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분이 60년 교회를 다녔는데 오늘 본문으로 설교하는 것을 단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부자가 되는 게 세상에서 제일 큰 바램인 사람들에게 이 말씀 전하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 귀를 통과하는 것보다도 더 어렵다는 말씀은 불신자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만큼 모두에게 오늘 말씀은 민감한 내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몇 년 전 삼성가의 고이병0 회장이 죽기 일주일 전에 종교에 대한 24가지 질문을 던진 것이 뒤늦게 공개되며 큰 관심을 끌었던 적이 있었죠.
그 질문 중 16번째 질문이 바로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부자가 천국 가는 게 낙타가 바늘 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했는 데 부자들이 다 악인이란 말인가?’
부자들만 이 말씀에 민감한 게 아닙니다.
부자가 아닐지라도 우리들에게 이 말씀이 걸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이 부분이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나타나셔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면 보통 일 아니잖습니까?
큰 재물이 아니래도 작은 소유라도 내 놓는 게 사람들에게는 뼈를 깎아내는 것 같은 고통이 아니겠습니까?
이 말씀대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라도 영생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르시겠습니까?
이렇게 묻지 않겠습니다.
실례니까.
본문의 이 사건이 제자들에게도 상당한 충격을 주었었나 봅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 세 군데에 이 사건이 공통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각자에게 하실 말씀이 있으시리라 믿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의 핵심은 재물이 아니라 영생이라는 데 촛점을 맞춰 살펴보겠습니다.
지난 주 송파구 석촌동에서 60대 노모와 30대 두 딸이 생계문제에 시달리다 목숨을 끊은 안타까운 소식이 있었습니다.
이 분들이 죽기 전에 마지막 월세와 공과금 70만원을 집주인 앞으로 내놓고 죄송하다는 메모를 남긴 것이 많은 사람의 마음을 더 충격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힘들다고 생각할 때가 사실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육체적 질병으로 매일 고통과 싸워야하는 환자들이 죽음을 생각하는 것을 나무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매일 부딪히는 가정의 문제들과 싸우다 만신창이가 되었을 때 죽음은 차라리 달콤한 유혹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때로 산다는 게 참 잔인한 일이지 않습니까?
죽으면 모든 것이 다 끝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있다면 누구든 모진 마음먹을 수도 있는 위기가 다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내세에 대한 지각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 앞에 나온 이 청년도, 죽음을 앞둔 고 이병철회장도 내세에 대한 동물적인, 원초적인 본능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선 영생에 대한 남다른 고민을 가졌던 이 청년에 대해 성경을 살펴보겠습니다.
17절에서 청년이 예수님이 지나실 때 달려와서 꿇어 앉아 간절하게 물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종합해보면 이 청년은 종교교육을 잘 받은 관료였고 부자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자는 누구에게 머리 숙이는 게 쉽지 않습니다.
어느나라나 관직에 있는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또 가방 끈이 긴 사람들 얼마나 도도합니까?
그런데 이 모든 조건을 다 겸한 부자청년 관원이 예수님 앞에 꿇어 앉아 영생에 대해 묻고 있는 것입니다.
영생에 대한 질문은 당시 예수님 주변에 몰려든 사람들에 비교할 때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 주변에 모인 사람들이 대개는 병자와 가난하고 무식한 서민들이었고 기본적인 욕구가 아쉬워서 모여들었습니다.
우리나라 기독교 초기에 천시 당하던 백정들이나 천민계층 사람들이 교회에 모여든 거나 비슷합니다.
부자청년관원 같은 수준의 사람이 영생에 대한 갈증을 갖고 예수님 앞에 나온 것은 꽤 드문 일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산헤드린 공회원이었던 니고데모 정도 있었죠.
그러나 예수님과 청년의 대화는 처음부터 어긋나기 시작한 것을 본문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일 먼저 반응하신 것은 청년이 ‘선한 선생님이여’ 라고 부른 호칭에 대해서 입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이 부르는 호칭에 대해 랍비건, 주님이건, 다윗의 자손이건, 선생님이건 그다지 문제 삼으신 적이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유독 청년의 ‘선한’ 선생님이여에다 예수님께서 제동을 거십니다.
오늘 이 사건은 인간의 구원을 다루는 직접적인 예시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반문하시기를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하십니다.
이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부자청년의 심중에 인간이 선해질 수 있다는 오판을 하고 있다는 것을 꿰뚫고 지적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선한 경지에 이른 인간의 스승으로 인정하고 그 비결을 배워 자기도 구원에 이르겠다는 잘못된 시작이라는 것을 직고하신 것이죠.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데서 시작하지 않으면 영생에 대한 의문은 풀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사후세계를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저는 성인군자 예수님이 사후세계와 영생에 대해 말했다면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천지만물과 인간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이시기에 주님이 말씀하신 영생에 대해 믿습니다.
어떤 뛰어난 인간이라 할지라도 오류와 헛점 투성이라는 것을 제 나이 정도만 되도 다 압니다.
믿을 만한 인간은 없습니다.
18절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선한 인간은 없다.
죄의 본성을 완벽하게 다스리는 사람도 없고 영생에 대해 알만큼 영적 예지력을 가진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가 믿고 따를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신 예수님 한 분이시고 말에 대해 완벽하게 책임지실 수 있는 분도 오직 예수님 한 분이십니다.
영생에 대해 진지한 질문을 갖고 예수님 앞으로 나왔다면 우리 모두 정말 복있는 자들인줄 믿습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청년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이미 십계명을 잘 알고 있지 않냐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뜻을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십계명을 지키면 영생을 얻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청년은 무엇을 하면 영생을 얻냐고 물었습니다.
무엇인가 인간의 힘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착각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이것입니다.
네가 계명을 열심히 지켰지만 그것으로 영생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네 스스로가 알기에 지금 내 앞에 와서 묻는 것이 아니냐는 뜻입니다.
청년이 어려서 부터 인간에 대한 계명을 유전대로 잘 지켰다고 말하죠.
그런데 그걸 지켜도 왠지 영생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가 이미 알고 있기에 도대체 뭘 더 해야 하느냐 묻는 게 아니냐는 것입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고 봉사도 많이 하는 사람들 중에 영생에 대한 확신이 없는 분들이 있습니다.
자기가 영원한 생명을 받았고 천국에서 영생을 누릴 것에 대해 불확실하다는 것이죠.
이 부자 청년이 지금 그런 것입니다.
왜 그런 지 아시겠습니까?
21절에 예수님께서 정확하게 그 이유를 말씀해주십니다.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네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내가 믿는 게 진짜 무엇인지 솔직한 ‘결단’을 하라는 것입니다.
청년에겐 분명히 속으로 고뇌가 있었습니다.
그가 입으로는 이웃에 대한 모든 계명을 다 지켰다고 했지만 헐벗고 굶주리고 끼니가 어려운 동족들을 볼 때 그의 양심이 왜 자기의 풍족한 재물을 고발하지 않았겠습니까?
어제 3.1절 기념일이었는 데, 로마제국 치하에 부자나 일제시대 부자나 비슷한 냄새가 나는 것입니다.
이사야 58장10절 말씀을 서기관인 청년이 왜 몰랐겠습니까?
네가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을 동하며 괴로와하는 자의 마음을 만족케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발하여 네 어두움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양심은 이미 청년의 재물을 지목하고 있었지만 짐짓 다른 데서 영생의 확신을 얻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미 성령께서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지 않는 이유, 영생에 대한 확신이 부족한 이유를 지적하신다는 것입니다.
끊어야 할 죄 문제일 수도 있고, 희생이나 헌신에 대한 결단일 수도 있습니다.
인격적인 결함, 거짓말이나 매정함이나 게으름이나 이기심을 버리는 결단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피해서 내가 하기 쉬운 다른 것으로 대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언제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그 문제를 성령께서는 지적하십니다.
이런 문제점들을 하나 하나 진지하게 다루고 결단하지 않으면 신앙은 언제나 제자리 걸음입니다.
다른 것을 계속 더 해도 확신도 없고 위선적인 신앙이 되기 쉽습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본질적 측면에서 예수님이 지적하시는 게 있습니다.
청년에게는 자기가 가진 부를 깨어서 나눌 만큼 영생이 절박하지 않다는 걸 드러내는 것입니다.
정말 죽은 다음에 내세가 확실하게 존재하고 현세에서 내 선택과 행위가 영원한 내세를 결정짓는다면 솔직히 어느 것이 더 중요합니까?
우리가 죽을 확률은 100%입니다.
모든 것을 다 두고 갈 확률도 100%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희생이 내세에 내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믿는다면 현재의 나를 위해 한없이 쌓아두기만 하겠냐는 것입니다.
청년이 영생에 대해 퍽이나 관심이 있는 것 같지만 실은 내세가 있다는 것에 대해 조차 확신하지도 않았다는 뜻입니다.
종교에는 관심이 있었지만 정작 자신의 영혼에는 무지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혹시 있을지 모르는 내세도 당장 손해가 안 나는 수준에서라면 한번 대비해 볼까 하는 정도라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이런 청년의 신앙의 허상에 직격탄을 날리신 것입니다.
부자청년이 견고한 성처럼 의뢰하는 재산을 팔아 천국의 보화를 쌓겠냐는 것이죠.
결단 못하는 것입니다.
내세가 불확실하니까.
그래서 청년은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영생에 대한 확신, 천국에 대한 확신이 확고하지 않으면 아직 구원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정말 받아들이고 영접하면 성령을 보증으로 우리에게 주신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 바로 보증해주는 일이십니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가 왠지 저절로 믿어지게 됩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는 대개 신앙이 엄연한 현실이라는 자각이 없고 단지 종교생활 정도로 입문한 상태일 것입니다.
성경을 많이 몰라도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시면 저절로 근본적인 구원에 대한 확실한 인식이 된다고 봅니다.
그게 아직 안된 경우 이 부자청년의 경우처럼,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면 되는 지를 오늘 분명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결단입니다.
알만큼 알았고 들을 만큼 들었으니, 결단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녀가 오래 연애하면 그 다음 결혼을 하기로 결정을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연애만 하겠다? 그거 진짜 사랑 아닙니다.
진짜 사랑이 오면 유사품이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러면 뒤도 안돌아보고 진짜 사랑에게 갑니다.
한 남자, 한 여자를 선택하기로 결정한다는 것은 다른 모든 기회를 포기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것을 다 포기해도 이 사람을 선택하겠다는 결단이 바로 결혼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의지가 있고 내 인격을 걸고 진심으로 결단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정말 천지만물을 창조하고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성경의 증언을 믿겠다.
창조주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섬기지 않은 것은 죄라는 것을 인정하자.
내 속의 수많은 부도덕한 죄도 인정하자.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이 모든 내 죄의 값을 다 청산해주시고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주시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믿자.
어떤 불이익이 와도 이 사실을 끝까지 믿고 지키자.
이렇게 결단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내가 결단을 안했기 때문에 의혹이 계속 생기는 것입니다.
결단하고 내가 결단한 것에 투자를 하는 것입니다.
투자를 해야 내 결단이 견고하다는 것을 스스로가 점점 더 인정하게 됩니다.
부자 청년에게 재산을 다 팔아서 나눠주라는 특단의 해법은 바로 이 두가지를 정확히 하라는 것입니다.
영생의 가치를 이 세상의 모든 가치 위에 두겠다고 결단해라.
그 결단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고하게 세워가기 위해 네가 가장 귀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던짐으로 네 스스로에게 증명해가라.
우리가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고 시간과 물질을 드려 봉사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다른 게 아닙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결단 없이, 어려서 부터 열심히 해온 종교행위가 구원과 아무 관계가 없었다는 것을 부자 청년의 번민하며 떠나는 뒷모습이 말해줍니다.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고 하는 모든 종교적인 행위들은 위기를 만날 때 절대 우리를 지탱해 주지 못합니다.
아니, 이 종교적인 행위를 지속할 수 없게 됩니다.
신앙이 목숨을 위협할 때, 어떻게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키겠습니까?
물론 죽음이나 큰 손해 앞에서 과연 담대하게 내 신앙을 증명하며 불이익을 당할 수 있을지는 저도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우리가 어떤 고초 앞에서 내 자식이나 부모나 가족을 부인하려 한다면 가슴이 찢어지지 않겠습니까?
죽음이 두려워 예수님을 부인할 수 밖에 없는 절박한 순간이라면 예수님께 대한 미안함으로 가슴이 찢어질 것 같으리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결단이 있으면 관계가 명확해 집니다.
아무 미안함도 없이 일상에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믿음이라면 위기에서 갈등 없이 주님을 부인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아직 관계가 성립되지 않은 것입니다.
2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그런 그를 사랑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비록 영생을 위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돈을 구원보다 더 좋아하는 연약한 믿음이지만 예수님께서 그를 사랑하셨다고 말씀합니다.
마태와 누가복음에서는 그를 사랑하셨다는 구절이 없습니다.
마가복음을 기록한 마가라는 제자의 관심과 통찰력이 여기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마가는 제자들 중 드물게 큰 부잣집 아들이었습니다.
바나바의 조카이기도 한 마가는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중 재정적으로 많은 후원을 할 정도로 부유했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오순절에 120여명이 기도하다 성령이 임하셨다는 것을 볼 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일 만큼 큰 저택에서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잣집 아들의 유약함이 젊은 시절 마가에 대한 성경기록에서 드러납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마가는 겟세마네동산에서 주님이 체포되실 때 두루고 다니던 홑이불을 벗어던지고 맨몸으로 도망했다고 마가복음에 스스로가 부끄러운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와의 1차 선교여행에서 전도여정의 고됨을 견디지 못하고 집으로 도중에 돌아가 버린 전적이 있습니다.
마가는 부자청년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연민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대하는 예수님의 눈빛을 주목했을 것입니다.
그런 연약한 청년을 사랑하시는 그 눈빛을 놓치지 않고 포착 한 것입니다.
자신도 유약한 부잣집 아들이고 결단하지 못한 연약함이 있었기 때문이죠.
우리에게 항상 위로가 되고 소망이 되는 것은 불완전한 믿음이지만 예수님 앞에 나온 청년을 사랑하셨듯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재산을 다 팔고 나눠주라는 충격적인 해법을 주신 것은 부자청년의 믿음을 백일하에 드러내고 썩 물러가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를 사랑하셔서 한 가지 부족한 것을 깨닫고 그 문제를 결단하고 그리고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인지 예수님은 너무나 정확하게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늘에서 너의 보화가 영원할 것이다.
그리고 나를 따르라.
내가 모든 것을 책임져 주겠다.
다 팔아서 나눠주고 거지 행색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 다음은 책임져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을 주시하던 베드로가 다음 28절에서 묻지 않습니까?
베드로가 여짜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물론 당시 베드로의 인식 차원의 보상을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을 내가 책임지는 것 보다 예수님께서 더 잘 책임져주십니다.
내가 이 문제를 근심하지 않으면 다 잘못될 것 같지만 아닙니다.
예수님께 맡기면 더 잘 이끌어주십니다.
내 인생의 방식을 고수하지 않으면 온통 혼란스럽고 실타래처럼 뒤엉킬 것 같지만 기도하고 주도권을 주님께 넘겨드리면 나를 나도 몰랐던 최상의 나로 인도해 주십니다.
가수 0과 정혜0 부부가 참 모범적인 크리스찬 부부입니다.
이 부부가 컴패션이라는 아동구호단체에서 적극적으로 구호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정혜0 씨가 후원하는 아이를 찾아가 직접 만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절대적인 빈곤, 희망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는 가정에서 단지 예수님을 믿기에 천사같은 얼굴로 살아가는 그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국컴패션회장인 서정0 목사님께 전화를 했다고 합니다.
주부들의 꿈이 내집 한칸 마련해서 안정되고 단란하게 사는 것이지만 이 땅에서 내 집 갖는 것은 포기하겠어요.
그리고 붓고 있던 적금을 깨서 백명의 어린이를 후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부를 하나님이 책임지고 계시다는 것을 확실히 느낍니다.
영생이 확실하기에 천국을 위해 내 귀중한 것들을 쌓아두는 것이 더 실제적이라는 것을 알고 행한다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시고 초대교회가 생길 때 기억하시죠?
영생에 대한 확신을 한 초대교회 성도들이 자신의 밭을 팔아 교회로 가져왔습니다.
부들 부들 떨려서 내가 귀하게 여기는 물질이든, 시간이든, 내 장래의 계획이든 내려놓지 못할 것 같지만 영생이 확실하면 고민하다 결국 순종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나무랄 데 없어 보이는 부자 청년, 선망의 눈길로 부자 청년을 주시하던 제자들이 결과에 심히 놀랐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청년의 고민하며 돌아서는 모습에서 마치 자기가 발각된 것 같은 찔림이 있었겠죠.
예수님께서 낙타가 바늘 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는 말씀이 부자를 꿈꾸던 그들에게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구원을 받겠는가?
우리의 구원이 확실하겠는가?
이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우리 같이 욕심 많고, 세상을 좋아하고, 지지부진한 신앙상태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부르셨고 마침내 구원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십니까?
이렇게 계속 천국과 영생에 대해 들려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속죄가 나를 위한 사랑이라는 것을 계속 들려주시고 성령께서는 계속 그 말씀으로 우리를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 우리가 그 감동에 더 버티지 못하고 결단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실하신 인격을 믿고 그 분이 하신 모든 말씀대로 분명히 천국의 영원한 삶이 놀랍게 실제한다는 것을 비로서 믿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결심하고 결정한 이 믿음을 위해 과감하게 이 세상의 좋아하던 것을 하나 하나 바꿔서 영생을 좇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눈에 보이는 세상 것에 연연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십니다.
내일이 염려되어 조금이라도 더 벌어야 하고, 적금이라도 들어놔야 안심이 되고, 노후대책이 없어 마음에 근심이 있다는 것을 왜 모르시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이런 현재의 문제에 얽매일수록 영적인 축복과 풍성한 자유와 하나님과의 교제의 향기롭고 윤택한 고귀한 삶을 맛도 보지 못하고 버겁게 인생을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을 걱정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를수록 분명히 더 좋은 길, 더 보람된 미래가 활짝 열릴 줄 믿습니다.
한국 컴패션 서정0 목사님이 골수 이식을 두 번이나 해주었다고 합니다.
한번은 그냥 헌혈하는 수준으로 알고 승낙했는 데 일주일 입원하고 뼈에 구멍을 세개나 뚫는 힘든 과정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고 합니다.
게다가 구멍 세개 중 두개만 꼬매고 한 개는 꼬매지 않은 의료사고까지 있어 피를 엄청 쏟고 수혈을 받는 고생을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뒤 골수이식을 받은 꼬마가 백혈병이 재발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골수이식을 한번 받은 사람은 그 사람의 것이 아니면 다른 사람 것은 절대 사용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김목사가 다시 이식을 안해주면 어린아이는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이죠.
그런데 정말 두렵고 무섭고 당시 자기 몸무게도 50킬로가 안나가는 힘든 건강이라 하기 싫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마음에 짐을 벗을 수가 없었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어떻게든 이 짐을 벗어버리려고 자기가 골수이식 할 형편이 아닌 것을 계속 말하며 동조를 구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여전히 그 짐을 벗을 수가 없어 결국 하나님께 하소연하며 기도했다고 합니다.
제가 지금 할 수 없고, 두렵고 힘든 것 주님 다 아시지 않습니까?
정말 저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너무나 확실히 느껴졌습니다.
그래, 너 힘들고 무섭고, 어려운 마음 내가 다 안다.
그런데, 만일 그 애가 네 아들이라면 어떻겠니?
예수님께는 그 아이가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듣는 순간 결국 수술대에 또 올라갈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아이는 지금 완벽하게 완치되고 부모도 전도가 되어 교회에 잘 다니고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한가지씩 세상에 자랑과 기쁨과 좋은 것을 내려놓도록 요구하신다면 당장은 고통이되고 손해가 되는 것 같지만 그것은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기 위해서 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했더니 상상도 못한 반전의 축복이 따라오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선택하기 위해 세상적인 기쁨을 포기했다면 세상의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좋은 일과 기쁨으로 채워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내 인생의 현세와 내세의 가장 좋은 것, 가치있는 것은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을 믿으시고 오늘 더 믿음으로 살기를 결단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축원드립니다. 아멘.
2014.3.2 주일설교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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