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흥미로운 통계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30년 전 우리나라 백대 기업들 중에 오늘까지 살아남은 곳이 14개 밖에 없다고 합니다.
정말 의외죠?
우리나라에는 중소기업이 3백만개 정도 있다는데 이 기업들의 평균 수명은 11년 정도라고 합니다.
11년 전후해서 기업들이 문을 닫는다는 것이죠.
그동안은 대기업의 평균수명을 30년 정도로 보았는데 최근 발표를 보면 대기업도 이젠 수명이 15년 밖에 안된다고 합니다.
대기업 반열에 회사를 올려놓으면 무궁히 발전할 줄 알았지 누가 이십년도 안되 문을 닫을 줄 알았겠습니까?
서하남 입구에 보면 유명한 훈제오리 음식점이 있습니다.
몇 년 전까지 자리가 없어 기다려야 할 정도로 성업이었는데, 재작년에 한번 가봤더니 손님이 거의 없고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어서 놀란 적이 있습니다.
손님들이 장사진을 이룰 때 이런 날이 오리라고 꿈엔들 생각했겠습니까?
세상에는 장구한 게 없습니다.
내일이 우리의 예측대로 되지도 않습니다.
이런 예측불가의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도 급변하는 상황과 생각지도 못한 불행을 만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은 무엇을 위함이고, 믿음이 오늘 우리가 사는 현실에서 어떤 빛을 발할 수 있는 것일까요?
지난 한 주 믿음을 힘입어 좀 통쾌하게 이기며 지내셨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삶에 속고 뒤통수를 맞으며 세상에 휩쓸려 사셨습니까?
오늘 본문은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나와서 고침을 받은 사건을 전합니다.
이 사건이 이런 우리의 질문에 대한 답을 갖고 있을까요?
마가는 이 나병환자의 치료사건을 왜 기록했을까요?
‘봐라,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고치는 이런 엄청난 기적도 일으키셨다’
이런 차원에서 기록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것이나 나병환자를 고치는 것이나 물 위를 걷는 것이나 호들갑을 떨 만큼 큰 일은 아니죠.
마가를 통해 전해주시는 이 사건은 표면으로 드러난 것 이상의 복잡다단한 진리들로 짜여져 있습니다.
우리가 꼭 붙들어야 할 중요한 구원의 진리와 예측불가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삶을 승리할 통찰력과 지혜를 오늘 말씀을 통해 깨닫게 하시리라 믿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나병환자는 누구인가입니다.
오늘 사건은 단순한 치유기적이 아니듯이 나병환자 역시 단순히 한 불행한 병자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나병환자는 구원이 필요한 모든 죄인의 대표주자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들이 이것을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나병은 특이하게 사람을 괴롭히는 병입니다.
감각기관이 망가져 고통을 못느끼며 죽어가는 희한한 병입니다.
그런데 병균이 심장이나 뇌나 위장 같은 생존 기관에 침투하는 게 아니라 피부조직을 괴사시켜 외관을 흉측하게 만듭니다.
전염성이 그렇게 큰 병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흉측하게 변하는 모습 때문에 더 격리시켰던 병이죠.
이스라엘의 율법에도 문둥병자는 마을에서 살 수 없었습니다.
특히 이 병은 하나님께 심판받은 병으로 여겼습니다.
왕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웃시야왕이 제사장의 직무인 분향을 하려고 나서며 한껏 교만했을 때 하나님이 치셔서 문둥병이 걸리죠.
웃시야가 즉시 격리되어 죽을 때까지 별궁에서 혼자 지냈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당시 문둥병은 치유 불가능한 병입니다.
나병균은 19세기 말 노르웨의의 의사 한센이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나병을 한센병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이때서야 균의 정체가 발견되었으니 그 이전에 치료법이 있었을 리가 없죠.걸리면 서서히 전신에 퍼지고 사방이 썩으며 죽어갑니다.
그래서 문둥병자는 신체적인 혐오감이나 종교적인 측면에서 가장 천대받던 사람이었습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이 사람은 전신에 나병이 퍼졌다고 합니다.
코는 뭉그러지고, 눈은 튀어나오고, 손가락 발가락 마디도 몇 개 떨어져 나가고 피부는 썩어 고름이 나오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민망하고 끔찍한 나병환자의 모습이 본래의 영광을 잃어버리고 죄로 인격이 좀먹은 인간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죄인은 나병환자처럼 영적 고통도 느끼지 못합니다.
온갖 것으로 죄에 감염된 자신을 휘두르고 치장하고 다니지만 실은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병은 신체를 치료하는 의료행위가 아니라 영적인 치료행위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완치된 환자를 제사장에게 판정받게 보내시죠.
나병은 신체의 질병보다 영적인 질병으로 간주했기에 의사가 아닌 제사장에게 완치 판정을 받았던 것이죠.
레위기에는 문둥병이 나았을 때, 새 두 마리를 제사장에게 가져가 예물을 드려 완치 판정을 받는 절차가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문둥병이란 병이 불치병이라 당시에 완치 될 수가 없습니다.
완치돼서 예물을 드리고 완치 판정을 받는 것은 사실 그림의 떡입니다.
문둥병이 나았을 때, 제사장에게 가져가 예물을 드리고 완치 판정을 받는 율법은 있었지만 실제 그래 본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셨잖아요, 엘리사 때 이스라엘에 무수히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지만 단 한사람 아람장군 나아만이 고침을 받았다고.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만은 이 병을 고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병환자가 낫는다는 것은 이사야의 예언대로 종말에 있을 하나님의 나라가 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오셔야 낫는 게 나병인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감옥에 갇혔을 때, 제자들을 보내 예수님께 묻죠.
‘오실 그 이가 당신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릴까요?’
그때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가서 이렇게 전하라고 하십니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이사야가 종말에 일어날 메시야의 왕국을 예언한 내용 그대로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이런 기적들이 바로 메시야라는 증거 아니냐는 것이죠.
그러니까 오늘 예수님 앞에 나온 이 나병환자는 단순한 환자가 아니라 구원받아야 할 모든 죄인들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망의 불치병을 치유하실 그리스도가 그 앞에 계신 것입니다.
이 그림을 보고 영적 나병에서 치유를 받으러 예수님 앞에 나오라는 강력한 메시지가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죄의 고통에서 풀려나고 본래 우리의 영광을 회복하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정말 유일한 희망은 예수님을 믿고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병환자는 어떤 과정을 통해 그 천형의 질병을 고치고 생명을 얻게 될까요?
그가 한 일이 40절 한 줄에 아주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먼저 이 사람이 예수님 앞에 나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도 나오지 않았다면 나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소문을 들은 모든 나병환자들이 다 예수님께 몰려오진 않았습니다.
우리는 정보와 소문의 홍수 속에서 삽니다.
꼭 필요한 것을 초등학생 알림장처럼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습니다.
정보를 가려서 내게 꼭 필요하고 이익이 될 것을 스스로 취사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무수한 소문, 예수님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들이 오늘날 모든 사람 귀에 들려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예수님 앞에 나온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아시겠습니까?
구원과 축복은 하나님 앞에 나오면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 앞에 나온 나병환자는 꿇어 엎드립니다.
사람 앞에 무릎을 꿇는 행위에 누구든 굴욕감을 떠올립니다.
어렸을 때 뭘 잘못해서 어머니 앞에서 싹싹 빈 것 외에는 사람 앞에 무릎꿇어 본 일들이 다 없으실 겁니다.
그러나 자기가 죽을 죄를 저질렀다는 것을 알면 생명줄을 쥔 사람에게 꿇어 빌게 되어 있죠.
그래서 자기의 죄를 깨닫고 심판받을 미래를 인식한 사람은 저절로 하나님 앞에 꿇어 엎드립니다.
그런데 사람에게 굴복할 땐 수치심과 모멸감을 느끼지만 하나님께 꿇어 엎드릴 때는 다릅니다.
섬겨야 할 절대자를 깨닫고 마땅히 굴복할 곳에 굴복할 때 제자리를 찾은 안도감과 큰 기쁨을 오히려 느끼게 되죠.
복종할수록 기쁩니다.
그 분이 예수님이라면, 나를 사랑하셔서 내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오르신 그 분이라면 우리는 그 발아래 기꺼이 꿇어 엎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신자들 가운데 하나님 앞에 나오지만 여전히 꿇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아직 영적 나병에 걸려 나날이 썩어가는 자신의 영혼을 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나병처럼 뭉그러진 자기의 내면을 보고 종말을 생각한다면 오늘 나병환자처럼 유일한 구원자이신 예수님 앞에 꿇어 엎드릴 수 밖에 없습니다.
진짜 꿇어 엎드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이생과 내생에서 결코 굴욕스런 삶을 살지 않게 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꿇어 엎드린 이 사람은 자신의 필요를 절박하게 간구합니다.
단지 나와서 처분만 바란 게 아니라 자신의 요구를 분명하게 구했습니다.
예수님은 종종 사람들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물으신 뒤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가 구한 게 무엇입니까?
자신을 지긋지긋한 나병에서 깨끗히 낫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 신앙생활을 하면 좋은 점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에 나오면 마음이 편하다고도 하고 복을 받는다고도 합니다.
교회에 다니는 신자들에게 왜 교회에 나오냐는 설문조사를 했더니 ‘구원을 받기 위해서’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평안을 얻기 위해서’라고 대답했습니다.
세상엔 평안이 없다는 증거인 것이죠.
하나님 앞에 나오면 평안을 얻는 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맞습니다.
그러나 진짜 그것만이 하나님 앞에 우리가 구해야 될 것은 아닙니다.
진짜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생명의 구원입니다.
교회 다니며 마음만 편하고, 사업만 잘되고, 몸만 건강해지고, 종말적으로 구원을 받지 못하면 그게 뭡니까?
나병환자가 나와서 예수님께 마음의 평안만을 구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이 사람이 집 문제나 사업문제를 구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예수님 앞에 나온다면 제일 먼저 생명을 구원받길 구해야 합니다.
지금 현실적인 문제보다 더 절박한 것은 이생을 마쳤을 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선다는 것이고 이후에 천국과 지옥은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 하나님 앞에 우리 영혼의 구원을 점검해야 합니다.
내 믿음이 건재한지.
바울사도는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뤄가라고 말씀한바 있습니다.
우리가 끝까지 믿음을 지켜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하나님의 은혜를 가장 진지하고 간절히 구하는 모두가 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구원은 저 세상에서만이 아닙니다.
현재 이 땅에서 죄로 인한 고통과 환난 속에서도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이 또한 예수님 앞에 나가고 하나님아버지께 간구해야 할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해주실거라는 믿음이 좋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런 태도로는 설령 하나님이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신다 해도 하나님의 역사신줄 알지도 못합니다.
그래서는 하나님께 대한 체험적 믿음을 갖지 못합니다.
구하고 받으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조목조목 기도해야 합니다.
수시로 조목조목 기도하는 것이야말로 이 변화무쌍한 현실을 이기는 비법입니다.
그런데 이 나병환자는 구하기에 앞서 이런 가정을 답니다.
‘만일 원하시면’
예수님이 수많은 사람들을 치료하신 것은 알고 있다 해도 문제는 과연 나를 고쳐주실 것이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초월적으로 높이 앉아 은하계를 운행하고 통치하시는 그런 하나님을 믿기는 쉽습니다.
사람의 본성에는 종교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 생각과 내 행위를 아시는 하나님, 내 살아가는 일에 관심을 갖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갖는 것은 어렵습니다.
이 사람이 지금 그 말을 하는 것입니다.
소문에는 이러저런 사람들이 병이 낫고 기적을 체험했다는 데 과연 내게도 그런 일이 있겠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개별적으로 아시고 인도하신다는 것에 대한 확신을 갖는게 신앙에서 어려운 일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고쳐주실 의사가 있는지, 그걸 과연 원하시는지가 이 나병환자의 최고의 난제였습니다.
오늘 주님 앞에 나온 우리 가운데도 이런 믿음의 한계점을 갖고 계신 분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오늘 분명한 예수님의 답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내가 원하노니’
내가 너의 문제를 도와주길 진심으로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이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해결하지 못할 문제 상황 속에 갇혀 통분한 우리 심정을 같이 느끼며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에 대해 기록한 사복음서는 예수님의 초상화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어떤 예수님의 얼굴을 보고 계십니까?
모두가 코를 막고 고개를 돌리는, 이 전신에 문둥병이 든 환자를 보는 예수님의 눈에 그가 불쌍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고질적인 아픔과 문제들을 볼 때 남들은 혀를 차고 한심해 할지도 모르지만 예수님만이 우리의 아픔을 같이 느끼십니다.
사람은 남의 아픔에 어느 정도 공감을 한다고 해도 도와줄 능력이 없습니다.
능력이 있어도 남의 문제에 그렇게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모든 마음에 공감하시는 분이시고 도와줄 능력도 있으십니다.
사복음서에서 그리는 예수님의 초상화는 도움을 구하러 나오는 어떤 손길도 뿌리치신 적이 없습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오늘 본문에서 깨닫고 하나님께 구원받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또 벌써 골이 깊은 문제들도 포기하지 말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남들이 고개를 돌리는 환자의 몸에 손을 대시고 치료하십니다.
문둥병 환자를 접촉하는 일은 율법으로 금지 된 일입니다.
누구도 인간의 죄로 인한 고통과 그 결과로 인한 사망에 손 쓸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이신 예수님만이 그 손으로 죄인을 어루만지시며 치유하십니다.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께 간구해서 구원을 받고 또 매일 만나는 많은 문제들과 싸워 이길 힘도 받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치유기적으로 꿈같이 나병이 나은 환자는 그 다음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치료하신 뒤 이 사실을 의료행위처럼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침묵명령을 내리십니다.
모든 병자들이 다 예수님께 몰려올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과도하게 민중들이 동원되면 그런 집회는 당국에서 조사 나오게 되어 있죠.
예수님 사역초기에 이런 문제로 종교권력자들과 갈등을 일으킬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또 이런 기적 자체가 복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기적에 열광하는 현장에서 복음이 차분히 전해질 수 없습니다.
실제로 그 많은 병자들이 예수님께 기적적인 치료를 받았지만 주님이 십자가형을 받으실 때 어땠습니까?
단 한사람도 왜 우리의 그리스도를 죽이냐고 항변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기적이 곧 믿음을 불러일으키진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좀 이상한 점을 발견하셨을지 모르겠습니다.
엄청난 기적의 시혜를 받은 환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완전 무시하고 이 사실을 널리 널리 전파합니다.
그리고 역시 그 결과 예수님은 더 이상 그 지방의 마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인적이 드문 외곽지대로 돌아다니셔야 했습니다.
병 치료받고 예수님의 사역을 망쳐놓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 나병환자는 예수님의 함구령을 깨고 이 소문을 널리 널리 퍼뜨린 것일까요?
마가복음을 잘 읽어 보면 예수님의 사역을 따라 다니는 불길한 기운과 그로 인한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집니다.
바로 앞에서도 예수님은 몰려드는 사람들을 피해 한적한 곳으로 피하시고, 병을 고치려 몰려온 사람들을 따돌리고 다른 마을로 가십니다.
또 이번처럼 기적을 베풀고 여러 번 함구령을 내리시지만 사람들은 한결같이 소문을 내고 다닙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지만 곧바로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호통을 당합니다.
이런 혼돈과 불안과 반전들이 마가복음서에는 특히 많이 나타납니다.
오늘 본문도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과 이 나환자와의 관계에서 실은 묘한 긴장감이 있습니다.
본문에는 이 사람을 곧 보내시며 엄히 경고하셨다고 해석되어 있지만 원래의 언어로 보면 내 쫒으셨다는데 가깝습니다.
보내시고, 엄히 경고하셨다는 말은 귀신 쫒을 때 쓰였던 그 단어입니다.
결국 이 환자는 예수님의 명령에 불복하고 떠들고 다님으로 예수님의 사역에 차질을 가져옵니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 같습니까?
예수님의 사역 내내 사탄도 끊임없이 사역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경종을 울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만 있는게 아니라 마귀도 역사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 은혜의 자리가 즉시 시험의 자리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따르지 않는 곳에 반드시 마귀가 개입할 여지가 생깁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의 신통력을 소문내는 게 주님을 도와드리는 걸로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의 일을 훼방하고 불순종의 사람으로 오점을 남깁니다.
마가는 지금 나병환자의 불순종과 고집스런 인간성을 평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범위 안에 우리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 이쁜 짓하다 언제 그랬냐는 듯 미운 짓 합니다.
왜 우리가 기도하고 응답받았던 축복이 또 다시 기도제목이 됩니까?
나와 너의 죄와 사탄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을 위한 열심을 품고 일을 했는데 시험이 옵니까?
교회 안에서 다 하나님의 일을 하다 시험에 듭니다.
사탄이 부지런히 일하고, 사람의 죄성이 동조했기 때문입니다.
유일하게 이 모든 활동들을 다 보시는 예수님은 사탄의 세력의 훼방과 공작을 대처하며 완전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행동에서 때로 일관성이 없는 것 같은 의아한 장면들이 나옵니다.
우리를 불행에 빠트릴 어둠의 세력들은 끊임없이 노리다 사건을 만들고 함정을 팝니다.
매일 정신을 차리고 기도로 믿음을 강화시키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복된 계획을 망치고 나 역시 실패합니다.
마귀는 우리를 삼키지 못하지만 넘어지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고 하시잖아요?
넘어지면 무릎 깨지고 피나고 아픕니다.
때로 팔다리가 골절되기도 하고 오래 그 실패로 인해 괴롭힘을 당합니다.
시험에 들지말고 넘어지지 말아야 합니다.
그 길은 근신하며 깨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따르는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 눈에 좋아 보이고, 경험적으로 바른 판단 같아 보여도 말씀을 최우선으로 적용해보아야 합니다.
다급하게 머리 쓰기 전에 기도 먼저 해도 늦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하나님께만 인정받으면 세상에서도 더 잘 통하고, 더 가정이 화목하고, 더 실패 없이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셔야 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예수님께 치료받은 이 나병환자의 사건은 영혼의 구원과 삶의 구원을 위해 간절하게 하나님 앞에 나갈 것을 먼저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그리고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 했어도, 아무리 기도로 승리했어도, 곧 우리 앞에 올무를 만들고 있는 악의 세력들을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나병의 치유라는 엄청난 기적과 환희를 체험했지만 오늘의 주인공은 예수님께 불순종하고 주님의 사역을 방해하는 자로 평가되고 말았습니다.
모든 것을 분별하고 행동 할 기준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고 순종만이 평안 중에 승리하며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장기적인 불황으로 적금을 깨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세 명 중 한 명이 중도해지를 선택한다고 합니다.
앞으로 우리의 생활도 만만치 않게 조여 올지 모릅니다.
삶의 현장은 곧 신앙의 현장이고 그 싸움은 치열합니다.
염려라는 함정에 빠지지 말고, 하나님 앞에 모든 문제들을 의논하고 지혜와 인도를 구하는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믿음은 모든 것을 이기게 하고 가능하게 한다는 말씀대로 철저한 신앙을 따라 살아갈 때 모두가 통쾌하게 승리하는 삶이 되리라 믿습니다.
2017년2월26일 주일설교 남수연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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