우울감, 엄습하는 불안감, 꼬리를 무는 부정적인 생각, 무력감과 게으름 이런 것들이 과도한 경우는 배후에 악한 영의 침입을 의심해야 합니다.

일차적으로는 내 책임이구요, 그 다음이 마귀 짓입니다.

성경은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감정과 생각을 파고드는 마귀를 대적하는 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물러가라고 소리칠 문제가 아닙니다.

마귀가 주는 생각과 감정을 의지적으로 단호히 거부하고 성령께서 원하시는 마음과 행동을 적극적으로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과 감정을 틈탄 악한 영을 대적하지 않고 계속 허용하는 것은 점차 마귀에게 눌리는 삶을 살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사건을 평소하고 좀 다르게 이끌어 가시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물으셨다는 말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

16절에 너희가 왜 이렇게 논쟁을 하고 있냐고 물으십니다.

21절에 아이가 언제부터 이리 되었냐고 또 물으십니다.

예수님이 무언가를 물으셨다는 경우는 성경에서 많이 나오지 않습니다.

다 아시니까요.

예수님께서 물으실 때는 모르셔서가 아니라 특별한 의도가 있으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일부러 물으신 의도가 무엇이었겠습니까?

아이 아버지의 믿음을 정확하게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지혜로운 질문 몇 마디하면 속에 있는 것 다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이 두 가지 질문으로 아버지의 빈약한 믿음이 여실히 드러납니다.이 아버지가 들은 소문대로 라면 예수님이 이러셔야 맞는 것이죠.

물어보지 말고 내려오자 마자 상황을 훤히 알고 계셔야 했죠.

‘어찌 아이의 귀신을 쫒아주지 못하고 이렇게 소동이냐’

그리고 아버지를 향해 이런식으로 말하셨어야죠.

‘아이가 세 살 때부터 귀신에게 붙들렸으니 그동안 참 고통이 심했겠구나’

그러면 믿음이 확 생기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를 들여다보던 예수님이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냐고 조곤조곤 물으시는 것입니다.

명의라면 척보고 ‘관절염이 십년은 되었군요.’ 이렇게 나와야 하는 것이죠.

제자들의 실패하는 모습과 예수님의 신통해 보이지 않는 질문이 오가는 중에 이 아버지의 믿음은 완전 바닥을 보이게 됩니다.

결국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시옵소서.’

그동안 예수님께 나와 병을 고친 사람들과 얼마나 비교가 됩니까?

혈루증 여인은 예수님의 옷만 잡아도 병이 낫겠다는 믿음이었습니다.

백부장은 가시지 말고 여기서 말씀만 해도 집에 있는 환자가 나을 거라는 믿음이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고 메시야란 것을 믿고 온 것이 아닙니다.

그냥 소문을 듣고 왔던 것이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올 때 다 똑같이 그런 믿음들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의 도움을 구하며 나오는 자들을 이렇게 구원받을 믿음으로 이끌어 주는 줄 믿습니다.

아들의 병을 고쳐주는 것보다 더 시급한 것은 이들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어찌보면 예수님이 믿음을 다 꺾어 놓으시고 믿으라고 요구하는 것 같죠?

그러나 그게 아닙니다.

믿음으로 혼동할 만한 요소들을 다 제거하신 뒤 그의 믿음을 정확하게 다루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이렇게 다루실 때가 있습니다.

마치 내 믿음이 송두리째 흔들릴 것 같은 상황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몇 가지를 거둬내시면 우리가 가진 것이 정말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었냐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오늘 사건을 통해 예수님은 ‘믿음’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정리해주십니다.

만일 예수님이 처음부터 신통한 능력을 보여주셨다면 이 아버지는 예수님이 아이를 고쳐주실 수 있으리라고 더 확실히 예수님을 믿었겠죠.

그렇다면 이것이 믿음입니까?

증거를 보고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고 단순한 시인입니다.

만일 증거가 없다면 그 다음엔 분명히 믿지 않을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단어 속에는 불확실하다라는 상황이 이미 들어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증거를 보여주시면 믿겠다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적과 신비가 나타나는 곳을 향해 떠돌아다닙니다.

그들은 언제나 목말라 합니다.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생애를 통해 인격적으로 마음과 의지를 다해 믿는 것이 그게 믿음입니다.

그런 믿음은 상황에 따라 좌우되거나 감정에 따라 변덕을 부리지 않습니다.

언제고 하나님께서 내 삶을 축복하고 인도하실 것을 알기에 한결같은 믿음의 태도로 언제나 여유가 있고 평안합니다.

아들의 치유에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듣자 아이 아버지가 절박하게 부르짖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믿음이 절박하게 필요할 때가 되야 간절해 지는 것은 어쩔 수 없나봅니다.

그는 다급하게 외칩니다.

내가 믿나이다.

그런데 그 다음에 뭐라고 말합니까?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두 말이 모순 아닙니까?

의지를 다해 믿어야 겠다고 생각하지만 그 순간 자신을 보니 믿어지지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믿어져야 믿지, 믿으려고 한다고 믿어집니까?

이게 우리가 기도할 때 느끼는 딜레마 아닌가요?

우리도 기도하고 그것이 응답될 것을 믿고 싶은 데 믿어집니까?

아픈 다리를 붙잡고 열심히 기도했는데 마음 한 구석에서 나을 것이 안 믿어지는 거예요.

이게 바로 이 아버지의 현재 심경입니다.

이 사람이 부르짖었을 때 드디어 그의 마음에 아들의 병이 나을 거라는 믿음이 확실히 생겼겠습니까?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의 아버지가 믿기를 결단하고 간절히 예수님께 매달릴 때 주님은 그의 간구를 듣고 아이의 귀신을 쫒아주십니다.

이 아버지의 마음에 응답에 대한 확신이 생겨서가 아니라 그의 간절함과 아이에 대한 긍휼함 때문입니다.

이것이 믿은대로 될지어다, 믿는 자에겐 능치못함이 없느니라 콤플렉스를 벗어날 수 있는 진리입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확신하는 것에 따라 응답이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기도한 내용에 대한 확신이 없어도 하나님아버지는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만일 기도하고 진짜 이뤄지리라 확신한 것만 하나님아버지께서 응답해주셨다면 우리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우리 아이들이 무엇을 사달라고 요구했을 때 아이들이 내가 사줄 것을 꼭 믿어야만 사줍니까?

아이들이 내 재정형편을 믿건 안 믿건, 기대하건 안하건 우리가 판단해서 그게 아이들에게 필요하다면 사줍니다.

부모니까 우리는 아이들 문제를 책임집니다.

하나님아버지께서 그러십니다.

우리가 어찌보면 주눅드는 말씀이 이 믿는 자에겐 능치못함이 없느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순복음교회 교인들이 전유물인양 사용하고 있는 것이죠.

이제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기도응답은 자기 최면도 적극적 사고 방식도 아닙니다.

인간의 본성은 불확실한 것에 대해서는 믿음이 안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무조건 기도한 것을 믿으라고 해서 믿어지지가 않는 것이죠.

우리가 믿는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셨고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내 감정과 믿음의 상태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내 기도를 들으시고 기쁘게 응답하실 하나님아버지께 항상 주목할 때 우리 기도에 능치 못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만일 기도하고 확신하는 것만 응답 된다면 항상 확신이 들지 않는 우리의 기도는 언제 응답받겠습니까?

오히려 기도를 포기하기가 쉽습니다.

사실 믿음이 오래될수록 지금 내가 기도하는 것에 대한 확신이 점점 더 없어지는 것을 느끼게 되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과거에 내가 얼마나 엉뚱한 것을 구했는 지, 그리고 하나님은 어떻게 좋은 것으로 응답해주셨었는 지 데이터를 갖고 있거든요.

그러니 지금 구하고 있는 문제들이 정말 내게 좋은 지 어떻게 압니까?

꼭 내가 원하는 방법과 때를 고집할 필요가 뭐가 있습니까?

그냥 내 사정을 하나님아버지께 아뢰고 좋으신 아버지를 믿어드리면 하나님께서 모든 계획을 가장 완벽하게 인도해주시는 줄 것만을 점점 믿게 됩니다.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한 트라우마가 다 사라진 줄 믿습니다.

응답을 받지 못할 것을 두려워 말고 우리의 형편을 진지하고 끈기 있게 하나님아버지께 기도하고 구하십시오.

예수님은 다만 끈기 있게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좋은 것을 판단하셔서 반드시 가장 좋은 방법으로 응답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이 불확실한 세상에서 모든 삶을 우리가 책임지고 꾸려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오래 교회를 다니고 말씀을 들어도 하나님아버지와 또 주 예수님에 대해 개인적인 체험이 안 생깁니다.

믿기는 하지만 그래서 세상사람들과 똑같이 살 게 되는 것이죠.

오늘 산 아래서 온갖 야단법석을 떨고 있는 이 무리들처럼 그렇게 고된 삶을 혼자서 살아내고 있는 것입니다.

힘들면 하나님아버지 앞에 가서 울고, 아프면 예수님께 고쳐달라고 매달리고, 내일의 계획을 말씀드리며 묻고, 그런 가운데 점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나를 어떻게 사랑하고 섬세하게 인도해가시는 분이신지 믿음과 신뢰가 쌓이는 것입니다.

우리 같은 티끌 같은 존재들이 어떻게 저 거룩하고 전능하신 하나님과 교제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기꺼이 교제를 해주십니다.

조금씩 그렇게 하나님과 교제해 가면서 내 소속이 점점 분명해 지는 것입니다.

이 땅이 아니라 저 천국이라는 걸 내 온 몸과 인격이 알아가요.

그러므로 하나님아버지께 더 담대하게 구하게 되고 응답에 대해 더 든든하게 믿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내가 아무 것도 안하는 게 아닙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기도하고 나면 우리가 더 하나님의 사인에 집중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것을 확실히 믿기 때문에 그 응답이 어떤 방법으로 올지 흥미진진하게 기대하게 됩니다.

작은 조짐과 환경의 변화와 내 마음에 생기는 소원, 또 만나는 사람들을 주시하며 하나님의 인도에 따라 지혜롭게 반응하게 됩니다.

우리 마음의 모든 소원과 계획을 마음껏 하나님께 기도하기 원합니다.

반드시 그 방법대로 되리라는 확신이 안 생겨도 좋습니다.

그냥 하나님을 신뢰하며 어떻게 우리의 기도를 이끌어 주시고 응답해 주시는 지를 기대하십시오.

하나님의 생각이 내 생각과 꼭 같지 않은 것이 이상한 게 아닙니다.

어찌 내 얕은 소견과 짧은 판단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꼭 같겠습니까?

오늘 제자들의 실패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믿음의 부족이고 믿음이 결핍된 것은 기도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말씀하십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사역 틈틈이 항상 기도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기도하는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변화산에서도 제자들은 잠들어 있었고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제자들은 잠들어 있었습니다.

우리 삶엔 늘 위기가 오고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들은 자주 부족해 집니다.

보이지 않는 내일은 답답한 안개처럼 우리 마음을 무기력하게 합니다.

기도 외에는 이런 인생고를 몰아낼 수 없습니다.

하나님아버지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고 믿는 자들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소망을 품고 담대히 기도하시길 축원드립니다.

반드시 우리 계획을 가장 멋진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6장 24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