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십자가에 못박히시다 (마가복음15장15절-39절)

남수연 2015. 4. 2. 17:36

오늘은 교회력으로 종려주일이고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오늘 나눌 말씀은 제자 마가가 기록한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의 순간이라면 게다가 그 죽음이 나를 위한 것이라면 그 순간은 영원히 마음에 각인 될 것입니다.

바로 그런 사랑을 받은 장본인인 신자들이 그 날 예수님께 일어났던 일들에 관심이 없고 알지도 못한다면 좀 이상한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십자가를 생각할 때 항상 우리 눈가가 젖어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주님의 십자가의 깊은 사랑과 의미를 우리 영과 마음의 심비에 조금씩 새겨 가십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내 죄 때문이란 것을 완전하게 깨닫는 순간, 나는 죄인이 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왜 그렇게 기쁘고 행복한지 경험하신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은혜가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가는 데 삼십년이 걸렸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도 나를 위한 그 십자가의 의미를 겸손하게 깨닫기를 원할 때 성령께서 주시는 은혜가 반드시 있으리라 믿습니다.

먼저 십자가 형을 당하시는 예수님의 고통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 주님은 은 삼십개를 받은 가룟 유다의 밀고로 은닉장소인 겟세마네동산에서 붙잡히십니다.

그리고 당시 이스라엘을 통치하던 로마제국의 총독인 빌라도 앞에서 재판을 받고 십자가형을 선고받습니다.

15절을 보면 빌라도의 법정에서 십자가형을 선고받은 예수님은 먼저 채찍질을 당하셨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의 채찍질 태형은 십자가에 박히는 것만큼 공포스러운 형벌이었습니다.

죄수를 때리는 가죽 채찍은 플라겔룸이라고 불렀습니다.

플라겔룸이라는 단어의 어원이 가죽을 벗기다에서 유래했습니다.

끝에 납이나 유리나 뼈 조각 등이 박혀있는 이 채찍으로 때리면 거의 가죽이 벗겨질 정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역사가인 요세푸스는 자기의 숙적들이 채찍형을 받고 내장이 밖으로 드러났었다고 기록합니다.

로마의 시인 케케로는 이 채찍질 태형에 대해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이 형벌은 인간의 도착증이 빚어낸 최악의 형벌이다. 이것을 우리는 보아서도 안되고 기억해서도 안 되며 결코 전달해서도 안된다.’

영화 패션오브크라이스트에서 피가 낭자하고 살이 너덜너덜해진 예수님의 영상은 가장 사실적인 주님의 모습이 맞습니다.

채찍 태형만으로 죽는 사람이 있을 만큼 무섭고도 잔인한 형벌을 주님이 십자가에 박히시기 전에 먼저 당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목수 출신의 건장한 청년이셨던 예수님이 십자가 기둥을 지고 갈 수 없는 상태가 되셨던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십자가 형벌 내내 인격적인 멸시와 모욕을 받으셨습니다.

그냥 적당히 죄와 버무려진 평범한 우리 같은 죄인이 아니라 죄와 무관하신 고결하신 주님이 무자비한 군인들에게 치욕스런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너무나 선하신 주님이시기에 이런 모욕이 한없이 슬프게 느껴집니다.

16절부터 20절까지를 보면 그들은 주님의 머리를 때리고 놀리며 침을 뱉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곤욕을 치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하나님께서는 구약성경에 이미 기록해 놓으셨다는 것을 아십니까?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가 고난을 당하고 죽어야 될 것을 가장 정확히 예언했던 선지자가 이사야입니다.

이사야서 50장6절을 보면 고난 받는 하나님의 종을 이렇게 예언합니다.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

바로 인간의 구속을 위해 꿋꿋이 모욕과 고통을 참아내시는 오늘 예수님의 모습을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미리 기록하신 것이 너무나 분명하죠.

이런 채찍형을 받은 뒤 몸도 가누지 못하는 예수님은 군인들에게 사정없이 끌려서 골고다 사형장을 향해 올라가셨습니다.

23절에 보면 형을 집행할 때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다고 합니다.

잔인한 로마군인들이 약간의 진통효과가 있는 몰약 포도주를 주었다는 것은 이제 당할 십자가의 고통이 얼마나 극심한 것인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형장에서 담배 한대 태울 시간을 주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것마저 거절하셨다고 합니다.

주님은 지금 십자가에서 받는 수난이 무엇 때문인지 알고 계십니다.

인류의 죄에 대한 형벌을 받으시는 지금 스스로 그 고통을 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가는 24절에 아주 짧게 ‘십자가에 못박고’ 라고 그 끔찍한 순간을 끝내버립니다.

예수님을 사랑했던 마가는 차마 그 참혹함을 자세히 기록할 수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또 당시 박해를 받고 있는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끔찍한 십자가형을 되새겨 두려움을 주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실 십자가형의 참혹함 때문에 초대교부들은 십자가 상징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4세기 이후에야 십자가가 기독교의 상징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전9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오후3시에 숨을 거두셨습니다.

못 박힌 손목이 찢어지고 모든 피가 다 흘러내리고 인간의 극한의 고통을 여섯시간 동안 견디며 죽으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주는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야야 합니다.

왜 주님은 이런 처참한 십자가의 형틀에서 못박혀 죽으셔야 했나.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창조주 하나님을 배신하고 모욕하는 모든 인간의 죄를 대신해 심판을 받으시고 속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속죄의 죽음이 참혹한 것은 우리의 죄가 그만큼 집요하고 질이 나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에 대한 형량이 그만큼 무겁다는 뜻입니다.

우주와 모든 생명체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존재자체를 부인하는 것이 인간의 대담한 죄입니다.

만물에 하나님을 알만한 것을 이미 다 드러내 놓으셨는데, 하나님의 존재를 묵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인 사랑과 겸손과 성실, 이런 선을 버리고, 미움과 파괴와 탐욕, 교만 같은 악을 행하며 사는 것입니다.

인간이 선택한 이 반역의 댓가는 이미 삶의 고통을 통해 모두가 톡톡히 치르고 있습니다.

삶이 고통스럽지 않습니까?

인간이 문명사회를 이루고 이 땅에 유토피아를 만들 수 있다는 자만심이 충천했던 20세기 초에 세계는 1,2차 세계대전이란 끔찍한 현실을 만났습니다.

역사의 미래가 행복할 거라는 장미빛 낙관론은 그때 무너져 내렸습니다.

인간이 미래를 세우는 게 아니라 다 파괴해 버릴 수도 있다는 걸 안 것이죠.

이제는 모든 사람들이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빠질 것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며 삽니다.

저출산으로 많은 나라들이 인구절벽에서 떨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인구부족으로 생산성이 줄어 식물경제 상태가 될 것이라는 경제학자들의 우려는 이미 우리가 아는 바입니다.

그런데 아리조나대학교의 앨런 와이즈먼을 비롯한 일련의 연구가들은 인구가 더 감소해야 인류가 생존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예측된 식량고갈 문제로 인류의 미래를 보는 것입니다.

지구온도가 1도만 올라가도 곡물생산량은 10%가 줄어든다는 연구가 있습니다.

이미 지구환경이 자체 유지능력과 시스템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은 모든 과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입니다.

미래는 점점 더 심각한 기근과 식량문제로 고통을 당할거라는 것이죠.

부족한 식량으로 먹고 살려면 인구를 더 줄여야 한다는 주장인 것입니다.

인구절벽이 되어도 문제고, 인구가 계속 늘어나도 문제인 진퇴양난에 빠진 게 인류의 현실입니다.

이런 문제가 다 입니까?

테러와 전쟁의 위험수위가 점점 더 올라간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인간의 반인륜적이고 흉악한 범죄가 증폭되는 사회는 또 어떻습니까?

이런 세상에서 우리 자녀들의 미래를 생각하면 암울할 뿐입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행복한 미래를 세우려했지만 인간 속의 괴물인 죄와 탐욕이 절대 그걸 해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더 심각한 현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불멸의 영혼입니다.

인간에게 끝은 없습니다.

이 땅에서 생을 마감하는 순간 모든 영은 창조주께 소환됩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살았던 모든 삶을 평가받고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나는 당당하고 떳떳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인간 안에 주신 양심이 자기를 고발합니다.

기능을 상실한 내 양심도 나를 책망할 정도인데,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이 드러나면 우리 죄의 무게가 어떻겠습니까?

도무지 개선할 희망이 없는 인류를 구출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그 죄를 죄 없는 사람이 덮어 쓰고 심판에 대한 계산을 끝내 버리는 것이 유일한 해법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떠나 빈사상태에 빠진 인간에게 다시 생명과 하늘에 속한 모든 좋은 것을 되찾아 주시는 것입니다.

본문 38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이 운명하신 순간 성전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쫙 찢어집니다.

이 휘장은 하나님이 임재 하시던 지성소를 사람들과 차단했던 것입니다.

이 휘장이 갈라졌다는 게 무슨 의미입니까?

죄로 인해 차단되었던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장애가 말끔히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10장 19절에서 이렇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그 몸을 찢어 아버지 앞에 갈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에서 고통당하는 모습을 떠올릴 때 자식의 형벌을 막아서는 부모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내 자식이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저질렀다면, 우리도 그렇게 할 것 같습니다.

만일 우리 애가 잘못해서 법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면 할 수만 있다면 내가 대신 그 벌을 받고 싶지 않겠습니까?

내 자식이 죽을 죄를 짓고 사람들의 뭇매를 맞고 있다면 내 등을 대신 대주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왜 예수님의 십자가의 속죄를 이해하지 못하겠습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향한 공의의 채찍이 떨어질 때 우리를 몸으로 감싸시고 그 심판을 대신 당하신 것이 바로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우리를 구하기 위해 성자하나님을 대신 심판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은 자식을 둔 부모의 입장에선 더더욱 헤아릴 수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아버지와 예수님의 우리를 향하신 사랑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증거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질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본문에서 예수님을 희롱하는 대제사장들의 입에서도 분명히 증언이 되고 있습니다.

31절을 보면 그들이 비아냥거리며 서로 말합니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예수님이 왜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셨겠습니까?

주님의 능력과 권능으로도 당장 십자가에서 훨훨 내려오지 못하셨겠습니까?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스스로를 구원하시면 남은 구원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과연 인류의 죄를 대신지고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이라면 여기에는 모든 인간에게 선언되는 두 가지 명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인간이 자력으로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 앞에 모든 사람들은 입장을 표명해야 합니다.

사실을 믿고 십자가 앞에 나오거나 관심을 끄고 그 앞을 지나쳐가거나 둘 중 한편을 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형벌에 관련되었고 또 눈으로 그 현장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선택의 모습은 오늘, 이 순간도 사람들의 삶에서 그대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나쳐간 사람은 15절에 등장하는 로마의 빌라도총독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끌려 왔을 때 죄목이 뭐냐고 묻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사람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해 신성을 모독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은 빌라도는 두려워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다루기 힘든 묵직한 죄목을 판결해야 했던 빌라도는 분명히 그 사실 앞에서 두려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식민지 유대인들은 당시 종교적인 독특성 때문에 로마제국엔 상당한 골치덩이였습니다.

유월절 같은 이런 대명절날엔 예루살렘에 모인 사람들이 흥분해서 예상치 못한 소요사태가 종종 일어났습니다.

빌라도는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는’ 현실적인 판결을 내렸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갈등을 느끼고 두려움을 느끼지만 어떤 이들은 이 빌라도처럼 당장의 손실과 이득을 계산해 재빨리 이득 보는 쪽을 선택합니다.

빌라도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가까이 다가왔던 구원의 기회를 놓친 안타까운 사람입니다.

그는 이 사건을 잘 처리해서 유대총독의 자리를 길게 보존하고 싶었지만 이 사건 얼마 뒤 로마로 송환되었고 2년 뒤 죽음을 맞았다고 로마 역사는 기록합니다.

다음은 16절에 군인들입니다.

그들은 온 군대를 모아 그 앞에서 예수님을 모욕하고 침을 뱉고 조롱합니다.

이들은 가이사랴에 주둔해 있던 로마 정규군으로서 소요사태에 대비해 예루살렘에 파병된 군인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에 대해서도 예수님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고, 영적인 진리들을 하찮게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잔뜩 기대했던 메시야 소요사태가 시시하게 끝나버린 데 대한 실망감으로 예수님께 분풀이를 해댈 뿐입니다.

속에서 이글거리는 폭력의 본능을 하나님의 아들이란 죄목의 예수님께 일말의 두려움도 없이 쏟아 붓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유 없이 하나님을 향한 분노를 갖고 있는 사람들, 기회만 되면 하나님을 향해 삿대질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고 21절에 구레네 사람 시몬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더 이상 짊어지지 못할 만큼 탈진했을 때 군인들이 강제로 붙잡아 주님의 십자가를 지게 한 사람입니다.

그는 본의 아니게 수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 사형수와 동행하게 된 것입니다.

사형수와 함께 십자가를 메고 사람들이 욕하고 함성을 지르는 골고다 언덕길을 올라갈 때 그 상황이 얼마나 치욕스럽고 억울했겠습니까?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나도 똑같은 죄인으로 보진 않을까, 정말 재수 없이 걸렸다고 생각하며 분통이 터졌을 것입니다.

시몬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를 지고 간 길은 비아돌로로사라고 불리우는 8백미터 정도의 길입니다.

몸을 추스리지도 못해 겨우 걸음을 떼시는 예수님 때문에 이 길은 그에게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억지로 주님의 십자가를 함께 졌던 시몬은 어떤 길을 택했을까요?

마가는 21절에서 그가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이고 그 이름이 시몬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시골에서 올라왔던 이름 없는 한 남자는 이제 누구누구의 아버지라고 말하면 초대교회의 모두가 다 알만한 사람이 되어있었던 것입니다.

로마서에 보면 바울사도가 로마교회에 보낸 편지에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로마서 16장 13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시몬의 아들 루포는 물론이고 그의 아내 역시 바울에게 어머니라 불릴 정도로 교회의 신실한 일군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는 방법은 얼굴이 다 다른 것 만큼이나 다양합니다.

다른 사람이 꼭 나와 같은 경험으로 예수님을 만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다 어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여기에 끌려와 예수님의 십자가를 따르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21절에 마가는 의미심장한 단어를 사용합니다.

마침 시몬이 시골로 부터 와서 그 길을 지나가는 데.

‘마침’이란 하나님이 만들어내신 절묘한 타이밍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내동댕이치며 넘어지신 바로 그 앞에 마침 시몬이 서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마침 그 사람, 그 사건을 만나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서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시몬은 우연히 지목을 당한 것이 아니라 그 가정이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었다고 바울사도는 말씀합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에 대해, 예수님의 구원의 십자가에 대해 알고 따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예수님 앞에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라 마침, 주님의 시간에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고 나온 줄을 믿습니다.

그런가 하면 24절에는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의 옷을 차지하기 위해 한참 분배에 열을 올리는 군인들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현실의 문제에만 몰두하고 심하면 교회를 사업장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면서 성경에 수도 없이 예언된 바로 그 메시야를 알아보지 못하는 종교지도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서 자기의 이권을 챙기고 존경받을 마음에 눈이 멀어 주님의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를 보지 못합니다.

종교생활은 하지만 역시 주님의 십자가를 스쳐 지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반면 마지막에 나오는 로마의 장교는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로마장교는 예수님의 모든 형집행을 주도한 사람입니다.

39절에 보면 그가 예수를 향하여 섰고 주님의 죽으심을 지켜보았다고 합니다.

이 때 사용된 동사는 계속해서 지켜보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죽음이 죄수의 죽음과 무언가 다른 기이하고 특별나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십자가를 대하여 서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먼저 이해해야 거꾸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가 아니면 우리는 절대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사건만이 베일에 가려진 이해할 수 없는 우리 인생의 고통을 알게 해주고 그 십자가를 통해서 살 길이 열렸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오늘 고난주간을 시작하며 십자가의 은혜를 나누게 되어서 너무 감격스럽습니다.

십자가는 단지 죽음과 심판과 끔찍한 슬픔만을 떠올릴 일은 아닙니다.

끊어버릴 수 없는 죄와 저주의 굴레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하시고 하나님께 속한 모든 선하고 아름답고 풍성한 축복들이 우리에게 부어지게 하신 예수님의 최고의 작업이십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예수님의 대속에 대해 점점 더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가 머리에서 부터 서서히 가슴으로 내려오고, 그 다음 영혼 깊이 깨달아질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아버지와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의 영혼이 직관하고 깨닫게 될 때, 십자가 안의 모든 축복이 있고 우리를 향한 주님의 계획이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억지로 주님의 십자가를 졌지만 온 가족이 성경에 기록되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가장 값지고 보람있는 인생을 살게 된 시몬과 같은 그런 우리들, 우리 가족들이 되게 해 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드립니다.

2015년3월29일 주일설교 남수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