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만민이 기도하는 집2(마가복음11장15절-25절)

남수연 2013. 9. 5. 10:01

지난 주에 이어 같은 본문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기도하지 않는 믿음은 이상한 것입니다.

믿음은 언제나 기도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므로 기도하게 되는 것이고 우리가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이유 21가지’라는 책이 있습니다.

성도들이 기도를 하지 않는 이유가 21가지나 되더군요.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앞세우고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분초마다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가면 갈수록 더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기도는 거듭난 새 생명의 숨쉬기나 같습니다.

거듭난 생명이 기도로 하나님의 생명을 계속 공급받지 못하면 그 영혼은 점점 파리하게 질식해갑니다.

그래서 성령으로 거듭난 영혼은 성령의 격려하심을 받으며 스스로 자가호흡을 하려고 애를 쓰게 되어 있습니다.

되던 안되던 기도하려고 애를 쓰고 기도하지 못하면 답답함과 마음에 미진함을 느낍니다.

누가 기도하지 않고도 여전히 사는 것이 괜찮다면 그것은 둘 중 하나입니다.

그 영혼이 아직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 상태이든지 영혼이 숨쉬려고 절박하게 요구한다는 것을 느끼지 못할 만큼 육적인 성도라는 것이죠.

성도들이 이생에서 두 가지 입장을 취하며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지만 단지 내게 있는 자력으로 인생을 경영해 가는 것입니다.

그렇게도 세상적으로 잘 해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에 펑크가 날 때, 내 힘과 능력으로 컨트롤할 수 없는 한계에 부딪힐 때 그 삶은 비참하게 깨어집니다.

펑크 난 타이어로 끝까지 달릴 수 있는 차는 없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대로 기도하며 이생을 살아가면 헤아릴 수 없는 축복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의지할수록 내 삶의 안전을 느끼게 됩니다.

매일의 삶에서 코앞에 현실과 감정에 휘말려 수도 없이 지옥을 오가는 일이 결단코 없습니다.

왜 내 능력도 없는 데 될 것 같은 소망이 생기고 알 수 없는 생명력이 깊은 곳에서 그렇게 솟아오르는지요.

기도하며 사는 인생은 즐겁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 우리를 도우십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스스로 빼앗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돕지 못하시게 하는 것이죠.

지난 주에 예수님께서 성전의 모든 강도짓을 폭풍처럼 다 쓸어버리시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역으로 말하자면 예루살렘성전이 무너지고 유대인의 역사적 심판이 있었던 이유는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기도하지 않는 개인이나 국가는 망합니다.

분명히 영적이든 육적이든 망해갑니다.

이웃나라 일본을 보면 그런 안타까운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까?

기도하는 사람이 없는 민족의 암울함이 일본을 뒤덮고 있는 것 같습니다.

민족의 정신세계가 집단으로 뭔가에 홀려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원전사고는 점점 풀 수 없는 재난으로 번져가는 데도 세상이 다 아는 뻔한 진실을 은폐하려는 양심이 마비된 정치인들을 보면 무섭습니다.

우리 개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기도로 우리는 영육간의 빈곤을 벗고 풍성한 유산을 누리게 됩니다.

제가 아는 분은 재정도 가정도 건강도 정말 파산상태에 있던 때가 있었습니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이를 악물고 2년 정도를 오직 기도로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몸은 피곤해 젖은 솜처럼 무거워도 이를 악물고 탈출구를 위해 매일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던 2년이 지나고 나니 그때부터 일이 서서히 불리기 시작하더랍니다.

신기하게 마음먹으면 길이 열리고 마음먹으면 그 일이 바로 눈 앞에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감동시켜 우리의 어떤 형편이든 개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의 영혼과 행복을 갉아먹는 마귀의 세력을 이길 수도 없습니다.

우리 주변에 늘 있는 마귀의 공격은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닙니다.

마귀의 교묘한 수작은 오직 하나님의 차원에서만 감지할 수 있기에 기도로 보호받지 않으면 걸려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마귀의 세력에 대해 기도 외에는 이런 류가 나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잖습니까?

마귀가 성도들을 망하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그래서 기도를 방해하는 것입니다.

요즘 기도가 잘 되지 않는다면 마귀의 전략이 성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기도에 대한 관심이 더 생기고 꾸준히 기도가 잘 되고 있다면 우리가 영적으로 승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기도의 막강한 권세를 약속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간곡한 주님의 교훈은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기도를 시도해 보았지만 침묵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기도를 포기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끈기있게 기도하라는 말씀도 주신 것입니다.

바쁜 생활과 육신의 게으름으로 기도생활을 못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내 평생에 기도하리라는 강력한 결심을 할 수 있도록 성령께서 기도의 축복을 깨닫게 해주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래서 매일 기도응답의 재미와 기쁨으로 충만한 믿음생활이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아멘.

 

먼저 본문에서 몇 가지 의문점을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지난 주에 살펴본 대로 수난주간 삼일 째 아침 다시 예루살렘성으로 향하던 예수님과 제자일행이 어제 그 무화과나무 곁을 지나갑니다.

그때 21절에 보면 베드로가 저주하신 무화과 나무가 말랐다고 예수님께 말씀드립니다.

아직 베드로사도는 무화과나무가 말라죽은 사건이 이스라엘의 심판을 상징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베드로에게는 단지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나무가 저주받은 사건이 이상할 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질문에 약간 핀트가 안 맞는 것 같은 답변을 하십니다.

믿는 자들은 이보다 더 파격적인 기적도 행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로 던져지라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 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이 말씀 안에서 우리는 두 가지 거북한 진실을 대합니다.

한 가지는 너무나 비현실적이고 불가능한 기도응답을 약속하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고 이루어졌다는 말 들어보신 적 있습니까?

단지 기도의 중요성을 과장되게 표현하신 것일까요?

또 한 가지 거북한 부분은 무화과나무가 말라죽은 일과 산을 옮길만한 큰 믿음의 연결이 부자연스럽다는 것입니다.

좀 민감하신 분은 느끼셨을 것입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역시 걸려 넘어질 내용입니다.

한 안티기독교인이 이 말씀을 비난한 글을 읽었습니다.

‘믿음만 있다면 나무 정도 죽인 것은 문제도 아니라 하니 대단한 하나님의 아드님이시다’

이렇게 오해 할 소지가 있는 부분입니다.

물론 우리는 지난 주에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가 심판을 받은 두 가지 이유를 잘 살펴보았습니다.

마땅히 하나님의 창조섭리에 따라 열매를 맺어야 할 시기였다는 것과 그 사건이 똑같이 열매가 없는 이스라엘의 심판을 상징한다는 것이었죠.

그렇다하더라도 무화과나무가 말라죽은 부정적인 기적을 긍정적인 큰 믿음으로 연결시킨 것은 어쨌든 좀 어색한 게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이런 화법이 성경에 많이 나타납니다.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불의한 재물에 충성하란 말씀입니까, 아닙니까?

예수님의 말씀 중에는 이렇게 전개가 엉뚱한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문제의 본질을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하게 하고 더 깊은 진리를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죠.

오늘 말씀의 결론도 보세요.

갑자기 용서의 문제로 이 사건이 끝이 납니다.

예수님이 논리적이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까?

이런 것들이 우리의 지혜와 예측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지식의 단편들입니다.

성경에서 오해가 되는 부분들은 단지 우리의 이해력에 한계 때문입니다.

먼저 오늘의 이 난제를 풀어야 본문의 내용이 오해없이 매끄럽게 풀릴 것입니다.

이 사건의 전체적인 흐름을 봐서 산이 들려 바다에 던져지리라는 말씀은 긍정적인 의미보다는 역시 파멸의 의미로 보아야 합니다.

산이 바다에 던져져 가라앉아버렸다면 그건 당연히 산의 파멸입니다.

무화과나무 고사, 성전숙정, 산이 던져짐이 모두 하나님의 구속역사의 절반을 이끌어왔던 이스라엘 사명의 종결을 상징한다는 것이죠.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 근거는 본절에서 말씀한 산은 아무 산이나가 아니라정확하게 ‘이 산’이라고 지목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예수님과 제자들이 서있는 바로 이 성전이 있는 성전산을 말씀합니다.

이 성전산이 통째로 바다에 던져진다는 것은 성전예배가 완전히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진짜 성전되신 예수님 안에서 참 예배가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죠.

그 그림자였던 예배, 그나마 철저히 실패해버린 그 동물제사를 통한 예배는 종결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내용을 무화과나무가 말라죽은 사건과 연결시키신 것입니다.

24절의 말씀은 허황되고 과장되게 기도응답을 보장한 내용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심판과 성전제사의 종결을 말씀하는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일을 왜 다른 누군가, 즉 믿고 의심하지 않는 사람들이 해야 할 것으로 넘기시는 지 의문이 남습니다.

즉 제자들에게 성전제사의 종결과 예수님 안의 새 언약을 통한 예배를 전하고 이룰 사명을 위임하신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 말을 듣고 있는 제자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이들은 기도할 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기도해야 할 결정적인 순간에 잠들어 있던 사람들이고 기도가 빈약해서 소년에게 들린 귀신을 쫒지 못해 진땀을 뺀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런 제자들에게 주님이 하신 일 보다 더 큰 일을 도전하라는 것은 허망하게 느껴질 뿐입니다.

이 내용의 해석의 실마리는 그 앞에 있는 ‘하나님을 믿으라’입니다.

이 모든 구원의 역사는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 중에 기적을 베푸시고 나서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행하신다고 말씀하셨던 것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제 주님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류의 죄를 속죄하신 뒤 승천하셔서 본래 영광의 자리로 가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전권을 제자들에게 위임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하셨던 방법대로 아버지의 뜻을 믿고 행하면 제자들이 주님이 하셨던 일을 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실제 그 무능해 보이던 제자들은 성령을 받은 뒤 놀라운 능력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훌륭하게 이루어 나갔습니다.

이 명령과 약속은 여전히 지금의 세대에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과거와 똑같은 내 삶에 플러스 구원을 주신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작던 크던 예수님의 이 사역을 위임받아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약하고 실패하는 우리들을 통해 하나님은 기도하게 하시고 그 기도를 통해서 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나라는 하나님 단독으로 개인기를 발휘해서 세우지 않으십니다.

하나님나라의 건설에 우리가 거들게 하신다는 것이죠.

그것은 그만큼 우리를 인정하시고 배역을 주시는 아버지의 놀라우신 사랑이요 하나님나라의 신비입니다.

기도는 이 일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무능한 우리 손에 쥐어주신 놀라운 능력인 것입니다.

놀라운 일을 기대하십니까?

그렇다면 놀라운 기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서, 그리고 내 삶을 향한 하나님의 가장 선하고 온전하신 뜻을 발견하고 그 길로 달려가기 위해 기도의 손으로 그 약속을 따내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복드립니다.

 

다음은 기도에 대한 일상의 유익과 영적 원리들을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기도 응답의 보장은 영적인 문제 뿐 아니라 육신의 모든 일에도 제한이 없습니다.

24절에 보면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무엇이든지는 우리의 기도의 영역에 제한이 없음을 말씀합니다.

다만 이 말씀이 앞 부분과 연결되어 이미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여야 한다는 것이 전제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무조건 다 들어주신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어떤 분이 실제로 박종순목사님께 이런 신앙상담을 해왔다고 합니다.

자기가 이 말씀을 믿고 6개월 째 복권을 사서 기도 하고 있는 데 당첨이 되지 않으니 계속 사야되는 지 말아야 되냐는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우리는 이성적이든 신앙적이든 타당성 있는 기도인지 아닌지 정도는 압니다.지나치게 요행을 바라는 기도는 스스로가 생각해도 부끄럽습니다.

반면에 산 같은 장애물이 도저히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해도 하나님의 뜻이면 신기하게 점점 믿음이 생기고 기도에 열정이 생기고 결국 이루어집니다.

우리교회를 개척할 때도 참 비관적인 상황이 많았는데 기도를 할수록 신기하게 장애물이 눈에 보이질 않는 것입니다.

저도 꽤 따지고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는 성격에다 모험은 아예 근처에도 안가는 사람인 데 그냥 믿음으로 돌격해 버린 것입니다.

우리 기도가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단지 욕심에 의한 것이면 점점 시들해지고 기도제목도 슬그머니 사라져버립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는 무엇일까요?

의식주를 위한 기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 내 직업과 진로를 위한 기도,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기도, 질병의 치료를 위한 기도, 우리 믿음의 성장과 성숙을 위한 기도,

세속적인 영역이나 영적인 영역이나 선한 것은 다 기도의 제목이 되고 하나님의 뜻이 됩니다.

빌립보서 4장19절은 말씀합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 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우리가 몸의 필요를 먼저 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육적인 것을 기도하지 못하는 사람은 당연히 영적인 것도 구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도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기도에 순종해서 구하기만 한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냐 아니냐는 그 다음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중 세부사항은 조화를 이루며 기도하게 하십니다.

그러니 무엇이든 믿고 기도를 시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우리는 응답하신다는 약속에 근거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응답해주지 않을 거면 왜 예수님께서 기도하라고 하시겠습니까?

그런데 이 말씀은 한편 약속을 받았어도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약속 받은 것도 기도해서 얻어내는 것이 성경의 원리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받을 수 있는 항목은 없습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는 말씀은 기도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걸 향해 무한정 쫒아가지 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기도문에서 일용할 양식을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아신다고 했지만 기도해서 구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무엇을 약속하셨습니까?

하늘의 별과 같이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며느리인 리브가가 아기를 갖지 못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이삭이 잉태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고 나서야 리브가가 아기를 갖게 됩니다.

이미 약속 된 축복을 받기 위해서도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를 통해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70년 뒤 귀환할 것을 약속하셨지만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그래도 너희가 그렇게 되기를 기도해야 할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약속의 말씀을 바로 깨달은 사람이 바로 다니엘이고 그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기도합니다.

그 때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응답을 갖고 다니엘에게 왔었습니다.

성경의 생명과 경건에 속한 수많은 약속들을 믿음의 기도로 받아내는 성도님들 되시길 축복드립니다.

기도는 이미 약속된 것들을 받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불가능한 상황을 유리한 상황으로 바꾸기 위해서도 역시 필요합니다.

한나는 자식이 없는 처지를 간곡하게 하나님께 기도했고 사무엘과 그 형제들을 받아냈습니다.

히스기야는 죽을 병에 걸린 자신을 위해 눈물로 기도해서 15년의 생을 연장받았습니다.

야곱이 얍복강에서 눈물로 기도의 씨름을 했을 때 4백명을 이끌고 쫒아오던에서의 마음에서 적개심이 눈 녹듯 사라졌습니다.

우리가 사실 왜 매일 기도하게 됩니까?

이렇게 우리 앞을 가로막는 산이 있기 때문입니다.

고난이 우리 앞을 막아서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죠.

고난은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직면한 문제입니다.

욥기14장은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생애가 짧고 걱정이 가득하다고 말씀합니다.

인생에서 햇빛만을 기대하고 편안과 즐거움만 바라는 사람은 인생을 전혀 모르는 무지의 극치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언제고 우리 앞에 고난이 들이닥칠 때 실망감으로 무너지지 않으려면 매일 기도를 통해 도우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나와 가까이 계신지를 알아가야 합니다.

잠깐씩 하나님 앞에 가서는 하나님과 친숙해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도 잠깐 방문하고 돌아가는 사람과 친해질 수가 없잖습니까?

우리의 기도가 너무 짧고 허약하다면 고난이 올 때 힘이 되지 못합니다.

또 매일의 우리 삶이 걱정거리에 휩싸이지 않고 평상적인 마음으로 살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걱정은 인간에게 너무나 자연스럽고 너무나 강해서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그것을 물리칠 수 없습니다.

걱정하는 생각과 근심이 우리 영혼을 공격하면 순식간에 낙망하고 무기력과 두려움이 우리를 삼켜버립니다.

기도의 거장 이엠 바운즈는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가장 강력한 사람은 천국문을 가장 잘 두드리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왜 내 문제가 해결이 안되고 왜 원하는 축복이 내 삶에 없을까 묻는 사람들에 대해 토레이목사는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이런 모든 영육간의 유익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기도의 위대함은 피조물인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가 하나님을 점점 더 알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기도에서 가장 귀한 유익은 우리의 구주되신 예수님을 만나고 하나님아버지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이걸 위해 하나님은 만민이 성전에서 기도하길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신적인 것을 구하러 들어갔다 해도 기도를 계속하다보면 영적인 것으로 기도가 점점 확대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심지어 믿음이 없어 갈등하면서도 지속적으로 기도의 자리로 나가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응답하신다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아직 믿어지지 않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에 대한 확신이 부족해도 실망하지 말고 계속 기도의 자리로 나가시기 바랍니다.

그곳은 곧 하나님을 경험하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기독교저술가 필립얀시의 회심은 놀랍게 우리를 대우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합니다.

필립얀시는 신학생 시절에 하나님의 존재와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봉사학점을 위해 이웃에 있는 대학에 가서 전도를 하고 매 주 기도모임을 가져야 했습니다.

기도회에서 학생들이 모두 돌아가며 기도를 한 다음 얀시 차례가 되면 10초 정도 정적이 흐른 뒤 기도회가 끝납니다.

한마디도 기도하지 못했던 것이죠.

그런데 어느날 밤 순서가 되었을 때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로 기도가 흘러나왔습니다.

‘하나님’하고 얀시가 기도를 시작했을 때 방안에 긴장감이 감돌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학교에 다니는 만 명의 학생들이 지옥에 가도 저는 상관없습니다.

또 제가 지옥에 간다고 해도 저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친구들은 그 기도를 만류하지도 않고 조용히 듣고 있었습니다.

그는 무슨 이유인지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우리 신학생들이 이 곳의 대학생들을 볼 때 선한 사마리아인의 마음처럼 동정심을 가져야 하지만 나는 아무 느낌도 없고 관심도 사랑도 없습니다.

그 순간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의 눈에 긴 옷을 입고 머리에 터반을 두른 나이 든 사마리아인이 허리를 굽혀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 사람을 부축하고 있는 것이 상상 속에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더니 이 두 사람의 얼굴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의 얼굴로 변했고 강도를 만난 불쌍한 유대인의 얼굴이 바로 자기의 얼굴로 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자기의 피를 닦아주고 상처를 싸매주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허리를 굽히셨을 때 환상 속의 자신이 눈을 똑바로 뜨고 예수님을 바라보다 입을 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더니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는 모습이 그의 눈에 똑똑히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 순간 갑자기 기도를 멈추고 일어나 자기 방으로 돌아갔습니다.

방으로 돌아온 그는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밤 내가 영적인 체험을 한 것 같아'

그날 밤 그의 교만이 산산조각 났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죄로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가면서도 자신을 살리기 위해 손을 내미시는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었던 자신이 모습이 너무나 선명했습니다.

삐딱한 시선으로 예수님을 의심하던 필립얀시는 그 후 명망있는 기독교저술가가 되었습니다.

한마디도 하지 않고 의심하는 마음으로 그냥 앉아만 있던 그 기도회를 통해서도 예수님을 만나는 영적체험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와 인격을 체험해야 하나님의 존재도 믿어집니다.

아가 2장 14절에 말씀합니다.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하나님은 우리의 얼굴보기를 원하십니다.

혹시 마음에 아직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확신이 부족하다해도 말씀을 의지해 매일 예수님의 십자가를 앞세우고 하나님아버지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좋으신 아버지께서 구하는 것과 함께 성령을 반드시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여기에 주님께서 한 가지 조건을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단, 마음에 누군가를 향해 품은 혐의가 있다면 용서해라.

십자가형의 부당한 판결, 제자들의 배신, 자신을 배척한 백성들에 대해 예수님은 아무 혐의도 갖지 않고 용서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고통당하는 순간에도 예수님은 그들을 용서하며 기도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이렇게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를 기억하며 내게 고통을 주는 모든 분들을 용서하고 기도할 때 비로서 우리 죄도 사함받고 문제도 응답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장차 제자들의 고통을 내다보고 계셨습니다.

주님을 죽인 저 유대인들, 사랑하는 형제들을 매질하고 처참하게 살해하는 저 사람들, 이런 피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할 제자들이 증오와 환멸의 소용돌이에 말리지 않도록 용서를 명령하십니다.

마음에 미움의 고통을 품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나설 수 없습니다.

미움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하나 다스리는 것만으로도 인생이 버겁습니다.

내 삶에서 아무리 작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면 마음에 혐오감을 둔 사람을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도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고통당하신 예수님을 향해 침을 뱉던 사람들 아닙니까?

용서받은 체험을 한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교회 안에서, 성전 된 우리가 거룩한 손을 들고 하나님을 사모하며 평생 기도하는 축복된 성도들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기도는 시험해 보지 않은 이론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기도의 효력을 알려면 스스로 기도해서 기도를 시험해보아야 합니다.

기도로 우리의 영육간의 빈곤을 벗어나 하나님이 약속하신 모든 부요를 누리고 우리를 향한 사명을 힘차게 감당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2013년8월25일 주일예배 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