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의 주인공은 맹인 거지 바디매오입니다.
바디매오는 주인공의 이름이긴 하지만 디매오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자기의 정체성인 이름조차 없이 디매오의 아들로 불리며 거리에서 구걸해 먹고 살던 맹인입니다.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는커녕 눈길 한번 주지 않았을 그런 사람입니다.
우리는 부자나 왕이나 귀족, 능력이 많고 성공한 사람에 관심을 갖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맹인 거지 바디매오에 대해 마태와 마가와 누가가 동일하게 관심을 갖고 복음서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이 사건을 꼭 전하고 싶을 만큼 의미가 있다는 것이겠죠.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분명한 것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구원사역 중 치료해준 수많은 사람들과는 좀 다르게 이 사건을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마태복음에는 이 날 고침 받은 맹인이 두 사람이었다고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후에 읽으시다 왜 같은 사건을 두고 진술이 다르냐고 의문을 가질까봐 미리 말씀드립니다.
마가와 누가는 바디매오 한사람의 구원에 집중했던 것이고 마태는 세리 출신이기 때문에 정확한 숫자를 기록해야 마음이 편했을 것입니다.
제가 어제 윤집사님을 길에서 만났다고 말할 때, 그 옆에 친구가 같이 있었다는 것은 굳이 밝혀도 좋고, 또 안 밝혀도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각도로 이해하시면 좋겠습니다.
오늘 살펴볼 마가의 기록은 특히 10장 전체의 사건들을 바디매오와 관련시켜 의미 있게 다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앞부분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바디매오사건과 관련시켜 구원받는 믿음에 대해 아주 선명한 그림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글을 쓸 때 무작정 쓰는 사람은 없습니다.
성경을 볼 때 우리가 먼저 생각할 것은 저자가 무슨 의도로 이 글을 썼냐는 것입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의 탄생과 메시야로서의 행적과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 그리고 재림과 심판에 대한 약속을 사람들이 잘 이해하고 예수님을 믿게 하기 위한 것이 목적입니다.
복음, 즉 복된 구원의 소식을 잘 듣고 믿게 하기 위해서죠.
그래서 성경을 제자들이 기록한 의도와 목적에 따라 잘 배우면 예수님을 더 확신 있게 믿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갖고 ‘예수님께 부르짖어 구하는 자는 모든 문제를 해결 받는다’로 주제를 잡는다면 작가의 의도에 너무 맞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말씀 속에 담겨있는 하나님나라의 귀중한 진리를 놓치게 됩니다.
또 말씀이 우리 내면을 깊이 탐색해서 훈계나 위로나 믿음을 주는 기회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깊이 연구한다는 것은 사실 말씀이 나 자신을 깊이 탐색하시게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깊이 알수록 인간에 대해 이해가 되고 자기 자신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오늘 말씀을 제대로 잘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길 원합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맹인인 바디매오가 길거리에서 구걸할 때 예수님이 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그 앞을 지나가십니다.
바디매오는 예수님께 소리를 지르며 불쌍히 여겨달라고 애원했고 예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셔서 그를 고쳐주셨습니다.
눈을 뜬 바디매오가 즐거이 예수님을 따라갔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10장의 이 여러 사건들이 일어난 시점이 언제냐가 본문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생애 마지막 일주일을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중이시라는 것입니다.
당연히 십자가의 구원사역에 그 의미가 모아지는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겠습니까?
10장 맨 앞에 나오는 바리새인들과의 이혼에 대한 논쟁만 해도 그렇습니다.
이 주제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임박한 시점에서 좀 어울리지 않는 내용인 것 처럼 보입니다.
다음 장에서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고 바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그런데, 뜬금없이 결혼에 대한 논쟁이 있었고 그것을 기록했다는 것이죠.
제자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많은 일과 설교들 중에서 복음이 잘 이해되도록 하기 위해 적당한 일화를 고르고, 빼고, 적절하게 배치하기도 했습니다.
요한사도가 요한복음에서 그랬잖아요, 예수님이 하신 일을 어떻게 다 기록하겠냐고.
그렇다면 십자가가 임박한 현재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 결혼 논쟁을 빼도 좋을 것 같은 데, 굳이 기록했다면 전체 맥락과 관련이 있다는 뜻이겠죠.
당연히 관련이 있습니다.
결혼은 하나님의 아이디어입니다.
결혼의 비밀은 바울사도가 에베소에서 풀어주었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부모를 떠나 하나가 되도록 하신 것은 예수님과 성도들이 연합되는 구속의 신비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은 결혼에 대한 논쟁에서 당연히 십자가사역을 통한 성도들과의 연합을 머리에 그리고 계신 것입니다.
마가 역시 그 의도를 알아차리고 그 사실을 기록한 것이죠.
10장의 모든 내용이 예수님의 십자가구속과 우리의 구원에 모아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예수님의 신부가 될 수 있냐는 대답을 10장의 결론으로 바디매오사건에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10장을 보면 예수님의 마음이 참 착찹하셨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바리새인들은 결혼과 이혼에 대한 논쟁으로 여전히 모세를 내세워 예수님을 공격합니다.
예수님의 축복을 받으려고 어린이들을 데려오자 매정한 제자들이 꾸짖어 쫒아 버립니다.
부자청년은 영생에 대한 질문을 갖고 왔다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말씀에 고민하고 돌아가 버립니다.
이제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아야 될지나 다투고 있습니다.
삼년 반을 복음을 전하고 백성을 모으려고 최선을 다하셨지만 나타나는 결과들을 보면 좀 민망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 마지막에 이 바디매오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앞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상하게 했을 인물들에 비해 존재감도 정체성도 없는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주님의 마음에 위로를 드렸을 것입니다.
제자 마가가 의도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다 무엇이라도 된 줄 알고 자기를 내세우던 그 사람들, 율법을 받았으니 뭐나 된 줄 알던 바리새인, 재산과 권세가 많으니 예수님 없이도 영생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한 부자청년,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으니 새왕국의 권력을 누구보다 새 왕국의 자격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던 제자들.
이들이 아니라 구원받을 주님의 백성은 눈멀어 구걸하고 있는 저 거지 바디매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곁에 신부로 세워 질 교회는 바로 자신이 눈 먼 거지같은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는 바디매오 같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디매오 같은 우리를 찾아오셔서 주님 곁에 세워주신 것 아닌가요?
바디매오 사건은 어떻게 구원받고 예수님의 신부가 되는 지를 앞의 인물들과 대조시키며 아주 정확하게 보여줍니다.
52절에 예수님께서 바디매오에게 하신 말씀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예수님의 신부인 교회의 일원이 될 수 있는 방법은 단 한 가지뿐인데, 믿음입니다.
바디매오가 지금 무엇을 믿고 있기에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까?
분명한 것은 지금 바디매오가 다른 유대인들 처럼 창조주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은 아닙니다.
다른 유대인들도 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확신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다 구원을 받았냐면 그게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구원을 받는 게 아닙니다.
지구상의 수많은 종교들이 어떤 절대자, 신, 하늘에 있는 존재를 믿습니다.
도교에서는 옥황상제라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힌두교에서는 브라흐마, 비슈누, 시바를 삼주신으로 믿습니다.
이슬람에서는 알라신을 믿죠.
이런 관념적인 종교의 신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창조주이신 여호와하나님을 믿는다고 해도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현재에도 이스라엘의 많은 유대인들이 구약의 여호와하나님을 믿지만 구원받은 게 아닙니다.
인간의 근원적인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하나님을 제대로 믿고 섬길 수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증명해준 집단이 이 유대인들입니다.
하나님을 아무리 보여줘도 죄로 죽어 있는 영혼들은 절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가나안의 우상신과 하나님을 똑같이 여기는 것이 영적으로 눈이 멀어 태어나는 죄인들의 한계입니다.
인간이 갖고 있는 죄문제를 해결해 영적인 눈을 떠 하나님을 바로 볼 수 있게 해 줄 대속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게 구약에 나타난 메시야 예언의 핵심입니다.
바디매오는 메시야가 그렇게 자기를 구원해 줄 것을 분명히 믿었습니다.
47절을 보면 떠들썩한 행렬에 어리둥절해서 무슨 일이냐고 묻는 바디매오에게 사람들은 나사렛 예수가 지나가신다고 말해줍니다.
이 소리를 들은 바디매오가 버럭 소리를 질러 예수님을 부르죠.
그런데 나사렛 예수여하지 않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라고 부릅니다.
물론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야가 다윗의 후손 중에서 나오신다는 것을 유대인들은 다 알고 있었습니다.
조선시대 정체불명의 민간 예언서인 정감록이라고 있습니다.
말세에 정씨성을 가진 정도령이란 사람이 나라를 구원할 거라는 내용입니다.
조선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정감록의 예언을 믿고 이상향이 올 것을 은밀하게 전파하고 정권을 불신했기에 조선정부에서 금서로 취급했던 것입니다.
그것처럼 다윗의 족보를 통해 탄생할 메시야가 대적들을 물리치고 영원히 이스라엘을 복락으로 통치하게 될거라는 예언을 유대인들이 알고 있었습니다.
구약시대의 검증된 선지자들을 통해 분명하게 예언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사실로 믿는 사람들도 있었고, 너무 오랜 역사 속에서 그냥 전설적인 이야기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겠죠.
바디매오는 이 사실을 사실로 믿었습니다.
병자를 고치시고 하나님나라를 전하시는 예수님의 소식을 들었을 때, 그 분이 바로 메시야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기적을 보았다고 해서 다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했던 게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제자들조차도 헷갈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디매오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라고 하셨을 때 그가 예수님을 자기의 구원자, 메시야로 믿었다는 것을 인증해주신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도 짚고 넘어갑니다.
예수님을 종교지도자나, 역사의 스승이 아닌, 다윗의 자손인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로 믿어야 구원받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오셔서 역사 속에 살다 가신 실존했던 분이시고 오셔서 내 죄를 속죄해주신 유일하신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다음에 이어지는 일화들은 좀 더 가시적으로 이 구원받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축복기도를 받기 위해 어린 아이들을 데려온 것을 보고 제자들이 꾸짖었던 내용과의 관련입니다.
그걸 보고 예수님께서 노하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아이들을 막지 말라. 천국을 어린아이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구원받을 믿음은 어린아이 같이 의심 없이 믿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은 믿으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상대에게 신뢰가 가면 그냥 믿습니다.
아직도 믿으려고 노력하고 있다면 예수님에 대한 신뢰가 더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 성령께서 누구보다 신뢰할 만한 예수님을 더 보여주셔야 합니다.
본문48절에서 마가가 의미 있는 한 상황을 기록하고 있죠.
앞에서 어린아이들을 꾸짖었던 그 제자들이 지금은 바디매오를 꾸짖고 있는 장면입니다.
우연히 비슷한 상황이 된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바디매오의 믿음이 바로 어린아이와 같이 천국을 믿는 믿음이라는 것을 연상할 수 있도록 제자들이 꾸짖는 동일한 행동을 통해 암시하는 것입니다.
지금 분위기는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예수님과 기대와 흥분에 가득 찬 군중들이 에워싸고 있습니다.
뜨거운 열기와 기대와 환호로 가득찬 이 행렬에 대고 바디매오 혼자만 울부짖고 있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은 분위기 파악 못합니다.
자기 신념대로 행동하죠.
바디매오에겐 예수님이 자기를 고쳐주실 메시야라는 것이 너무 믿어지니 그냥 지나치실까봐 조바심이 나 죽을 지경이니 어떡하겠습니까?
조용히 하라고 많은 사람들이 면박을 주었지만 더욱 크게 소리질러 예수님을 부릅니다.
바디매오가 뻔뻔해서 그랬을까요?
확신이 있다면 앞뒤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중국집에서 단무지 더 달란 소리도 제대로 못하던 소심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나니 버스 안이건 학교 캠퍼스건 전도되는 데 자기도 놀랐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서 큰 소리를 낸다는 것은 그 만큼 확신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디매오의 염치불구한 부르짖음을 마가는 앞부분에 있었던 어린아이 같이 믿어지는 믿음이라고 보여주는 것입니다.
반면 예수님을 호위하고 대단한 믿음의 투사 같던 제자와 무리들은 어떻습니까?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며 눈을 고쳐 달라고 소리 지르는 바디매오을 꾸짖었다고 합니다.
왜, 꾸짖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거지 맹인의 급작스런 등장이 거슬리기도 했겠죠.
그런데 사실인즉슨, 그들의 내면에 불신과 불안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한창 고조된 메시야의 행렬에 언짢은 일이 생길까봐 불안하다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맹인을 고치지 못한다면 그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게 아니겠습니까?불안한 거예요.
예수님이 서서 바디매오를 부르라 하셨을 때 그들의 반응을 보십시오.
49절에 보니 그들이 얼른 그 맹인을 부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갑자기 왠 친절입니까? 원어로 보면 ‘힘을 좀 내보게’ 이런 뜻도 있습니다.
좀 전까지 불쾌하게 꾸짖던 사람에게 갑자기 왜 이렇게 분위기가 급반전되어 친절을 베풀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그를 부르시니는 걸 보니 ‘고쳐주실 자신이 있으시구나’ 본인들이 안심이 됐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믿었다가 안믿었다 하면 그게 믿는 것입니까? 안 믿는 것입니까?
며칠 뒤 예수님이 체포되셨을 때 군중들은‘ 에이, 아니잖아’ 하며 다 예수님을 욕하며 돌아갔습니다.
우리가 머리를 뭔가 복잡하게 쓰고 있으면 대개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이 확고할 때는 그렇게 인상쓰고 복잡하게 하지 않아도 단순하게 일을 잘 풀어가게 됩니다.
잔 신경을 많이 쓰는 게 대개 믿음이 약해졌을 때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속죄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지금 만물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정말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이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다면 어떤 상황에도 끝까지 어린아이처럼 믿고 따르게 되시길 간절히 원합니다.
다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부자청년의 이야기와 바디매오를 살펴볼까요?부자청년이 예수님 앞에 나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냐고 물었죠.
예수님께서 계명을 잘 지키라고 하셨고 잘 지켰다고 청년이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재산을 좀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와서 주님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청년이 재산이 많은 관계로 깊은 고민에 빠져 주님을 떠났었죠.
이것을 보고 예수님께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 보다 더 어렵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부자되면 천국가기 힘듭니다.
부자도 되고 천국도 가려면 돈을 계속 선한 일에 써야 합니다.
버리지를 못해 근심하고 돌아간 이 부자청년과 바디매오가 어떤 대조적인 모습을 보입니까?
50절에 맹인이 겉옷을 내 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님께 나왔다고 합니다.
이 둘 사이의 차이를 제자 마가가 눈여겨 본 것입니다.
구원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버릴 수도 있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많은 재산을 내놓는 것과 작은 재산을 내놓는 것은 다릅니다.
그러나 거지 바디매오에게 겉옷은 재산 목록 1호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 겉옷을 놓고 군인들이 솔기를 따라 나누어 가졌던 것을 보면 의복하나 얻는 게 힘든 때라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디매오가 그걸 내버리고 일어나 뛰어갔다고 합니다.
부자에게 큰 물질이 내놓기 힘들 듯이 가난한 사람에게는 작은 물건 하나 내놓는 게 그만큼 어렵습니다.
큰 부자들은 온전한 십일조하기가 힘들고 비정규직 88만원 세대는 십일조하기가 쉽겠습니까?
없는 데서 떼어내는 게 더 힘듭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한 여자가 동전 두 개 헌금하는 것을 보고 제일 많이 드렸다고 하셨잖아요.
그것이 여인의 생활비 전부라는 거예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가진 것을 다 포기할 수도 있는 것이 구원받을 믿음이라는 것을 오늘 바디매오의 행동을 통해 보여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가진 옷에 옷 한 벌을 더 얻으려는 것 아닙니까?
내가 가진 행복에 건강도 달라는 것이고, 자녀의 성공까지도 보장해 달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죽으면 구원도 받게 해 달라는 것이죠.아니요, 구원받을 믿음은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일 구원을 받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버려야 한다면, 그래도 모든 것을 버리고 난 구원을 꼭 받아야겠다.
이것이 진짜 구원이 얼마나 절박한 진실인지를 깨달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마태나 누가 복음서에는 맹인이 겉옷을 버리고 뛰어갔다는 말이 없습니다.
유독 마가가 이 광경을 포착해서 기록한 것이 참 흥미롭지 않습니까?
마가는 마가복음서에 겉옷을 벗어던지고 뛰어간 사람을 또 한 명 기록하고 있습니다.
겟세마네동산에서 예수님이 체포되셨을 때 제자들이 다 혼비백산해서 도망치던 중, 겉옷을 벗어던진 채 날 살려라 도망간 사람이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그 사람이 바로 마가 본인입니다.
마가가 복음서를 기록할 때, 자기의 모든 것이라고 할 겉옷을 주저 없이 벗어던지고 예수님께 나갔던 바디매오의 모습과 겉옷이 도망치는 데 걸리적거릴까봐 벗어던지고 뛰었던 젊은 날의 자신의 모습을 보았겠죠.
예수님을 믿는 삶이 내 성공과 안전에 위해가 된다면 많은 사람들이 마가의 겉옷처럼 믿음을 벗어던지고 도망가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을 따른 데 방해가 되는 거라면 세속의 겉옷이든, 욕심의 겉옷이든, 죄의 겉옷이든 벗어버리고 따르는 게 구원받은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깨끗한 마음으로 따르는 데 방해하는 것이 있다면 아까워하지 말고 버려야 합니다.
바디매오가 더러운 거지 옷을 벗어던지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추워 얼어 죽었겠습니까?바디매오라는 이름이 어떻게 마가복음에 기록되었겠습니까?
그냥 무명의 거지로 끝났어야 할 바디매오의 이름이 어떻게 마가에게 알려졌겠습니까?
43절을 보니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따랐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머지 두 복음서에도 동일하게 예수님을 따랐다는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단순히 군중 속에 섞였다는 것이 아니라 제자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거지 옷을 벗어던졌더니 제자의 옷을 입게 된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그렇게 예수님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들어갔고, 주님의 십자가의 길도 따라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는 주님도 목격했을 것입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했던 120명 속에도 끼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성령을 받고 초대교회의 일군이 되었으리라고 저는 분명히 믿어집니다.
이런 바디매오의 믿음을 보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바디매오의 믿음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확신하는 믿음, 어린아이 같이 예수님을 신뢰하며 믿어지는 믿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현주소가 어디에 있는 지, 무엇이 부족한지 오늘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탐색해 주셨으리라 믿습니다.
여대생청부살인 사건을 맡았던 엄상0 변호사라고 있습니다.
영0 제분 회장부인이 사위와 불륜 관계로 오해해 여대생을 청부살인한 사건입니다.
엄상0 변호사가 청부살인범의 변호를 맡아 진실이 세상에 밝혀지게 되었지 않습니까?
엄변호사가 어느날 오늘 본문인 거지 맹인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만나 눈을 뜨고 주님을 따르는 말씀을 읽다가 갑자기 눈물이 줄줄 흐르면서 과거 살아왔던 자신의 모습이 길거리에 동냥하고 다니던 거지맹인이었다는 것이 깨달아지더랍니다.
이를 악물고 사시공부를 하고, 사건을 해결하려 남의 뒤를 캐고 다니고, 자기 딴엔 최선을 다한다고 살아온 영욕의 세월이 다 거지같더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과거가 눈먼 거지였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야말로 영혼의 눈을 뜬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인생의 어두운 거리에서 눈이 먼 채 이리저리 쫒기고 방황하던 우리를 예수님께서 계속 따라오셨고 그 인자하신 눈으로 우리를 불러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영의 눈을 열어 주셨으니 바디매오처럼 즐거이 예수님을 따르길 원합니다.
예수님을 즐거이 따르는 길은 장차 영화로운 구원이 보장 된 길이고, 현세에서의 삶 또한 가장 보람되고 가치 있고 만족스럽게 사는 길이 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2014.9.14 주일설교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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