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큰 광풍을 잔잔하게 하신 예수님을 만나러 2천년전 갈릴리 바다로 한번 가보겠습니다.
우리의 항해에는 늘 바람이 불고 물결이 일렁입니다.
때로 더 큰 광풍이 불고 물결이 배를 덮치고 위협하는 때도 피해갈 수가 없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제자들과 우리에게 닥치는 광풍의 의미를 잘 깨닫고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게 되길 원합니다.
35절에서 36절까지는 제자들이 혼비백산한 큰 광풍을 만나게 된 이유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날 저물 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갈릴리 바다 저 건너편으로 가자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저물 때’라는 말에서 무엇이 느껴지십니까?뭔가 불길하고, 불안한 감이 오지 않습니까?
다 저녁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몰고 바다로 나가셨다는 것입니다.
이젠 집으로 들어가 하루의 일과를 접고 따뜻한 잠자리에 들어야 할 어둑어둑한 시간에요.
여기서 특히 ‘그 날’ 저물 때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 바로 앞에 기술되어 있는 ‘그 날’, 예수님과 제자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바닷가에서 배를 띄워놓고 종일 군중집회를 열었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도 중동지방의 뜨거운 태양으로 상당히 피곤하셨을 것입니다.
피곤한 일과를 마치고 해가 뉘엿뉘엿 기울 때는 그렇지 않아도 뭔가 서글픔이 울컥 올라오는 시간 아닙니까?
본서의 기록자인 마가는 ‘그날 저물 때’란 말로 상황을 섬세하게 기록했습니다.
제자들 사이에서도 약간의 불만과 염려가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피곤해 있을 제자들에게 무리한 주문을 하셨을까요?
게다가 갈릴리 바다의 특성상 밤에 바다를 건너가는 것은 위험이 예측된 일입니다.
주변이 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갈릴리 바다에는 기온 차와 바람의 영향으로 소용돌이성 풍랑이 갑작스레 일어나곤 했습니다.
갈릴리 바다 어부 출신인 제자들은 저물 때, 바다를 가로질러 건너는 데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그걸 모르지는 않으셨습니다.
저물 때 배를 몰고 바다로 나가 광풍을 만날 상황을 오늘 주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물론 주님께는 이유가 있으셨습니다.
광풍이는 바다를 건너 도착하게 된 바다 저편은 거라사인의 지방입니다.
거기서 주님은 군대귀신에 붙잡혀 인격이 처참하게 부서진 가련한 한 남자를 구원해주셨습니다.
36절에 보면 예수님이 배에 계시던 그대로 모시고 갔다고 합니다.
배 위에서 무리들을 가르치셨던 예수님이 집회를 끝내고 쉬지도 않으시고 그 상태로 바로 바다를 건너가셨다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죄인들은 자기의 구원에 대해 조차 한가롭게 생각하지만 내세의 운명을 유일하게 알고 계시는 예수님은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는 지체한 적이 없으십니다.
오늘 저녁 광풍은 이런 주님의 계획을 이루는 과정에서 일어났고 그 속에는 제자들에게 주실 큰 유익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걸 모른 채 일과 후에 바다 건너편으로 노를 저어야 하는 제자들의 마음은 편치만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저물 때’ 다시 바다를 향해 배를 몰아야 하는 힘겹고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 있지 않습니까?
왜 나를 힘들고 불편한 환경 속에 계속해서 내모시는걸까 야속할 때가 있습니다.
이제 좀 편한 길을 열어주시면 좋으련만.
우리가 지난 주도 다 그런 애절한 마음으로 살았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제자들의 노고도 모르시고, 쉬어야 할 때를 모르시기 때문에 오늘 밤 제자들을 몰아세우시는 게 아닙니다.
마가복음 6장31절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얼마나 생각하시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이르시되 너희는 따로 한적한 곳에 와서 잠간 쉬어라 하시니 이는 오고 가는 사람이 많아 음식 먹을 겨를도 없음이라
우리가 무더위에 여전히 열악한 일터에서 땀을 흘려 일하고, 여전히 해결할 문제들로 고생할 때 주님께서 다 살펴보고 계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만큼 우리를 아끼시고 긍휼히 여겨주시는 분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연단 될 시간을 분초 단위로 계산하고 그 만큼 위로와 축복의 날들을 준비하십니다.
욥기 7장18절에 보면 그 사실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크게 만드사 그에게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분초마다 시험하시나이까
심지어 침을 삼킬 동안도 나를 놓치 않으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우연히 발생하는 사건은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이 광풍을 아시고 모든 일을 계획하셨듯이 우리의 영적 성장과 축복을 위해서 매일 계획을 짜시고 섬세하게 인도해 주십니다.
제자들이 큰 광풍을 만나는 시련을 통해 오늘 단단히 얻은 것이 있듯이 우리에게도 광풍이 있다면 반드시 축복도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1. 먼저 광풍은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불어 닥칩니다.
36절에 보면 제자들이 바다를 건널 때, 다른 배들도 함께 했다고 합니다.
오늘 갈릴리 바다의 광풍은 예수님을 모신 제자들만 겪는 게 아닙니다.
죄와 사탄의 지배로 위태로운 이 땅에선 누구나 삶의 위기들을 만납니다.
그런대로 꾸려가던 사업체가 협력업체의 부도로 한방에 넘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삼십평대 아파트에서 중산층으로 살던 사람이 몇 가지 변고를 만나더니 반지하로 내려가는 경우도 주변에 있습니다.
믿었던 건강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안전하게 보호해줄 것 같던 모든 것들이 우리의 조종능력을 벗어난 큰 광풍 앞에서 무기력하게 무너져 내리는 것입니다.
인생의 주인이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각자의 방법대로 그 위기들을 겪어 냅니다.
눈물을 훔치며 이를 악물고 치열하게 고통을 견뎌낸 사람들일수록 대개 성격이 질겨집니다.
힘겹게 산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이 ‘내가 눈치는 백단이라’는 말입니다.
눈치밥을 많이 먹으며 가시밭길을 걸어왔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광풍을 건너 온 사람들은 자기 경험을 최고로 치고 남의 말을 잘 받아들이지 않고 의심이 많습니다.
또 언제 닥칠지 모르는 어려움을 대비하려다 보니 악착같이 돈을 모으게 되고 인색하기가 쉽습니다.
이렇게 이를 악물고 혼자 시련을 이겨낸 사람은 옹고집이 되기 쉽고, 강팍하고, 본성에만 충실하기 쉽습니다.
주님께 기대 광풍을 통과하는 성도들은 신기하게 갈수록 어린아이 같이 천진하고 점점 젊어지고 즐겁게 살아갑니다.
예수님을 배에 모신 사람들은 휘몰아치는 광풍을 이겨낼 뿐 아니라 광풍을 통해 주님을 닮아가고 더 큰 이득을 챙기게 됩니다.
37절에 예수님을 모신 제자들에게도 영락없이 광풍이 몰아 닥쳤습니다.
광풍에 물결이 집채만큼 높아지고 배에 물이 차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배의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깊이 잠들어 계셨습니다.
잠 못 이루는 현대인들에게 광풍 속에서도 숙면하시는 주님의 모습은 기이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군중집회의 고단함도 있으셨겠지만 번뇌하다 잠을 설치는 우리들과 대조적인 주님의 평화로움을 보게 됩니다.
사실 이미 예수님을 모신 우리에게는 근본적으로 이런 평화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난 광풍에 잠시 우리의 평화를 잊어버리는 것이죠.
38절을 보면 제자들이 다 죽게 되서야 예수님을 원망하며 급히 흔들어 깨웁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문제는 제자들도 죽기 직전까지 자기들 힘으로 버티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 중 대부분은 갈릴리 바다에서 생업을 하던 어부들입니다.
어지간한 풍랑은 수도 없이 겪었고, 바다에서 벌어먹고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의 노련한 실력이면 광풍을 뚫고 건너편에 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목수일을 하셨던 예수님보다야 아무렴 낫다고 생각했겠죠.
그렇기에 물이 배에 가득 차 가라앉기 일보 직전까지 노를 쥐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항해도 그렇지 않습니까?
내 능력으로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해 나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배가 침몰하기 직전까지 키를 움켜 잡고있다 다 죽게 되서야 우리의 무능함을 실토하며 하나님 앞에 도움을 요청하며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도움을 구한다고 나무라신 적이 없으십니다.
오히려 복을 다른 데서 구한 이스라엘백성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즉시 일어나셔서 바다를 평정해 주셨습니다.
환경이 점점 두렵게 출렁일 때 주님께 기도하시기 축복드립니다.
그러나 이런 광풍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을 유익하게 하십니다.
신앙은 두 가지를 알아야 온전한 것입니다.
하나는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2. 큰 광풍을 만날 때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좀 전까지 제자들은 삶의 위기를 만나 처절하게 예수님을 만나려 했던 사람들의 믿음을 대단치 않게 여겼을 것입니다.
교회생활을 잘 알고 조직과 사역에 열중하는 사람들 중에 흔히 범하는 오류는 자기 신앙의 현주소를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낮 동안 몰려든 사람들을 줄 세우고, 장내를 정리하고, 병자들을 안내하고, 분주하게 주님의 일을 도왔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믿음이 주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져서 병이 낫고자 모여든 절박한 저 병자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대단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광풍에 배가 침몰하려는 위기를 만나자 제자들은 그들보다 더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없다는 것이 발각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위기의 해답이 되신다는 사실 조차 아직 신뢰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시잖아요?
어찌하여 무서워하고, 어찌하여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고난이 오고 생활에 어려움이 닥칠 때 우리는 믿음의 실체를 보게 됩니다.
웅장한 예배환경에서 아멘으로 호흡을 맞추며 인기목사님의 설교에 울고 웃다보면 사람들은 믿음이 있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사람들은 거대한 군중들과 일치될 때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쉽게 세뇌가 됩니다.
영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흥분되고 고양된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삶에 광풍이 몰아닥치고 기반이 흔들거릴 때, 정작 믿음을 발휘해야 할 순간에 가서야 아무것도 믿어지지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죠.
게다가 깊은 곳에서 고개를 쳐드는 하나님께 대한 원망과 적대감은 숨겨있던 죄의 본색을 드러냅니다.
아멘을 연발할 땐 꽤나 하나님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일이 꼬이고 가로막힐 때 사람들의 입에서 흘러 나오는 것은 오늘 제자들과 같은 원망입니다.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아무리 입을 틀어막아도 속에서 자꾸 그런 것들을 부글부글 토해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삶이 궁핍하고 근심이 떼를 지어 다가오는 상황들을 통해 자신의 믿음을 보게 하고 실체를 깨닫게 하십니다.
우리에게 충분한 믿음이 없고, 우리 본성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라는 것을 통감한 사람들만 심각하게 예수님 앞에 나갑니다.
사실 우리는 천국과 세상 사이에 끼어 있는 어정쩡한 상태로 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너무 잘 맞는 죄의 본성이 건설한 이 세상과 하나님께서 입혀주신 거룩하고 보배로운 천국 사이에서 갈등을 겪으며 사는 것입니다.
세상 쪽에 기울일 수는 없고, 그렇다고 천국 쪽으로는 쉽게 기울어지지가 않죠.
우리 몸과 마음이 움직이는 데로 두면 당연히 세상 쪽으로 기웁니다.
그래서 삶의 크고 작은 문제들이 우리를 세상에 정떨어지게 하고, 완전한 평안과 만족을 얻기 위해 천국을 자꾸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인생이 순풍이고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우호적이고 다 내 비유를 맞춰준다면 우리 속에 과연 무엇이 있는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내 심기를 건드리고, 꼴보기 싫고, 불쾌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곁에 있을 때 비로서 사람들에 대해 적대적인 내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옹졸하고 냉소적이고 비판적인 나를 그들을 통해 비로서 보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 예수님께서 마치 이런 상황을 일부러 세팅해 놓으신 것처럼 우리에게 불편한 환경을 조성하십니다.
우리 인생에서 끊임없이 크고 작은 시련의 풍랑이 있는 것은 우리가 끊임없이 부족하다는 것과 우리 죄가 끝이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는 그 날까지 끊임없이 부족한 자들입니다.
그것을 깨닫게 하는 광풍은 우리를 예수님께로 이끄는 일등공신인 것입니다.
3. 광풍을 통과하며 우리는 꼭 알아야 할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배가 침몰할 일촉즉발의 위기 앞에서 제자들은 외마디 소리같이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이 한 마디 안에 예수님에 대한 제자들의 신앙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제자들은 아직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교회에 오는 사람들은 설교에 귀를 기울이고 다른 사람들의 신앙이야기를 듣고 교제하며 하나님에 대해 알아갑니다.
성경의 가르침에 수긍을 하기도 하고, 좋아하는 성경 말씀에 빨간 줄도 긋습니다.
그러면서 점점 하나님은 뭔가 우리 인생에 도움을 주시고 복을 주시는 존재라는 막연한 믿음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삼킬 듯이 높아진 풍랑과 광풍 앞에서는 내가 취사선택한 믿음은 소용이 없다는 것을 직감합니다.
살아계신 전능자만이 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는 절박한 현실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습니다.
그런 기도 가운데 하나님은 서서히 자신을 드러내 보이시는 것입니다.
오늘 광풍과 바다를 꾸짖어 잔잔하게 하신 예수님을 보고 제자들은 깜짝 놀라 말합니다.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광풍과 바다는 무생물입니다.
사람들은 다가오는 태풍을 절대 다룰 수 없습니다.
여름만 되면 태풍의 경로 때문에 나라마다 전전긍긍할 뿐입니다.
바람과 바다는 창조하신 분께만 복종합니다.
예수님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제자들은 이 권능을 보며 서로에게 묻습니다.
바람과 바다도 잠잠케 하는 그는 도대체 누구이신가?
이 광경을 보던 제자들이 심히 두려워했다고 마가는 기록합니다.
인생의 크고 작은 풍랑 속에서 체험으로 하나님을 알아가게 될 때, 우리는 점점 더 하나님을 경외하게 됩니다.
이전엔 광풍과 죽음이 두려웠다면, 이제 우리가 두려워할 대상이 달라진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할 때, 환경도, 사람도, 질병도, 더 이상 우리를 두려워 떨게 하지 못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이백칠십육명이 승선한 거대한 배가 유라굴로라는 큰 광풍과 풍랑에 밀려 파선될 위기를 만난 사건이 나옵니다.
무려 보름간을 광풍에 휘말려 살 소망을 잃은 사람들은 배를 조금이라도 가볍게 하기 위해 모든 곡물과 배의 기구들을 다 바다에 내버립니다.
그 때 죄수의 신분으로 끌려가던 바울사도가 그들 가운데 서서 늠름하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안심하라. 내가 섬기는 하나님께서 너희 모두의 생명이 안전하다고 내게 말씀하셨노라’
그리고 여전히 요동치는 배 위에서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입니다.
풍랑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바울에게 광풍이 두렵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본체이심을 알지 못했을 때, 죽음 앞에서 주님을 부인하고 도망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성자하나님을 목격하고 나자 더 이상 죽음이 그들의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 하러 나갔을 때, 제자들은 더 이상 죽음 앞에서 등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솔직하게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 그는 내게 누구이신가?
광풍과 파도를 명령하시는 예수님은 과연 온 우주의 창조주이시고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신가?
그렇다면 주님은 우리가 두려워하고 경외해야 할 주인이 되셔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를 무섭게 하는 세상의 수많은 두려운 존재들로부터 안전하고, 전능자의 그늘 아래 평안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았다면 우리를 안내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대로 따라야 합니다.
성경을 펼치고 이젠 좋아하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의 행복을 위해 명령하고 지시하신 말씀들을 골라 줄을 치며 하나 하나 진실되게 지켜야 합니다.
그것이 마땅히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성도의 삶입니다.
며칠 전 최태0 회장이 광복절 특사로 사면되어 의정부교도소를 나올 때 그 손에 성경책을 들고 있어서 주목을 받았었죠.
최회장은 옥중에서 연구하는 자료들과 신문 외엔 성경만 보았다고 합니다.
최회장이 기독교신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2003년 분식회계사건으로 7개월간 수감생활을 하고 나서부터라고 합니다.
믿었던 사람에게 자기도 배신을 당했다는 이 사건을 통해 최회장은 무속성향의 측근에게 무언가 홀린 것 같았다고 합니다.
올바른 판단을 못한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감으로 교회에 발을 들여 놓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번에 계열사자금횡령건으로 2년7개월 수감생활 중 더 확고한 믿음을 갖게 되었다고 하죠.
최회장이 인생의 큰 광풍을 만나 자기의 한계를 보게 되고 또 더 큰 광풍을 만나 조금씩 하나님을 알아가게 된 것이 바로 오늘 메시지의 예증인 것 같습니다.
개중에는 교회가 이제 최회장의 욕받이가 되었다고 하기도 하지만 이 분에게 예수님이 경외해야 할 인생의 주인으로 바르게 만나졌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세상엔 크고 작은 풍랑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그 통에 우리는 소중한 것을 잃기도 합니다.
어떤 목사님 글에 이런 내용이 있더군요.
시골집에 불이나면 소를 끌어내는 것이 큰 일이랍니다.
소가 절대로 밖으로 나오지 않으려고 해서 장사가 끌어도 소용없답니다.
그때 꿈쩍도 않는 소를 밖으로 신속히 끌어내는 방법은 여물통을 엎어 버리는 것입니다.
소가 엎어진 여물통을 보면 더 이상 먹을 게 없다는 것을 알고 제 발로 끌려 나온다고 합니다.
세상에 있는 여물통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오지 않을 때 광풍이 불어 닥쳐 우리의 여물통을 뒤집어 엎어 버리는 것 아닐까요?
여물통이 엎어졌을 때 우리는 슬퍼하지만 그래서 우리가 주님 앞에 나왔을 때 예수님은 영원한 양식인 주님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광풍은 밖에서만 부는 게 아닙니다.
사는 게 크게 달라진게 없고 오늘의 문제만이 아닌 데도 마음의 큰 풍랑이 일렁이고 안정이 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어제와 크게 다를 것도 없는 오늘인데 모든 게 더 불행하게 느껴지고, 우울감에 사로잡혀 헤어나지 못하게 될 때가 일상에서 더 자주 있는 일입니다.
괜히 자신에 대한 연민에 비참한 기분이 들고 초라해 보이는 현재의 내 모습에 좌절과 분노가 일어납니다.
그럴 때 우리 인생의 배에서 평화롭게 동행하시는 예수님을 떠올리며 평안을 주시길 기도한다면 순식간에 광풍이 잔잔해졌듯이 요동하던 우리 심령이 잠잠해 질 것입니다.
그리고 사방에서 우리를 불편하게 하던 환경들도 바다가 고요해지듯이 안정되고,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게 될 줄 믿습니다.
모든 피조물과 환경이 하나님께 복종한다는 것을 오늘 말씀을 통해 굳게 믿으시고 하나님만을 경외함으로 세상에 대해 항상 담대한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2015년8월16일 주일설교 남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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